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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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ert Cam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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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195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1956 - J.R. 히메네스알베르 카뮈1958 -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1 개요

1913년 11월 7일 ~ 1960년 1월 4일
프랑스 문학의 대문호이자 프랑스어권에서 존경받는 문학자 중 한명. 1913년 11월 7일 ~ 1960년 1월 4일. 프랑스와 알제리(프랑스령 알제리)의 문인, 작가, 실존주의 철학자. 역대 최연소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흔히 알려져 있지만 사실 최연소는 러디어드 키플링이고 카뮈는 그 다음이다. 물론 그래도 40대에 노벨문학상을 받는 건 극히 드문 일이다.

2 생애

알제리계로 아는 사람도 있지만 아버지가 프랑스계로 예전에 알제리로 이민갔으며 어머니는 스페인계다. 그래서 알제리 및 이슬람계와는 큰 연관은 없다. [1]

여튼 아버지가 1차 세계 대전 당시 전사하는 바람에 어린 시절엔 가난에 시달려야 했고, 학생 시절에도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지만 고질병인 결핵이 방해가 되어 대학 진학도 포기한 채 자동차 수리공 및 신문사 인턴 기자, 가정교사 같은 여러 일로 벌어먹으면서 철학학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이런 경험 때문인지 22살에 공산당에 가입하여 좌익사회운동을 했으며 프랑스측의 알제리 식민지배에 부정적인 글을 남기기도 했고, 베르베르족으로 흔히 알려진 이마지겐 부족에 대한 프랑스의 억압과 더불어 아랍계들의 차별도 고발하며 까기도 했다. 그 때문에 정부의 압력으로 일하던 신문사에서 해고당하기도 했고 이에 언론인 노조가 반발하며 시위를 벌여 결국 복직한 일도 있었다.

2차세계대전 이후 프랑스가 해방되자 과거를 잊고 관용과 용서를 베풀자는 주장에 맞서 반역자들을 가혹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하지만 소위 나치 청산이란 구실로 무고한 사람들이 수만 명이나 죽이는 대학살극이 벌어지자 경악하여 이를 크게 규탄하기도 했다.

참고로 한국에선 프랑스가 반역자 청산을 잘한 것 정도로 오해하는 일이 많지만, 실상 프랑스의 청산은 36년간 식민지였던 조선이 아닌 한국전쟁 직후 한반도에서 벌어진 남북정권의 청산과 비교하는 게 더 부합한다. 꽤 유명한 사례로 독일군과 애인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린치당한 여자를 비롯하여, 독일군에게 빵을 팔거나 평소에 사이가 안좋았단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하고, 같은 레지스탕스들끼리도 정치성향이 다르다고 서로 죽이는 등 한국전쟁 전후 한반도처럼 반동분자 청산을 구실로 무의미한 학살을 일으키는 개막장 사례가 속출했다. 때문에 샤를 드 골이 허겁지겁 이를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했다.[2]

2.1 알제리 전쟁

그랬던 카뮈가 알제리 전쟁 당시 알제리 해방 전선(FNL)과 프랑스 정부 가운데 프랑스 정부 편을 든 것은 주변인들에게 매우 충격적인 일로 받아들여졌다. '이 전쟁은 반란이며 새로운 아랍 제국주의와 소련 공산 폭력주의가 만나 반프랑스 움직임을 만드는 폭력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프랑스 우익들과 비슷한 주장을 한 것.

카뮈는 알제리의 독립은 반대하되 자치권의 확대를 주장했다. '알제리의 독립은 인정할 수 없으나 프랑스인과 평등하게 살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먼가 중국과 대만, 홍콩 관계 같기도 하고 카뮈의 옹호론자들은 당시 카뮈의 어머니가 알제리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신변을 염려하여 한 주장이라는 말도 한다. 하지만 카뮈의 제안은 프랑스측에서도 동의할 수 없는 것이었고 알제리도 마찬가지였다. 결론적으로 그는 양쪽에서 까였다. 알제리는 카뮈를 극렬 프랑스 우익으로 여겼으며 공산당 동료들과 알제리 독립을 지지하던 언론인이나 지식인들은 그를 배신자로 낙인찍고 무시해버렸다.

그래서 알제리가 독립하자 알제리에서 카뮈에 대한 모든 흔적은 철저하게 지워졌다. 이것은 카뮈가 알제리를 고향으로 여겼다지만 정작 이방인 등 그의 여러 작품들 속에서는 프랑스인이 주축이지 알제리인들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는 점도 한 몫한 듯하다. 현재 그가 살던 집은 일반 가정집이며 노벨문학상 수상 당시 기념으로 만들어졌던 카뮈 문학기념비는 알제리에 용케 남아 있지만 카뮈의 이름은 끌로 지워진 채 방치되어 보존 상태가 엉망이라고 한다. 당연히 알제리인들은 카뮈가 누군지 잘 모른다.

카뮈 연구가이자 카뮈 전집을 번역하고 프랑스로 가서 카뮈 연구에 참여한 김화영 교수는 알제리에 가서 카뮈에 대한 흔적이 철저하게 없어진 것을 아쉬워하면서도 그가 보여준 알제리에 대한 인식을 '똑같이 식민지를 겪은 한국인으로선 받아줄 수 없다'고 선을 그은 바 있다.(김화영, 《알제리 기행》 참고)

3 문학

카뮈의 문학은 '부조리 문학'으로 잘 알려져 있다. '부조리 문학'이란, 세상에는 어떠한 불변의 정의나 법칙이 없다는, 아니 있다 하더라도 이해조차 할 수 없는 '부조리'를 보여주며 이에 주인공이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렇기에 허무주의적 혹은 불가지론적인 태도를 가지는 경우가 많다. 뿐만 아니라, 부조리 문학은 주로 블랙/다크 코미디가 대다수이다.

알베르는 인간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으며 그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인간이 만든 것이 부조리라고 생각했다. 또 인간의 윤리란 매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라고 믿었고, 타협하지 않고 부조리에 저항하면서 스스로에게 거짓되지 않고 솔직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4 기타

1960년 1월 4일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한창 나이에 숨을 거둔다. 카뮈의 코트에는 전철표가 있었는데 전날 아내와 같이 전철을 타려고 했다. 그런데 갈리마르 출판사 사장의 조카이자 친구였던 미셸 갈리마르(Michel Gallimard)가 몰던 차를(갈리마르가 타라고 설득했다고) 타고 가던 길에 차가 플라타너스 나무를 들이박는 교통사고를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냥 전철을 타고 갔다면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았을 듯. 아이러니하게도 인터뷰에서 '자동차사고로 죽는 것보다 더 의미 없는 죽음은 상상할 수 없다.'란 말을 남겼다. 지못미. 참고로 갈리마르도 카뮈와 같은 원인으로 사망했다.(사고 현장을 찍은 흑백뉴스)

유작으로 다 완성하지 못한 《최초의 인간》을 남겼는데 사망할 당시 유품에 이 최초의 인간 원고가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 전철표 및 지갑, 펜, 메모지같은 것들과 같이. 미완성임에도 카뮈의 마지막 소설이라 그런지 미완성인 채로 책으로 나왔으며 국내에서도 정식번역되어 출판되었다.

카뮈는 좌익운동가로 활동하다 아나키스트로 전향한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그가 20대에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는 공산당에 가입은 하지만 결코 어떤 이념에 맹목적으로 세뇌당하진 않을 거라는 문구도 있다. 알제리 전쟁에서 보여준 애매모호한 회색분자 태도도 그의 성향이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는 괴물이 되어버린 자본주의든, 패배한 파시즘이든 이미 부작용을 드러내기 시작한 사회주의권력화한 집단은 부조리를 양산하기 마련이므로 아나키즘적인 태도를 추구했다. 즉 알제리가 독립해도 새로운 제국주의 집단의 탄생일 뿐이라는 인식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이 때문에 사르트르를 비롯한 당시 많은 사회주의자들에게 비판받기도 했다.

2009년 12월 프랑스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는 알베르 카뮈의 문학을 깊이 존중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프랑스 좌파와 카뮈의 딸은 이를 반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공산당에 가입하고 좌익 활동 사상가로 지냈던 카뮈의 문학을 우파 대통령인 사르코지가 존중한다는 것이니.

원래 장래희망은 축구선수였고 알제리 지역팀에서 골키퍼로 활동했다. 그러나 결핵을 앓으며 축구를 그만두게 되었다. 배우 활동에도 관심이 있었으나 여의치 않아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원래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도 없었고 소설은 그냥 자기 머리에서 나오는대로 썼다고 한다. 그러나 책을 좋아하기는 했던 듯싶다.《작가수첩》이라고 이름붙인 메모장에다가 아이디어가 머리속에 떠오르면 그 즉시 메모했다고 . 《작가수첩》은 카뮈 사후 출판되었고(방대한 양 때문에 나뉘어 출판) 한국에도 번역 출판되었다.

5 대표작

  • 이방인
  • 페스트
  • 시지프스 신화
  • 결혼
  • 반항하는 인간
  • 단두대에 대한 성찰
  • 독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 전락
  • 여름
  • 오해
  • 작가수첩
  • 시사평론
  • 정의의 사람들
  1. 알제리계 출신으로 유명한 프랑스 사람은 지네딘 지단이 있다. 아버지가 알제리 전쟁 당시 아르키(Harki)라고 불리던 친프랑스 알제리 민병대원 출신으로 용케 프랑스로 이민 온 항만 노동자였다.
  2. 카뮈는 이런 무분별한 폭력 뿐만 아니라 드 골이 법적으로 나치 부역자를 처벌하는 일에도 일부 반대하기도 했다. 문학가이며 언론인인 로베르 브라지야크가 나치에 부역한 죄로 처형될 때 프랑스의 문학가들이 탄원서를 쓰며 브라지야크의 처형에 반대했고 카뮈도 이에 참여했다. 그러나 드 골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