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龍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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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간략한 소개
조선의 어민이자 민간외교가. 울릉도에서 일본인들이 불법입항을 하게 되자 일본인과 싸움을 계기로 일본 현지로 가서 울릉도가 명백한 조선의 영토임을 알리며 대마도주를 문책한 후 일본측의 사죄를 받아내었다. 부산 동래구 출신.
2 생애
경상도 동래군(지금의 부산 동래구) 출신이며 상세한 출생연도는 알려지지 않았다. 동래에 주둔중인 조선 수군 부대로 들어가 능로군(能櫓軍) 병사로 근무하여 당시 부산에 주재중인 왜관(倭館)을 자주 왕래하고 일본인과 대화를 했던 영향 때문에 일본어에 능통한 편으로 일본어 통역도 맡은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 당시에는 평범한 어획 활동을 하고 있었으나,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중 울릉도에 몰래 불법으로 입항한 일본 어선이 정박한 것을 보고난 후에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고 증언하였다.
1693년(숙종 19년) 그는 울릉도로 올라가서 다른 어민들과 함께 고기잡이를 하게 되었는데, 이 때 울릉도에 일본 어선이 불법으로 정박해 있는 모습을 보자 때마침 선상(船上)에 있는 일본인들을 향해 어째서 남의 나라땅에 왜놈들이 멋대로 들어왔냐며 언쟁을 했다. 이에 일본인들은 "우린 80년 전부터 여기서 고기를 잡았는데 여기가 조선땅이라니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우린 쇼군에게 받은 어업 허가증이 있다!"라고 반박했고 안용복은 그 허가증 한번 보자, 라고 동료 어부인 박어둔과 같이 일본 어부들과 같이 오키 섬까지 같이 가게 된다. 안용복이 납치되었단 말이 있는데 관리도 아닌 일개 어부를 갑자기 태수에게 데려갈 이유도 없고, 당시 일본측 기록에도 허가증의 여부를 따지기 위해서 데려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안용복은 오키도주 앞에서 울릉도는 명백한 조선의 영토이며, 일본인이 불법으로 남의 땅에 와서 행패를 부리고 멋대로 고기잡이를 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당황한 오키도주는 그를 호키슈(백기주) 태수에게 보냈고 호키슈 태수는 다시 에도에 편지를 보냈다. 에도 막부는 그런 작은 섬을 무력을 뺏는 일은 지극히 쉬운 일이지만 그깟 섬 하나 때문에 이웃나라와의 교리를 해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울릉도에서 조업하던 가문들에겐 일본 동해안으로 어장을 옮길 것을 지시하고 다신 일본인이 울릉도로 가지 않겠다는 편지를 써서 안용복에게 준 다음에 그를 조선으로 돌려보내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도중에 대마도주가 수하들을 보내 시모노세키에서 안용복 일행을 잡아 그를 고문하고 쇼군이 준 편지도 뺏았다. 그리고 조선측에서 자기네 백성을 고문했다고 항의할까봐 안용복과 박어둔을 왜관에 두어 약과 밥을 주어 회복시킨 다음에 조선에 표류한 어부를 구했다고 거짓말을 하여 풀어준 다음, 그것도 모자라 조선 측에서는 이들이 일본 땅인 죽도에 함부로 들어오는 일이 잦으니 그걸 막아달라는 요구를 했다. 이때 조선은 이게 일본 측이 주장하는 죽도 즉 '다케시마'가 울릉도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작은 섬 때문에 싸우기 싫어 울릉도는 우리땅, 죽도는 너희땅이라고 대충 마무리 짓기 위해 '우리가 어민들이 먼 바다로 못 나가게 하고 심지어 우리 땅인 울릉도도 못 가게 하는데 하물며 니네 땅인 죽도에 들어가게 하겠니?'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일본과의 외교 마찰을 우려하면서도 울릉도가 조선 땅임을 확실히 한 것. 대마도 측에서는 '울릉도'라는 말을 싫어해 빼기를 원했지만 끝끝내 빼지 않았다고 한다. 대마도주가 보낸 사신 귤진중은 이 내용을 빼달라고 옥신각신하다가 소득이 없자 열받아 조선측에서 제공한 체제배도 받지 않고 돌아가버렸다. 한편 안용복은 동래 왜관에서 2년간 구금된다. 이유는 그를 고문한 것을 대마도주가 들킬까봐였다.
2년간의 구금이 끝나고 풀려나온 1696년에 안용복은 울산에서 승려 뇌헌의 배를 포섭하고 11명을 모집하여 울릉도로 출항을 나서게 되었는데, 이는 고기잡이 출항이 아니라 작심하고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 자신이 동래부에서 2년간 구금된 것이 일본의 농간이라고 생각했던 것인지, 전남 송광사의 승려 뇌헌[1]을 포함한 승려 5명[2]을 포함[3]한 일행을 만들어서 울릉도로 간 것이다. 그리고 이 때 울릉도에 일본 어선이 있는 모습을 보고 다시 일본 어부들과 실랑이를 벌이게 되고 결국에는 독도까지 도망가는 일본 어선을 쫒아간 끝에 일본으로 가서 자신을 '울릉우산양도감세장'[4]이라고 칭하고 다시 호키슈 태수를 만나 항의하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듬해 일본 에도 막부는 대마도주를 통하여 공식적으로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일본인의 울릉도 침입 및 월경(越警)을 금지[5]시키겠다고 통보하였다. 한편 안용복이 쫓던 일본인들은 호키슈 태수에게 붙잡혀서 월경죄로 모조리 사형당한다. 안용복은 에도에 대마도주가 자신을 구금하고 쇼군의 문서까지 빼앗았다고 항의했지만 대마도주의 아비가 아들이 죽을 것을 염려하여 안용복에게 따로 뇌물을 주기 위해 밀사를 보내고 다시 에도에 사람을 보내 뇌물을 뿌려 이 일이 공론화되는 것을 막았다. 안용복에게 주기 위해 금과 은을 챙겨 호키슈로 가던 대마도주의 밀사는 일이 마무리되었단 전갈을 받고 도중에 돌아왔다. 어쨌거나 안용복은 또 시모노세키를 거쳐 느긋하게 돌아가다가 대마도주의 술수에 걸릴까봐 호키슈에 서둘러 강원도를 통해 조선으로 귀국한다. 강원감사는 안용복을 붙잡아 뭐하다 왔는지를 캐물었고 월경죄로 그들을 하옥했으며 다시 의금부로 보냈다.
사건이 알려지자, 조선의 조정에서는 울릉도 영유권을 확실히 하고 일본 정부에게까지 확언을 받아온 점 등은 관료들 모두가 일관되게 공(功)으로 삼을 만한 일로 보았다. 특히 에도 막부의 월경 단속 약속이 들어오자 남구만은 아예 이는 역사적인 쾌거라고 칭찬했고 대소신료들이 공이 능히 죄를 덮을만 하다고 주장했으나 윤지완이 하지만 그렇다고 이 간악한 백성을 죽이지 않으면 안용복을 흉내낼 이가 많으니 곤란하다고 하여 사형은 면한 대신에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가 어디로 유배를 갔는지, 그 후의 삶은 어떠했는지 등은 전하지 않는다.
안용복 이후 조선에서는 고종 때까지 울릉도 인근에 대한 영유권 문제가 벌어지지 않았다. 또한 안용복 사건 이후 숙종 대에는 울릉도 인근에 대한 감찰이 강화되어, 원칙적으로 3년에 한 번씩은 울릉도 인근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3 왜 조선 정부는 그를 유배 보냈나?
국가적으로는 울릉도를 사수하고 일본과의 분쟁을 잘 조정하였던 용기있는 인물로 평가되었지만 결국 유배를 떠났다는 점에서 '공을 세워도 귀양 보내는 조선' 등의 평가로 이어지기도 하는데, 지나치게 형식에 얽매였다는 지적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이 사건의 이해를 위해서는 그러한 조치가 내려진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조정에서 왜관 문제로 일본과 복잡한 관계를 맺었던 것이 바로 숙종 때였다. 실록에서 왜관을 검색했을 때 가장 많은 기록이 등장하는 것이 숙종 때인데 '倭館' 검색 시 국역 56건, 원문 41건. '왜관' 검색 시 국역 58건, 원문 44건. (단 숙종보궐정오 등의 기록은 제외했다.) 참고로 이 수치는 경종 때부터 철종 때까지의 합산과 비슷한 수준이다. 조선 정부가 왜관 관련 문제에 부던히 노력했으며, 이후 일본 관련 문제가 안정세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현종 때의 왜관 관련 기록 중 많은 수가 재위 10년부터 재위 15년까지, 즉 그의 재위 후반기에 집중되어 있다. 이는 현종 후기부터 숙종 대까지는 왜관과 일본인의 관리 문제가 국가적으로 중요한 화두 중 하나였음을 보여준다.
이는 1671년에 일본이 왜관을 넓혀달라며 한바탕 깽판을 부린 탓에 초량으로 왜관을 이전했던 일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일본과의 교역이 활발해지는 한편 왜관의 면적이 넓어지자 자연히 조선 정부가 정한 교역 범위를 넘어서는 문제점들이 곳곳에서 발생했다. 이러한 문제 외에도 1674년과 1677년 왜관에 일어난 화재, 1682년의 조선 통신사, 1711년 쇼군의 호칭 문제[6], 1712년 징비록의 국외 유출 금지[7] 등 일본과 상당히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 때 조선의 목적은 조정에서 최대한 신경 써서, 왜관 교역을 비롯한 일본 문제를 정부의 관리 하에 놓자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갑자기 한 평민이 가지 말라던 울릉도에 가서 어로행위를 한 것도 모자라(1차 도일, 원래 울릉도는 공도정책으로 인해 관리 이외에는 도항 자체가 범죄행위였다.) 조선 정부 관리의 이름을 칭하며 에도의 일본 중앙 정부에까지 올라갔다 온 것이었다(이건 2차 도일). 오늘날로 말하자면 일반 시민이 외교부, 혹은 내무부 관계자임을 주장하며 외국의 지방자치단체장을 직접 만나서 영토 문제에 대해 강하게 항의하고 이 소식이 해당 국가의 중앙 정부에까지 올라간 격이다. 따라서 조선 정부 입장에서는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고, 처벌의 강도도 이에 맞춰 강해지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관련 기록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관료들 모두가 안용복의 공적은 분명히 인정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반대 측에서도 '공은 큰데 죄가 더 크니 처벌해야 함' 식의 주장을 펴고 있음을 실록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고, 하다못해 '처벌을 하긴 해야 하는데, 일본한테는 들키면 안 됨. 기껏 기 죽여 놨는데 그걸 무위로 돌릴 수는 없으니까' 식의 주장도 나오고 있다.
다시 말해 조선 정부가 단순히 부패하고 무능해서[8], 안용복을 귀양 보냈다기보다는, 당시 매우 중요시되던 일본 문제에서 조선이 특히 중시하던 관을 사칭하여, 일본 중앙에까지 들어가 자칫 외교 문제로 번질 수 있는 일을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이렇게 사건의 무게가 적층되면서 사형을 논하는 수준까지 커진 것이지, 안용복이 무슨 국가 반역죄로 취급되었느니 어쩌니 하는 말은 근거가 없는 소문이다.
4 평가
조선의 실학자인 성호 이익은 안용복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안용복은 영웅호걸이다. 미천한 일개 군졸로서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계책을 내어 강한 적에 대항하였다. 왜인들의 간사한 마음을 꺾어버리고, 여러 대를 끌어온 분쟁을 그치게 하였으며, 한 고을의 땅을 회복하였다. 이는 부개자(傅介子)와 진탕(陳湯)[9]이 한 일들에 비해서도 더욱 뛰어난 업적으로, 걸출한 자가 아니면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그에게 상(賞)을 내리기는커녕 형(刑)을 내리고 나중에는 귀양까지 보내어 그의 뜻을 꺾고 그를 무함(誣陷)하기에 바빴으니, 애석하구나.
안용복은 특히 독도 영유권 문제로 일본과 신경전을 벌이게 되면서, 현대에 17세기 일본과 울릉도, 독도 문제를 확실히 담판 지은 인물로 주목 받고 있다. 안용복 사건 이후, 동국문헌비고, 만기요람에는 '우산(도)은 왜가 말하는 송도(마츠시마)'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일본 학자 이케우치 사토시는 이전에는 이런 인식(조선에서 말하는 우산도와 일본에서 말하는 마츠시마가 동일한 섬이라는 인식)이 없었고 안용복의 2차 도일 이후에야 우산=마츠시마 인식이 생겼다고 보고 있다.[10] 울릉도에 안용복을 기리는 안용복 동상과 안용복 장군 충혼비,[11] 그리고 추모 사당이 있다.
전쟁소설 독도왜란에선 그 상징성 때문인지 당시에는 정해지지 않은 세종대왕급 3번함의 이름으로 명명되었다.
2016년 10월 16일에 그의 이야기가 서프라이즈를 통해 방영되었다.- ↑ 울릉도로 향한 배의 소유주 역시 뇌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 뇌헌, 승담, 연습, 영률, 단책
- ↑ 일본의 유식층은 주로 승려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서 승려들과 함께 움직인 것으로 추정됨.
- ↑ 울릉도와 자산도, 두 섬의 세금을 관장하는 장군이라는 뜻이다.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의 국역본에서는 '울릉자산양도감세'라고만 되어 있어 뭔가 애매한 느낌을 주지만, 이것은 뒤에 붙어있는 장(將)을 '장차 ~하려 했다'는 뜻으로 오역해서 벌어진 해프닝.
- ↑ 죽도도해금지령.
- ↑ 이전부터 쇼군을 '일본 국왕'으로 칭해주다가 숙종 연간에는 '일본 대군(大君)'으로 칭하고 있었는데, 이 때 다시 '일본 국왕'으로 하는 것으로 못박게 된다. 여담이지만 근세 후기 ~ 근대 일본은 이걸 빌미로 '쇼군이 일본 국왕이니까 그보다 높은 덴노는 당연히 조선에서도 황제로 봤음. 그러니까 조선은 일본 속국 ㅋ' 따위의 논리를 펴기도 했다.개소리도 정도껏 해라
- ↑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군사력을 비롯한 많은 정보의 누출 우려 때문이었다.
- ↑ 사실 조선 정부는 괜찮은 외교 처리 능력을 보여주었다. 다만 조선 초엔 곁에 유아독존 강대국 명이 있었고, 임란은 외교만으로 막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였다. 흔히 외교미스로 초래한 전쟁으로 이해되는 호란도 실상은 조선의 대응과 상관없이 청이 침략해온 전쟁이다.
- ↑ 한나라의 흉노 정벌 당시 활약한 인물들로, 서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시켰다.
- ↑ 이케우치 사토시는 나고야대학 교수로서 은주시청합기에서 말하는 일본 영토의 서북 경계는 독도가 아니라 오키 섬이라고 논증함으로써 일본의 '다케시마 고유영토설'을 부정한 학자이다. 그러나 시마네현 고시는 '도덕적 문제일 뿐'이라면서 독도의 무주지 선점론을 주장하는 학자로서, 안용복의 2차 도일은 1차 도일 때 받은 냉대에 대한 항의 목적일 뿐이며, 안용복은 독도를 지킨 영웅이 아니라고 주장 할 뿐만 아니라, 대한제국 칙령 41호의 '석도'가 독도라는 주장은 발음의 유사성에 근거한 가능성일 뿐, 문헌적 증거가 없으며(유감스럽게도 이건 사실이다.) 시마네현 고시 이전까지 조선인은 독도에 다녀오지도, 알지도 못했다고 주장하고 있다.(그런데, 동국문헌비고의 우산=마츠시마 인식이 안용복 때문이라고 본인이 논문에서 주장해놓고 안용복과 독도영유권은 관계가 없다라고 주장하는 건 뭔 소린지......... )
- ↑ 다만 실제로 관직을 제수받은 적은 없다. 흔히 무당들이 모시는 XX장군의 개념으로 생각해야 할 듯. 당시 민간에서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관직이 '장군'밖에 없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