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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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영국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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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41대42대
벤저민 디즈레일리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벤저민 디즈레일리
42대43대44대
벤저민 디즈레일리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솔즈베리 후작 로버트 게스코인세실
44대45대46대
솔즈베리 후작 로버트 게스코인세실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솔즈베리 후작 로버트 게스코인세실
46대47대48대
솔즈베리 후작 로버트 게스코인세실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로즈베리 백작 아치볼드 프림로즈
풀네임William Ewart Gladstone(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
출신 정당자유당
생몰연도1809년 12월 29일 ~ 1898년 5월 19일
재임기간1868년 12월 3일 ~ 1874년 2월 17일
1880년 4월 23일 ~ 1885년 6월 9일
1886년 2월 1일 ~ 1886년 7월 20일
1892년 8월 15일 ~ 1894년 3월 2일
"서로의 사랑은 영국 법에 의해 제한받지 않는다는 것과 기독교 문명의 범주에서 제한받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서로에 대한 사랑은 전세계에 유효하다는 것을 기억하시오"

델케이스(Dalkeith) 연설에서, 1879년 11월

1 개요

가장 위대한 평민(The great Commoner)

윈스턴 처칠, 벤저민 디즈레일리 등과 더불어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총리로 꼽히는 인물. 제국주의가 절정이던 시기에 평화주의적 대외관계를 고수하였으며, 아일랜드 자치법, 비밀투표 실시와 같은 많은 내정 개혁을 시도하는 등 자유주의19세기 의회정치를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무려 4차례에 걸쳐 영국 총리직을 역임했다.[1]

글래드스턴이 유태인이라는 루머가 있지만, 글래드스턴은 유태인들이 많이 쓰는 성씨인 스턴(Stern)이 아닌 Gladstone이다.[2] 오히려 그의 동시대 라이벌이었던 디즈레일리가 유태인이다.

2 생애

2.1 초기

1809년 잉글랜드 리버풀에서 부유한 상인이자 하원의원이었던 존 글래드스턴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튼옥스퍼드 대학교라는 엘리트 코스를 거친 뒤 아버지의 권유로 정계에 입문해 1833년 2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하원의원에 당선된다. 정적이었던 디즈레일리가 6번 낙선되고서야 정계진출 성공한 것과 여러모로 대비된다.

초선 의원 시절인 1840년 영국 내각이 청나라와의 아편전쟁을 감행하려고 하자, 의회 연설을 통해 이를 통렬히 비판했다. 비록 전쟁 자체를 막지는 못했지만, 그의 연설을 계기로 아무런 이의 없이 진행될 뻔 했던 영국의 전쟁 선포가 의회 표결에서 불과 수표 차이로 간신히 결정될 정도로 논쟁을 일으켰다. 이는 글래드스턴에게 상당한 정치적 명성을 가져왔고, 이후 그가 실시하는 비(非)제국주의/도덕주의적 외교 정책을 예고하게 되었다.

1841년 재선된 이후 로버트 필 내각의 상무원 총재(President of the Board of Trade)로 입각한다. 자유무역을 지지하는 소위 필 파(Peelites)였던 그는 이 시기 관세 개혁을 통하여 자유 무역을 증진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1845년 아일랜드의 종교 문제가 본인의 신념과 어긋나자[3] 장관직에서 사임한다. 하지만 당시 수상이었던 로버트 필이 글래드스턴을 각별히 아꼈던 만큼 채 1년도 지나기 전이었던 같은 해 12월에 식민지 장관으로 재임용된다. 1846년 로버트 필 내각이 곡물법 폐지 문제로 인해 붕괴되었을 때, 자유무역의 옹호론자답게 시종일관 곡물법 폐지를 주장하면서 주요 정치인 중 하나로 부상하기 시작한 그는 1852년 휘그당과 필 파의 연정이었던 애버딘 내각의 재무부 장관으로 취임한다. 이 시기 각종 관세 인하를 비롯한 획기적인 예산안으로 재정가로의 명성을 얻는다. 그는 자유주의자답게 작은 정부를 지향했고, 정부의 규모를 줄이기 위해서 직접세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이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대중의 지지가 필요했는데, 글래드스턴은 직접세의 액수를 낮춰서[4]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직접세를 내게끔 하여 직접세 폐지 여론에 불을 붙였던 것. 문제는 곧바로 크림전쟁이 터지면서 산통 다 깨졌어요

이 시기 얻은 명성을 바탕으로 점점 자신의 지위를 키워나간 글래드스턴은 1850년대 후반 이후 자유당의 지도자 중 하나가 된다. 디즈레일리와 인생매치의 시작

재무장관으로 재임하던 시절에는 "정신이 온전한 모든 성인남성에게 투표권이 주어지지 않을 이유가 없다. 다만 노동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좀더 관심을 가지게 된 이후에야 그것이 가능할 것이다" 라고 발언한 적이 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급진적인 주장이라서 총리인 파머스턴 경은 격노하여 선동적인 언행이라고 비난했고 심지어는 빅토리아 여왕의 귀에까지 들어가 여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고 한다[5]

이후 존 러셀 내각에서 노동자 계층 중 상당수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는 개혁을 추진하지만 당 내 보수파들의 반발로 인해 실패로 돌아간다. 하지만 아이러닉하게도 평생의 적 디즈레일리의 보수당 정부가 글래드스턴의 개혁안보다 오히려 더 급진적인 투표권 확대 정책을 실시하였고[6] 정작 그 덕으로 1868년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글래드스턴이 총리직에 오르게 된다. 죽써서 자유당줬다

2.2 대영제국의 총리로

1868년부터 1874년까지 이어진 그의 1차 내각 시기 글래드스턴이 보여준 주요 자유주의적 정책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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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는 영국 내 자유주의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민족주의제국주의의 광풍이 유럽을 휩쓸고 있었고, 영국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식민지제국주의에 대해 전반적으로 무관심했던 글래드스턴 내각에게 민중은 실망했고 디즈레일리가 이 점을 집요히 공격하면서 민심을 사로잡는다. 결국 1874년 총선에서 디즈레일리의 보수당이 다시 글래드스턴의 자유당을 누르고 2차 디즈레일리 내각이 성립하게 된다.

1874년 총리직에서 물러난 이후 글래드스턴은 자유당의 당수직에서도 내려오고 언론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1876년 불가리아를 비롯한 발칸반도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항한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글래드스턴은 오스만 제국의 잔학행위에 분노하여 영국의 인도주의적 개입을 호소[8]하는 팜플렛을 쓴다. 그런데 호소문이 대중 사이에서 대폭발을 불러일으켰고 이를 발판으로 글래드스턴은 다시 정계에 복귀했고 디즈레일리 내각의 제국주의적 외교의 비도덕성을 비판하면서[9] 1880년 선거에서 승리, 다시 총리직에 오르게 된다. 1881년 제2차 아일랜드 토지법을 성립시켰으나 외교적으로는 이집트에서 반영폭동이 일어났을 때의 유약함[10] 등을 비판당하면서 1885년 다시 총리직에서 물러난다. 이후에도 두 차례 더 재임하면서 아일랜드의 자치권을 부여하고자 백방 노력했으나 보수당의 반대[11]로 번번이 부결되었으며[12], 독일 제국과의 군비 경쟁에도 반대하다가 물러난다.

2.3 여생

이후 연구와 강연으로 여생을 보내면서 1898년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친다. 무덤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있다. 은퇴한 그에게 백작 작위를 수여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그는 평민의 신분으로 죽겠다며 이를 거절했고, 그에게는 '가장 위대한 평민(The Great commoner)'이라는 찬사가 붙게 됐다. 글래드스턴의 사상은 이후 1차 대전 시기 영국의 총리를 지낸 데이빗 로이드 조지에게 계승된 것으로 평가받는다. 자유당이 망한 지금은? 신자유주의도 자유주의의 한 갈래이니 이 아줌마가 계승한 셈인가...?

풍채가 좋았다고 한다.

3 정치

그는 대표적인 도덕정치(Moralpolitik)[13]의 지지자였다. 경쟁국가들 사이의 갈등이나 마찰을 국제적 여론과 중재에 의해 해결한다는 것이 글래드스턴의 정치관이었다. 국제적 위기가 있을 때 주로 강경책을 내놓았던 디즈레일리 내각과는 달리, 글래드스턴의 내각은 주로 유화책을 사용했다. 1870년 러시아에게 흑해 재무장을 허용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 1856년 크림 전쟁 종전 이후 흑해는 무장 중립지역으로 남았었는데, 이 '런던 협약'으로 러시아는 이 조항을 파기해 버렸다. 또 하나의 예는 1872년의 '앨라배마 호 보상사건'인데, 미국 남북전쟁에 남부연합 소속의 영국 배가 입힌 손실을 영국이 배상해 내라는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다. 당시 대영제국의 위상을 생각하면 쿨하게 씹었어도 될 요구였으나, 글래드스턴은 "보상액은 도덕적 가치에 비하면 먼지에 불과한 수준"이라 말했다고 한다.

자유주의와 도덕정치를 중시했던 그의 관점은 영국인들에게 찬사를 받으며 그에게 G.O.M(Grand Old Man)이라는 명예로운 별명을 얻게했지만, 말년에는 역효과를 불러 실각에 이르게 했다. 1881년 이집트에서 일어난 반영폭동에서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한 것도 한몫 했고, 1883년 수단에서 민족주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군대 투입을 지나치게 망설인 것도 결정적이었다. 뒤이은 1885년 이집트 주둔군의 장군이었던 찰스 고든이 자의적으로 군대를 끌고 수단 문제에 개입했다가 포위되는 상황에 이르렀고, 글래드스턴은 구원군을 신속히 보내지 못해 고든은 효수당했다. (자세한 내용은 파쇼다 사건 참조.)

사건 이후 그의 별명이었던 G.O.M은 '고든 살해자'라는 M.O.G(Murder of Gordon)로 전위되었다고 한다.
  1. 덧붙여 최고령 영국 총리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사임했을때 나이가 무려 84세였으니...
  2. 이 루머가 황당하게도 꼴에 유태인에 대하여 분석했다는 책자(90년대 후반에 나온 책이었음)에 유태인 유명인이라며 여러 위인들, 인물들과 같이 나온 바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름만 보고 대충 비슷하면 유태인이라고 싸그리 넣어뒀는데, 같은 이유로 찰턴 헤스턴(;;), 스티븐 스필버그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스티븐 소더버그까지 유태인이라고 기재했다.우피 골드버그도 넣지 그랬냐? 태양중심설로 유명한 코페르니쿠스도 유태인으로 올라왔다.
  3. 당시 아일랜드의 가톨릭 세력을 달래기 위해 필 내각에서 각종 국비를 지원하기로 결의했는데 이 시기 글래드스턴은 아직 자유주의로 성향이 바뀌기 전인 보수주의자였고 열렬한 성공회 지지자였다.
  4. 150파운드에서 100파운드.
  5. 차티스트 운동을 무엄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라고 여겼던 사람이니 당연한 반응이다. 여왕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귀족들과 상류층의 생각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 당시(19세기 중반)는 영국, 미국 정도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나라에서 여전히 전제군주제가 유지되고 있던 시절이었으니 뭐...
  6. 상술한 글래드스턴의 발언에 불쾌해했던 빅토리아 여왕은 정작 디즈레일리의 개혁에는 찬성했다. 실제로 여왕은 글래드스턴을 싫어하고 디즈레일리를 더 총애하기도 했고...
  7. 정확히 서술하자면, 아일랜드의 국교성공회로 지정해놓았던 법령을 폐기했다.
  8. 디즈레일리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디즈레일리는 불가리아의 독립이 러시아의 남방진출을 불러올 것을 뻔히 알고있어서 개입에 소극적이었다.
  9. 미들로디언 연설(Midlothian Campaign)이라고도 한다. 이 연설에서 글래드스턴은 제국주의의 배제와 자유주의의 수용을 선언했다.
  10. 어떤 영국인 학자는 '네빌 체임벌린보다도 외교를 못했다'라고 까기도 했다. 근데 체임벌린은 히틀러가 희대의 돌아이였다는 핑계거리라도 있잖아.
  11. 심지어는 자당인 자유당 안에서도 신흥자본가들과 구 휘그계를 중심으로 반란표가 쏟아져나왔으며, 제국주의에도 우호적이었던 이 반대세력은 탈당 후 "자유통일당(Liberal Unionist)"을 차리고 보수당과 연정을 구성한다.
  12. 여담으로 자치권 관련 투표를 하루 앞두고 영국의 한 진보적인 성향의 일간지에서 가결은 평화, 부결은 피바다로 가는 길을 그린 시사만화를 그렸었는데 그대로 들어맞았다. 자유당 당수가 더블린 공원에서 살해당한 것은 덤. 흠좀무.
  13. '현실정치'를 뜻하는 Realpolitik과 대척점에 있는 정치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