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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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존 인물

박어우동(朴於宇同, 1430년경(?) ~ 1480년 10월 18일)

조선시대 성종시기에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여인.

본명은 박어우동(朴於宇同)으로 왕실과 친척 집안태생이다. 조선시대 당시 금기에 가까운 간통 사건을 일으켰기에 가문에서 파문, 성을 뺀 어우동(於宇同)이란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일부 문헌엔 어을우동(於乙宇同)이란 이름으로 기록되기도 하는데, 乙자가 ㄹ받침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발음이 어ㄹ우동 그러니까 얼동에 가까운 발음이라고 추측하는 주장도 있다.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곱게 자란 뒤 왕손인 태강수 이동이란 자[1]와 혼인을 했는데 이동은 아내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동은 이혼을 할 속셈으로 아내 어우동이 집에 온 은장이와 바람이 났다고 모함했는데, 조사 결과 무고로 밝혀져서 어우동과 재결합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씹었다.[2]

황당하게 소박을 맞고 홀몸이 된 어우동은 수산수, 방산수를 비롯한 왕족들, 과거 급제자 홍찬 등 양반, 그 외에 양인과 노비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검열삭제 행각을 벌였다. 그런데 간통 대상 중 한 명이 간통 사실을 승정원에 신고, 이왕 이렇게 된 거 남자를 사귀라고 옆에 꼬드긴 여종과 함께 교수형을 당하였다.[3] 양반 집안 출신의 여성이 양인을 비롯한 노비, 십여명과 정을 통한 희대의 간통 사건이라 사회의 파문이 컸다고 전해진다.

현대엔 어째서인지 기생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는데, 어우동은 엄연히 양반 가문 출신이며 기생과는 상관이 없다. 어우동이란 존재를 세간에 널리 알린 방기환의 소설과 그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에서 어우동이 소박을 맞은 후 기생 생활을 한 걸로 나오는데, 소설과 영화의 유명세로 인해 이러한 인식이 굳어진 것.

어우동의 기록이 실록에까지 남겨졌던 것은 그녀와 정을 통한 남자들 중에 고관대작들과 그들의 자식들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왕족들까지, 더구나 서로 사촌 사이인 왕족들이 어우동과 관계를 맺은 게 드러나 왕실을 충공깽으로 몰았다. 지금으로 비유하자면 대통령의 친척들이 구멍동서 사이였단 말. 당시에는 거의 클린턴의 섹스 스캔들 수준의 대형 정치 스캔들 사건이었던 것이다. 2010년 말 발생했던 상하이 한국 영사 섹스 스캔들과도 사정이 비슷하다.

원래 이 사실을 알게 된 성종이나 조정에선 왕실 및 상류층의 체면 때문에 이 일을 덮으려고 했다. 하지만 도승지[4] 김계창이 격분하여 이런 사실을 덮으면 더 안 좋은 소문만 난다면서 강력하게 처벌을 건의했다.

이는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잘 나와있다.

성종 11년(1479년) 6월 13일, 의금부에서 전지하기를, "방산수 난이, 태강수 동이 버린 아내 박씨(어우동)를 간통하였으니, 국문하라." 하였다.

이틀 뒤인 6월 15일. 좌승지 김계창이 들어와 고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들으니 태강수 동의 아내 박씨(어우동)가 죄가 중한 것을 스스로 알고 도망하였다 하니, 끝까지 추포하라." 하였다. 김계창이 말하기를, "박씨가 처음에 은장이와 간통하여 남편의 버림을 받았고, 또 방산수와 간통하여 추한 소문이 일국에 들리었으며, 또 그 어미는 노복과 간통하여 남편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한 집안의 음풍이 이와 같으니 마탕히 끝까지 추포하여 법에 따라 처치해햐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가하다." 하였다.

왕도 별 수 없이 그들의 처분에 고심하다가 어우동은 귀양 보낸 뒤 1년 뒤인 1480년 10월 18일 사형에 처하며 마무리 되었다.

어우동은 번좌라는 이름의 을 하나 남겼는데, 이 딸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몰라서 더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이 딸에 대해서는 그 후 어찌되었는지 기록은 전해지는 게 없으나, 그 출신과 사건 파장을 생각하면 그리 좋은 여생을 보내진 못했을 것 같다.

연관된 고관대작들은 어우동의 사형 이후 재등용 되었다고 한다.왕명으로 재등용이 되었어도 사람들의 비웃음과 소문을 견디지 못해 그만둔 이들도 여러 있었다고 한다. 하긴 왕족에서 천민까지 골고루 구멍동서였으니, 어지간히 뻔뻔스러운 사람이 아니라면 타인의 시선이나 수근거림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지만 꽤 많이 정계에서 남아 출세한 이들이 많다. 이전 항목에서는 어유소가 병사들의 비웃음을 못 견디고 그만뒀다라고 기재되어있으나 틀렸다. 어유소는 되려 성종 12년(1481년) 이조판서, 지중추부사를 거쳐 평안도관찰사, 성종 19년(1488년)에는 판중추부사 겸 정2품 군무 최고직인 도총관에 이르렀을 정도로 되려 더 출세했다. 그러나, 1489년 갑자기 돌연사로 56세로 사망했다.

또한 후술하는 대로 정치적 타격이 있다고 해도 그렇다고 정계에서 이들이 줄줄이 물러난 게 아니다. 김세직(?~1490) 은 이후에 문,무관 고위직을 거쳐 형조참판이 되어 가선대부에 이르렀으며 정숙지(참고로 정도전의 증손이다.)는 아예 손자인 정원준이 성종의 딸인 정순옹주와 결혼하여 부마로서 봉성위에 봉해졌을 정도로 집안이 되려 더 출세했다. 이전 항목에서는 마치 어우동 일로 이들이 정계적으로 몰락했다는 듯이 서술되었으나 전혀 아니다.

다만 타격을 아예 받지 않은 건 아니다. 어우동이 죽은 지 4년 후에 이사준李師準이라는 사람이 정9품으로 승진하려는 찰나 어우동과 관련이 있으니 승진시키면 안 된다는 상소가 올라왔는데. 종9품이 최말단, 정9품은 그 바로 위니 이런 미관말직 승진에서는 철저했다(...). 하지만 상술하듯이 다른 고관대작들은 어우동이 사형되고 되려 더 출세했으니.

가끔 가다 성종과 관련이 있는 인물이란 이야기가 나오는데 어림 반 푼어치 없는 소리다. 수많은 궁녀 속에 사는 왕이 뭐가 아쉬워서? 성종이 유부녀 킬러도 아니고 야사 등에서는 미행을 많이 한 성종이 어우동을 만나 연애를 즐겼으나, 음탕한 여인과 밀애를 즐겼다는 사실이 발각될까 두려워 어우동을 잡아다 죽였다는 것이다. 이런 야사의 이야기는 SBS 대하사극 "왕과 나" 에서도 등장하며 어우동과 성종의 밀애를 조정 대신들이 문제삼자 어우동이 음녀의 누명을 자청하고 성종을 위해 죽었다는 식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성종이 어우동과 놀아났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런 루머가 당대에 퍼진 이유는 어우동과 놀아난 사람 중에 이씨 성을 쓰는 선비가 있었는데 그 선비의 정체가 성종이 아니겠느냐는 세간의 짐작 때문이었다고 한다.

성종이 어우동을 싫어했으면 싫어했지 좋아하진 않았을 것이다. 어우동 스캔들은 성종에게 있어서도 큰 타격이었다. 성종도 원상집단과 훈구파에 맞서 자기 세력을 키우려 했는데 그 중요 인물과 유망주들이 어우동 사건에 연루되었다. 김칭, 김세적, 김휘, 정숙지등은 성종의 총애를 받고 성장한 세력이었고 이승언도 종친의 사위로 성종이 눈 여겨볼 법한 유망주였다. 그런데 이들이 줄줄이 섹스 스캔들로 정치적으로 타격을 입게 된 것이다. 여기에 소박 맞긴 했지만 법적으로는 여전히 왕족의 아내인 여인이[5] 시가 친척인 여러 왕족을 비롯해 많은 남자들과 관계를 맺었으니, 왕을 중심으로 하는 왕실의 위상도 흔들렸고... 성종에게는 어우동이 이가 갈리도록 미웠을 것이다. 강상죄를 적용해서라도 죽이려 든 것도 그 때문으로 보인다.

고우영 화백은 늘그막 작품인 고우영 수레바퀴에서 이걸 다루면서 수레바퀴처럼 역사는 돌고돈다며 이야기한 게 바로 1970년에 벌어진 정인숙 살해사건이었다. 정말이지 어우동과 비슷한 여러가지 점이 많으며 어우동처럼 아버지를 모를 아이를 낳았던 여인 정인숙[6] 사건은 고우영 화백이 말하던 것처럼 매우 닮았다.

머털도사와 또매에서는 또매가 사람의 운명을 적은 글을 볼때 어느 글을 보더니만 몸서리치는데 바로 어우동의 운명이 적힌 글이었다!

2 영화

2.1 1985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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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기환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1985년작. 영화의 완성도와 흥행 양 쪽에서 당시 특급으로 분류되던 감독 중 한명인 이장호가 감독을 맡았다. 당대의 이장호의 페르소나이자 섹스심벌 이보희[7]가 주연을 맡아 연기력과 요염함을 동시에 필름에 담아냈으며 거기다 대사 하나 없는 안성기, 김명곤, 같은 연기파 배우들이 주 조연을 맡았다.

정창손(...)의 막 나가는 며느리 어우동을 제거하려고 높으신 분이 말없는 자객 안성기를 고용하게 되고[8] 안성기는 어우동의 주변에서 그녀의 여러 행각을 보면서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

일단은 사극 에로물이라 할 수 있지만 섹스신과 노출 장면들, 한편으로 단순히 에로물이라고 넘길 수 없는 스토리와 영상미를 통해 상당한 완성도를 가진 작품으로서 만들어졌으며 이때문에 개봉한 그 해 서울관객 39만 2천명을 기록하는 대박으로 한국 영화 최고 히트작이 되었다. 막상 가슴 노출도 마지막 장면에서 나올 정도였으니. 일반적인 에로물과는 차원이 다르다. 여담으로 MBC에서 방영하기도 했는데 약간 삭제가 되긴 했다.

결말은 모든 걸 정리한 어우동은 동굴에서 안성기와 최후로 마주치게 되고 저 포스터에 나와있듯이 동굴에서 검열삭제를 하면서 서로 칼로 찔러서 동반자살하게 된다.[9]

이보희는 이 영화로 백상예술대상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했다.

어우동에 대한 이미지는 거의 이 영화로 만들어졌다고도 할 수 있다. 어우동이 에로물에서 자주 다루어졌다는 오해도 간혹 있으나 어우동을 소재로 한 영화는 이 영화와 '요화 어을우동' 두 영화 뿐이다. 물론 영화 말고도 성종대 연간으로 사극에서 어우동의 이야기가 간간히 나오는 경우는 있으나 이보희의 어우동을 능가하는 어우동은 없었다. 위에서도 나온 이야기이지만 가장 최근에 어우동 이야기가 나온 사극이 왕과 나 였는데 뭐 결과물이야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2.2 2014년작

이수성 감독 작품. 송은채, 백도빈, 여욱환 주연. '주인 없는 꽃'이라는 부제가 붙는다. 2015년 01월 29일 개봉하였다. 30년만에 어우동을 소재로 한 영화였으나 평론은 좋지 못하고 흥행조차 최종 전국 관객 13087명으로 망했어요. 안습하게 영화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도 많다. 더불어 다른 장면에는 노출씬이 잘도 나오면서 꼭 형벌 장면에는 옷을 단단히 입혀놓는 폐습이 어김없이 나왔다.[10]

3 게임 확산성 밀리언 아서

한밀아 어우동 일러스트 논란 항목 참고.

  1. 효령대군의 5남의 서자이다.
  2. 동시대의 인물인 제안대군도 비슷한 짓을 한 바가 있다. 자세한 정황은 제안대군 항목 참조.
  3. 어우동은 간통죄로 죽은게 아니다. 강상죄로 처형된 것인데, 강상죄는 패륜이나 노비가 주인을 죽인 경우 정도에나 처벌받는 엄청나게 무거운 중벌이었다. 당시의 형벌인 대명률에 의하면 간통죄의 경우는 장 90대였다. 사실 조정에서도 사건 자체는 그냥 간통이었기에 일반적인 간통 사건으로 처리하고자 하였으나, 성종이 강상죄를 적용하라고 강하게 요구하면서 사형에 처해졌던 것.
  4. 지금으로 치자면 청와대 비서실장
  5. '소박 맞았다'는 말을 이혼당했다는 뜻으로 아는 사람들이 있는데, 소박은 이혼이 아니다! 법적으로는 여전히 부부지만 배우자에게 외면당한 것을 말한다.
  6. 당시 정부 고위인사들과 얽매이던 고급요정 접대원이었다
  7. 지금이야 이보희씨가 드라마 등지에서 푼수 아줌마(...) 역할로 많이 나오시지만 전성기 이보희씨는 요즘의 웬만한 글래머 여배우는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섹시 스타였다. 어느 야구계 유명 물리학자의 한자 이름을 잘못 읽어서 지금의 푼수끼 이미지의 씨앗이 있긴 했지만
  8. 이 만나는 부분이 재미있는게 높으신 분이 안성기에게 실력을 보여주라고 하자 바로 높으신 분에게 단검을 던지고 그분은 그걸 손으로 받는다. 그럴 거면 직접 가는 게 낫지 않나?
  9. 안성기는 늘 그렇듯이 베드신에 아주 취약해서 이 장면도 대역을 썼다. 멀리서 검열삭제 장면이 잡히는 이유가 바로 그것. 근데 대역 티가 너무 많이 난다.
  10. 본래 조선시대에 주리틀기를 할때는 치마와 바지를 걷어 맨다리를 드러나게 한 후에 시행했고 참수형 집행시에는 남녀를 불문하고 사형수의 웃옷을 벗기게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