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


東萊

20px 부산광역시의 지역 구분
원도심동래서면서부산동부산

1 개요

지금의 부산광역시의 옛 이름.[1] 동래의 중심지역은 지금의 동래구 일대였다.

해운대 지역에 장산국(萇山國)과 거칠산국(居柒山國)으로 소국을 이루었다. 6세기 경 신라의 점령 후 거칠산군(居柒山郡)이 되었고 8세기 경 통일신라 경덕왕 때 현재까지 쓰이는 지명인 동래군(東萊郡)으로 개칭되었다. 후한서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독로국(瀆盧國)이 나오는데, 이 독로가 동래의 어원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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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동래구라는 뜻 외에도 넓은 의미의 동래지역, 동래구, 연제구, 금정구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쓰인다. 이 중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동래는 지금의 동래구 영역(정확히는 읍성과 그 인근)이며 금정구와 수영구, 연제구는 동래의 변두리에 해당했다.

2 역사

파일:Attachment/동래/map1.jpg 1896년 양산의 모습이 심히 이상한 것은 무시하자[2] 동해선다대선이 두드러진 건 무시하자

조선 시대에 동래도호부(東萊都護府)로 승격되었으며, 초량에 왜관(倭館)이 설치되어 일본과의 무역 거점 도시로 기능하였다. 이 당시 부산(부산포, 부산진)이라는 이름은 동래도호부 예하의 포구 및 (鎭)에 불과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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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23부제 시행했을 때는 포항시, 경주시, 울산광역시, 양산시 등 경상도 동쪽을 통째로 떼어서 동래부라고 명명했는데(위의 연두색 범위), 이건 저 안에서 가장 대표적인 도시가 동래였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아래에 설명할 도시로서의 동래는 동래부 안의 동래군이었다. 이듬해 13도제 시행으로 동래부는 반반 나눠서 경상북도경상남도의 일부가 되었고, 동래군은 동래부가 되었다. 같은 용어가 전혀 다른 범위를 포함하는 것으로 휙휙 바뀌므로 헷갈리기 쉽다.

파일:Attachment/동래/map2.jpg 1914년

1910년 일제강점기의 시작과 함께 동래부가 잠시 통째로 부산부로 개칭되었으며, 1914년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부군면 통폐합으로 부산부의 영역이 개항장 일대로 축소되고, 부산부의 잔여지역을 동래군으로 분리하였다. 이와 함께 별개의 행정구역이었던 기장군이 동래군에 병합되었다. 동래군청은 기존 동래부 관아(동헌)를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기장군 지역만 남은 동래군이 1973년 양산군에 병합될 때까지 현역 군청사로 쓰였다. 조선시대 건축물이 현대에까지 현역 관공서 건물로 쓰인 특이한 케이스.[3][4]

파일:Attachment/동래/map3.jpg 1945년 광복 직후

일제강점기와 8.15 광복 이후를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동래군은 부산시에 편입, 흡수되었으며, 1963년에는 현 기장군과 동일한 영역만을 점유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73년 최종적으로 폐지되고 양산군에 병합됨으로서 동래군은 소멸되었다.

한편, 1957년 부산시에 구(區)제가 실시되면서 아래 항목의 동래구가 설치되었으며[5], 폐지된 동래군을 대신하여 동래구가 부산의 옛 이름인 '동래'의 맥을 잇고 있다.

위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원래는 동래가 상위 지명, 부산이 그 하위 지명이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부산과 동래의 지명의 지위가 뒤바뀐 것. 일제강점기가 아니었다면 동래광역시 부산구가 되었을 것이다. 덤으로 경부고속도로도 경동고속도로 혹은 경래고속도로였을지도[6] 비슷한 사례로 회덕군 대전리광역시의 이름으로 격상되고, 상위 지명이었던 회덕은 회덕동 정도로만 남아버린 대전광역시의 사례가 있다. 동래는 그래도 이름은 챙겼으니까 그나마 선방 구미시의 경우도 원래는 선산군이었지만 구미면이 차례대로 구미읍, 구미시로 승격되어서 구미에서 선산이 독립했고 1995년 도농통합시가 출범하면서 구미시의 일부가 되었다. 선산읍은 지금 에 불과해 진 셈.

부산과 통합된 이후에도 7~80년대까지는 '부산'과는 다른 동래 지역만의 정체성이 남아있었지만[7] 동래와 부산 시가지 사이의 미개발지역까지 부산 시가지가 확장되면서 연담화되어 지금은 완전히 부산이라는 도시의 일부로 동화된 상태이다.

3 동래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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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사대문처럼 과거 동래부도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동서남북 4개의 문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동래읍성일본과의 외교 창구였기 때문에 관아의 규모도 크고 격식이 높았다.[8]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일본군의 제1차 공격목표가 되어 동래성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으며, 1731년에 동래부사 정언섭이 나라의 관문인 동래의 중요성을 감안해 훨씬 크게 다시 쌓았고 이 때의 증축이 지금 남아있는 읍성의 기원이다. 동래읍성의 성벽은 일제강점기에 대부분 철거되었다.

3.1 인생문 복원과 성벽 붕괴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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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행정편의주의에 따른 엉터리 문화재 복원의 실태 사례

동래구는 2005년 11억 3200만원의 예산을 들여 의욕적으로 동래읍성 6개 문 가운데 하나인 인생문과 주변 성곽을(길이 50m) 복원하였다. 그러나 복원의 결과물이 너무나 조잡하여 자치단체장 치적 쌓기용 디시인사이드 역사 갤러리를 비롯한 수많은 커뮤니티에서 숱한 까임의 대상이 되었다. 관련 블로그

2012년부터 성벽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2014년에는 아치형 성벽[9]에 손이 들어갈 만한 틈이 생기거나 전통 공법으로 만든 성벽에 배불림 현상이 보이는 등 붕괴 조짐을 보였다.

동래구는 이 사실을 최소 2014년 2월부터는 인지하고 있었으며, 같은 해 8월부터 6개월간 성벽 균열 계측 관리 작업을 시행하여 그 결과 2015년 2월에 '인생문으로 통과하는 차량 통행이 많아[10] 진동과 성곽 상부 바닥의 빗물 유입 등으로 배불림과 뒷 채움석 사이에 틈이 벌어지고 이질재 접합부의 완충재 부재 등으로 지속적 배불림이 진행 중인 것으로 추정된다'는 내용의 계측 용역까지도 완료했다.

그리하여 8월에 예산 요청을 하는 등 조만간 성벽 보수 공사를 시작하기로 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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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 17일. 결국 인생문을 복원한지 10년만에 성벽이 무너졌다.

당연하게도 이유는 부실공사였다. 시 문화재위원의 말에 따르면 "돌 하나 빠지면 다 무너져 내릴 구조"라고 한다. 부산시 감사관실에서 붕괴된 인생문 성벽을 조사한 결과 원래는 성벽 내부를 자연석으로 서로 맞물리게 쌓도록 돼 있지만 실제 공사에서는 주먹 크기의 잡석으로 채워 넣어 외부 진동이나 충격에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만든 데다가, 겉으로는 돌을 단단하게 고정하기 위해 표면을 거칠게 마무리하도록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보이는 부분만 거칠게 처리하거나 심지어는 돌이 맞닿는 부분에 본드(!)까지 사용하는 등 시공사가 설계와는 다른 재료와 시공방법으로 공사한 사실이 드러나 충공깽을 선사해 주었다. 성벽 내부에서 건설현장 자재 쓰레기가 발견된 것은 애교다

그리고 이 같은 부실 공사가 아직 무너지지 않은 성벽에도 사용된 것으로 보고 정밀 안전 진단이 완전히 끝난 뒤 대책을 강구하기로 했다.

부산시는 동래구에 시공사를 고발하고 부당이익 2억 1천만 원을 환수하도록 촉구했으나 손해배상청구권 소멸 시효(10년)가 이미 지났기 때문에 소송은 쉽지 않을 전망이다. 관리 감독 업무를 맡은 공무원 3명은 징계 시효는 지났으나 재발 방지 차원에서 고작 훈계 등의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고 한다.

무너진 성벽의 수리는 예산이 확보되는 2016년 3월에야 가능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4 관련 항목

  1. 그러나 지금 부산광역시의 영역과 옛 동래의 영역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동래부에서 부산이 떨어져나간 20세기 초반부터 동래군이 부산직할시에 완전히 흡수된 20세기 후반까지는 50년이 넘는 기간 동안에는 동래와 부산이 공존했었다. 이 당시 부산은 지금의 중,동,서,영도구(+부산진구)를 중심으로 한 지역이었다.
  2. 이러한 형태의 행정구역을 땅거스러미라 하며, 조선시대에는 '견아상입지'라고 불렀다. 항목 참고.
  3. 심지어 1973년 이후에도 동래부동헌 건물은 양산군보건소 동부지소로 쓰였다고 한다.
  4. 인천 문학초등학교에 있는 오리지널 인천도호부청사 건물도 부천군청, 인천시 문학출장소 건물로 쓰인 적이 있었다.
  5. 즉, 1957년부터 1973년까지는 '부산시 동래구'와 '경상남도 동래군'이 함께 존재했던 것이다.
  6. 조선시대 거상(巨商) 중 하나인 내상(萊商)이 동에서 유래했다.
  7. 광주광역시 광산구, 인천광역시 부평구, 창원시 마산 지역,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등 다른 도시에도 비슷한 사례가 많다. 다만 부평의 경우는 원인천과는 역사적으로 별개의 고을이기 때문에 1:1 비교는 곤란하다.
  8. 시기별로 다르지만 주로 조선 통신사에도(도쿄)까지 산 넘고 물 건너서 간 경우가 많았지만 일본 측의 사자는 거의 동래성까지만 왔다.
  9. 차량 통행을 위해 인생문 좌우로 너비 50m, 높이 6m인 2개의 아치형 성벽을 현대식 공법으로 철근 콘크리트로 뼈대를 만들고 돌을 쌓아 겉면에 판석을 붙여 만들었다.
  10. 2010년도부터 인근 아파트 공사 등으로 덤프트럭 등 대형차량의 출입이 많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