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등포구 행정구역 변천사 | |||||||||||||||||||
년도 | 당시 행정구역 | ||||||||||||||||||
1896 | 시흥군 상북면 / 하북면 (始興郡 上北面 / 下北面) | 한성부 성저십리 연희방 (漢城府 延禧坊) | 시흥군 상북면 원지목리 (始興郡 上北面 遠芝牧里)[1] | ||||||||||||||||
1911 | ↓ | 경성부 연희면 여율리 (京城府 延禧面 汝栗里) | ↓ | ||||||||||||||||
1914 | 시흥군 북면 (北面) | 고양군 용강면 여율리 (高陽郡 龍江面 汝栗里) | 시흥군 북면 도림리 (北面 道林里)[2] | ||||||||||||||||
1917 | 시흥군 영등포면/북면 (永登浦面/北面) | ↓ | ↓ | ||||||||||||||||
1931 | 시흥군 영등포읍/북면 (永登浦邑/北面) | ↓ | ↓ | ||||||||||||||||
1936 1943 | 경성부 영등포구 (京城府 永登浦區)[3] | 시흥군 동면 도림리 (東面 道林理)[4] | |||||||||||||||||
1946 | 서울특별자유시 영등포구 (永登浦區) | ↓ | |||||||||||||||||
1949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永登浦區) [5] |
1 개관
'영등포'란 지명의 유래에는 정설이 없지만 다음과 같은 설이 유력하다고 한다. 무속 신앙으로 음력 2월 초하루를 영등날이라 하여 무당이 보름동안 영등굿을 했는데, 지금의 영등포구 신길동 50번지 일대 방아곶이 나루터부근에 성황당이 있었고 이 곳에서 영등굿을 하였기 때문에 영등포라는 명칭이 나왔다고 한다. 또, '영등포'라는 이름은 음차이기 때문에 한자 명칭도 英登浦, 永登浦 등 다양했다.
참고로 이 문서는 서울특별시 산하 자치구 최초로 만들어진 역사 하위문서이자 당시 리그베다 위키에서 특별시/광역시 산하 자치구 최초로 만들어진 역사 하위문서이기도 하다.
이 문서는 현재의 영등포구 지역을 위주로 작성되었지만, 과거에 영등포구에 소속된 지역까지 아우른다.
2 삼국시대 ~ 남북국시대
삼국시대 때에는 '잉벌노'('늠내')이라는 지역의 일부였으며, 통일신라 때는 곡양현의 일부였다. 단 양화동은 제차파의현 소속이었고, 통일신라때 공암현(孔岩縣)이었다가, 이후 부평도호부(현재의 부평, 부천 일대) 전신인 수주군(樹州郡)에 병합되었다.
3 고려
태조 때 곡양현이 금주(衿州)로 개편되자 이에 속했다. 한편 양화동이 속한 옛 공암현은 충선왕때 양천현으로 부평에서 재분리되었다.
파일:Attachment/영등포구/역사/yeongdeungpo-prior to 1413 2.jpg
고대 이후 조선 건국 이전까지의 영등포구 지역 모습
4 조선
파일:Attachment/영등포구/역사/yeongdeungpo-1896 revised01.jpg
구한말(1896년) 당시 영등포구 지역 모습
금주가 금천으로 이름이 바뀌고(1413년) 금천현 자체가 인근 과천시 지역의 과천현과 현재의 강서구/양천구 일대인 양천현과 합치고 찢어지길 반복하다(1414년) 결국 세조 이후 금천현의 경계가 확정(1416년). 그 뒤로는 이름만 금천현 → 시흥현 → 시흥군으로 변경되면서 유지되었다. 이 때 세종실록지리지에서 영등포(英登浦)란 명칭이 처음 쓰였다.
단 여의도는 조선 건국으로 한성부 성저십리에 편입되었다. 양화동은 양천군(양천현) 소속이었다. 당시 안양천 합류부가 현재의 염창동 - 영등포정수장 사이가 아닌 영등포정수장 - 선유도 사이였기 때문. 이러한 형태는 1935년 안양천 제방을 축조하기 전까지 지속되다 제방 축조 이후 안양천의 유역 변경, 즉 물길이 바뀌면서 양화동이 영등포 권역으로 편입된다.
5 일제강점기 그리고 경성부 편입
파일:Attachment/영등포구/역사/yeongdeungpo-1914 revised01.jpg
1914년에 여의도는 고양군에 편입되었고, 양화동은 김포군에 편입되었으며, 나머지 지역은 통합되어 시흥군 북면이 되었다.[6]
파일:Attachment/영등포구/역사/yeongdeungpo-1917 revised01.jpg
1917년 북면 중 영등포리, 당산리, 양평리를 영등포면으로 분리하였으며, 1931년 영등포읍으로 승격되었다.
파일:Attachment/영등포구/역사/yeongdeungpo-1936 revised01.jpg
1936년에 영등포읍 전역과 북면의 일부 지역, 김포군 양화리가 경성부에 편입되었다. 상술하였듯이 안양천의 유역이 서쪽으로 이동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북면의 잔여 지역은 동면에 편입되었다. 한강 이남 지역 중에 처음으로 서울로 편입된 것이다. 경성부의 남부 경계는 지금은 복개된 대방천(상도천)[7]이 기준이 되었다. 다만 대방천이 복개될 당시에 직강화도 동시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현재의 대방천로와 당시 경성부 경계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당시에 영등포읍에 자리잡은 일본인 유지들이 경성부 편입을 반대하면서 영등포부 승격을 주장했다. 경성부 편입 당시에 영등포는 공업도시로 성장하여 자족도시로 발돋움하려는 채비를 하고 있었고, 영등포읍 차원에서도 독자적인 도시계획을 마련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1936년에 경성부가 확장될 당시에 시흥군 영등포읍에서는 일본인 유지들이 편입을 반대하였으나 조선총독부는 가볍게 씹었다(...). 총독부가 영등포 지역 일본인 유지들의 반론을 씹은 데는 인천권의 경성부 추가 편입을 살짝 염두에 둔, '대경성계획'의 일환으로 영등포 지역의 경성부 편입을 추진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1920년대에도 영등포의 경성부 편입이 고려되기는 했지만 경성부 편입은 시기상조[8]라는 지역 여론이 강했었고 1925년 한강 대홍수 사태[9]로 사실상 편입 계획이 무산된 적이 있다. 그런데 1930년대 초반에 들어서면서 경성부 확장 초안에 한강 이남지역은 여의도, 노량진과 흑석동이 포함되었다가 갑자기 영등포(영등포읍 일대 및 북면 일부)도 경성부 편입 대상 지역에 포함되었다. 만약에 유지들 의견대로 경성부 편입대신 영등포부 승격이 이루어졌다면, 지금의 서울 서남부와 광명시 일대는 지금의 인천광역시마냥 서울특별시와 접하는 희대의 광역시급 서울 근교 위성도시가 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영등포의 경성부 편입은 서울 주변의 (사실상의) 위성도시가 서울에 병합된, 지금까지의 유일한 사례로 볼 수 있다. 광주 광산구의 서울 버전?
영등포로서의 독자적인 지역 정체성은 그 잔재가 198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으나(출처: 뿌리깊은 나무 - 서울편), 지금은 완전히 서울특별시에 동화된 상태이다.
파일:Attachment/영등포구/역사/yeongdeungpo-1943 revised01.jpg
1943년 구제 실시에 따라 설치된 7개 구 중 하나로(용산, 중, 종로, 서대문, 동대문, 영등포, 성동), 70년 가까운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자치구다. 서울 서남부의 터줏대감.
5.1 만일 경성부 편입 대신에 영등포부 승격이 이루어졌다면?
파일:Attachment/영등포구/역사/virtual yeongdeungpo-city.gif
만일 경성부 편입 대신에 영등포 지역 일본인 유지들의 주장대로 영등포부 승격이 이루어졌다면 서울특별시와 한강을 사이로 접경하는, 인구 200~300여만 정도의 희대의 위성도시가 되었을 것이다. 인천이나 안산 같은 도시가 한강을 사이로 서울 바로 옆에 붙어있는 격
경기도 영등포부는 광복 이후에는 경기도 '영등포시'가 되어 한강 이남 최대의 서울권 위성도시로 성장했을 것이며, 영등포와 구로공단[10] 일대의 공업지대를 기반으로 직할시로 승격했을 여지도 있을지도 모른다. 공업지대라는 기반 덕분에 서울 바로 옆에 있는 위성도시치고는 자족기능을 어느정도 갖춘 도시가 되었을 것이다.광명시의 경우와 딴판 다만 인천과 다르게 해안도시와 같은 특수성은 없기 때문에 경기도 산하의 초대형 특정시로 남았을 가능성이 더 있었을 것이지만, 인구의 급속한 증가 문제 때문에 1980년대에 직할시로 승격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영등포시가 직할시로 승격했다면 1973년에 시로 승격된 안양시를 병합하는 형태로광산구의 영등포 버전? 시역이 확장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안양시 승격 대신에 시흥군 안양읍을 영등포시 남구로 편입했었을 수도 있었고... 한편으로 지금의 강남 지역은 서울 편입 대신에 경기도의 위성도시(베드타운) 개념으로 개발되었을지도 모른다. 1963년 서울 대확장도 정치적 힘겨루기 끝에 가까스로 단행된 것이라...
시역도 지금의 영등포구(대림동 포함), 동작구(신대방동 포함. 사당동 제외), 구로구 신도림동/구로동이상 영등포시 북구, 금천구, 관악구(남현동 제외) 일대이상 영등포시 동구 뿐만 아니라 지금의 광명시[11]영등포시 서구나 안양시영등포시 남구(or 안양구) 일대로 확장되었을 것이다. 본격 오리지널 시흥군의 부활? 그리고 옛 부천군 소사읍 동부 지역인 고척동, 개봉동, 오류동, 천왕동 일대도 지리적, 생활권상 문제로 영등포시에 편입되었을 수도 있었다.[12] 200만명대로 성장한 영등포시는 수원시 못지 않게 광역시 승격 문제로 시끄러웠을것이다. 물론 이미 직할시로 승격해버렸다면 그런 논란은 없었겠지만.
그러나 서울특별시의 행정구역 광역화 차원에서 서울 대확장이 단행되었을 경우 영등포시가 통째로 서울특별시에 병합될 여지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963년 서울 대확장도 정치적 힘겨루기 끝에 가까스로 단행된 것이라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 만큼 영등포시가 서울에 병합되는 확률은 높진 않았을 듯.
아무튼 영등포가 독자 승격했다면 시흥군의 역사도 지금보다는 덜 꼬였을 것이다. 영등포가 서울특별시의 일부가 아닌, 오리지널 시흥을 대표하는 독자적인 대도시로 존속했더라면 말이다.
6 대한민국
파일:Attachment/영등포구/역사/yeongdeungpo-1949 revised01.jpg
1949년에 현 영등포구 전 지역이 서울로 편입되었다.[13] 이는 1936년에 경성부로 편입되지 못한 시흥군 옛 북면 지역(1936년에 시흥군 동면으로 이관)이라는 잔여구역(지금의 대림동, 신도림동, 구로동, 신대방동) 정리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1963년 김포군 양서면과 양동면 전역[14], 부천군 오정면 2개리[15]와 소사읍 7개리[16], 시흥군 동면 3개리[17]와 신동면 전역[18]을 편입하여 서울특별시의 서남쪽을 모두 관할하는 큰 구가 되었다. 즉, 김포공항에서부터 양재동까지가 전부 영등포구 관할이었던 것.[19] 흠좀무
파일:Attachment/영등포구/역사/yeongdeungpo-1963 revised01.jpg
1963년 서울 대확장 당시 지금의 영등포구 지역 모습
파일:Attachment/영등포구/역사/seoul1963expansion.jpg
1963년~1972년까지의 서울특별시 행정구역 상황. 영등포구와 성동구가 정말 크고 아름답다
그 후 1973년 구의 동쪽이 관악구[20]로 분구되었고, 개봉동-시흥군 서면 광명리(지금의 광명시 광명동)쪽 경계가 미세조정되었다.
파일:Attachment/영등포구/역사/singil-daebang-boundary.jpg
1975년 관악구 대방동와 신대방동의 각 일부를 신길동에 편입하여(현재의 신길6동과 신길7동의 대부분 지역), 대방로를 기준으로 경계를 조정하였다. 또한 영등포구 독산동(현재의 금천구 독산동) 일부 역시 관악구 신림동에 편입되었다(현재의 행정동 조원동 일부).
1977년 구의 서쪽이 강서구, 1980년 구의 남서쪽이 구로구로 분구되어 오늘에 이른다. 이 때 영등포구에 잔류한 신도림동 지역은 대림동이 되었다. 구로구 분구 당시에 지금의 광명시 광명동과 철산동을 구로구에 편입시키는 안이 검토되기도 하였다.[21]
파일:Attachment/영등포구/역사/yeongdeungpo-1980 revised01.jpg
1980년 당시 영등포구 모습. 구로구, 강서구(양천구 포함), 관악구(동작구 포함), 서초구(분리직전 성동구 소속)가 영등포구에서 떨어져나갔다. 영등포구 분할 당시에 이미 관악구(현 동작구)로 넘어간 신대방동, 대방동, 노량진동 등지를 도로 영등포구에 편입시키는 안이 고려되기도 하였다.
파일:Attachment/영등포구/역사/yeongdeungpo-1995 revised01.jpg
1995년 이후 현재의 영등포구 모습- ↑ 지금의 대림동, 도림동 지역
- ↑ 사촌리(문래동) + 도야미리(신도림동) + 원지목리(도림동, 대림동) 통합
- ↑ 1936년 1943년 2번에 걸쳐 개편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대림동은 이때 경성부에 편입되지 못하여 시흥군 동면에 이관되었다. 대림동이 서울시에 편입된 것은 1949년.
- ↑ 도림리 중 지금의 문래동(구한말 사촌리), 도림동(구한말 원지목리 일부) 지역만 1943년에 경성부 편입
- ↑ 시흥군 도림리는 '영등포구 신도림동(新道林洞)'으로 편입됨
- ↑ 한편, 3년 전인 1911년 현재의 금천구 시흥동에 있었던 시흥군청도 영등포로 이전한다.
- ↑ 현재 대방천로
- ↑ 영등포에 거주하던 조선인과 일본인 주민들은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영등포의 경성부 편입에는 동의하지만, '지금은 아니다'는 입장을 보였다.
- ↑ 지금의 영등포구 일대를 차지하던 옛 시흥군 상북면, 하북면 일대는 저지대 범람원 지대로 홍수의 피해가 잦았던 곳이었다. 조선후기 인구 조사자료를 보면 조선후기 당시 영등포 일대의 인구가 지금의 광명시(서면), 금천구(현내면) 일대의 인구에 비해 훨씬 적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 ↑ 구로공단이 서울시 도시계획과 맞물려 개발된 건 사실이나 궁극적인 건설주체는 서울시가 아닌 중앙정부였고, 지금의 금천구 지역은 경부선 철도를 끼고 있기에 영등포권 지역이 서울시가 아닌 영등포시 소속이었더라도 구로공단 조성 계획이 지금과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 ↑ 지금의 광명시 지역이 서울 편입 예정지의 개념으로 주거지로 개발되었으나 서울 집중문제로 서울 편입이 무산되었던 점을 고려하면, 영등포가 서울특별시의 일부가 아닌 독립된 시로 존재했다면 광명시 승격 대신에 영등포시 편입 가능성이 매우 높았을 것이다. 즉, 이런 시나리오에선 '광명시' 자체가 아예 탄생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말.
- ↑ 여담으로 이들 지역은 부평도호부 수탄면이었다.
- ↑ 영등포에 있던 시흥군청은 1947년 안양면으로 옮겨갔다.
- ↑ 현재의 강서구 대부분과 양천구 전역
- ↑ 현재의 강서구 오곡동, 오쇠동
- ↑ 현재의 구로구 고척동, 개봉동, 오류동, 온수동 일대
- ↑ 현재의 관악구 봉천동, 신림동과 금천구 시흥동. 참고로 이 때 유일하게 남은 안양리는 지금의 경기도 안양시 석수동이 되었다.
- ↑ 현재의 서초구 대부분과 동작구 사당동, 관악구 남현동
- ↑ 이 때문에, 영등포구를 포함해 강서구, 양천구, 구로구, 금천구, 동작구, 관악구, 서초구가 '범(凡) 영등포 권역'으로 분류되는 것이다.
- ↑ 이와 함께, 방배동과 반포주공아파트 1단지를 제외한 지금의 서초구 일대가 성동구로 이관된다.
- ↑ 이게 무산되어 생긴 결과가 1981년 광명시 승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