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당(영국)

(영국 자유당에서 넘어옴)

Liberal Party

1 과거에 있었던 정당

1859년에 창당되어 1988년까지 존재했었던 영국의 정당이었다. 본래 있던 자유당은 사회민주당과 합쳐 사회자유민주당(현 자유민주당)이 됐으나, 당시 합당에 반발한 소수 자유당원들이 이탈하여 자유당이라는 이름의 정당을 다시 만들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이 문서 두 번째 단락에서 설명).

영국의 양대 정당...이었으나 1924년 총선을 기점으로 군소정당으로 추락, 64년 동안 콩라인도 아닌 만년 제3정당으로 존속했다. 다만 '군소정당'이란 이미지는 소선거구제 때문으로, 실제 합당 전 각종 선거에서 자유당의 득표율은 10% 후반대를 유지했다. 그러나 소선거구제 때문에 의석이 매우 적다. 다만 높은 득표율때문에 의석수에 비해서 언론의 관심은 큰 편이었다.

1689년에 토리에 대립되었던 젠트리 파벌인 휘그당이 토대인 것 같긴 한데 애매하다. 토리와 위그는 정치적 논점이라기 보다는 종교적인 논점에서 구별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토리는 국교도+가톨릭, 휘그는 장로파) 그런데도 보수당은 토리에 대한 계승점이 있는 반면, 19세기에 형성된 자유당은 휘그+급진파(Radicals)+필파(Peelites)[1] 연합으로 된 복잡한 생성 과정을 지니고 있다. 이 점이 후에 자유당이 몰락하게 되는 원인이기도 한데... 어쨌든 자유당이란 말은 1840년대에 사용되었고 직접적인 체계를 갖추게 된 것은 1859년에 들어서 일이다.

자유주의를 표방하고 있긴 하였지만 19세기에 큼직큼직한 개혁은 대개 보수당이 한 지라 나름 진보 성향의 정당으로서 의미가 무색한 점이 있다. 국가 정책에서도 팽창적인 보수당과 비교하여 평화주의 노선을 견지하였지만 실제로는 딱히 그렇지 않다. 포함외교의 주인공인 파머스턴 경도 자유당에서 배출한 수상. 4번 연임한 윌리엄 글래드스턴 수상은 자유당에서 배출한 인재로 영국 신사의 전형이다. 아편전쟁을 앞장서서 반대하고, 그것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막상 빅토리아 여왕이 총애하였던 인물은 보수당의 벤저민 디즈레일리 총리였다.

19세기에는 보수당과 함께 양대 정당으로서 역할을 다하지만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세력이 약해진다. 일설에는 보수당이 디즈레일리와 같은 인물의 지도 하에 선거권 확대에 발맞추어 대중 정당으로서 면모를 갖추어 간 반면, 자유당은 그러하지 못하였다는데.. 이건 글래드스턴이 직접 광장으로 나가 시민들을 동원한 사례도 있다는 점과 1906년 선거의 유례 없는 압승을 생각하면 사실이 아니다. 그것보다는 복잡한 생성 원인으로 생긴 번잡한 당의 구조와 파벌 갈등이 원인이었던 것으로 지적된다.

자유당의 내부 갈등은 1880년대 중반부터 불거졌다. 온건한 대외정책과 아일랜드의 자치, 스코틀랜드와 웨일즈의 종교자유로 대변되는 "작은 영국"을 주장한 글래드스턴에게 기존의 휘그파와 영연방 확장과 제국주의에 적극적이었던 체임벌린 등의 신흥자본파가 함께 반발한 것이다. 이들은 "자유통일당(Liberal Unionist)"을 조직하고 보수당과 연합해 글래드스턴에게 엿을 먹인다. (덤으로 아일랜드 의회주의자들은 영국 내에서는 보수당에게 표를 던져서 연정 없이는 자유당이 집권할 수 없는 교묘한 전략으로 의석을 깎아먹었다.) 이걸 어떻게 헨리 캠벨배너먼이 탕평책(...)으로 봉합에 성공했지만, 한번 갈라졌던 경험은 이미 당내를 누더기로 만든 상황이었다.

자유당 최후의 영광인 1906년 총선은 무려 397석대 156석으로 보수당 17년 정권을 종결시켰다. 하지만 캠벨배너먼이 1908년 사망하면서 자유당의 분열은 표면화 된다. 자유당에서는 글래드스턴의 평화주의 노선과 국가의 적극적인 분배정책 개입을 주장하는 사회자유주의자("뉴 리버럴리스트")들의 목소리가 높았고,[2][3] 이것이 노령연금법안(1908년), "인민예산"이란 말마저 들은 막대한 예산확보(1909년)같은 강력한 분배 정책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 예산안은 상원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부결당하고 만다.[4] #[5]

이런 잡음 속에서 허버트 애스퀴트 수상(재임 : 1908~1916)은 378석의 우위를 버리고 정면 돌파에 나섰다. 1910년 1월의 재신임 선거에서 자유당은 274:272로 간발의 차로 제1당이 되었고, 12월의 재선거에서도 272:271(!)로 더욱 간신히 이겼다. (심지어 12월 선거에서는 득표자에서는 패배했다.) 자유당은 70여석의 아일랜드 의회당(Irish Parliamentary), 40여석의 노동당과의 연정을 통해 정권을 유지했다. 애스퀴스 수상 개인은 8년간 장기 재임했으며, 영국의 사회복지를 완수하는 동시에 해군을 증강한 명수상으로 꼽히지만, 신흥 중산층의 이탈로 자유당이 단독 집권하는 것은 불가능해져 버렸다. # 허버트 애스퀴스

1차 대전 직전에는 전통적인 휘그 지지자(비국교도 중산층)들도 다 나가버리고, 당내에는 자유방임주의자와 사회자유주의자간의 투쟁이 계속 벌어졌다. 정권의 한 축이었던 아일랜드 의회당의 자치 및 독립 요구는 오히려 1916년의 "부활절 봉기"를 초래했고, 결국 이로 인해 의회당이 몰락하고 강경파인 신페인당이 득세했다. 그야말로 내우외환.

결국 로이드 조지의 "궁정 쿠데타"[6] 이후의 분당 크리가 결정타가 되어 1918년 3당이 되었다. 이로서 보수당은 별로 한 일이 없는데 자유당 욕만 하다 제1당을 차지하게 되었고, 자유당의 자매정당 기믹이던 노동당 역시 반사이익으로 제1야당이 되고 만다. 당의 분열 속에서 로이드 조지는 1922년 장기 재임했으나 결국 사임했고, 당은 1924년 재통합되었으나 옛날의 영광을 회복하기엔 때 늦은 뒤였다. 당의 전성기를 책임진 애스퀴스 수상과 로이드 조지는 분당 정국에서도 각 정파의 대표를 역임했으며, 통합 뒤에 오히려 전체 의석의 20%는 커녕 그 반토막 이하로 쇠락한 자유당의 모습을 늘그막까지 지켜봐야했다.

하지만 자유당 내각은 짧은 전성기(1905년 ~ 1918년대) 동안 제1차 세계대전을 마치고, 상원의 하원 비토권을 에드워드 7세와 함께 없에버렸으며, 복지국가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했다. 화려하게 산화했군 # 로이드 조지의 업적

어쨌든 몰락 이후에도 연명하다가[7] 그러던 중 1981년 노동당에서 떨어져 나온 중도 성향(노동당 내 우파)의 사회민주당(SDP)과 선거연대를 맺었고, 1988년에는 아예 합병하여 사회자유민주당이 됐다. 그리고 1989년에 사회자유민주당이 당명을 바꿔 현재의 자유민주당이 되었다.

2 현재의 군소정당

100px-Logox100px.jpg

구 자유당과 사회민주당의 합당에 반발한 일부 자유당원들이 당을 이탈한 뒤, 1989년에 새로 창당한 정당. 현재도 존속되고 있다.

그러나 죽 제3당의 지위를 지키고 있다가 물론 2015년에는 제4당으로 밀려났지만 2010년에 연립정부에까지 참여하게 된 자유민주당과 달리, 부활한 자유당은 아예 인지도가 희박한 듣보잡 군소정당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아마 영국인들 다수도 옛 자유당이 현재의 자유민주당으로 바뀌었다는 건 알아도 아직도 자유당이란 이름의 정당이 따로 있다는 걸 모르는 경우가 매우 많을 듯하다.

현재 영국 전국에서 지방의회 극소수 의석만 확보하고 있고, 영국 국회나 유럽의회 의석은 없다. 안습...
  1. 보수당 소속이었던 로버트 필 총리를 중심으로 한 자유무역을 지지하던 정파였다. 필파는 결국 보수당 내 다른 계파와 갈등을 빚다가 탈당해 자유당으로 합쳐진다.
  2. 영어권에서는 20세기 초반 이후로 별도의 설명 없이 liberal이라는 말을 사용하면 뉴리버럴, 즉 사회적(진보적) 자유주의를 가리키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고전적 자유주의가 시장에 맡겨 놓는 자유방임이라면 뉴리버럴은 거기에 반대해 국가의 분배 개입을 지지하니 같은 자유주의라도 입장이 상당히 다르다. 참고로 고전적 자유주의에서 유래한 현대의 시장 자유주의 계열들은 오늘날 대개 libertarian(자유지상주의, 자유의지주의 등으로 번역)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굳이 liberal이라는 말을 쓸 경우 앞에 다른 수식하는 다른 단어를 덧붙여야 오해를 피할 수 있다.
  3. new liberalism이나 neoliberalism이나 모두 '신자유주의'로 번역 가능하나 양자의 입장은 완전히 다르다. 전자는 국가의 적극적인 분배 개입을 지지하지만 후자는 고전적 자유주의, 시장 자유주의를 계승해 국가 개입을 최소화하는 입장을 취한다. 한국어에서 '신자유주의'는 보통 neoliberalism을 가리킨다. 참고로 new는 기존에 있던 것에 대항하여 등장한 대안을, neo는 기존에 있던 것을 계승하여 개량한 것이라고 뉘앙스라고 이해하면 된다. 즉 new liberalism은 기존에 있었던 고전적/시장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등장한 새로운 유형의 자유주의고, neoliberalism의 neo는 고전적/시장 자유주의를 계승하여 등장한 최신 버전의 (시장) 자유주의인 셈. 이런 특성 때문에 new liberalism은 그 특성상 진보주의, 좌파 이념과 연합할 여지가 크고, neoliberalism은 보수주의, 우파 이념과 연합할 여지가 크다.
  4. 사실 이런 밀어붙이기 통과는 1870년의 보수당의 로버드 필이 먼저 시작한 것이었지만...
  5. 해당 기사에서는 'new liberalism'을 신자유주의라고 번역했는데 이것은 이 문서의 앞 주석에서 설명했듯이 정반대의 사상인 neoliberalism으로 오해할 여지가 있어서 회피하는 게 좋다.
  6. 명재상이었지만 전쟁 직후 보수당과 손을 잡아 총선을 치렀다.
  7. 그래도 네임 밸류는 있었기 때문에 항상 선거 득표율 10%는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은 비례대표제가 제로인 지역선거구제... 대표적으로 1974년 2월 노동당:보수당 301:297로 2차대전 이래로 최초의 과반다수당이 없는 헝(hung)의회가 이루어지면서 캐스팅보더가 될 기회를 잡았지만 10월 이루어진 재신임 선거에서 319:277이 되면서 처참하게 버려졌다(...) 당시 두번 모두 20%에 육박하는 득표를 얻으며 의석이 2배나 증가했지만, 그럼에도 확보한 의석은 10여석에 불과했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