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녀

宮女

1 개요

중국의 영향을 받은 동양의 궁정에서 일하는 여성. 서양으로 치면 시녀...라기에는 시녀 항목 참조.[1] 서양 개념으로는 메이드 정도로 볼 수 있다.

왕의 여자 예비군(...) 정도로 여겨져서 정조를 지켜야 했다. 물론 왕의 체력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궁녀를 모두 검열삭제할 수는 없었고 대부분은 숫처녀로 죽었다. 그리고 사극 같은 매체에서 한번 궁에 들어가면 평생 궁궐 안에서만 살아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고령이 되면 은퇴해서 궐 밖으로 나가 살 수 있었다. 노후를 돌봐줄 가족이 있으면 귀가해서 살 수 있었고 여의치 않으면 양로원 같은 성격의 은퇴한 궁녀들만 모여 사는 숙소에서 말년을 보낼 수도 있었다.

2 중국의 궁녀

관자에는 하나라걸왕이 3만의 여악(女樂)을 거느렸다는 기록이 있다. 여악이란 여자 악사와 배우, 무희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주례에는 천관총재 편에 궁녀들의 상세한 조직도가 언급되며, 이후로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한나라 때에 호칭이 바뀌어서 소의(昭儀), 미인(美人), 양인(良人), 팔자(八子), 칠자(七子), 장사(長使), 소사(小使) 등의 호칭이 생겨나고, 황후로부터 내명부 최하위까지 14등급으로 구분된다. 수나라 때는 상서(尙書), 상의(尙儀), 상식(尙食), 상침(尙寢) 등의 용어가 등장한다.

2.1 주례의 궁녀 조직

주례의 천관총재 편에는 궁녀들로 구성된 조직이 언급된다.

2.1.1 여어(女御)

후궁들을 모시는 일을 담당하는 궁녀.

왕후(王后)에게는 81명의 여어가 배치된다.

부인(婦人:왕후 아래의 2번째 서열에 해당하는 후궁)에게도 81명의 여어가 배치된다.

구빈(九嬪:왕후, 부인에 이어 3번째 서열에 해당하는 후궁)에게는 빈 1인당 9명의 여어가 배치된다. 구빈이라는 명칭답게 빈은 9명이므로, 구빈 모두에게 배치되는 여어의 숫자는 9*9=81명이다.

세부(世婦:왕후 아래로 4번째 서열에 해당하는 후궁)에게는 1인당 3명씩 배정되었다. 세부의 숫자는 법적으로는 27명이며, 따라서 세부에 배치되는 여어의 숫자는 총 81명. 이렇게 해서 기본적으로 324명이 배치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빈은 10명 이상씩, 부인은 3명 이상씩 둘 수 있고, 세부만 수백명에 달하기도 하니 여어의 숫자도 그만큼 늘어났다. 게다가 태후, 왕태후, 태자비 등에게도 많은 여어들이 배치되고, 궁궐의 각 기관에도 배치되었으니 그만큼 늘어났다.

여어의 주된 임무 중 하나는 자기가 모시는 주인이 언제 왕을 모실 것인지 순서를 정하는 일이었다.

2.1.2 여축(女祝)

궁궐 안에 머무는 무당이다. 왕후의 내제사(內祭祀:궁궐안의 부엌, 문, 창 등에 지내는 제사)와 내도사(內禱詞:기원이나 축원하는 일)를 담당했으며 그 수는 4명이다. 여축 아래에는 그들을 시중드는 해(奚)가 2명씩 있다.

2.1.3 여사(女史)

왕후의 지시를 받아 육궁의 내정을 다스리며 부관 역할을 한다. 육궁이란 왕후와 후궁들이 거처하는 궁궐을 지칭하는 것으로, 정침 하나 연침 다섯으로 이뤄져 있어 이를 합쳐 육궁이라 한다. 여사는 육궁의 지출결산서를 살펴보고 왕후의 명령을 기록했다. 여사는 총 8인, 그들의 시녀인 해(奚)는 16인이다.

2.1.4 해(奚)

여축, 여사를 보좌하는 시녀. 여축, 여사, 여어에게 각 2명씩 배치되었다.

2.1.5 여궁(女宮)

궁궐 안의 잡일을 담당하는 노비. 가장 신분이 낮으며 아무튼 매우 많다.

2.1.6 궐 내의 각 부서

약 100명에 달하는 궁녀가 배치된다.

  • 내사복(內司服) : 왕후의 의복을 만들고 관장한다. 여어 2명이 배치.
  • 봉인(縫人) : 왕궁의 재봉 일을 맡는다. 여어 8인, 여공 80인, 해 30인이 배치.
  • 염인(鹽人) : 왕궁의 소금을 맡는다. 여염 20인, 해 40인.
  • 멱인(冪人) : 물건 덮는 덮개를 만든다. 여멱 10인, 해 20인.
  • 혜인(醯人) : 채소 요리를 담당. 여혜 20인, 해 40인.
  • 해인(諧人) : 젓갈이나 조림을 담당. 여해 20인, 해 40인.
  • 변인(邊人) : 대추, 밤 복숭아 등 과일을 담당. 여변 10인, 해 20인.
  • 장인(奬人) : 왕이 마시는 음료수를 담당. 여장 15인, 해 150인.
  • 주인(酒人) : 왕이 마시는 술을 담당. 여주 20인, 해 300인.

3 우리나라의 궁녀

삼국시대에는 신라의 궁녀 조직에 대해 비교적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다. 고려는 건국 초기에는 궁녀 조직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았던 듯 하며, 후궁에 대해서는 ~원(院), ~궁(宮), ~부인(夫人) 등의 칭호가 있었지만 일반 궁녀에게는 딱히 칭호가 없었으며, 품계나 직책에 따른 명칭도 없다.

제8대 현종 대에 상궁(尙宮), 상침(尙寢), 상식(尙食), 상침(尙針) 등의 직책이 생겼고, 후궁에 대해서도 귀비(貴妃), 숙비(淑妃) 등이 칭호가 생겼다. 제10대 정종 대에는 후궁들에 대해 원비(院妃), 원주(院主), 궁주(宮主) 등의 칭호가 생겨났다. 제11대 문종은 귀비, 숙비, 덕비, 현비를 정 1품으로 정하고, 공주와 대장공주 등도 정1품으로 정했다. 하지만 그 외의 궁녀들에 대해서는 품계를 작성하지 않았다.[2]

조선시대에는 태조, 태종, 세종을 거치면서 내명부의 작호와 품계가 만들어졌고, 조금씩 바뀌다가 경국대전에서 완전히 정립되어 조선 말기까지 바뀌는 것이 없었다. 조선왕조가 멸망한 후에도 생존한 이왕가의 인물들을 모시기 위해 일제시대 와중에도 궁녀는 계속 뽑혔으며 해방 이후에도 궁녀들이 구 왕실 인물들을 모셨다.

현대 대한민국에서 생존한 궁녀는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마지막까지 생존했던 성옥염 상궁이 2001년 5월 4일 82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3.1 신라의 궁녀 조직

모(母)와 여자(女子)로 구분된다.

조하방(朝霞房)에 모 23인, 침방(針房)에 여자 16인, 소방전(蘇芳典)에는 모 6인, 표전(漂典)에는 모 10인, 기전(綺典)에는 모 8인, 염궁(染宮)에는 모 11인, 홍전(紅典)에는 모 6인, 찬염전(儹染典)에는 모 6인, 소전(蔬典)에는 모 6인이 배치되었다. 그 외에도 금전(錦典) 등이 있다. 하지만 이들이 왕을 모시는 임무를 맡은 여인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한 여자 관리였는지는 알 수 없다.

3.2 조선의 궁녀 조직

내명부를 참조.

의녀에 대해서는 의녀를 참조.

3.3 궁녀의 수

조선시대의 궁녀 수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전혀 없어 알 수 없다. 연산군 시대에는 궁녀가 1,000명이 넘었다는 기록이 있고, 영조 대에 쓰인 이익성호사설에 의하면 ‘지금 환관이 335명이고 궁녀가 684명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고종 말기에는 왕실 사정이 좋지 않아 200명 정도밖에 없었다. 대체로 조선의 궁녀는 600~700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3.4 궁녀의 처녀 감별

궁녀는 승은을 입어 왕의 여자가 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처녀여야 했고, 처녀를 가려 선발하기 위해 궁녀가 될 예정인 소녀의 손목에 앵무새 피를 떨어뜨렸다고 전해진다. 손목에 떨어뜨린 앵무새 피가 흘러내리면 처녀가 아니며, 흘러내리지 않으면 처녀라는 판별법이었다.

터무니없는 미신이지만, 당시에도 내수사에서는 판별 효과가 없는 것을 알면서 다른 목적으로 이러한 선발 방법을 시행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배울 대로 배운 양반가에서도 미신을 어느 정도 믿던 시대였고, 열 몇 살도 안 된 어린 소녀들에게는 충분히 이런 미신이 먹혀들었을 것이다. 혹시라도 처녀가 아닌 소녀가 있었다면 애초에 감별을 받지 않았으며, 만일 받았더라도 몸의 떨림을 감추기 어려워 앵무새 피가 흘러내리라는 점을 이용했다는 것.

애초에 조선 시대에 앵무새는 귀한 생물이라 모든 궁녀 후보들에게 앵무새 피 감별을 해볼 수도 없어 가끔식 몇몇만 형식 삼아 했거나 다른 동물의 피를 앵무새 피로 속여 시행했을 것이고, 앵무새 피의 역할은 공포를 심어주는 것으로 끝이었다.

3.5 궁녀의 출신

속대전, 대전회통 등지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는 원칙적으로 공노비 중에서 궁녀를 선발했다. 순조 1년에야 공노비 제도가 혁파되어 공노비 중에서 궁녀를 선발할 수 없게 되었고, 이후 궁녀 선발은 대부분 양인으로만 이루어졌다. 그러나 순조 시대 이전에도 가난한 양인 집안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덜거나 왕실과의 연줄을 만들기 위해 딸을 궁녀로 보내길 원하고, 왕실에서도 좋은 출신의 궁녀를 선호하여 일부는 편법을 통해 양인 중에서 선발되어 종종 문제가 되곤 하였다. 현종실록에서는 별감이 법을 어기고 양인을 궁녀로 선발하는 폐단을 문제삼고 있으며, 한중록에도 혜경궁 홍씨가 양인 출신을 궁녀로 선발해 시아버지 영조에게 혼이 났다는 일화가 있던 것으로 보아 공공연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순조 이후 극히 일부 시기를 제외하면 궁녀는 원칙적으로 천민 출신이었고 일부만 양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전 시대를 다룬 사극에도 궁녀들은 대부분 상당히 좋은 집안 출신인 왜곡을 자주 볼 수 있고, 심지어 동이에서는 동이가 궁녀로 들어올 때, 다른 궁녀들이 천민을 궁녀로 들인다는 것에 화를 내는 장면까지 볼 수 있다.

이는 꼭 사극만의 잘못은 아니다. 과거에는 연구자료가 부족해서 궁녀제도나 생활상에 대한 연구는 구한말 이후 생존해 있는 궁녀 출신들의 증언에 상당수 의존해 이루어졌다. 그녀들은 순조 이후 입궁했던 사람들이라 노비 출신이 아니었고, 조선 후기 사회제도의 변화로 애초에 양반과 중인이 많고 상민은 별로 없었기에, 그녀들의 증언을 따르면 '궁녀의 출신은 중인 이상이었다.'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견해가 역사학자들의 논문이나 저서에 수록되었다. 최근에는 연구가 진전되어 궁녀의 다수가 공노비 출신의 천민이었다고 보고 있지만 이미 뿌리박힌 오해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고 있다.

여담으로 현대의 관점에서는 궁녀가 제때 밥 주고 재워주고 월급 주는(...) 상당히 좋은 직업에다 승은을 입어 출세할 수도 있었기에 인기 직업이었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조선 시대 사람들은 궁녀가 되는 것을 기피했다. 조선뿐만 아니라 그 이전 시대나 외국에서도 궁녀는 기피직업이다.[3] 효종 대에 궁녀를 공노비에서 선발하는 원칙을 깨고 양인 중에서 선발하려 했던 적이 있는데, 효종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양인들이 딸을 궁녀로 보내기 싫어 내수사의 궁녀 차출 수색을 피해 딸을 숨기거나 10세 전후의 여자아이들을 조혼시키는 사태가 일어났다고 했다.

결국 양인 궁녀 선발 계획은 무효로 돌아가고 계속해서 공노비 중에서 선발한다는 원칙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궁녀의 일 자체가 매우 고된 일이었으며[4] 당시 시대의 가치관으로 평생 결혼이나 성관계도 못 하고 독신으로 살다가 자식도 없이 부모형제 죽으면 쓸쓸하게 생을 마쳐야 하는 삶이 좋아 보일 리가 없었다. 간혹 왕의 승은을 입을 수도 있지만 승은을 입을 가능성도 복권 맞을 확률인 데다가, 후궁이 되는 것은 또다른 어려움이었다. 자식을 낳지 못하거나 낳았지만 아들을 못 낳고 딸만 낳았다면 후궁 첩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승은상궁들은 궁궐 한구석에서 쓸쓸하게 살며 일반 궁녀에 비해 엄청나게 나을 것도 없는 일생을 살아야 했다. 이런 이유로 궁녀는 가세가 워낙 기울어 딸을 궁녀로 보내는 것 외에 경제적 회생 방법이 없는 경우가 아니면 거의 강제 차출로 이루어졌다. 애초에 내수사가 집집마다 돌며 여자아이들을 뽑았다는 데서도, 지원자들이 넘치는 인기직업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왕실을 받드는 직책인 만큼 본의도 아닌 정치적 사건이나 왕비, 후궁, 왕세자빈, 공주, 옹주 등의 삽질에 휘말려 곤욕을 치르는 경우도 많았다. 당연히 왕실과 관련된 사건이라 사건조사가 역모사건급으로 가혹하게 진행되는데다 지체 높은 여인네들을 직접 족칠 수 없으니, 대신 의금부로 끌려나와 혹형을 당하는 일이 빈번했다. 처벌 또한 궁녀 자신은 거열형 등으로 끔살되는 것은 물론, 가족까지 연루되어 죽거나 유배를 당하는 마당이니, 이 때문에 불똥 잘못 튀기 쉬운 궁녀가 되길 꺼린 것이다.

3.6 기타 궁녀 제도와 생활상

궁녀는 모두 왕의 여자였으므로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을 수 없었다. 만일 궁녀가 외간 남자와 통하다가 적발되면 즉시 참형에 처해지는데, 특이한 점은 궁녀가 임신한 상태여도 당장 처형한다는 점이었다. 조선은 노동력을 중시하는 국가였고 죄인의 자식은 노동력이 되기에 여자 사형수가 임신 중이면 출산하고 나서 사형을 집행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출산 때까지 사형을 집행하지 않는데, 오로지 궁녀의 간통만이 예외였다.

세간에는 궁녀는 죽을 때까지 궁을 못 떠난다고 알려져 있지만 나라에 큰 가뭄 등 어려운 일이 생기면 시집 못간 여자들의 한 때문이라고 해서 멀쩡한 궁녀들까지 대거 출궁했으며, 이렇게 출궁당한 궁녀는 젊고 건강한 나이였지만 역시 결혼은 하지 못했다. 또한 모시던 상전이 결혼이나 요양 등으로 궁을 떠나게 되면 함께 출궁해야 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의지와는 관계없이 출궁을 하게 되고, 왕실 구성원 외에는 궁 안에서 사람이 죽는 것을 기피하여 늙거나 병 들어서 곧 죽겠다 싶은 궁녀들은 역시나 다 내보냈으므로 사실 궁녀가 죽을 때까지 궁에서 사는 일은 거의 없었다.

3.7 기타

티벳궁녀(...)

4 일본의 궁녀

일본의 경우는 궁녀와 내시를 통합해서 여관(女官)이라는 직위를 갖고 일하는 여성이 있었다. 일본은 한국이나 중국과는 달리 내시가 없었다. 그 이유는 일본 특유의 사무라이 문화 때문인데 당대의 일본인들은 남성의 신체 중에서 생식기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며 거세는 참수보다 더 큰 참사로 여겼기 때문에 내시가 없었다. 남자=무사[5](전투력)로 인식하는 고대 일본인들에게 비전투 남성이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은 내시를 두지 않은 것이다. 실제로 고대 일본은 다이묘가 휘하 농부들에게 갑옷을 빌려줘서 병사로 삼은 것을 아시가루라 했다. 대신에 이쁘게 차려입은 소년들을 시종으로 썼다(...)

중국이나 한국과는 달리 일본의 궁녀는 궁을 나오면 혼인할 수 있었다. 혼인하기 전 궁에 들어가 일하거나[6] 아예 궁에서 좋은 남자를 만나 연애 끝에 혼인하고 출궁하기도 했으며 남편과 사별하거나 이혼한 후 궁녀로 들어가기도 하였다. 궁녀로 들어가는 경우도 비교적 지체 높은 귀족 출신의 여자가 많았고, 여러 왕비들 가운데 누구를 모시느냐에 따라서 서로 간에 경쟁과 기세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에도 시대의 오오쿠는 엄격히 말하면 쇼군은 왕이 아니기 때문에 궁녀 제도와는 차이가 있지만 쇼군이 사실상 왕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에 궁녀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다.
  1. 다만 청나라때와 일본의 궁녀는 귀족들이 시녀로 지원했고, 사실상 신부수업의 개념이었다. 고로 청나라때와 일본 한정으로 시녀랑 같다고 볼 수 있다.
  2. 왕후가 아닌 후궁을 '비(妃)' 로 칭했다. 고려가 외교적으로는 제후국인 척 했지만, 내치에서는 황제국 - 외왕내제 - 을 칭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점이다. 동아시아의 중국적 세계질서와 예법에서 '비'는 황후의 아랫단계. 중국황제의 후궁이 '비'였다.양귀비 제후국에서는 왕후가 '왕비', 다음 단계의 후궁이 '빈'. 사대가 정립된 조선이후는 근대 대한제국을 선포하기 전까지 제후국의 예를 따랐으므로, '왕후'의 칭호는 '왕비'였다.
  3. 다만 궁녀 일자리를 기피하는 가장 큰 이유는 '결혼을 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궁녀의 출궁과 결혼을 허락한 왕조에서는 그렇게까지 기피되지는 않았다.
  4. 하루 24시간 내내 대기해야 하는 궁녀의 업무상 교대근무를 해야 했다. 현대에도 교대근무를 하며 야간과 새벽에 일하는 직업이 육체적으로 고된 직업으로 손꼽히는 것처럼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5. 사무라이 또는 아시가루를 뜻한다.
  6. 다만 궁녀 출신 여성은 좀 노는 여자 같아 꺼리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