연의 역대 황제 | ||||||
연 건국 | ← | 초대 안록산 | → | 2대 안경서 |
당 제국 상서좌복야 | ||||||
전임 이임보 | ← | 안록산 754년~755년 | → | 후임 가서한 |
묘호 | 없음 | |
시호 | 광렬황제(光烈皇帝) | |
성 | 안(安) | |
휘 | 록/녹산(禄山) | |
생몰기간 | 703? ~ 757년 | |
재위기간 | 755년 12월 ~ 757년 |
1 개요
중국 당나라 시기의 장군. 안록산의 난을 일으켜 연나라 황제를 자칭했다.
소그드 출신. '록산'은 소그드 어 '로흐샨(rwxšn/roxš(a)n)'을 음차한 것으로, '밝음, 빛나다'라는 뜻이다.
안녹산이라고도 한다.
2 생애
안록산의 아버지는 당나라 성씨를 가졌으나 이란계 소그드 인의 유력자인 것으로 추측되며, 어머니는 돌궐의 무녀였다고 한다.
돌궐 부족이 혼란에 빠지자 어린 시절 그의 집안은 당나라에 망명하였는데, 안록산은 인근 부족의 6개 국어를 할 줄 알아 처음에는 호시아랑(互市牙郎)에 임명되었다. 교활하고 잔인하지만 재치가 많아 남의 비위를 맞추고 아첨하는데 능숙했다고 한다. 상술에 뛰어나서 변방의 이민족들과 중계무역을 많은 부를 쌓았다. 이를 통해 중앙의 고위 관리들에게 많은 뇌물을 뿌려 자신의 실책과 비리를 면했다.
그러다보니 딱히 큰 공을 세운게 없음에도, 당현종에게 아첨하여 현종의 총애를 받아 3개 절도사를 겸임하게 되었다. 안록산은 양귀비에게도 아첨하였는데 양귀비를 양모로 모시고 그 양자로 들어가기도 했다.
당시 재상 양국충(楊國忠)과 마찰을 일으켰으며, 양국충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안록산의 난을 일으킨다.
3 죽음
반란에 성공하고 낙양에서 웅무황제(雄武皇帝)에 즉위, 국호를 연(燕), 연호를 성무(聖武)로 했다. 하지만 당현종은 쓰촨성으로 도피하고, 당숙종은 분조를 이끌면서 계속 저항하여 안록산의 세력은 지지부진해졌다. 거병을 한 다음부터 점점 눈이 나빠지고 있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거의 실명 상태가 되었으며, 실명을 하게 되자 매우 난폭해졌다.
757년 후계자 문제로 갈등을 빚던 터에 아들 안경서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하지만 부하이던 사사명이 안경서를 죽이고 계속 반란을 이어갔고 그도 아들 사조의에게 살해당하고 사조의가 반란을 이어갔다가 당나라,위구르 연합군에게 패해 자살함으로서 763년에서야 8년만에 반란은 막을 내린다.
4 비만
안록산은 매우 뚱뚱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랫배가 무릎까지 처지고, 몸무게가 330근(약 200kg)에 달했다고 한다. 현종이 그 불룩한 뱃속에 무엇이 들었냐고 물었을 때 "단지 충심(忠心)만이 들어있습니다." 라고 대답해서 현종을 기쁘게 했다.
또 거란족 출신으로 10세에 안록산이 직접 거세를 한 환관 이저아(李猪兒)를 곁에 두었는데, 이저아는 안록산이 옷을 갈아입을 때 머리로 배를 받쳐 들고 허리띠를 메어줬다고 한다. 너무 배가 커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허리띠를 멜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뚱뚱했기 때문에 말년의 눈병과 실명은 당뇨병의 영향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 때문에 고우영 화백의 십팔사략에선 매우 뚱뚱하게 그려지고 있다.
다만 뚱뚱했던 것과는 별개로 몸놀림 자체는 재빨랐던 듯 하다. 안록산은 호선무라는 춤을 잘 췄다고 전하는데, 이 춤은 서역에서 전래된 춤으로 아주 빠른 속도로 빙글빙글 도는 춤이다. 이런 춤을 잘 춘다는 건 몸놀림과 행동이 재빠르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활을 잘 다루고 자기 스스로 활솜씨를 자랑으로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