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소설)

「L'Étranger」. 프랑스의 작가 알베르 카뮈가 1942년에 발표한 소설.

영역명은 「The Stranger」, 「The Outsider」, 「Foreigner」. 프랑스어인 'L'Étranger'를 영어로 옮기다 보니 저런 다양한 이름이 나왔다. 실제로 다 존재하는 판본들. 주로 'The Stranger'로 알려져 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김화영 번역본)라는 충격적인 문장으로 시작한다. 소설은 안 읽었어도 첫 문장만큼은 널리 알려져 있다.[1]

1 줄거리

프랑스 치하의 북아프리카 알제에서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던 프랑스인 뫼르소라는 남자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장례 때 어머니의 시신 주변에서 담배를 피우기도 하고, 장례를 치른 직후엔 여자친구인 마리와 노닥거리고 코미디 영화를 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2]

다음날엔 이웃집 사람 레몽이 저녁에 초대해서는 자기와 친구가 되자고 한다. 그런데, 이 사람, 불량배다... 그런데 뫼르소는 그냥 신경 안 쓰고 그러자고 한다. 그리곤 레몽이 뫼르소에게 자길 도와달라고 부탁하는데, 도와달라는 일인즉슨 레몽이 자기에게서 돈만 뜯어가고 자기를 성의 없이 대하는 정부(情婦)를 좀 두들겨 패려고 하니 자기 정부를 속일 만한 편지를 써 달라는 것. 뫼르소는 '그를 돕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 그를 돕게 되고, 그러다 그 정부의 남자 형제랑 엮이게 된다.[3]

며칠 후인 일요일에 레몽이 뫼르소와 마리를 해변가로 초대한다. 이 때 뫼르소는 레몽이 사람을 쏠까 봐 레몽의 권총을 대신 가지고 있었는데 레몽에게 보복하러 몰래 뒤따라 온 정부의 남자형제 패거리 중 한 명인 아랍인을 권총으로 사살하게 된다.

그는 처음에는 법정 등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결과로 끝날 것이라는 결과를 들었고, 국선변호사[4]나 예심판사[5]도 '당신의 사건은 별 볼 일 없는 정도로 취급될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 그 당시의 알제리는 프랑스 식민지였던지라 프랑스인이 알제리인을 죽였다는 것은 어느 정도 감쌀 수 있었으니. 에라이

그러나 어이없게도 법정의 주요 화제는 아랍인 살해건이 아니라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에 그다지 슬퍼하지 않고 무덤덤하게 보였고 놀러 다니기까지 했다는 것이 된다. 이 이야기는 마리가 법정에서 무심코 증언한 것이었는데, 증언하는 도중에 이 증언 때문에 뫼르소가 불리해지는 것을 깨닫고 운다.

또한 뫼르소가 아랍인을 살해한 이유를 설명해야 했을 때, 그 스스로가 상황의 모든 맥락을 생략하고는 '햇빛이 눈부셔서 그랬다'는 말만 하는 바람에 배심원들이 뫼르소를 별 것 아닌 일로 사람을 죽이는 사이코로 오해한 것도, 재판이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데에 큰 영향을 끼쳤다. 무난하게 풀려나거나 가벼운 형벌을 받게 될 것으로 예상되었던 뫼르소는 어머니의 장례 건과 불충분한 자기 변호로 인해 계획 살해범과 무자비한 인간으로 부풀려지며 사형 선고를 받게 된다.

종국에는 신부가 찾아와 그에게 죄를 털어놓을 것을 권하지만, 뫼르소는 신부의 허위적인 면을 꾸짖고 자신의 죽음이야말로 진실되고, 그것이 자신의 삶을 증명한다며 거부한다. 자신이 가장 바라는 것은 처형되는 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증오를 퍼붓는 것이라며 작품은 끝을 맺는다.

2 해설과 이해

상식적인 설명이 불가능한 뫼르소의 행동은 삶의 부조리를 의미하며, 이 부조리의 인식이야말로 참된 인간의 기본조건이라고 카뮈는 역설하고 있다. 뫼르소는 여러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고, 어머니의 죽음이나 애인과의 사랑에서도 별다른 의식을 못하고, 죽기 직전에서야 의식이 깨어나고 행복을 느낀다는 것이 이 작품의 아이러니이자, 백미, 그리고 비극적인 면모다. 마지막 장면을 통해, 뫼르소는 인간의 기본적 깨달음을 성취한다.

민음사의 뒤표지에는 '진실을 위해서는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순교자 뫼르소'라고 명시했다. 진실을 위해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은 뫼르소의 성격에서 우러나는 것인데, 예컨대 뫼르소는 아랍인을 쏜 게 뜨거운 태양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뫼르소의 변호사는 뫼르소의 감형을 위해 최대한 말이 되게끔 맞출 것을 제안했으나 뫼르소는 "아뇨,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라며 거짓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뿐만이 아니라 뫼르소는 작중의 어떤 사건이나 서술에서도 거짓을 거부하는 정의를 따르고, 작중 모든 일반인의 시점에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그 특유의 고집 아닌 고집을 부리기에 결국 사형을 언도받게 된다.

뫼르소는 세상 일에 별 관심도 없다. 예를 들어, 직장 상사가 새로 생기는 파리 지점에 보내 준다고 하니깐 기뻐하기는커녕 그냥 거절한다... 딱히 갈 이유가 없어서. 심지어 어머니의 죽음마저도 대수롭잖게 여긴다. 이러한 뫼르소의 무감수성은 현대인의 모습을 잘 반영한 실존주의 문학의 면모라고 볼 수 있겠다.[6]

사실 이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만약에 유학생이고 문학수업을 이 작품으로 나간다면 건투를 빈다... 어느 작품이 안 그렇겠냐마는 문학을 전공한 사람들도 카뮈의 작품이나 철학을 해석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고백한다.[7] 작품 내에 수많은 상징적 장치가 있고, 부조리에 대한 깊이 있는 철학적 통찰이 깔려 있기에, 일반인이 이를 그대로 읽으면 주인공이 '부모의 죽음에 슬퍼하지도 않고 사람을 죽인 후레자식' 이상으로 보이지가 않는다.

그렇기에 이 책을 읽기 전에 카뮈의 철학에 대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고 여러 전문가의 서평을 참고하여 책을 해석하는 것이 좋다. 이방인을 이해하기에 가장 적합한 책은 저자의 철학 에세이인 「시지프 신화」이며 이 두 권을 같이 읽는 것이 「이방인」을 이해하기에도, 카뮈 철학을 알기에도 좋다. 물론 이 에세이 역시 만만하지는 않다. 심도 있게 읽으려면 균형 잡힌 서평 혹은 해설서와 함께 며칠 붙잡고 읽거나 아예 문학을 전공한 사람에게 설명을 부탁하자. 원한다면 「시지프 신화」와 「이방인」을 엮어서 설명해 줄 것이다.

3 영향

이 장편 하나로 카뮈는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 중 한 사람이 되었으며, 20대라는 나이에서부터 노벨 문학상 후보에 거론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결국 1957년, 44살이라는 무지 젊은 나이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된다.[8]

또한 이 작품은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로서 판매량도 엄청나다. 현재까지 100가지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전세계 판매량이 수천만 부에 달한다. 프랑스 내에서 700만부, 일본에서 400만부가 팔렸다고 한다.

4 기타

주인공의 이름 '뫼르소'가 '살인(meurtre)'과 '태양(soleil)'을 의미하는 단어의 앞부분을 따 조합되었다.

또 번역본으로는 잘 알 수 없지만, 이 소설은 문어체(단순과거)가 아니라 구어체(복합과거)로 쓰여진 소설이다. 그래서 그 당시 이와 같은 표현 자체만으로도 큰 충격이었다고 한다. 프랑스어에서는 현재와 관련 없는 과거를 표현할 때에는 단순과거를, 현재와 관련 있는 과거를 표현할 때에는 복합과거를 사용한다. 회화에서는 단순과거를 사용하지 않고 복합과거만 사용한다. 결국 거칠게 말하자면 단순과거는 문어체, 복합과거는 회화체에 사용된다고 보면 된다. 해서 일반적인 소설은 현재와 관련이 없기 때문에 단순과거를 사용하며, 이것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용법이다. 그런데 다른 곳도 아닌 소설에서 복합과거를 사용했다는 것은 소설의 내용이 현실과 관련이 있다는 의미가 된다. 카뮈 역시 다른 소설인 『페스트』에서는 문어체를 사용했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대차게 깐 소설이기도 하다. 이유는 인종차별적 내용. 진짜로 인종차별적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는 중이다.

당연하지만 알제리에서는 무시당한다. 알제리인이 같잖게 나오는 점도 있지만 카뮈가 알제리 전쟁 당시 알제리인에게 탄압을 하지 말고 자치권을 주자고 주장했지만 결국 알제리 독립에는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힌 바람에 당하는 취급을 생각하면 이럴 만하다. 그래서인지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 조선에 살던 일본인이 주인공으로 나와 조선인을 쏴죽였다는 내용'으로 바꿔서 비교한 평도 있다. 기사

별에서 온 그대의 모티프라 카더라.

5 「이방인」 번역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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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5.1 사건의 흐름

5.1.1 발단

2013년에 즈음해서 새움출판사 블로그에서 '이정서'(필명)라는 사람이 "김화영의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다"라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기존 〈이방인〉의 번역을 비판하는 글을 연재했다. 이후 2014년 5월에는 새움출판사에서 정식으로 새로운 「이방인」 번역본을 출간했다.[10] 김화영 교수는 알베르 카뮈 전집을 번역했으며 현재 대한민국에서 카뮈 번역으로 가장 권위 있는 불문학 교수이다. 이정서는 '김화영의 권위에 눌려 기존의 독자들이 「이방인」을 읽을 때 작품이 난해하고 재미가 없어도 번역본의 탓이 아닌 자신의 탓으로 잘못 생각했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김화영의 번역본이 내용적으로도 심각한 오역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출처 연합뉴스 기사)

가령 '뫼르소가 태양빛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라는 기존 번역에 대해서는 "소설의 개연성을 무시한 오역"이라며 비판하고 있다.[11] 이정서는 이 부분을 "(상대방이 들고 있는 칼에 비친) 햇빛을 보고 죽였다"로 해석하며 '뫼르소의 정당방위로 인한 살인'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칼을 들고 있는데 정당방위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얘기(…).

또한 김화영 교수의 오역이 레몽을 죄 없는 여자나 두들겨 패는 희대의 악한으로 만들었다며, 원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기존의 번역에서는 '레몽의 정부(情婦)와 남매 관계에 있는 사람'으로 묘사된 남자 아랍인이, 실은 '레몽 정부의 기둥서방'이라고 주장하며, 그런 상황에서 레몽이 스스로의 정부를 때린 것도 지극히 자연스럽다고 해석한다. 양다리를 걸치는데 누가 안 때리겠느냐는 것. 이건 이것대로 인성이… 그리고 그 근거로 든 게, 원문에서 해당 남자는 'Arabe(아랍)'으로, 레몽의 정부는 'Mauresque(모레스크)'로 표기되었다는 것이다. 이정서는 이 두 단어를 각각 '아랍인'과 '무어인'으로 해석하고는, "인종이 다른데 어떻게 남매라 할 수 있느냐"라고 주장하였다.[12]

종합하면 프랑스인들은 잘만 이해하고 있는, 재미있고 개연성 있는 소설임에도, 우리나라 사람들만 김화영의 오역 때문에 잘못 이해하여 막연히 철학적인 이야기로 느끼고 어려워했다는 게 이정서가 새 번역본을 내놓으며 내건 주장이었다.

5.1.2 전개

포문은 도발적으로 거창하게 열었고, 관심을 어느 정도 모으는 데에도 성공했다. 그러나 (다른 곳도 아니고 진보 언론으로 평가받는) 한겨레신문에서 이정서의 새로운 번역본을 의문스럽게 바라보는 기사를 내보냈다. 여기에 이어 경향신문과 소설가 장정일새 번역본이 주장하는 것만큼 이전 번역이 잘못으로 점철된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근데 장정일 삼국지 보면 딱히 남 말 할 처지는 아닌데..

번역 자체에 대한 일반 독자들의 평에는, 읽기 편한 문체라는 평, 이전 번역에 비해서 과도하게 해석한 무리수라는 평, 김화영 번역을 비난하면서도 단어 선택 등에 있어서는 오히려 김화영 번역을 참고한 흔적이 있다는 평, 읽기는 편해졌을지언정 독자의 문학적 상상을 막아버렸다는(=문학적인 맛이 덜하다는) 평, 바로 잡은 해석이라고 제기하는 대목들이 이전 번역들과 크게 다를 것도 없다는 평 등 여러가지가 있었다.[13] 문제는 그의 태도였다. 본인은 "학계 권력적인 면을 배제하고, 쓰여진 글만 놓고 판단해 달라"라며 번역 논쟁을 하고 싶다고 부르짖었지만,[14] 정작 홈페이지에서 번역 논쟁이 시작되자 잦은 글 수정과 불리한 댓글 삭제, 한 얘기 또 하고 또 하기 등의 스킬 등을 시전함으로써 정상적인 논쟁이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5.1.3 위기

이 와중에 번역자 이정서가 그 논란의 「이방인」을 출판한 새움출판사의 대표인 '이대식'이라는 주장이 나왔고,[15] 이정서는 다른 글을 통해 이 사실을 인정하는 동시에, '이미 (이정서가 이대식이라는 게) 알음알음 알려진 것 같기에 굳이 밝히지 않았다'고 해명했다.[16] 이정서/이대식은, "서울대 김윤식 교수의 저서 중 일부분은 가라타니 고진이 쓴 『근대문학의 종언』의 표절"이라며 문제를 제기했다가 교수 사회에서 반쯤 매장되었던 경희대학교 이명원 교수를 다룬 소설 『당신들의 감동은 위험하다』를 쓰기도 했다.[17] 이정서/이대식은 이번에 자신이 엮인 번역 논쟁 역시, 김윤식 대 이명원 논쟁과 마찬가지로 '25년 문단 권력의 바른 소리 죽이기', 혹은 '문학 권력(수구 세력)에 고용된 알바들의 공격'으로 받아들이려는 경향이 다분했다. 그런데 이명원은 옳은 말 한 게 맞지만 이정서는 아니잖아

이어 로쟈(이현우)가 이정서가 영어판을 중역했다고 주장하여 다시 논란이 되었다. 이에 이정서는 "자신은 불어 전공자가 아니다"라며, "비록 프랑스어 회화는 못하지만 읽을 줄은 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다들 나를 신기하게 생각한다"고 블로그에 해명(?)했다. 개 풀 뜯어먹는 소리가 더 신빙성있게 들린다. 외국어를 배우는데 독해만 하는 것도 아니고 기자가 전화 걸어서 프랑스어 통역가와 연결시켜 줄까 봐 미리 밑밥 깐 듯 "사전 잘 찾는 법만은 자신 있게 가르쳐 줄 수 있다"는 드립은 덤.[18]

아무튼 이처럼 화제가 되고 논쟁이 벌어지는 가운데, 새 번역은 대형 서점에서 눈에 띄는 곳에 전시되고 베스트셀러 순위권에 들었다. 실제 의도를 떠나서, 도발적인 카피를 내세우고 번역 논란을 일으켰던 게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이었다면 대성공이었던 셈.

논쟁 중에 번역자 이정서는 절대번역론을 주장함으로써 트위터에 상주중인 일선 번역가들에게 폭풍처럼 까였다. '번역에는 원작자의 의도보다도 중요한 것이 있다'는 말도 나오는 마당인데, 이정서의 주장처럼 '외국어를 무오하게 옮길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에러라는 것. 역자 본인은 스스로에게 카뮈가 접신(…)하였기에 세계의 그 어느 번역본보다도 카뮈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가 있다고 주장했는데, 각자 알아서 판단해 보자.

5.1.4 절정

이처럼 많은 지적이 빗발치자 이정서는 갈리마르 출판사[19]에 전화 한 통 걸어서 자신이 주장하는 독창적인 해석과 그에 기반한 번역[20]이 맞느냐고 물어보면 맞지. 문학 선생한테 맞지. 이렇게 해석하는 경우는 못 봤다 모든 궁금증이 다 풀릴 거라고 주장했다. 만약 자신의 해석과 번역이 틀렸다면 "책 전부를 수거해서 폐기처분 할 것"이며, "더불어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새움출판사 대표직에서 물러날 것이며 독자들 앞에 무릎을 꿇고 '혹세무민'했다고 석고대죄할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했다.「이방인」 논쟁 본문 이게 회사 블로그여 사장 싸이월드

그러다가 '고마해라'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 한 댓글러가 위 문제에 관해 프랑스 카뮈 연구회(SEC;Société des Études camusiennes)에 정말 문의하였다.[21] 오히려 출판사인 갈리마르보다 훨씬 권위 있는, 공식적인 학회에 문의한 것. 더욱이 프랑스 카뮈 연구회 회장 아녜스 스피켈(Agnès Spiquel)은 갈리마르에서 발간하는 플레이아드 전집의 카뮈편 편집에도 참여한 사람이다.[22] 그 결과 SEC의 페이스북 페이지 관리자인 조반니 가에타니(Giovanni Gaetani)로부터 "그러한 번역은 매우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이를 시정하기 위하여 공개적으로 무슨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라는 답변을 받았다.(...)

그러나 새움출판사 블로그 관리자는 "뭘 어떻게 물어봤다는 거죠? 본인이 방구석에서 할 일 없이 놀고 있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것 같은데, 그런 사람이 뭘 어떻게 물어봤는지 모르겠지만"이라며 비꼬기로 대응했으며, 이에 논쟁에 참여하여 문제 제기를 해오던 'indifference'라는 다른 유저가, 논란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SEC의 페이스북 계정으로 보낼 스스로의 문의 내용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공개하였으며, 이 문의를 받은 SEC 페이지 관리자는 "저에게 그러한 끔찍한 번역(cette terrible traduction)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 한국인 독자가 귀하가 처음이 아니라는 점[23]을 알려드립니다."라는 답장을 보냈다.(…)

상황이 이런 식으로 불리하게 전개되고, 번역 논쟁에 있어서도 시종일관 예의를 지킨 'indifference'에게 이정서가 떡실신을 당하자 새움출판사 대표 이대식, 즉 역자 이정서는 창피했는지 이전에 썼던 관련 댓글들을 모두 삭제하고는 독자들에게 '바퀴벌레'라며 욕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미 누군가가, 자신이 지운 댓글들을 알라딘 블로그에 박제해 둔 상태였다. 이방인 사라진 댓글들 결국 번역계에 지울 수 없는 희대의 촌극을 남긴 셈.

5.1.5 결말

이전의 댓글을 모두 삭제한 후, "이제 앞으로 「이방인」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라는 댓글을 직원을 시켜 올리게 하였으나, 불과 하루가 다 지나기도 전에, 가만 있는 김화영 교수를 다시금 물어뜯는 글을 올려 사람들의 어처구니를 안드로메다로 보냈다.

여기에 이어, MBC뉴스의 한토막으로 이 번역 논쟁이 다뤄지는 과정에서, 김욱동 교수와 한국출판물마케팅 연구소의 한기호 소장이 '김화영 교수 번역본에 크게 문제가 없다'라고 이야기한 사실, '번역 논쟁이 노이즈 마케팅 차원에서 이용된 것'이라고 인터뷰한 사실에 대해서도 시비를 걸었다.[24]

이 외에도 자기 번역과 관련한 논쟁이 일어나는 곳은 출판사 직원들을 시켜 귀신같이 찾아내고선 거기에 사뭇 공격적이고도 감정적인 옹호 댓글을 쓰(게 하)며 여론전을 펴기에 바쁘다.[25] 여론몰이 할 시간에 불어 공부나 좀;;

일이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도 댓글을 통해 지적된 자신의 오역에 대한 해명은 일언반구도 없는 상황이며, 덧글도 막아버린 상태.이대식 네이버 블로그

한편 'indifference'는 SEC 학회장인 아녜스 스피켈로부터도 직접 답변을 받았고 이를 공개하였다. 아녜스 스피켈은 기둥서방설에 대해서는 "그 아랍인이 곧 레몽의 정부(모레스크, 곧 아랍 여인)와 남매 사이"라고 남매설을 재확인함으로써 간단히 일축하였으며(…), 정당방위설에 대해서는 "(아무리 좋게 보아도) 그것은 뫼르소와 아랍인을 동시에 지켜본 제3자의 시각일 수밖에 없으며, 카뮈가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한 뫼르소 1인칭의 시점에서는 태양 때문에 살인을 저지른 것이 맞다"라고 답변하였다. 전문은 여기 참고. 학회 페이지 관리자가 아닌 학회장의 답변이므로 확인사살이 이루어진 셈.

그러나 번역자 이정서는 듣보잡(…) 단체에 문의 메일을 보내는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비난하고, 다시금 김화영 교수만을 붙들고 늘어지고 있는 상황이며, 동시에 '뫼르소의 살인이 정당방위였느냐 아니냐'라는 문제는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해석'의 문제라며 교묘한 말돌리기로 면피를 자행하고 있는 상태. 애초에 '오역'이 '틀린 해석'을 자아냈다고 한 게 누구인지 생각해 보면 적반하장도 이런 적반하장이 없다. 그의 입장에 따르면 번역과 해석은 불가분의 관계가 되는데도, 정작 스스로가 불리해지니 번역과 해석은 별개의 문제라며 셀프 꼬리 자르기(…)를 시도하고 있는 것.

재미있는 것은 항상 권위에 눌리지 말라고 역설하면서, 김화영 교수나 로쟈 등, 이름이 알려진 상대로는 열심히 답변글을 썼으면서도, 직접 문의를 시도한 'indifference'에 대해서는 "이분, 한창 공부중인 불문학도생이 분명해 보입니다. 배우는 학생이라면 벌써부터 허명을 쫓기보다는 좀 더 진지한 자세로 학문에 임해 주길 선배로서 부탁드립니다."라고 언급하며 꼰대질을 시전했다는 것. 권위를 내려놓자면서 자신은 권위에 의거한 대응 태도를 보인 셈이다. 거기다 불어 실력도 안 되면서 자기 자신만의 독자연구스러운 해석을 끼얹은 번역본을 내서 허명을 좇은 게 애초에 누구인지 생각한다면…….

번역서 출간 후 시간이 지난 시점에서도 대응은 별 차이가 없었고, 출판사는 결국 제기된 의문들에 대해 끝까지 답을 하지 않았다. 번역자 역시 별다른 답변을 않았고 이미 답변한 질문이라고만 되받고 있다. 그리고는 네이버 블로그에 '소설'의 형식을 빌어 번역 과정과 논란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게 정말 소설로서의 완성도를 갖고 있는지의 문제는 차치하고서도) 공식적인 답변은 않으면서 창작물이라는 방패로만 자기 변명을 하려는 태도가, 지금까지 번역 문제를 제기한 이들의 어이를 쏙 빼놓았다.

특히 소설 연재 초기에는 프랑스어를 거의 모른다고 시인하는, 'je(나)'와 'il(그)'마저 착각하는 주인공(사장) '이윤'이[26] 그 어떠한 개연성도 없이 갑자기 프랑스어 뉘앙스까지 꿰뚫어보며 김화영 번역을 비판할 수 있는 수준의 번역가로 성장하게 되는 건 그냥 코미디. 무협지도 아니고 소설의 개연성을 중시한다는 본인의 평소 문학관(?)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차라리 무협지는 주인공이 어디서 무공비급을 찾거나 영물을 잡아먹기라도 하지

그뿐이 아니다. 프랑스어에서 'adieu'는 이태리어와 달리 완전한 이별 인사로 사용되는데,[27] 그의 소설에서는 카뮈가 유창한 한국어(…)로 '이윤'에게 "하하. 아니, 나도 모르게 유쾌해져서 한 마디라도 더 나누고 싶어서 덧붙였어요. 이제 정말 Adieu!"라며 편지를 끝마친다. 말하지는 못해도 읽을 수는 있는 불어면 이래도 되는 건가...

5.1.6 후일담

2015년 6월 1일, 경향신문 전면 광고란에 중대한(?) 오역이 있었다는 내용의 유별난 광고를 실었다. 실은 개정판 광고였다(...) 오역이었다고 스스로 밝힌 것도 레몽의 대사 한 줄뿐. 자신의 정부에게 레몽이 하는 말이다. "넌 날 농락했어, 날 농락했다고, 나를 농락했다는 걸 깨닫게 해 주지."라는 자신의 번역을 "당신이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다구. 나를 그리워하도록 만들어 줄 테다."로 수정했다. 이정서는 레몽이 의리 있고, 정부를 진정 사랑한 남자라고 줄곧 주장해 왔다. 레몽은 저렇게 말한 뒤에 정부를 마구 때려 경찰까지 출동했는데 말이다(...) 이정서의 번역에 따르면 레몽은 얀데레인 것이 확실하다.

이 와중에 신경숙 표절 논란이 터지자 또다시 예의 그 출판 권력 문제를 운운하며 숟가락 얹기를 시전하고 있다. 불씨 살리기 그러나 신경숙의 표절, 출판사·문학지와의 유착 논란과는 별개로, 이정서의 번역은 그냥 못한 번역이다. 애초에 독자는 출판사 따져서 읽는 게 아니다. 이정서 본인만 자신이 소수이고 약자라서 핍박받고 있다고 여길 뿐이다. 더구나 그의 공격적이고 도발적인 마케팅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이미 그의 책은 충분히 일반 독자들에게 소개되었다. 그런데도 별다른 호응이 없다는 건 그냥 못한 번역이라는 얘기다. 출판 권력이니 하는 문제로 스스로의 번역이 저평가되는 게 아니다. 번역만 제대로 했다면 누가 뭐라고 하랴. 더구나 다른 좋은 번역도 많은 판국에 굳이 값도 더 비싼 이정서의 역본을 보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28][29]

그리고 2015년 12월 이정서와 새움출판사는 페이스북과 블로그에서 이제 어린왕자를 가지고 "우리가 만난 어린왕자는 진짜 '어린왕자'였을까?" 하면서 또 오역 비판을 하고 새 번역을 낸다고 나섰다. 물론 이번에도 탈탈 털리는 중이다. 페이스북포스트

5.2 정리

이정서는 자신이 느낀 '진짜(?)' 「이방인」을 알리려는 마음이 그만큼 절박했기에 마케팅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무리수를 두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문단 권력에 저항하고, 기존의 성과를 성역으로 여기지 않으며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는 건 문학과 번역, 독자를 위해서 정말 좋은 일이다. 그러나 이는 스스로가 내세우는 결과물이 제대로 된 물건이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마케팅 과정에서의 각종 잡음과 불화, 이런저런 진영 논리는 차치하고서라도 우선 이정서의 번역 결과물 그 자체부터 문제가 많다. 그 자신도 인정하였듯, 애초에 그는 불어 전공자가 아니다. 물론 해당 언어 비전공자가 중역 등을 통해서 훌륭한 번역물을 내놓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그가 처음에 그토록 도발적이고도 기세 좋게 기존의 번역판들에 대해 반기를 들었던 게 무색하게도, 그의 번역은 차라리 초라할 지경.[30] 결국 거창한 포부와는 달리, 그저 그런 빈약한 번역본 하나를 더 추가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 세계 최고 수준의 프랑스 카뮈 연구회도 그의 해석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냥 기존의 번역판들보다 훨씬 심각한 오역을 하고 만 셈.[31][32]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핍박받고 있는, 선량하고 양심적인 약자' 프레임에 갇혀(or 프레임을 만들어) 스스로의 억지 주장을 강변하고 있다. '김윤식의 표절을 용기 있게 지적한 이명원'과 '김화영의 오역을 용기 있게 지적한 자기 자신 이정서(이대식)'를 동일선상에 놓고 싶은 모양이지만, 전자는 바른 말을 했으나 후자는 시답잖은(…) 결과물을 내놓았다는 차이를 간과하고 있다.[33] 물론 (몇 번이나 언급했지만) 애초에 김화영의 번역에 '오역'이라는 낙인을 찍기도 어렵다는 게 (진보적 인사들의 평을 포함한) 중론.

그가 '기둥서방설, 정당방위설' 등을 밀었던 걸 보면, '말이 되는, 개연성이 있는 소설'에 집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화영의 난해한 번역과 오역이 참된(?) 「이방인」 이해를 가로막고 있다고 주장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심오하고 철학적인 우화로서의 카뮈 문학을 통속적인 삼류 치정물(…)로 바꿔 놓고야 말았다. 이정서의 이해가 맞다면, 카뮈가 이 작품을 통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게 도리어 신기해질 지경. 당신이 이해 안 간다고 해서 말이 안 되는 게 아니에요[34][35] 그럼에도 끝까지 "나만이 카뮈의 「이방인」을 온전히 이해했다"며 절대번역론을 내세우는가 하면, 그 근거라고 내세우는 게 카뮈와의 접신(…) 정도이니 말 다 한 셈. 그가 카뮈의 다른 작품이나, 그 문학 세계를 다룬 논문 한 편이라도 읽어봤을지 의심스럽다.

이 해프닝에 대한 총평은 이 링크를 참고하자. 위 논쟁에 참여하지 않고 지켜보며 팝콘만 먹은 제3자가 정리한 글이다.[36]

한편 「이방인」의 각종 역본을 연구한 논문도 나왔는데, 이정서의 역본 역시 다루고 있다. 서울대학교 불어교육과 김진하 교수가 쓴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한국어 번역본들에 대한 문체론적 고찰」.[37] 이정서의 「이방인」이해와 번역에 대해 이 논문에서 내린 총평은

요컨대, 소설 작품에 대한 몰이해는 새로운 소설쓰기가 되어 버림을 이정서의 독법은 보여주고 있다.

이다. 호평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평가다.

사실 저 정도는 그나마 점잖은 표현이고, 논문 본문에서는

이정서의 번역에서는 작은 부분에서도 단어나 문법에 대한 오해나 문체상의 부적절함이 쉽게 발견된다.
더욱이 이정서는 비단 김화영의 번역뿐만 아니라 이기언과 김예령의 번역본도 더불어 비판했는데, 그가 내세운 번역의 실상을 보면, 이들 번역본들의 비교를 통해서 새로운 번역을 조합해냈다는 인상을 주는 대목들이 많다.
이정서의 『이방인』 번역에서 드러나는 많은 오류들은 대개가 그 자신이 내세운 원칙에 위배되는 것들이다. 그리고 어쩌다 독자적인 번역을 시도하는 대목에서는 일반 독자뿐만 아니라 프랑스어 수업에서 『이방인』을 강독할 때 번역의 예로 참고하기에 민망한 어법들이 나온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이정서의 『이방인』 번역에서뿐만 아니라 기존 번역들에 대한 비판을 통해 드러낸 독단과 자기현시욕, 그리고 작품에 대한 몰이해가 대중과 프랑스어 학습자들을 호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정서는 작품에 대한 과도한 애정으로 말미암아 작품을 자기 나름으로 재구성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데, 그런 시각이 작품을 얼마나 자기만의 견해로 오해하게 만드는지는 (후략)
(이정서의) 이 부분의 오독과 억지 해석에 대해서는 차마 언급하기 민망하다.

…와 같이 아주 가루가 되도록(…) 까고 있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이방인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div></div>

  1. 이렇게 소설 첫 문장이 유명한(?) 다른 작품으로는 안나 카레니나, 오만과 편견, 롤리타, 두 도시 이야기등이 있다.
  2. 물론 이 주인공을 단순한 불효 패드립 자식이라고 이해하면 안 될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작품 주제 형상화를 위한, 작가의 의도된 설정이다.
  3. 이 '남자 형제'가 오빠인지 남동생인지는 프랑스어의 특성상 밝혀지지 않는다. 오빠라는 번역은 엄밀히 말하면 오역. 나이를 설명하는 문맥 없이 '그 여자의 brother'라는 말만 던져 놓으면 이게 오빠인지 남동생인지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말의 친족 구분어가 불어나 영어보다 훨씬 세분화된 것.
  4. 뫼르소는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았고 또 필요를 못 느끼겠다고 시크한 태도를 보였지만 예심판사 쪽에서 법은 법이라고 선임해 줬다.
  5. 이 사람을 심문하던 예심판사는 이 사람을 종교적으로(물론 기독교) 감화시키려고 하지만 뫼르소가 무신론자인 것을 알게 된 데다가 뫼르소 역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자 포기하고 나중에는 그냥 가볍게 '적그리스도씨'(…)라고 부른다.
  6. 그런데 정작 카뮈 본인은 스스로를 실존주의자가 아니라고 여겼다. 실존주의가 본질에 선행하는 실존(사르트르)을 강조했던 반면, 카뮈는 스스로의 의지로 어쩔 수 없는 존재 자체의 부조리함에 맞서는 인간의 자세를 탐구했기 때문.
  7. 하지만 문장 자체는 간결하고 구어체로 쓰인 덕분에 어렵지 않은 편이다. 그리고 워낙 분석이 많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까다롭진 않다.
  8. 역대 2번째의 연소 수상자였다. 최연소 수상자는 41세로 수상한 정글북러디어드 키플링.
  9. 고구려(소설)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그야말로 유유상종.
  10. 블로그에 있던 연재분은 스스로의 번역본과 그 번역본에 실린 '역자노트'에 다 반영되었다고 본 것인지 삭제된 상태다.
  11. 일단 글만 놓고 보면 소설 속에서 뫼르소가 "태양빛 때문에 쏘았다"고 재판에서 증언한 것은 사실이다. 국선변호사와 뫼르소가 이 증언을 그대로 밀고 갈 것인가 말이 되게끔 바꿀 것인가를 놓고 다투기도 한다.
  12. 그러나 (추후의 논쟁 과정에서 밝혀진 것이지만) 당대 언어 풍습을 설명하는 수많은 외부 증거, 그리고 소설 내적 정황에 따르면 'Mauresque'는 그냥 '아랍인'의 여성형 표현이다. 인종이 다른 게 아니다. 무엇보다도 카뮈 스스로가 노트에 작품 스케치 정도로 간략하게 썼을 때는 'Une Arabe'이라고 해 두었던 것을 작품 본문 최종 탈고 과정에서 'une Mauresque'로 옮겨 썼던 사실이 확인된다. 동일한 대상이었다는 얘기다. 더 자세한 논증은 여기여기 참고.
  13. 후술하겠지만 아주 빈약한 번역임이 드러났다.
  14. 애초에 필명을 쓴 것 역시 선입견을 배제하고 읽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그랬다고. 그런데 그 번역 자체만 놓고 봐도 그닥이니 문제다.
  15. 한림대 연구교수이자 인터넷 서평가인 로쟈(이현우)가 제기했다. 한겨레 기사 참고
  16. 필명을 쓴 게 잘못이 되지는 않는다. 후술하겠지만 그냥 번역 자체에 문제가 많았다.
  17. 애초에 둘은 서울시립대학교 선후배 사이이다. 이정서가 84학번, 이명원이 90학번.
  18. 불어 'sac(자루, 가방, 핸드백)'을 '지갑'으로 옮긴 걸 보면 영어판을 참고한 게 맞는 것 같다. Matthew Ward의 영어판에 해당 표현이 'purse'로 되어 있기 때문. 그러나 'purse'는 미국식 영어 용법으로는 마찬가지로 '핸드백'이며, Matthew Ward는 미국인이다(…). 영국인 Stuart Gilbert는 'sac'을 'bag'으로 옮겼다는 점에서 상황 끝. 결국 카뮈가 쓴 본래 불어 단어('sac')는 물론이고 미국식 영어 표현('purse')이든 영국식 영어 표현('bag')이든 지시 대상은 그냥 '핸드백'임이 명백한데도 이정서가 착각한 것. 이정서는 한불사전이 아니라 영어사전도 제대로 못 찾아서 미국식 표현을 영국식 의미로 옮겼나 보다. 사전 잘 찾는다며? 출처
  19. 프랑스에서 카뮈의 「이방인」을 펴낸 출판사.
  20. 위에서 언급했던 뫼르소의 정당방위설과 레몽 정부의 기둥서방설.
  21. 이 과정에서 이정서는 '고마해라'가 문학동네판「이방인」 역자인 '이기언'이라는 무리한 주장을 펴는 추태를 보였다. 이기언이 선학 김화영의 기존 오역(?)에 영향받아 덩달아 오역을 한 게 부끄러워서 괜히 자신을 공격한다는 논지였다. 물론 사실이 아니었다.(...)
  22. 문학에서 플레이아드 전집의 권위는 세계 최고다.
  23. 먼저 이루어진 '고마해라'의 문의를 의미한다.
  24. 김욱동 교수는 서강대 명예교수이자 영문학 전공자. 다수의 영문학 작품 번역을 했음은 물론, 국내에 포스트모더니즘 사조를 널리 알린 것으로 유명하다. 번역과 오역 문제 자체에 대한 저서도 여러 권 냈다.
  25. 82쿡의 관련 게시물에 이르기까지 그의 직원(혹은 그 자신)의 마수(...)가 뻗쳤음이 포착되었다. 물론 가루가 되도록 까였으며, 원 댓글들은 지워진 상태. 그러나 이미 다른 회원들에 의해 박제되었다.
  26. 물론 스스로를 빗댄 인물이다. 실제로 놀랍게도 이정서는 'je'와 'il'을 착각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뭔가 소설 형식을 빌려서 핑계를 대고 싶었던 것 같은데, 이 소설은 이정서의 이방인 번역본 출간 이후에 씌어지기 시작했다. je와 il, 그러니까 번역본 출간 이후에도 I와 he를 착각하는 수준의 프랑스어 실력이었다는 것이다.
  27. 일본어 '사요나라'와 비슷하다. 가벼운 작별 인사가 아니다.
  28. 취소선 드립을 쳐 두긴 했지만, 실제로 그의 역본은 '역자노트'까지 들어가 있어서 꽤 두껍고 비싸다. 문제는 이 역자노트야말로 지금까지 살펴본 그의 억지 주장의 총본산이라는 점.
  29. 이정서는 기존의 번역들이 김화영을 감히 거스르지 못해 오류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주장을 하며, 그 역본들은 '비교할 가치조차 없는 엉터리'라는 폭언까지 일삼았다. '강단사학' 운운하며, 두계 마왕 못 잡아먹어 안달인 환빠가 떠오른다 그러나 각 역본의 번역자들은 모두 학술적으로 진지하게 번역하였으며, 그 역본들 중에는 당연히 김화영 교수본과 다른 번역도 많다. 그렇다고 그들이 "지금까지의 번역은 모두 가짜" 운운하며 누구처럼 도발적으로 나왔던 것도 아니다.
  30. 불어의 문법이나 시제, 관용적 표현에 익숙지 않아 이를 제대로 옮기지 못했음은 물론, 간단한 접속사도 몰라 이를 번역에 반영하지 않았으며, 외국어를 배울 때 제일 처음 배우는 인칭대명사마저 헷갈려한다. '세계의 무관심'이라는, 「이방인」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 의식을 담고 있는 문장조차 제대로 옮기지 못했다. '평영'과 '배영'을 '발차기를 했다'와 '몸을 뉘었다'(…)로 옮긴 건 차라리 애교.
  31. 문학이 제아무리 해석의 자유를 지닌다지만,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내적 논리와 정합성이 요구된다. 그러나 이정서는 기초적인 원문 해독조차 못 하는 수준. 애초에 참신한 해석을 해내는 게 무리다. 거기다 자신의 그 정상적인(?) 해석에 대한 근거를 대 보라고 하면 "내 느낌이 그렇다", "내가 읽으니 그렇더라", "당연히 이게 자연스럽지 않느냐", "카뮈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류의 허약한 근거만을 내세운다는 게 문제.
  32. 사실 그의 역본 자체가 매 쇄마다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고 한다. 그냥 불어 번역을 못 하니 계속 찔끔찔끔 수정하고 있는 것.
  33. 이하는 정황 근거이지만, 김윤식의 표절을 지적한 이명원을 다룬 소설 『당신들의 감동은 위험하다』는 2001년에 이미 출간된 책임에도, 이정서가 자신의 「이방인」을 출간하는 시점에서 이 책 역시 굳이 은근슬쩍 재출간시킨 점 역시 의심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결국 '부당한 권위에 저항하는 양식 있는 약자' 프레임을 성립시키기 위한 의도가 엿보인다는 것. 참고 이명원과 자신은 애초에 다른 경우라는 걸 이제는 깨칠 때도 됐는데 후배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나
  34. 해당 논쟁의 와중에, 정작 프랑스인들 역시 「이방인」의 줄거리를 기존에 한국인들이 이해했던 내용과 별반 다르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음이 밝혀졌다(프랑스 공영라디오 방송 France Culture의 <Le Gai Savoir> 2012년 10월 21일 방송분). "(김화영을 필두로 한) 오역이 본래 뜻을 가리고 이해를 망쳤다"라는 이정서의 주장이 무색해지는 지점.
  35. 파일:DAlbyAg.png 「이방인」에 대한 이정서의 명백히 잘못된 이해가 어떤 원인, 어떤 얼개에서 이루어졌는지를 잘 꼬집은 'indifference'의 댓글. 요컨대 이야기 구조와 전개에 있어서의 의도된 부조리함을 통해 오히려 주제의식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작품을 억지로 '조리 있게' 만들려 한다는 것이 이정서의 번역, 더 나아가 그의 「이방인」 이해의 문제점이다. 출처
  36. 사실 댓글 몇 마디 정도는 달았던 듯. 링크의 댓글창에 저 티스토리 주인장 분의 닉네임이 보인다. 다만 적극적으로 어느 한쪽의 의견을 개진하기보다는, 일단 한발 물러나서 사태를 지켜보다가 후에 위 총평과 같은 결론을 내린 듯하다.
  37. 한국학술지인용색인(KCI)의 해당 페이지에서 논문 전문 pdf를 볼 수 있다. 바쁜 사람은 논문 36페이지의 "Ⅴ. 번역본들의 특징 - 2. 이정서의 『이방인』 번역"부터 훑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