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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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黃長燁. 1923년 2월 17일 ~ 2010년 10월 10일

북한에서 김일성종합대학 총장, 조선로동당 국제담당 비서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대한민국으로 치면 국회의장에 해당하는 지위)으로 재직한 바가 있다. 대부분의 공산권 국가에서 최고 의결기구의 의장이 국가원수로 대우받는 것과 달리[1]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의장이 국회의장에 해당하는 것은 북한이 국가주석제를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2] 다만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지위는 시기에 따라 좀 달랐다. 국가주석제는 1972년 헌법 개정에서 국가주석제가 생겼으며 그 전까지 다른 공산권 국가들처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국가원수로 활동했다. 황장엽의 경우, 국가주석제가 도입된 이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되었기 때문에 명목상으로도 국가원수는 아니었다. 여하간 이런 특성 때문에 황장엽이 최고인민회의 의장에 임명되었을 때, 외국 언론이나 정보기관의 동아시아라인이 발칵 뒤집힌 바 있다.

"황장엽이란 사람이 북한의 새 의장이랍니다!"

"그런가? 그런데 황장엽이 누구야"
"모릅니다. 아까 기자클럽 다 뒤져봤는데 아는 사람이 없대요!"

하지만 그 무엇보다 북한에서 사는 동안 이 사람의 가장 중요한 행적은 주체사상의 이론을 정립하였다는 것이다. 그의 망명을 두고 워싱턴 포스트에서는 나치 독일괴벨스가 망명한 것과 같다고 표현했는데, 둘 다 자신들의 독재자를 위해 이론을 정립한 인물들이라고 생각하면 적절한 비유.[3]

참고로 황장엽은 김일성의 조카 사위로 따지자면 종친에 해당하긴 한다.

2 어린시절

황장엽은 1923년 1월 23일 평안남도 강동군 만달면 광청리 삼청동에서 황병덕과 이덕화 사이의 4남매중 막내로 태어났다. 황장엽의 회고에 따르면 중산층 정도의 집안으로 아버지는 마을 훈장에 2000평정도의 밭과 고향집에도 빌려주는 밭이 있었다고 쓰고 있다. 덕분에 무학자가 넘치던 시절 황장엽과 형 황승엽은 보통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보통학교 졸업후 원래는 사범학교에 진학하려고 했지만 적록색맹으로 탈락하고 1937년 평양상업학교에 입학한다.

3 숙청위협과 탈북

1996년 5월 10일 로동신문은 당 내에 수령을 받드는 척하며 음모를 꾸미는 야심가가 있다는 기사를 내놓았다. 이는 숙청을 암시하는 기사였다. 다시 7월 김정일은 황장엽에게 사상비판을 가했다. 이미 황장엽은 북한 내부에서 김정일의 권력 기반 장악을 위한 타겟이 된 상태였다.

황장엽은 1997년 1월 30일에 김정일의 지시로 나리타 공항을 통해 방일하여 조총련의 극진한 환대를 받았지만 기자들에게 신경질을 내는 등 심상찮은 조짐을 보였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사회주의의 실패 운운하는 발언을 했고 일본의 야마자키 자민당 정책위원장과의 면담을 요청하며 식량 원조, 북일 수교 문제를 논하려 했지만 미국의 압력을 받은 일본은 황장엽과의 면담을 거부했고 황장엽은 13일간의 일본 체류에서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하고 쓸쓸하게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는 수행원 김덕홍과 함께 2월 12일 바로 중국의 북한 대사관으로 갔고 다시 한국 총영사관으로 가서 전격적으로 망명의 뜻을 전달하였다.

북한은 황장엽의 망명을 저지하기 위해 남한이 선물 사러 외출한 황장엽을 납치한 것이라고 주장하다가[4] 2월 18일에 그 주장을 접었다. 이후 북한은 대규모 대표단을 중국에 파견하여 압박을 가했고 황장엽 망명과 관련이 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황장엽의 망명 요청 불과 4일 후인 2월 16일에 망명한 김정일의 처조카 이한영에게 총격을 가해 끝내 숨지게 만들었다.[5] 황장엽이 망명한 순간은 중국 등소평의 사망, 한보사태, 이한영 피살이 겹친 대혼란의 와중이었다. 이후 미국, 중국, 한국, 북한, 일본이 모두 개입된 치열한 외교전 끝에 67일만인 4월 20일에 한국에 들어왔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대한민국 만세 삼창을 외쳤고 "처음으로 유서 깊은 역사의 도시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본 심정은 참으로 감개무량합니다."란 소감을 발표했다. 그의 수행원 김덕홍은 "설레이는 마음 진정할 수 없고 남녘형제들과 만나게 된 이 기쁨과 감격은 그 무엇이라고 형언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그는 그의 동창인 유창순 전 국무총리와 그의 제자이자 먼저 귀순한 현성일, 최세웅, 신형희등과 오랜만에 회후했다. 귀국이후 김대중 대통령 때 가택연금을 당하였으나#, 이명박 대통령때 해제되었다.
황장엽 정도의 고위급 인사가 (그것도 70대의 늘그막에) 망명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국제적으로도 큰 화제가 되었다. 북한 내부에서도 그 충격이 꽤 컸던 모양인지,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황장엽과 아무 상관도 없는 멀고 먼 친척들까지 모조리 다 정치범수용소에 가두었다고 한다. 이후 황장엽은 북한이 봉건주의 국가라고 맹비난하면서 반(反)김정일 운동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의 망명에는 김일성의 사망 이후 김정일 체제가 성립되면서 서서히 권력에서 소외된 것이 원인이라는 분석이 있다. 김정일에 비해 김일성에 대해 비판이 약하다는 의견이 존재하나 '어둠의 편이 된 햇볕은 어둠을 밝힐 수 없다'라는 책에서 김일성을 자기 아들의 권력 앞에 아부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마지막 과오를 범하고 말았다. 정권을 아들에게 넘겨줌으로써 김정일과 함께 수치스러운 길을 걷게 되었으며, 그의 한 생의 전반부까지도 다 망쳐버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며 비판했다. 다만 그의 생 전반부나 후반부의 사건들에 대해서 김정일에 비해 우호적인 표현으로 정당화 하고 있는건 사실이다. 김일성의 무수한 과오 중에서도 김정일에게 아부하고 정권을 넘겨준 것에 초점을 맞추고, 그를 통하여 솔직히 더 망칠 것도 없는 생의 전반부까지 망쳐버렸다고 평했다는 것은, 황장엽이 언제나 주장하듯 현재 북한 사회가 가진 문제의 본질적 책임이 김정일에게 있다는 주장의 연장선상에서 그런 김정일에게 권력을 물려준 것에 대해 김일성을 비판하는 것이지, 문제의 본질적 원인 제공자로써의 김일성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그에 대하여 부정적인 의견은 이렇다. 김일성 앞잡이로 수십여 년을 호강하며 살다가 김정일 밑에서는 권력이 줄어들자 남한으로 망명하더니만 자신이 반공투사라고 호들갑을 떤다는 의견이다. 게다가 그는 단지 반 김정일주의자일 뿐, 그 자신이 창시해 수령절대주의의 이념적 바탕이 된 주체사상을 철회하지 않았다. 오용당했다고 죽기 전까지 계속해서 주장했을 뿐이다.실제로 직접 주체사상을 가르치려고 했고, 이 때문에 그와 같이 탈북한 김덕홍도 이에 대해 비판하고 그와의 인연을 끊었다.

그래도 북한 권력 정상급에 있었기에 고위층에 대한 정보력이 높아 쓸만하다는 평도 있었다. 거꾸로 생각하면 북에서도 불과 13년 때문에 4배가 넘는 동안 자기들에게 봉사한 사람을 그렇게 대해도 되는지 모르겠으나 많은 국가에서 아무리 공신이라고 해도 이용가치가 없어지거나 충돌이 벌어지면 가차없이 제거, 숙청하는 건 흔하다. 그 본보기로 북한과 마찬가지로 2대째 권력을 누리는 시리아의 아사드 일가를 봐도 다를 게 없다. 현 독재자인 바샤르 알 아사드는 아버지 하페즈 알 아사드 휘하에 있던 노대신(?)들을 대거 숙청해 이들은 이란이나 여러 곳을 거쳐 미국 및 서구로 망명해서 이들은 지금은 신나게 시리아, 현 아사드 정권을 까고 있다. 물론 정권 싸움(숙부인 레하트 아사드를 숙청했다) 탓도 컸지만 세습 독재자라고 아버지 때의 가신들에게 잘 봐줄 것이라 믿었으나 돌아온 결과가 달랐기 때문이다.

철학가의 면모를 보면, 1997년 리영희와의 대담을 가진 적이 있으나, 리영희의 회고담인 대화편에서 그를 대단히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김용옥이 한때 그와 주체사상을 논의하겠다는 이야기를 했으나 그 다음 소식은 없었다.

일부 탈북자들에게도 미움을 받기도 했었다. 실제 어느 탈북자남한와서 황장엽의 글을 보고 "무슨 지가 반공투사랍시고 설레발 치는 거 보면 구역질이 난다. 북한에서 얼마나 호강하던 작자인데 마치 자기가 북한에서 나중이나마 고생했다고 써대는 거 보니 어이없다."고 말한 적도 있다.

그래도 북한 실체에 대해서 정치적 숨겨진 이야기라든지 여러 가지로 알렸다는 점, 북한정권의 이데올로기인 주체사상을 정립한 사람이 탈북하여 남한으로 왔다는 점은 북한정권의 실패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봐야할 점들이다.

2010년 10월 10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 자택에서 사망. 사인은 심장마비로 추정된다. 사망 당시 따뜻한 욕조 안에 있었다고 한다. 경찰은 정황상 자연사로 추정하고 있지만 그 전에 암살 미수 사건[6]도 있었기에 혹시나 하여 사인 규명을 위한 부검을 했다. 같은 날 북한에서는 노동당 65주년에 김정은이 등장하면서 3대 세습이 확정되고 가도에 오르게 된다. 참 의미심장한 순간이었다.[7]

사후 한국에서 국가원수를 제외한 민간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 등급 훈장인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받았고,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한국의 네티즌정치인들 사이에 과연 그를 이렇게까지 대우할 이유가 있는가를 놓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8]

그의 사망 이후 북한 홍보용 모 웹사이트에서는 '황가 놈'이 '하늘의 저주를 받았다.'고 하다가 글을 지우고 다시 '노동당 행사날 죽었는데 우리 행사의 우렁찬 소리를 듣고 죽은 거 같다.'는 연이은 비난을 퍼부었다.

4 가족

망명할 때 가족들은 모두 북한에 두고 왔다. 부인 박승옥씨 사이에서 1남 2녀를 두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부인은 북한 유수의 출판사이자 외국 책을 북한에 번역하는 외국문출판사에서 일했으며 아들은 외교관, 큰딸은 외국문학을 전공한 학자, 둘째딸은 의대를 졸업한 의사였다. 직계 가족들의 안위에 대해서는 '숙청되었다', '자살했다', '그래도 살아있다' 등등의 다양한 설이 있지만 확인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일단 부인은 그의 망명 직후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자식들은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탈북자인 김현식 교수의 증언에 따르면 맏사위는 이혼을 강요당했으나 이혼하지 않고 같이 수용소에 들어갔고, 둘째 사위는 이혼당했으며 며느리 또한 이혼당해 아이(황장엽의 손자들)들을 빼앗기고 추방되었다고 한다.

그의 친척들 또한 정치범수용소에 수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피해자의 수만 3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민경부대에 있다가 비무장지대를 넘어 탈북한 주성일씨의 회고에 따르면 황장엽의 먼 친척 되는 어떤 군인은 "당에 충성하던 내가 왜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황장엽 비서 때문에 정치범수용소에 가야 하느냐"고 저항하다가 자살했다고 한다. 최근 먼 친척 3명이 탈북한 것으로 알려져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탈북한 이후 교수 출신인 김숙향이란 여성을 양녀로 삼았으며, 비서로 두고 있던 엄씨와 결혼하여 슬하에 아들을 두었다. 현재 남한의 처 엄씨와 아들은 미국에 체류중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엄씨는 논현동 대도식당과 대도식당이 위치한 빌딩을 소유중이다.

수양딸은 사실혼 관계 있는 여자에게 아버지 재산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가. 패소했다.

그리고 2012년 10월 탈북자들에게 100억원 이상 돈을 사기친 혐의로 체포되어 법정 구속되었다.

황장엽의 수양딸은 2015년 3월 27일 징역5년이 확정됐다.
  1. 행정수반으로서의 역할은 그 나라의 공산당 서기장이 담당한다.
  2. 이와 비슷한 체제가 현재 중국에서 행해지고 있다. 중국/정치항목 참고
  3. 다만 북한에는 김기남이라는 진짜 북한판 괴벨스가 있다. 김벨스
  4. 황장엽은 북한 대사관에 선물을 사러 가겠다고 하곤 한국 총영사관으로 달려갔다.
  5. 근데 탈북자 출신 주성하 기자는 이한영의 사망 배후가 김정일이 아니라 러시아 마피아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을 제시한 바가 있다.
  6. 이전에도 협박을 여러 번 받았었다. 대표적인 사건이 북한에서 보낸 공작원 암살조가 붙잡힌 사건이라든지, 모 종북 단체에서 황장엽 사진에 빨간칠을 하고 도끼를 박아서 황장엽에게 보낸 사건.
  7. 여담으로 중국, 특히 중화민국의 국경일 쌍십절이며 1945년 북조선 분국 및 노동당 창건일이다.
  8. 단, 이런 파격적인 대우는 북한에서 망명하면 이 정도로 대접해 준다는 프로파간다적 성격이 반영되어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