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게이 파블로비치 코롤료프
Сергей Павлович Королёв.
(1906-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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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우주개발의 아버지인 코롤료프와 인류최초의 우주인 유리 가가린(모자를 쓴 사람)
1 개요
소련 우주개발의 아버지. 미국의 베르너 폰 브라운, 중국의 첸쉐썬과 함께 그 나라의 우주개발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이들은 남다른 과학적 재능뿐만 아니라 여러 과학자들의 공동연구를 성공적으로 조율하는 리더쉽, 그리고 우주개발에 회의적인 정치가들을 구워 삶아 거액의 국고를 끌어 올 수 있는 특별한 정치력까지 갖추어 그 국가의 우주기술 수준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렸다. 이 세가지 능력 중 하나만 없었어도, 그 나라의 우주개발을 끌어올리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소련 과학기술사에서 이론물리학의 레프 란다우, 수학의 안드레이 콜모고로프, 핵물리학의 아나톨리 댜틀로프 이고르 쿠르차토프[1] 등 역사를 풍미한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인물들이 적지 않지만 소련이라는 나라의 위상을 드높인 공로로 치면 그의 앞에서는 모두 데꿀멍할 정도의 업적을 남겼다. 전성기 때도 미국의 반 내지 70% 밖에 안되는 국력을 가졌던 소련이 미국의 라이벌이라고 인식된 것은 군사면도 있겠지만 바로 우주경쟁의 초반기에 소련이 미국을 한발자국씩 앞섰기 때문이고, 그것을 이끈 사람이 바로 코롤료프이다.
2 초기이력
대학생시절 ..중년에는 몸이 불지만, 젊을 때는 꽤 미남. 여자관계도 꽤 복잡했다고..
제정 러시아 시절 돈바스 지방에서 태어났다.[2] 어릴 때부터 수학에 재능이 있었으며, 오데사에서 공부했다. 학창 시절부터 시대를 앞서가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바로 비행. 항공에 관련된 학문을 독학하면서 글라이더 서클에 가입해서 직접 글라이더 시제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 취미는 1924년 키예프 공대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항공공학을 공부하게 되면서 그의 직업이 되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선택했으니 잘하는 건 당연한 일. 이후 2학년을 마치고 모스크바에 있는 바우만 국립대학으로 전학하여 1929년 항공기 설계공학으로 학위를 받았다. 그의 지도교수는 유명한 항공기 설계자 안드레이 투폴레프였다. 나중에 폭격기나 수송기만을 전문적으로 설계하는 투폴레프 설계국의 설립자가 된 그 사람이다.
3 시련
졸업 후 항공기 설계국에서 일하면서 틈틈히 취미로 로켓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1930년에는 파일럿 자격증까지 땄으며, 당시 소련에서 로켓 연구로 가장 유명했던 '반작용 [3] 연구 그룹'으로 전근되었다. 이 조직은 시대에 앞서서 로켓무기나 글라이더 유도폭탄 등등을 연구하고 있었다.
BBC에서 방송한 다큐멘터리[4]에 소개된 그의 과거는 순수하게 로켓을 좋아하는 덕국 청년 베르너 폰 브라운과 그 본질이 다르지 않다. 이런 실험적 연구에는 당연히 실패가 뒤따르기 마련이지만, 이는 NKVD가 "이새퀴들 결과는 못 내면서 국고를 엉터리 실험으로 탕진하고 있네. 반동 아냐?"고 이들을 의심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한때는 코롤료프의 절친이었으나 나중에 원수가 된 발렌틴 글루쉬코(1908~1989) 그러나 이자도 코롤료프를 고발한 후 얼마 뒤 대숙청에 걸려 수용소를 가게 되었으나 열렬한 공산주의자 였고 고위층과 인맥도 있어서 금방 풀려났다. [5]
코롤료프의 실험을 회의적으로 보았던 그의 동료였던 발렌틴 글루쉬코는 그를 국고낭비 혐의로 고발했고[6], 1938년 한창 서슬퍼렀던 대숙청 기간 중에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수용소로 끌려갔다. 처음에는 악명높은 굴라그에 끌려가서 모든 치아를 잃는 등의 고생을 했지만, 그래도 인재는 인재인지라 후에 기술자나 과학자만 모아놓는 특별 수용소에서 복무기간을 채우게 되었다.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에 따르면 체력이 약해서 여자들이 목욕하는 동안 속옷을 지키는! 일도 했다고 한다. 아니 희대의 과학자에게 속옷 경비원이라니 .. 흠좀무
굴라그 죄수시절의 머그샷
이런 특별 수용소는 굴라그에 비하면 대우는 한결 좋았고, 반동으로 찍힌 기술자는 그곳에서 연구를 계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엔진 전문가 발렌틴 글루쉬코와 코롤료프의 불화는 나중에 우주 경쟁에서 소련이 미국에 역전당하는 빌미가 된다. 여자 속옷을 지키게 한 원한은 바다와 같다 ?
이런 소동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앞서있던 소련의 로켓연구는 나치 독일에 뒤쳐지는 결과를 빚었고, 독일이 먼저 탄도미사일 V2를 개발하게 된다. 이에 반해 소련이 가지고 있던 로켓은 그저 유도장치도 없는 단거리 로켓 카츄샤가 전부였다. [7] 가정에도 불행이 닥쳐서 코롤료프가 강제수용소에 있는 동안 조강지처와는 멀어지고 나중에 이혼하게 되었다. 1944년에 사면되어 연구소로 돌아왔는데, 당시 코롤료프를 고발한 발렌틴 글루쉬코는 독일군을 점령한 소련군에 파견되어 V2로켓을 보게 되었는데, 이것을 제대로 분석할 수 있는 것은 코롤료프 뿐이라고 상부에 보고하여 코롤료프는 V2의 기술 습득을 위해 독일로 파견되었다.
4 재기
소련은 V2기술자들을 고용하기 위해 배급 확대와 많은 연봉 등 여러가지 특전을 내걸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8] 베르너 폰 브라운을 비롯한 개발자급 인재들은 대부분 미국에 투항했다. 소련이 구할 수 있었던 기술자들은 V2공장에서 일하던 제조직공 정도였다. 다만 V-2의 유도장치를 개발한 전기공학자 헬무트 괴트룹(Helmut Gröttrup)은 개발자급에서 거의 유일하게 소련에 투항했다. 소련은 로켓의 구조면에서는 상당한 노하우를 가지고 있었으나 로켓의 두뇌에 해당하는 유도장치에 대해서는 거의 백지상태나 다름 없었는데, 괴트룹은 그 부족했던 부분을 채워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소련으로서는 가장 필요한 인재를 확보한 셈이었다. [9]
코롤료프는 이렇게 소련으로 온 독일 기술자들과 함께 V2를 개량한 새로운 로켓을 개발하였고, 1947년 R1 (V2의 카피판), R2를 개발하는데 R2는 V2의 두배의 사정거리를 보였다. R2가 두배의 사정거리를 가지게 된 이유는 지금은 흔하지만 당시에는 아주 기발한 로켓모터를 다 태우면 무게만 먹는 로켓모터는 때버리고 노즈콘만 날라가서 꼬라밖는 분리 로켓이기 때문이다. 그는 개발을 계속하여 1954년에 나온 R5는 사정거리가 1200km나 되었으며 처음으로 실전배치된 중거리 미사일이 되었다. 사실 이런 시험은 잦은 실패를 했었기 대문에, 코롤료프는 항상 이번이 당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는 경고와 상부로부터 받는 압력에 시달리며 개발했다.[10]
R2의 성공이후 KGB는 코룔로프와 핵심연구팀들이 미국의 첩보원들로 부터 암살을 당할까 우려해 코룔로프의 모든 신상정보를 최고급 기밀 처리 및 삭제처리를 해서 살아는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어서 관리를 했다. 때문에 베르너 폰 브라운도 그가 사망이후 국장으로 치루어지는 장례식을 신문으로 접했을때 그의 이름과 업적을 알 수 있었다.
1957년 4월에는 1938년의 혐의가 부당하다는 재심을 받아 완전 복권되고, 소련은 이 로켓 천재를 팍팍 밀어주게 되었다. 마침내 그는 R-7로 1957년 8월 세계 최초의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발사했다. 카자흐스탄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에서 발사된 이 로켓은 수천킬로를 날라가 캄차카 반도에 있던 표적을 정확히 맞추었다. 이것으로 독보적인 위치에 올라 더 이상 실패를 걱정하지 않는 위상이 되었다. 코롤료프는 R-7 로켓으로 1957년 10월 4일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를 발사하여 우주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5 소련의 우주개발을 이끌다
세계 최초의 대륙간 탄도 미사일이고 스푸트니크 쇼크의 주인공인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궤도에 올린 발사체이자 미국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한 R-7은 그의 위대한 작품이다.[11] R-7은 매우 독창적인 발사체로서 성공적으로 발사한 발사체 중 유일무이한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바로 약 20여개의 '주엔진'을 4개씩 다발로 묶어서 그 중 4다발을 액체로켓 부스터로 사용한 묶음식 로켓 발사체. 물론 이렇게 한 이유는 당시 소련이 대형 엔진을 개발할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설계 자체가 우수한건 말할 나위 없어서 몇가지 개량을 거쳐 2010년대인 아직까지도 사용되고 있을 정도이다!
소련은 물론이고 미국 역시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이렇게 많은 주엔진을 조율하여 안정적인 발사체로 만들어 낸 적이 없는걸 보면 그의 천재성이 독보이는 독창적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거기다 R-7은 그 이후 산화제와 연료, 엔진을 끊임없이 개량하여 여전히 소유즈의 1단 로켓으로 쓰인다. 오오 코롤료프!!
이후 다음 프로젝트로 인간을 우주로 보내기 위한 우주선 개발을 시작했다. 이를 위해 만들어 진 것이 1957년에 발사된 스푸트니크2호이고, 여기에 실린 개가 바로 그 유명한 라이카이다. 그러나 라이카는 발사한지 얼마 안 돼 죽고 말았다.
이후 코라블-스푸트니크 계획을 마련하여 5번의 발사를 했고, 계속 생물체를 태워 보내는 실험을 하여 데이터를 모아 우주에서 생물의 생존 가능성을 탐구했다.
그렇게 모은 데이터로 1961년 4월 12일에는 유리 가가린을 태운 보스토크 1호를 발사하여 마침내 최초로 인간을 우주로 보냈다. 유리 가가린을 태운 우주선을 발사하는 기록영화를 보면 비밀로 함인지 세르게이 코롤료프는 등장하지만 모습을 거의 비추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검은 중절모에 검은 양복을 입고 빨간 끈을 소매에 매고 가가린을 배웅하는 사람이 바로 코롤료프인데, 얼굴이 나오는 장면은 전혀 없다. [12]
이후에는 달 탐사를 위한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이때 달 탐사선으로 설계된 것이 그 유명한 소유즈 우주선이다. 현재는 달 탐사선이 아니라 궤도 우주선으로 쓰이고 있지만... 이것도 코롤료프가 만든 걸작이며 5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 개량되어 사용되고 있다. 다른 설계국과의 경쟁 때문에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급하게 발사하는 바람에 원형은 수동으로 착륙하다가 낙하산이 펴지지 않아 비행사가 사망했다. 그러나 이후 계속 개량을 통해 우주왕복선이 퇴출된 지금은 우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본좌 우주선이다. 적어도 2020년까지는 소유즈가 계속 독보적으로 이 분야에서 본좌 자리를 차지할 것 같다.
코롤료프는 소련 내 다른 설계국과의 극심한 내부경쟁 때문에 과중한 업무에 시달렸다. 대표적인 라이벌로 ICBM개발자인 블라디미르 첼로메이, 미하일 얀겔이 있는데, 네델린 참사(Nedelin catastrophe)라는 흑역사가 있어서 유인우주선 계획에서 배제되고 ICBM 개발에만 집중했던 얀겔[13]과는 얀겔이 코롤료프와 함께 일한 인연도 있고 해서 관계가 좋은 편이었으나, 첼로메이와 코룔로프는 달 탐사에 각기 다른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었고 정부 예산을 먼저 따내기 위해 엄청난 경쟁을 했다. 게다가 컴퓨터, 전자공학, 재료공학. 엔진기술 등 전반적으로 소련의 과학기술이 미국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해결해야 할 문제는 미국보다 훨씬 많았고, 이는 업무를 가중시켰다. 또한 미국전역을 공격할수 있는 대륙간 미사일 개발된뒤 소련은 코룔로프에 대한 지원을 축소하였다. 여담이지만 첼로메이가 만든 위성발사용 로켓 프로톤 로켓도 걸작 로켓으로 현재까지 러시아가 무인 위성 발사용으로 애용하고 있다.
코롤료프의 라이벌 블라디미르 첼로메이 (1914~1984)
6 사망
달 탐험에 필요한 로켓은 출력이 R-7보다 훨씬 커야 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대형 로켓 엔진의 개발이 필수적이었다. 미국은 폰 브라운이 새턴-5로 이를 달성한 반면에 소련은 계속 삽질을 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발사체 설계자 코롤료프와 로켓 엔진 권위자인 글루쉬코의 사이가 나빠서 좀처럼 설계 합의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그러게 왜 친구를 고발해 그래서 코롤료프는 다른 엔진 설계자인 니콜라이 쿠즈네초프[14]와 함께 N-1로켓을 설계하게 되었다. 특히 미국보다 우주경쟁에서 뒤지면 정부가 우주개발 예산을 깎을까봐 노심초사했고, 이것이 그를 과로로 이끈 요인이 되었다. 내부 장기에 모두 암이 퍼져 이미 살기 오래 힘들었으나, 1976년 수술 중 수술대에서 사망. 그가 죽자 소련의 우주개발은 그의 대리였던 바실리 미신이 이끌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코롤료프의 라이벌이었던 브라운도 65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로 1977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로써 미소 1세대 우주경쟁의 거두들은 안타깝게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코롤료프가 개발하려 했던 N-1로켓은 설계상 새턴5보다 출력이 세긴 했지만, 1단이 무려 30개가 넘는 엔진을 달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조율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고, 계속 폭발사고를 일으켜 4번의 실패를 했다.[15] 이 틈에 새턴5 로켓을 이용한 미국의 아폴로 11호는 달 착륙에 성공했고, 브레즈네프는 이미 늦었다고 판단하여 소련의 달 유인탐사 계획을 취소했다. 그리고 실패한 바실리 미신은 소련 우주개발 책임자에서 잘렸다. [16]
여담이지만 소련은 1980년대가 되어서야 새턴 V의 F1엔진과 동등 내지 우월하고 달탐험에 필요한 출력을 얻는 RD-170 엔진을 개발하게 된다. 그리고 1980년대에는 N1의 출력을 넘는 에네르기아 로켓을 개발하여 비운의 우주왕복선 부란을 한번 쏘아 올린다. 일부 밀덕들이 현재 막장상태인 러시아의 상황만 보고, 당시의 우주기술을 포함한 소련의 기술력이 별볼일 없었다는 식으로 주장하지만, 1980년대 시점에서는 적어도 3위 그룹 (유럽, 일본, 중국) [17] 과 넘사벽으로 차이가 나는 세계 2위는 되었고, 미국에 비해 앞선 것도 상당히 많았다. 부란의 경우는 당시 미국도 리스크가 커서 못하던 무인우주비행을 실시했고, 우주정거장 살류트와 미르 운용 같은 일도 미국이 못하던 일이었는데[18] 소련은 미국의 몇분의 일 비용으로 이를 다 해낼 수 있었는데, 이렇게 비용을 맞추는 것도 당연히 기술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미국은 현재도 소련시절 개발된 러시아제 RD-180엔진 (위에서 언급한 RD-170의 분사구를 2개로 줄인것)을 군용으로[19] 계속 수입하고 있다. 기사, 여기에 프랫&위트니에서는 이의 라이센스 생산을 검토하고 있다고 하니, 우주기술 만큼은 적어도 붕괴시점까지는 소련이 미국과 선두를 다투었고, 십수년의 침체를 겪은 2010년대 현재도 일부 분야에 있어서는 근소하게나마 우위에 있다고 보는게 합리적이다.
7 그의 사후 및 평가
결과적으로 보면 미국은 베르너 폰 브라운 한 사람이 주도권을 잡고 로켓 설계를 해 나간데 반해 소련에는 코롤료프, 첼로메이, 글루쉬코, 얀겔 등 굇수급 로켓 개발자가 넷이나 되었고 이들이 서로 화합하지 못한 것이 패인 중 하나가 되겠다.[20] [21][22]
이후 코롤료프와 원수지간인 글루쉬코가 바실리 미신이 경질된 코롤료프 설계국의 수석 설계자로 임명되었고, 글루쉬코는 달 탐사보다는 우주 정거장 미르나 소련판 우주왕복선 부란 개발에 힘쓴다. 그런데 글루쉬코가 이렇게 우주 정거장에 힘쓴 덕분에 오늘날 러시아가 ISS 돌리면서 NASA와 우주관광객들에게 삥을 뜯을 수 있는걸 보면 새옹지마가 따로 없다.
달 착륙 경쟁에서 승리하자 미국도 달 탐사에 흥미를 잃게 되었고, 20호까지 로켓을 만들어 두고도 17호에서 아폴로 계획을 종료한 뒤 실용적인 우주왕복선 개발에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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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과학계의 삼거두. 이들 때문에 갈려나갔던 양키 공돌이들 입장에서는 개노답 삼원쑤 왼쪽부터 코롤료프, 가운데는 소련의 핵개발을 주도한 이고르 쿠르차토프, 맨 오른쪽은 로켓과 핵무기의 물리-수학적 이론적 계산을 도맡았던 므스티슬라프 켈디쉬 [23]
소련 우주개발 계획에서의 중요성과 미국이 보내는 암살자 위협으로 부터 과잉보호 때문에 모든 신상정보와 역할은 극비기밀이었으며, 대외적으로는 '수석 개발자(Chief Designer)'로만 간간히 언급되었고, 사후에야 존재가 공개되었다. 성대한 장례식 후에 소련의 국가영웅들만 모셔지는 붉은 광장의 크렘린 벽 묘지에 안치되었다. 당시 서방에는 그의 존재가 거의 안 알려져 있었던지라 미국 영화 필사의 도전(Right Stuff)에서는 소련 로켓이 미국을 앞설 때마다 껄껄껄 웃는 모습으로 잠깐씩 비춘다.
현재 베르너 폰 브라운와 함께 발사체 계통 엔지니어들의 양대 주신이 되고 있는 상황.
아버지가 받은 훈장을 가득 담은 진열장 앞에 자랑스럽게 선 코롤료프의 유일한 혈육, 나탈리아 코롤료바 박사.
따님 되시는 나탈리아 코롤료바 (Наталия Королёва, 1935~) [24] 할머니도 우주개발 분야에 종사하고 있다. 소유즈의 발사 때면 으레 스타 시티나 바이코누르를 찾아 승무원들을 격려하신다.
7.1 코롤료프 시
1996년 공적을 기려 모스크바 주의 칼리닌그라드[25]가 코롤료프 시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여기에는 로켓 및 우주선 생산업체인 세르게이 코롤료프 로켓 및 우주 주식회사 «에네르기아» 본사 및 러시아 연방 우주국의 관제센터가 위치하고 있다
- ↑ 개드립이 아닌 진지한 평가를 하자면 소련 핵물리학의 레전드로는 체렌코프 현상을 규명하고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파벨 체렌코프, 일리야 프랑크, 이고르 탐이나 원폭의 아버지 이고르 쿠르차토프, 차르 봄바의 아버지 율리 하리톤, 안드레이 사하로프 등을 들 수 있다. 사하로프의 경우 차르 봄바 이후 핵무기 개발 회의를 느끼고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주장하고 소련 반체제 운동에 투신하였다가 귀양살이를 하고 노벨평화상을 받는등 인권운동가로도 높이 평가받는다.
- ↑ 후일담에 의하면 코롤료프는 처음엔 스스로를 우크라이나인이라고 생각했지만 나이가 먹어서는 그런 거에 관심없이 그냥 러시아인이라 자각했다고 한다.
시베리아 한번 갔다왔는데 뭘 어쩌겠누한편으로는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서기장이 된 니키타 흐루쇼프의 영향이라고도 한다. 어쨌든 독립국 우크라이나가 없던 시대를 살아간 우크라이나인들에겐 딱히 이상할 것은 없는 부분. - ↑ 로켓의 운동은 뉴튼이 발견한 작용-반작용의 결과인데, 이때문에 로켓공학의 선구자였던 콘스탄틴 치올콥스키는 로켓운동을 "반작용운동"이라고 이름붙였다.그래서 이 연구그룹도 이렇게 이름이 붙은 것이다.
- ↑ 2008년 1월 EBS에서 '우주 전쟁(Space Race)'라는 제목으로 더빙판을 방영하였다. 미소 양국의 로켓개발을 주도하는 폰 브라운과 코롤료프의 이야기를 교차적으로 보여준다. 각각 폰 브라운은 김일, 코롤료프는 이정구.
- ↑ 실제로 발렌티 글루쉬코는 달 탐사와 우주선 개발에 힘쓰는 코롤료프와 달리 장거리 탄도미사일같은 군용로켓 개발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스탈린,흐루쇼프,브레즈네프 등 소련 고위층과 군부에게 많은 지지를 받았다.
- ↑ 본래 코롤료프의 재능을 질투하기는 했으나 고발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NKVD의 지독한 고문과 협박 ,회유에 넘어가 코롤료프를 신고한다.
- ↑ 카츄샤 로켓은 독소전쟁에서 큰 활약을 하기는 했지만, 기술적으로 보면 조선시대의 신기전과 다를 바 없는 유치한 수준이었다.
- ↑ 소련에 끌려가긴 했어도 전쟁포로 취급이 아니라 매우 좋은 대우를 받았다. 그리고 이들이 대부분 서독으로 가길 원했기 때문에 계약기간이 끝난 1953년 이후 2년간 붙잡아두긴 했지만 1955년 동독이 아닌 서독으로 보내줬다.
- ↑ space race 다큐에서 영입
납치하는 장면이 묘사 되는데. 연회를 열어 보드카를 잔뜩 먹여서 만취상태로 만들고 집으로 보내서 재웠다가 새벽에 강제로 소련으로 끌고 갓다.오오 소련식 인재 스카우트 - ↑ space race 다큐에서 이걸 묘사 했는데 우수한 대우를 받으면서 연구하는 폰 브라운과 달리 비오면 물새고 추운 가건물에서 열악하게 역설계하는 소련연구팀과 매번 공중폭발 하는 로켓을 보며 부들부들 거리는 KGB 요원이 코룔로프에게 윽박지르고 있었다.
- ↑ 스푸트니크 제작 당시 팀을 수습할 때 했던 명대사가 있다. 스푸트니크 항목 참조.
- ↑ 이 역시 KGB의 코룔로프의 신상보호를 위해 철저히 기밀처리를 해서 그렇다. KGB의 과잉보호 때문에 이 대행사에 얼굴도 못 비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 ↑ 걸작 ICBM인 SS-18 사탄의 개발자이다.
- ↑ 흔한 성이라서 소련해군의 아버지인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제독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인물이다.
- ↑ 반면에 미국의 새턴-5는 강력한 F1엔진 5개로 모든 추진력을 감당했다. .
- ↑ 코룔로프와 달리 바실리 미신은 보좌관으로써는 탁월했지만 프로젝트 관리자이자 개발자로써는 능력이 부족했다. N-1 로캣 개발 당시 과중한 업무와 책임에 따른 부담으로 매일 매일 보드카에 빠져 살았고 결국 경질 되었다.
- ↑ 중국이 우주개발에 대한 투자를 의욕적으로 늘리고는 있지만, 여러가지 운영 상황은 아직까지는 소련의 1980년대 수준보다도 낮으며, 소련이 붕괴한 후 20년이 훨씬 넘는데도 우주기술 3위의 중국이 20-30년전의 소련 레벨이하라는 것은 소련이 그만큼 대단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우주개발도 경제력이니만큼 현재의 상태가 20-30년간 계속된다면 장기적으로는 중국이 러시아를 앞설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사실 당시 미소는 국가 자존심을 건 우주 경쟁 때문에 경제를 생각하지 않고 과도하게 우주기술 개발에 매달린 탓에 비정상적으로 기술 개발속도가 빨랐다. 그렇게 보면 자기 경제력에 맞게 수십년에 걸친 장기 계획을 세워 우주개발을 하는 중국이 정상적이다.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돈을 퍼붓던 냉전 이후 미소 모두 예산 삭감크리를 맞아 러시아는 소련시절의 라인업을 업그레이드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으며, 미국도 우주왕복선 퇴출 및 차세대 발사체 개발이 계속 연기-변경되는 처지이다.
- ↑ 기술적으로는 할수 있었을지 몰라도 챌린저 참사로 예산이 싹싹 썰려나간데다 SDI도 망해서 도저히 수지를 맞출 수가 없었다.
- ↑ 정확히는 ULA의 아틀라스 V 메인 엔진...인데 어차피 아틀라스의 주요 업무가 군사위성이나 가끔 NASA, NOAA 탐사선 쏘는 거다.
- ↑ 코롤료프 사후에도 첼로메이와 얀겔은 서로 자신이 개발한 로켓을 ICBM으로 제식 채용해달라고 싸웠고, 이를 중재하기 위해 아래에 나온 므스티슬라프 켈듸쉬가 나섰으나 두 사람이 만든 로켓이 모두 고성능인지라 우열을 가리지 못하고 모두 제식 채용되는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이러한 중복 투자는 소련 국방예산에 큰 부담을 지워주는 결과가...
- ↑ 사실 처음에 미국도 이렇게 여러군데서 로켓개발을 하다가 계속 실패하는 삽질을 했다. 특히 미공군 등에서 폰 브라운에게 태클을 많이 걸었는데 어디 감히 나치 부역자가 미국인들 우주로 보내는가 라는 묘한 차별의식 때문이였다. 하지만 계속된 삽질로 빡친 아이젠하워가 NACA를 NASA로 바꾸고 모든 로켓 개발역량과 인력이 싹 정리되면서 소련을 역전하게 된다.
- ↑ 그리고 애당초 미국은 소련보다 돈도 많은데다가 세계 각지에서 인재를 끌어모을 수 있고, 재료공학이나 전자공학같은 관련기술이 소련보다 훨씬 더 뛰어났다. 이렇게 소련이 갖지 못한 여러 장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거국적으로 스페이스 레이스에 나선 미국이 소련을 앞서는건 시간문제였다. 오히려 소련은 국토가 잿더미가 되고 인구의 1/10이 학살된 처참한 처지에서 벗어난지 얼마 안된 1950년대 (2차대전 당시 거의 피해가 없던) 미국을 앞서 나갔고, 여러가지 관련 기술이 뒤떨어졌음에도 이를 어떻게 떔방하여 우주기술에서 미국과 선두다툼을 한 것을 높이평가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불리함을 오직 자신의 재능과 노력으로 극복한 이가 바로 코롤료프이기 때문에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을 받아도 모자름이 없다.
- ↑ 응용수학자로서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지만, 주로 우주개발에 관련된 문제를 연구했기 떄문에 수학계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리하여 소련의 대표적 수학자로는 이분보다는 위에서 언급된 콜모고로프가 꼽힌다.
- ↑ 참고로 영어나 러시아어로 검색하면 같이 나오는 유명 러시아 여가수 나타샤 코롤료바 (Наташа Королёва, 1973~)가 있는데, 코롤료프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며, 이분의 본명은 나타샤 블라디미로브나 포리바이(Ната́лия Влади́мировна Порыва́й) 이다.
- ↑ 쾨니히스베르크였던 칼리닌그라드와는 다른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