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역사

1 연혁

1.1 삼국시대

마침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가 살 만한 곳을 찾아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열 신하가 간하였다.

"이 강의 남쪽 땅은 북으로 한수(漢水)를 두르고, 동으로 높은 산에 의지하며, 남으로 옥토를 바라보고, 서로는 대해가 막고 있으니 그 천험지리(天險地利)는 쉬이 얻지 못할 형세입니다. 이곳에 도읍을 짓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서 미추홀(彌鄒忽)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하남의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신하의 보좌를 받아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 삼국사기

고대부터 한강의 잦은 범람으로 땅이 비옥한 땅이었다. 수도로서의 최초 기록은 백제온조왕이 세운 위례성이다. 다만 현대의 서울시계 기준으로는 같은 서울이라지만 이건 서울시가 1963년에 광주군 땅을 편입하면서 들어온 것이지, 위례성은 한강 이남에 있어서 적어도 이후 조선의 수도가 되는 강북의 한양과는 완전히 다른 도시나 마찬가지였으며, 주지하다시피 백제의 기록이 워낙 개판이라서(...) 아예 위례성의 위치가 지금의 서울시계 내가 아니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때 이미 강남에 도읍을 정했다고 해놓고 13년에 소서노가 죽자 다시 강남에다가 도읍을 정한다. 강남에서 강남으로 제자리걸음 이 때문에 온조왕 원년의 위례성을 하북위례성, 13년의 위례성을 하남위례성이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지만 원년의 위례성도 '일단은' 기록상으로 하남에 있었다.

삼국유사에서는 원년의 위례성은 사천(蛇川)으로 지금의 천안시 직산읍이며, 13년의 도읍은 한산(漢山)으로 지금의 광주[1]라고 하는데 위례성 직산설은 이미 고고학적으로 부정되는 상황이고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사성(蛇城)의 존재로 비추어 원년의 위례성도 역시 한강 이남의 멀지 않은 곳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하튼 이 시기의 위례성은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송파구 일대로 추정되었으며, 이후 풍납토성몽촌토성이 발굴되면서 확실시된 상황. 후대로 오면서 그 주위로 영역이 확장되자 지금의 강남-강북과는 반대로 백제의 도심지인 강남은 한산(漢山), 부도심인 강북은 북한산(北漢山)으로 나뉘어 불리게 되었다. 중간에 근초고왕이 한강을 건너 북한산으로 천도하기도 했지만 26년 뒤 광개토왕이 백제를 개발살내고 아신왕의 항복을 받을 때 아리수를 건넌 것으로 보아 얼마 가지 못하고 진사왕이 찬탈하고 찬탈당하는 와중에 다시 강남으로 돌아온 듯하다.

그러다가 백제가 개발살나 웅진(공주)으로 쫓겨간 5세기 이래로도 지금의 서울 지역은 강남의 한산군(漢山郡)과 강북의 북한산군(北漢山郡)으로 고스란히 남았다.[2] 이러한 강남-강북 구도는 삼국시대가 끝나서도 강남의 한주(漢州)와 강북의 한양군(漢陽郡)으로 정리되었다.

1.2 남북국시대

통일신라9주 5소경한주(한산주) 소속이 되었다. 딱히 신라와 친한 관계는 아니었던 북방의 발해와 접한 국경선 전방 지역이었기 때문에 신라의 지방군인 10정을 9주 중 다른 8개 주에는 1정씩 배치했으나 한주에는 특별히 2정 배치했다. 김헌창의 난의 후속타로 아들 김범문이 북한산 아래에서 도적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으나 도독 총명에게 잡혀 죽었다. 후삼국시대에는 호족 함규의 영역이었는데 궁예를 거쳐 왕건에 복속됐고 함씨들의 조상이 됐다.

1.3 고려

강남은 광주(廣州), 강북은 양주(楊州)로 나뉘었다. 한편 문종 때에는 강북 지역이 남경(南京)으로 지정되어 양주와 대등해졌다. 이 때, 양주의 중심지는 현 광진구 일대였다.

남경은 풍수지리적으로 길지로 인정받아 문종숙종 연간에 천도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칭송받을 때는 오타쿠오덕구(五德丘)라고까지 불렸다고 한다. 이 오덕구란 중앙에 북악산(면악산), 북에 감악산, 남에 관악산, 동에 아차산(남행산), 서에 북악산(철마산?)이 오행에 걸맞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당시 남경의 범위는 오늘날로 치면 서쪽으로는 연세대 뒤의 안산, 동쪽으로는 동대문 일대의 낙산, 남쪽으로는 신용산, 이촌 일대까지였다고 한다. 충선왕 대에 다시 한양(漢陽)으로 개칭되었으며, 이후 한양이나 한성(漢城)이라고 불리웠다.

고려 말에는 더욱 천도하자는 분위기가 강해졌는데, 이유는 왜구의 준동으로 인해 수도 개경이 위협받는 상황이 계속 벌어지는 것과 예성강의 퇴적 현상으로 개경의 수운 활용이 난감해지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공민왕은 남경에 궁을 증축하려 했으며, 우왕 때는 일시적으로나마 왕이 남경에 거둥하였다. 공양왕 때에도 왕이 일시 머물렀으며, 서경과 마찬가지로 분사를 두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강북이 잘 나가기 시작하는 동안 강남은 여전히 광주의 깡촌(...) 신세로 남았고, 이 곳이 다시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려면 1980년대까지 천 년이 더 남아있었다.

강남, 강남>강북, 강북>강남, 강북, 강북/강남 정도 되려나(...)

1.4 조선~구한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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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 성저십리 지역은 빠져 있다(...).

조선시대를 거쳐 1394년(태조 3) 10월 25일(양력 11월 18일) 태조 이성계가 천도하였으나 1차 왕자의 난 이후 정종은 1399년(정종 1) 3월 7일(양력 4월 13일) 다시 개성으로 수도를 옮겼다. 그러나 태종 대인 1405년(태종 5) 10월 11일(양력 11월 2일)에 다시 서울로 옮겨왔고 이후 근 600년의 세월 동안 한반도의 중심지이자 최대도시 역할을 거침없이 수행해 왔다.

한양으로 천도할 당시에 수도 후보지로 꼽힌 곳이 무악(서울 신촌), 부평, 계룡(계룡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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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서울의 영역은 지금에 비해 좁은 것으로, 오늘날의 종로구, 중구 일대(이른바 사대문안[3])를 비롯하여 넓게 잡으면 용산구, 동대문구, 성북구, 서대문구, 강북구 일부(우이천 이남), 마포구 일부, 성동구 일부, 은평구 일부 일대[4] 까지 포함된다. 당시 조선에서는 서울(한양)의 범위를 표시하는 의미로 금표를 경계에 여러 개 설치했는데 대략 한강(용산포구)-마포-불광동-북한산-우이천-미아리-중랑천을 잇는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성저십리 참조.

한편 조선이 건국하면서 태조 대에 양주의 중심지는 현 광진구 일대에서 양주시 고읍동으로 이전되었다. 여담으로 조선왕조가 남경을 새도읍으로 삼으면서 그쪽 토박이들을 한성부 성저십리나 양주군으로 쫓아냈다는 얘기도 있다(...).

노원구, 도봉구, 중랑구, 광진구 일대 및 송파구 잠실/신천 일대, 강북구 일부(우이천 이북) 및 은평구 진관동[5]경기도 양주목, 서초구 일부분, 강남구, 송파구(잠실/신천일대 제외)[6], 강동구는 경기도 광주부, 마포구 일부(상암동 등)[7]경기도 고양군, 영등포구(여의도, 양화일대 제외), 구로구 동부(신도림동 등), 금천구[8], 동작구 일부(신대방동, 대방동, 상도동), 관악구 상당부분(남현동 제외)은 경기도 금천현(후에 시흥군), 동작구 일부(노량진, 사당동, 동작동, 흑석동), 서초구 대부분, 관악구 남현동은 경기도 과천현(후에 시흥군에 편입), 강서구 대부분과 양천구 일대, 영등포구 양화지구는 경기도 양천현(후에 김포군에 편입), 구로구 서부(고척동, 개봉동, 온수동 등)와 강서부 일부는 경기도 부평도호부(후에 부천군으로 개편)에 속했었다.

한양(서울)의 진산(鎭山)은 북한산(삼각산)이었다.

갑오개혁으로 인한 1895년 행정구역 대개편으로 양주군 고양주면 일부(대표적으로 오늘날의 중곡동 등 광진구 일부지역)가 한성부 두모방에 편입되었고, 성내 5부(部 : 동부, 서부, 남부, 북부, 중부)를 5서(署 : 동서, 서서, 남서, 북서, 중서)로 개편하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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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당시 서울 및 근교지역을 간략히 나타낸 지도.[9]

조선 당시 한성부 청사는 지금의 KT광화문지사 건물터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를 거쳐 건물이 아예 소실되어버렸다.

1.5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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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8월 9일에 만들어진 경성부 휘장.[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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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에 개정되어 해방 이전까지 통용된 경성부 휘장.[11]

공식 명칭 한성부(漢城府)[12]로서 경기도에 소속된 도시가 아닌 (오늘날의 서울특별시처럼) 독립된 도시였던 서울은 1910년 한일 강제병합과 함께 경성부(京城府)로 개칭되어 경기도의 한 도시로 격하되었다.[13] 이와 함께 5서(署)가 다시 5부(部)로 개편되고, 각 방(坊)은 면(面)으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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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당시 경성부. 1911년과 1914년 사이에 은평면 일부가 고양군 신도면으로 편입되었다 (현재의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효자동 일대).[14]

1914년 일제는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하여, 옛 한성부 성저십리 대부분을 경기도 고양군에 편입시키고, 옛 도성 안쪽(흔히 말하는 '사대문 안') 및 용산, 신용산의 일본인 거류지만을 경성부의 영역으로 축소시켰다.[15]

1914년 4월 1일 고양군에 편입된 경성부 8면 (옛 한성부 성저십리 8방) 지역

* 경기도 경성부 용산면, 서강면 (현 서울시 마포구 서강, 공덕 일대) : 고양군 용강면(용산의 '용'과 서강의 '강'을 따와 명명)
* 경기도 경성부 한지면[16] (현 서울시 용산구 동부, 중구 일부, 성동구 일부) : 고양군 한지면
* 경기도 경성부 숭신면, 인창면 (현 서울시 성북구, 강북구, 동대문구 일대) : 고양군 숭인면(숭신의 '숭'과 인창의 '인'을 따와 명명)
* 경기도 경성부 연희면 (현 서울시 서대문구 일부, 마포구 일부, 여의도) : 고양군 연희면
* 경기도 경성부 은평면[17][18] (현 서울시 은평구 일대, 서대문구 일부, 종로구 구기동과 부암동 등) : 고양군 은평면
* 경기도 경성부 두모면 (현 서울시 성동구 일대, 중구 신당동, 황학동, 광진구 일부): 고양군 한지면 및 뚝도면에 분할 편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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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당시 상황.크고 아름다운 고양군 고양군의 리즈 시절

경성부가 성벽을 벗어나 동서로 크게 확장된 것은 1936년 조선총독부의 '대경성계획(大京城計劃)'에 따른 것이었다.[19] 이로써 경성은 인구 60만을 돌파하여 일본 제국(만주국, 중화민국 등 해외 영토를 포함)의 7대 도시의 말엽으로 올라섰다. 1943년 최초로 구제(區制)를 실시하여 중구[20], 종로구, 용산구, 서대문구, 동대문구, 성동구, 영등포구의 7개 구가 설치되었고, 1944년에는 서대문구, 용산구 각 일부를 분리하여 마포구를 신설하였다.(8구)

1936년 4월 1일 경성부 행정 편입지역

(굵은 글씨 처리된 곳은 경성부에 재편입된 옛 한성부 지역)
*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 현 마포구 동부(공덕동, 아현동, 용강동 등), 여의도
*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 현 용산구 동부(한남동, 서빙고동, 이태원동 등), 성동구 중 중랑천 이서지역(왕십리 일대, 옥수동 등), 중구 신당동
*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일부 : 현 성북구 남부[21](동소문동, 성북동, 돈암동, 삼선동, 안암동, 종암동, 보문동), 동대문구 대부분(장안동 제외)
*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일부 : 현 서대문구 대부분(신촌 등), 마포구 홍대거리 일원[22]
*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일부 : 현 서대문구 홍제동, 종로구 홍지동, 부암동, 신영동
* 경기도 시흥군 영등포읍, 북면, 동면 일부 : 현 영등포구 대부분(대림동 제외), 동작구 대부분(상도동, 노량진, 흑석동, 대방동 등)[23]
* 경기도 김포군 양동면 양화리 : 현 영등포구 양화동[24]

1936년에 경성부가 확장될 당시에 시흥군 영등포읍에서는 일본인 유지들이 편입을 반대하였으나 조선총독부는 가볍게 씹었다(...). 당시 일본인 유지들은 경성부 편입이 아닌 영등포부 승격을 주장했다. 총독부가 영등포 지역 일본인 유지들의 반론을 씹은 데는 인천권의 경성부 추가 편입을 살짝 염두에 둔, '대경성계획'의 일환으로 영등포 지역의 경성부 편입을 추진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1920년대에도 영등포의 경성부 편입이 고려되기는 했지만 경성부 편입은 시기상조라는 지역 여론이 강했었고 1925년 한강 대홍수 사태로 사실상 편입 계획이 무산된 적이 있다. 그런데 1930년대 초반에 들어서면서 경성부 확장 초안에 노량진과 흑석동이 포함되었다가 갑자기 영등포도 경성부 편입 대상 지역에 포함되었다. 만약에 유지들 의견대로 경성부 편입대신 영등포부 승격이 이루어졌다면, 지금의 서울 서남부와 광명시 일대는 지금의 인천광역시마냥 서울특별시와 접하는 희대의 광역시급 서울 근교 위성도시가 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영등포의 경성부 편입은 서울 주변의 (사실상의) 위성도시가 서울에 병합된 거의 유일한 사례일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영등포구/역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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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경성부의 행정구역 확장 당시 상황.
경성부 내의 회색 점선과 괄호는 1943년 설치된 7개 구(區).

경성부 확장할 때 경성부의 경계를 결정 지었던 자연경계로는, 북쪽은 정릉천, 동쪽은 중랑천, 서쪽은 홍제천, 남쪽은 안양천과 대방천(상도천)이다.

1939년에 일제는 '경인(京仁) 일체화'의 목적으로(병참기지화의 목적이 짙었음) 당시 시흥군 동면(현 서울 금천구, 구로구 동부, 영등포구 대림동, 동작구 신대방동, 관악구 대부분), 서면 일부(현 경기 광명시 일부)[25], 부천군 소사면/부내면/오정면(현 경기 부천시, 서울 구로구 서부, 인천 부평구, 계양구 남부), 계양면(현 인천 계양구 북부), 서곶면(현 인천 서구), 문학면(현 인천 연수구, 부평구 십정동), 김포군 양서면/양동면(현 서울 강서구, 양천구), 고촌면(현 경기 김포시 고촌읍) 일대를 경성부에 편입시키는 방안(이른바 제2차 대경성계획)을 검토한 적이 있었다.[26] # 大擴張(대확장)되는京城府域(경성부역) 서울-인천 통합론의 일제시대 버전? 이러한 과감한 시역 확장 떡밥은 1970년에도 되풀이된다(...). 아무튼 경성부 추가 확장이 무산됨에 따라 경성부 추가 편입 검토지역[27]은 경인시가지계획지구로 잡혀 경인선을 따라 공업, 주거지역으로의 개발이 계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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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은 피지배국의 고도(古都)임에도 식민지의 행정 중심으로 선택되었다는 점에서 독특한 특성을 지니는데, 식민지의 중심은 철도망의 핵심이 되는, 새로 건설된 항구도시로 선정되는 것이 구미 식민지의 특징이라는 점에서 경성은 근린식민지로써 조선을 경영한 일본의 식민지 경영의 특수성을 보여주는 극적인 사례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서울에서 가까운 항구도시인천이나 일본 본토에서 가까운 부산이 행정 중심으로 선정되었을 것이다

비록 경성부는 경기도의 소속이었으나, 일본의 조선 경영에서 경성부는 언제나 특수성을 인정받았다. 기실 대한민국이나 일제시대이나 조선시대이나 서울은 곧 조선이었고, 일제시대에도 이는 변하지 않았다. 경성부의 일본인 거주지로는 남촌과 용산을 꼽을 수 있었다. 남촌은 남산 북면의 구릉으로써 조선 후기 이미 상인들의 거주지였으나, 1883년 이후 일본인 상인들이 경성에 이주하면서 일본인 거주지가 되었다. 당시 한성의 중심지가 북촌인 정동에 있었음에도 일본인들이 남촌, 그것도 끝자락에 거주한 것은 당시 조선은 청국에 의해 사실상 지배되고 있었기에, 상권 등 이권도 청국인들이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청일전쟁 승리 이후 조선에서 패권을 잡으면서 남대문 방면으로 영향력을 확대하였고, 러일전쟁 시기에 이르르면 남촌을 장악하였다. 용산은 크게 구용산과 신용산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 대부분이 한강변 모래톱이었던 곳이었다. 일본인들은 이 지대를 간척하여 거주지로 삼았고, 일본군이 용산에 주둔하여 철도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결과 20년대 이전 경성부는 북촌의 조선인 거주지와 남촌+용산의 일본인 거주지의 이중 도시적 모습을 띄었으며, 식민 행정부 당국은 기반 인프라 건설에 있어서 일본인 거주지에 대한 노골적인 특혜를 부여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 조선 총독부 신축, 경성부청 신축, 경성역 신축, 조선신사 신축 등 경성 및 식민지 조선의 행정중심이 남대문통의 북촌으로 이전하면서 경성의 이중 도시적 측면은 어느정도 해소되었다. 특히 기존 북촌의 동(洞) 행정체계, 남촌의 정(町) 행정체계로 이원화되었던 경성의 행정구역이 정(町)으로 일원화된 것은 식민지 당국이 조선 경영의 중심축을 이화(異化)가 아닌 동화(同化)에 두었다는 상징적 행위였다. 행정중심의 북상은 1925년 있었던 대홍수로 용산 등 한강변의 일본인 거주지가 큰 피해를 입었던 경험도 영향을 끼친것으로 보인다.

식민지 시기 일제에 의해 구한의 유적이 상당부분 훼손된 것은 사실이다. 특히 조선총독부 건축으로 인한 경복궁의 훼손은 당대 양식있는 일본인들에게도 지나친 행위라 비판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식민지 행정부가 피지배민의 반응을 도시계획에서 전적으로 무시한 것만은 아니었다. 일례로 총독부에서 혜화로 나가는 직선로(오늘날 율곡로)를 부설함에 있어서, 이 도로가 창덕궁과 종묘를 가로지르며 완전히 분리하였기에 일본은 창덕궁에 거주하던 순종이 사망하기 전에는 도로의 부설이 경성의 격자도로망을 구성하는 데 핵심이 됨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거부하였고, 사망 후에도 전주이씨 종친의 압박에 의해 창덕궁-종묘간 구름다리를 설치하여야 하였다. 총독부의 이런 소극적 태도는 3.1 운동의 경험에서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크게 자극시키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일전쟁 개전 이후 조선의 병참기지화가 가속화되면서 일본의 조선 경영은 더욱 가혹해졌고, 경성부에서도 그러하였다.

1.6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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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이후 현재(1995년)까지 서울특별시 행정구역 변천도[28] (과거 경기도 소재 서울시 도시계획구역[29][30] 포함)

유감스럽게도, 서울특별시의 경계 변천사를 다룬 지도들 간에 상당한 오류나 차이가 있다(...).[31] 심지어 서울시에서 발간한 자료, 도서에서 조차도 관련 오류가 왕왕보일 정도. 그 자료를 참고하는 위키러는 이점을 유의해두시길 바란다.

1947년 모습으로 추정되는 서울특별시 지도

1.6.1 서울특별시 출범과 1949년 추가 확장

해방 이후 1946년 미 군정청에 의해서 도와 동급의 "서울특별자유시"가 되었다. 영문으로는 'Seoul Independent City'였으나 한국인 직원이 '독립시'는 이상하다고 하여 번역과정에서 특별자유시로 번역한 것이다. 그리고 1948년 광복절 대한민국 건국 행사와 함께 한국의 수도가 되었다. 서울특별자유시 승격 이전에는 광복 이후 서울은 잠시 동안 경기도 서울시였다.

1949년에 광복절에 서울특별시로 명칭이 확정되고 경기도 고양군(現 경기도 고양시) 뚝도면, 숭인면, 은평면과 시흥군(現 경기도 시흥시 외) 도림리, 구로리, 번대방리 등[32]을 행정편입하여 시역(市域)을 확장하였다. 이 때 동대문구에서 성북구가 신설되었다(9구). 1949년 확장은 강북쪽은 1914년에 일제에 의해 고양군으로 넘어간 성저십리[33]를 도로 서울시로 되찾아오는 것이라는 의미와 영등포쪽은 1936년에 경성부로 편입되지 못한 시흥군 옛 북면 잔여지역[34]을 정리하는 차원이라는 의미가 있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1950년 6.25 전쟁 때는 한때 북한군의 점령 및 함락으로 대전부산에게 수도 지위를 이임하기도 했다. 부산에 더부살이했을 적에는 부산으로 피난온 서울시민들의 행정지원을 위한 기구인 서울특별시 부산출장소가 설치되기도 했었다. 그리고 휴전 후인 1955년에 수도 지위를 되찾게 되었다. 1958~1961년간 청계천 복개공사를 했다.

1949년 8월 15일 서울특별시 행정 편입지역

(굵은 글씨 처리된 곳은 서울시에 재편입된 옛 한성부 지역)
*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 현 은평구 대부분, 종로구 구기동, 평창동, 서대문구 홍은동, 마포구 서부(상암동, 성산동 등)
*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성북구 북부(정릉동, 길음동, 석관동, 장위동, 월곡동), 강북구 전역
* 경기도 고양군 뚝도면 : 현 광진구, 송파구 잠실 일대, 성동구 중 중랑천 이동지역(성수동 등), 중랑구 면목동, 동대문구 장안동
* 경기도 시흥군 동면 일부 : 현 영등포구 대림동, 구로구 구로동, 신도림동, 동작구 신대방동[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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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서울특별시 행정구역 확장 당시 상황. 이 시기에 편입된 동네는 '동'이 아닌 '리'로 편입되었으며 (예: 경기도 시흥군 동면 도림리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신도림), 1950년 3월 15일에 동으로 전환되었다.

6.25 전쟁 초기에는 미아리, 창동 일대에서 방어전투가 치열했는데 당시 그곳이 서울시의 경계였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면 미아리, 창동이 아니라 도봉동, 상계동, 의정부 호원동이었겠지... 당시 서울시 최북단은 우이동, 최남단은 구로동과 신도림동, 대림동이었다. (현재는 최북단은 도봉동, 최남단은 내곡동)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경 인민군이 전면 남침을 개시하면서 6.25 전쟁이 발발했다.

1.6.1.1 6.25 이후 부평·영등포으로의 수도 이전 떡밥

서울 수복 이후에는 강북이 군사적으로 전방지역에 있다는 문제와 전쟁으로 파괴된 서울 구도심을 복구하는 대신에 아예 한강이남의 새로운 땅에 신시가지를 조성하는 게 도시계획상으로 낫다는 의견이 대두되었기 때문에 기존의 서울 사대문안 지역은 역사적 상징으로 남겨두고 아예 수도를 지금의 부평[36], 부천[37], 영등포[38], 시흥[39] 일대로 옮기자는 논의가 나온 적이 있었다.

해당 블로그글 당시 기사 영등포와 부평은 한강이라는 거대한 자연장벽의 남쪽에 있어서 강북지역보다 수도 방위에 유리한 구조인데다가 영등포와 부평에 걸친 넓은 평야지대[40]는 신시가지 후보로서 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계획된 신도시의 예상 행정구역은 서쪽으로는 지금의 부평구, 동쪽으로는 지금의 금천구, 관악구 일대로 잡혔다. 만일 이 계획이 실행되었다면 전쟁 이전에 이미 서울에 편입된 지금의 영등포구, 구로구 동부, 동작구를 비롯하여 지금의 관악구, 금천구(안양 석수동 포함), 광명시(안양 박달동 포함), 강서구, 양천구, 부천시, 부평구, 계양구, 시흥시 북부 일대가 신수도의 행정구역에 편입되었을 것이다. 대신에 지금의 도봉구, 노원구, 강남3구, 강동구 일대는 그저 경기도로 남았을 듯 그리고 수도 서울에 둘러싸인 인천(...) 다시 말해 한때 일제가 경성부 추가 편입 대상으로 검토했던 지역들이 새로운 수도에 편입 될 수 있었던 상황.[41]

수도 서울을 북한한테 털렸던 기억이 너무나 생생했던 시대 상황 때문인지 이러한 계획에 서울특별시는 가시적인 반발대신에 새로운 수도 후보지 입지 조사에 협조하는 등의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당시 한국이 경제적으로 빈곤국이었던 한계[42] 때문에 이 계획이 무산되고 말았다.

1.6.2 1963년 대확장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서울특별시는 국무총리 직속이 되었으며, 서울특별시장은 국무회의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1963년에 서울특별시 면적의 대대적인 확장이 이루어져 오늘날 서울시 모양새의 기반이 되고 있다. 당시 정부가 서울시 편입 대상지를 물색하기 위해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지리학과에 지역 조사를 위탁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대규모로 확장하고나서도 뭔가 아쉬웠던지 1963년 9월 17일에 서울 편입을 염두에 두고 경기도 일부 지역도 서울시 도시계획에 포함시켰다.[43](건설부 고시 제547호 원문) 참고로 1963년 서울시 신규 편입지들이 서울시 도시계획구역에 편입된 것은 1963년 8월 28일이다.건설부 고시 제524호 원문

사실 1963년 서울 대확장에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서울 대확장 계획에 대해 박경원 내무부 장관과 자신의 땅이 뺏길 게 뻔한 걸 알만한 박창원 경기도지사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당시 윤태일 서울특별시장이 군사정권의 실세였다는 버프로 내무부 장관과 도지사와의 기싸움에서 승리하여 대확장을 단행했다는 설이 있다. 강남 개발을 담당했던 모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이때 서울 대확장이 단행 안 되었다면 강남 개발이 지지부진 했을 거라고... 그리고 시흥군 동면(지금의 금천구, 관악구)은 원래 서울시 편입 대상지가 아니었는데, 도시계획상 서울 편입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되어 서울 편입 대상지에 포함되었다고 한다. 추후에 서울시계 바로 옆 주거지로 개발될 시흥군 서면 광명리, 철산리, 하안리빼먹었던 건 에러

도시공학을 전공한 박사가 출연한 모 팟캐스트에 따르면 1960년대 서울 대확장 추진 초기에 당국에서 눈독을 들인 곳이 경인선 지역(부천, 광명북부, 부평, 인천 방면)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 방침이 바뀌어서 부천군 소사읍이 반토막난 채로 동부지역이 서울로 편입되는 데 그쳤다는 야사가 있었다고...

이때 경기도 김포군, 부천군, 시흥군, 광주군, 양주군 일대를 영등포구나 성동구, 성북구로 각각 편입하였는데 그 중 편입된 광주군 일대와 시흥군 신동면은 바로 오늘날의 강남 지역으로 성장하였다. 60년대 사이 인구가 250만에서 550만으로 두 배 이상 증가하면서 확장이 불가피해졌다. 이와 같은 인구증가 추세를 당국이 의식한 듯이 당시 시골이었던 강남, 강서, 노원 등지 또한 서울로 편입시킨 것으로 보인다.

한편, 1963년 성동구 면목동이 동대문구로 편입되었다.

1963년 1월 1일 서울특별시 행정 편입지역 및 경계 조정

*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서부[44] : 현 중랑구(면목동 제외)
*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 현 도봉구, 노원구 전역
*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신동면 : 현 관악구, 금천구 전역, 서초구 대부분, 동작구 사당동, 구로구 가리봉동[45]
*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동부 : 현 구로구 안양천 이서지역(고척동, 오류동, 개봉동, 온수동 등)
* 경기도 부천군 오정면 오곡리, 오쇠리 : 현 강서구 오곡동, 오쇠동
* 경기도 김포군 양서면, 양동면 : 현 양천구 전역, 강서구 대부분
*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전역, 대왕면 일부 : 현 강남구 전역, 서초구 내곡동, 신원동, 염곡동
*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 현 송파구 대부분(잠실 제외)
*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 현 강동구 전역 및 송파구 풍납동
* 성동구 면목동 : 동대문구로 편입

파일:Attachment/서울특별시/역사/1963.jpg
1963년 서울특별시의 행정구역 확장 당시 상황.
김포군, 부천군, 시흥군을 쳐묵편입해온 영등포구, 광주군을 편입해온 성동구, 양주군을 편입해온 성북구가 엄청나게 넓어졌다. 특히 성동구는 1975년까지 한강 남북에 모두 걸쳐있던 유일한 구였다.

1.6.3 1973년 구파발(진관동) 편입과 인접지역의 서울 편입 떡밥

1973년에는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일부가 서대문구로 편입되었고[46], 성북구에서 도봉구가, 영등포구에서 관악구가 분리 신설되었다.(11구) 이와 함께 영등포구 중 신동출장소 지역(방배동을 제외한 오늘날의 서초구 지역)을 성동구로 넘겨주었다.

1973년 7월 1일 서울특별시 행정 편입지역 및 경계조정

*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진관내리, 진관외리, 구파발리 (현 서울시 은평구 진관동)
* 경기도 시흥군 서면 광명리 (현 광명시 광명동)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개봉동 (현 구로구 개봉동) 간 경계조정

해당 법률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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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신도면 구파발(진관동) 일대 편입 및 도봉구·관악구 분구 당시 상황.

1975년에는 성동구에서 강남구가 분리 신설되었다.(12구) 이와 함께 각 구(區) 간에 행정구역 조정이 있었다. 아래 표에 언급되지 않은 동네인 신길동-대방동/신대방동, 안암동-제기동, 독산동-신림동 등에서도 자잘한 경계조정이 이루어졌다. 언급한 동네 간 경계가 직선화 된 것은 그 시기로 보면 된다.

1975년 서울특별시 각 구(區) 간 행정구역 조정

* 서대문구 구기동, 평창동, 신영동, 홍지동, 부암동, 무악동, 교남동 및 동대문구 숭인동, 창신동[47] : 종로구에 편입
* 서대문구 정동[48], 서소문동, 순화동, 의주로, 충정로1가[49], 중림동, 만리동 및 성동구 신당동 : 중구에 편입
* 서대문구 상암동, 중동, 성산동, 연희동 일부 : 마포구에 편입, 연희동 일부는 연남동[50]으로 신설
* 중구 동자동 : 용산구에 편입
* 동대문구 보문동, 도봉구 미아동 일부 : 성북구에 편입, 미아동 일부는 길음동[51]으로 신설
* 동대문구 용두동, 답십리동 각 일부 : 성동구에 편입하여 용답동[52] 신설
* 성동구 중곡동, 능동, 군자동 각 일부 : 동대문구에 편입하여 장안동 신설
* 영등포구 독산동 일부 : 관악구 신림동에 편입

1977년 영등포구에서 강서구가 분리 신설되었다.(13구) 1979년에는 강남구에서 강동구가, 서대문구에서 은평구가 분리 신설되었다.(15구)

1970년대를 거치며 550만에서 830만으로 인구가 급증하였다.

1970년 당시 양택식 서울특별시장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서울시 추가 확장을 건의하였는데, 당시 건의안에 포함되었던 편입대상 지역은(굵은 글씨는 서울시 도시계획구역이 아니었던 곳) 당시 시흥군 서면(현 광명시), 과천면(현 과천시), 안양읍(현 안양시)과 광주군 서부면, 중부면, 대왕면(현 성남시 일부, 하남시 일부, 광주시 일부), 부천군 오정면(현 부천시 오정구), 고양군 신도면, 원당읍, 지도면(현 고양시 덕양구)이었다. 기사 특히 시흥군 서면 광명출장소(현 광명시 철산동, 광명동)는 서울 개봉단지와 구로공단 계획과 맞물려 서울편입이 추진되었지만 결국 배제당한 역사가 있다.[53] 여담으로 1980년대 초반에 서울올림픽 요트 경기장 건설문제와 관련되어 당시 남양주군 구리읍 토평리(현 구리시 토평동)의 서울편입이 검토된 적 있었다. 기사 하지만 1973년 이후 '동' 단위 이상의 서울시 확장이 이루어진 적은 2015년 현재까지 없다.

1963년 서울시의 대대적인 확장과 함께 주변 경기도 일부 지역이 서울특별시 도시계획 구역에 편입되었다.도시계획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기 참조. 장기적으로는 서울시 행정구역 편입을 염두에 둔 지역이었으나 1973년 진관동 편입을 빼고는 끝내 서울시에 편입되지 못하였다. 서울 집중 문제 해소가 가장 큰 이유였고, 편입 예정지에 대한 부동산 투기 문제도 있었다.[54]

정부가 이들 지역의 서울 편입을 배제했을 정도로 서울 인구 분산에 집착했던 진짜 계기는 월남 패망으로 안보적 위협을 느낀 박정희 정권이 강북 인구의 강남 분산 정책에서 서울 인구 분산 정책으로 선회했다는 뒷말도 있다(...).

1980년대 이후 차례대로 서울시 도시계획 구역에서 해제되었고 1995년에 잔여 지역이 본격 해제될 당시에는 광명시 철산동 일부 월경지(현재의 광명롯데물류센터 자리와 1995년에 서울 가산동으로 편입된 철산3동 월경지)를 제외하고는 모두 해제되었다. 고양 신도지구, 광명, 과천 일대의 전화번호가 경기도의 031이 아닌 서울의 02인 것도 그 시절의 흔적인 셈.

1963년에 대대적으로 확장해놓고도 당시에 행정편입되지 않은 주변 경기도 일부 지역을 서울시 도시계획 구역에 포함시키고 아까 서술한 대로 1970년에 서울시장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접 추가확장을 건의한 것을 보면, 서울시가 1963년 대확장에도 성이 차지 않아 추가 확장할 생각은 조금이라도 있었던 모양.

서울특별시 도시계획 지구 편입지 (경기도 소재)

굵은 글씨는 1963년 도시계획 편입, 나머지는 1970년 도시계획 편입
* 경기도 시흥군 서면 철산리, 광명리, 하안리 (현 광명시 철산동, 광명동, 하안동)
* 경기도 시흥군 과천면 (현 과천시 전역)
*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현 고양시 지축동, 화전동, 삼송동 등 이른바 '지축-신도지구')[55]
* 경기도 남양주군 구리읍 갈매리 일부, 별내면 일부 (현 구리시 갈매동, 남양주시 별내동 일부)[56]
* 경기도 부천군 오정면 고강리, 원종리, 작리 (현 부천시 오정구 고강동, 원종동, 작동)

파일:Attachment/서울특별시/역사/greenbelt.jpg

자세한 것은 관련 자료 사이트를 참고하면 된다.

파일:Attachment/서울특별시/역사/seoulurbanplan-map-official.jpg
서울특별시 도시계획 구역 변천 지도

광명지구는 1982년에, 오정지구는 1986년에, 과천지구는 1991년에, 고양신도지구와 갈매지구는 1995년에 도시계획에서 해제되었다.

아래는 해당지역에서 서울시 도시계획 하에 조성된 것들 목록이다.

여담으로 서울근교 위성도시들 중 서울 편입떡밥이 잦은 동네는 광명, 구리, 과천, 하남이다. 이들 도시는 다른 위성도시(안양, 성남, 부천, 의정부 등)과 다르게 생활권 자체가 서울시에 거의 종속되어있기 때문. 역사적, 문화적으로도 다른 위성도시들의 경우보다 더 서울시에 가깝다. 특히 광명, 과천, 구리는 저런 떡밥때문에 인근 경기도 도시와의 통합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지금 현재 상황에서는 이들 도시가 서울시로 편입되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상당히 힘들 듯하다. 부천, 성남, 안양 등지는 서울 편입떡밥이 저 도시들보다 덜하지만 광명 등지가 서울시로 편입될 경우 이에 편승할 가능성은 있다. 해당 지역의 서울 편입 떡밥에 대해서는 행정구역 개편/경기권의 해당 단락 참조.

1.6.4 1980년 이후

1980년 관악구에서 동작구를 분리하고, 이와 동시에 방배동을 강남구로 이관했다. 이 때 사당동 중 남부순환로 이남 지역은 관악구에 잔류하여 남현동이 되었다. 그리고 영등포구에서 구로구가 분리 신설되었다. 이 때 신도림동 중 도림천 동쪽 지역은 영등포구에 잔류하여 대림동이 되었다.(17구)

1984년까지만 해도 서울 강남지역은 군사적 의미에서는 온전히 '서울'은 아니었는데, 수도경비사령부(현 수방사) 위수지역이 서울 강북지역뿐이었고, 강남지역은 경기도(전방 6군단 지역 제외)[61]와 인천을 관할하던 6관구사령부(현 수도군단) 위수지역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1984년에 수도경비사령부가 수도방위사령부로 확대 개편되면서 위수지역이 서울시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1988년 1월 1일 강서구에서 양천구, 강남구에서 서초구, 도봉구에서 노원구, 동대문구에서 중랑구, 강동구에서 송파구가 분리되었다(22구).[62][63]

1988년에는 서울 인구가 1000만명을 돌파했고, 1992년에는 1090여만명으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하였다.

1995년 성동구, 도봉구, 구로구에서 각각 광진구[64], 강북구, 금천구[65]가 신설되고, 광명시 일부가 금천구에 편입된 것을 끝으로 더 이상의 확장은 없었다. 1992년 1097만 까지 증가한 인구는 이를 정점으로 감소하여 2014년 기준으로 1010만 까지 줄었다. (물론 여전히 많지만) 관할 구의 개수는 여전히 25개다.

1995년 3월 1일 서울특별시 행정 편입지역 (경계조정 차원)

자잘한 경계조정차원에서 소규모의 추가 편입이 이루어진 것.
* 경기도 광명시 철산동 일부 (현 서울시 금천구 가산동 일부)[66][67]
* 경기도 광명시 하안동, 소하동 일부 (현 서울시 금천구 독산동, 시흥동 일부)[68]
* 경기도 광명시 광명동 일부 (현 서울시 구로구 개봉동, 천왕동 일부)[69] : 이쪽은 안양천변, 창릉천변 주변과 달리 1:1 교환이다.
* 경기도 고양시 지축동 일부 (현 서울시 은평구 진관동 일부)

1995년 경계구역 조정 법률 원문

그러나 광명시 쪽 경계 문제는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안양천, 행정구역 개편/경기권/광명시 서울편입 항목 참조.

1995년 행정구역 대개편을 앞두고 서울특별시 분할안이 검토된 적이 있었다. 서울특별시를 서울시(강북), 영등포시, 강남시 이런 식으로 쪼개자는 것. 물론 서울쪽의 반발이 뻔히 나왔고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서울 분할은 없다"고 일축하는 바람에 이 떡밥이 쏙 들어가버렸다. 노무현 정부때 이와 비슷한 떡밥이 거론된 적이 있었다. 당시 서울시 행정구역 개편 떡밥 및 현재까지 이루어지는 서울시 행정구역 개편 문제에 대해서는 서울특별시/행정구역 개편 문제 참조.

2008년에는 몇몇 법정동이 통합되었다. 노유동, 포이동, 모진동 등이 이때 사라졌다.

그리고 2015년 12월 7일, 위례신도시와 관련한 행정구역 경계 조정이 실시되었다. 이로써, 1995년 안양천변 경계조정 이후 20년만에 서울시 경계가 소폭 변경되었다. 관련기사

2015년 12월 7일 서울특별시 행정 편입지역 (경계조정 차원)

자잘한 경계조정차원에서 1:1 교환 형식으로[70] 소규모의 추가 편입이 이루어진 것.
*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복정동 일부
* 경기도 하남시 학암동 일부

하지만 이미 문제가 해결된 위례신도시쪽을 제외한 몇몇 서울시계 지역에서 아직도 경계 문제를 둘러싼 지자체간 갈등은 진행 중.

1992년의 절정을 끝으로, 1993년부터 서울 인구가 점차 줄어들더니 2003년에 경기도 인구에 역전당했고, 2016년 5월에 1000만명의 선이 28년만에 깨졌다.

일제강점기 관동 대지진으로 일본의 수도 도쿄가 폐허가 되자 수도 천도 논의가 있었는데, 그 중엔 서울 혹은 용인 모현면 외대캠퍼스 부지 일대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지진 이후로도 수도 천도 논의가 진지하게 이루어진 적도 있었으며, 일제의 본토 사찰단이 서울 및 용인이 일제의 수도로 적합한지 여러가지 시찰을 행한 적도 있었다.

항공사진의 변천을 보고 싶다면 여기로 들어가면 된다. 허나 인천시와 다르게 서울시는 전산시스템의 문제 때문인지 항공사진 조회 절차가 복잡하다(...).

2 명칭의 유래

2.1 '서울'과 '특별시'

1920년 4월 1일자 동아일보 창간호를 보면 창간호부터 신문의 영문 타이틀을 보면 THE DONG-A DAILY,SEOUL, 즉 경성의 일본식 표현인 'KEIJO'가 아니라 'SEOUL'로 표기하고 있고 동 창간호에서 '서울호텔'이라는 등의 '서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1920년 4월 2일자 제2호의 영문기사에서도 seoul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해방 후 미 군정은 1년이 지나도록 서울의 명칭에 관해서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일제가 지은 '경성부'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일본인들이 떠나가고 한국인만 남게 된 경성부 직원들이 자체적으로 왕이 살던 도읍을 뜻했던 '서울'이라는 우리말을 써서 '서울'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는 했으나 그냥 자기들끼리 그랬던 것이고 공식적인 것은 아니었다. 공식적으로 서울이라는 이름이 최초로 사용된 때는 미 군정청이 1946년 8월 15일 발표한 '서울시 헌장' 이고 '서울특별시'란 이름이 법적 효력을 갖게 된 것은 미 군정청이 1946년 9월18일 '서울특별시의 설치'라는 군정법률 제106호를 공포하고, 그해 9월 28일 법이 발효되면서부터다.

서울시가 '특별시'가 된 이유는 미 군정이 서울을 경기도에서 분리시킨 뒤 지방자치제를 시행하려고 하면서 미국 각지에서 시행되고 있던 '독립시(Independent City)' 제도를 참고했는데[71] 원래 영문으로 작성됐던 군정법령을 직역하면 `서울독립시(Seoul Independent City)'가 돼 어색했기 때문에 결국 '서울특별시'로 번역한 것이다.[72] 원문에는 분명히 경기도에서 서울을 분리한다라는 의미를 사용하였다. 결국 번역하는 과정에서 특별이란 말을 적은 것. 지방행정학계에서는 희대의 병크오역으로 취급한다. 덕분에 일부 지방출신이 수도권-지방간 격차문제를 지적할 때 "왜 서울특별시만 '특별'하냐?"는 지적의 빌미를 남겨두게 되었다(...).

2.2 개칭 주장

그러다 보니까 이 이름을 바꾸자는 주장도 지금까지 있다. 1955년 조선일보에서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수도 이름을 그냥 수도라는 뜻을 가진 서울은 엉터리 이름이라면서 바꾸자고 주장했는데 서울은 원래 '수도'라는 의미를 가진 일반명사였다. 수도(首都), 도읍(都邑), 경(京) 등과 같은 의미를 가진 순우리말 단어였던 것이다. 한 마디로, 병원종합병원, 대학대학교 같은 단어가 고유명사로 쓰인다고 상상해보면 최현배 선생의 기분을 체험할 수 있을 것 같다.[73]

그래서, 당시 대통령인 이승만도 새로운 이름을 지으려고 국회에서 논의를 했으나 제시된 이름들이 영 아니었고 심지어 이승만 호였던 '우남'으로 밀어붙이려는 아첨배 정치인들까지 있었다. 사실, 이승만도 우남에 대하여 별다른 거부감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야당에서 "북한조차도 평양을 김일성의 이름이나 상징하는 말로 바꾸지 않았다."라면서 "북한에서 이승만이 왕으로 집권하는 나라라고 실컷 욕이나 할 짓을 스스로 만든다"라고 비아냥거리자 결국 흐지부지되었다. 그러나, 정작 이승만은 '우남'으로 정하자고 주장했던 적은 없었고 직접 내세웠던 이름은 한양에서 따온 '한도(韓都)'였다.

당연히, 외솔 최현배 선생도 반대를 했고 결국 그대로 서울이란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결정하면서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오늘날에는 오히려 고유명사로 사용되기 때문에 서울이라는 단어자체가 일반명사 서울이라는 단어를 대체하게 되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이란 말이 일반명사의 의미가 남아 있었지만, 젊은 층에게는 "워싱턴은 미국의 서울(수도)입니다." 같은 문장이 굉장히 어색하게 느껴진다. 사실상, 서울이 "수도"라는 의미가 사라지게 된 것이다.[74]

3 관련 항목

  1. 광주광역시가 아니라 경기도 광주시. 지금은 분리됐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강남구, 송파구, 강동구, 성남시, 하남시 등이 모두 광주 산하에 있었다.
  2. 단, 지금의 강서구-양천구 일대는 제차파의(조선시대 양천군), 구로구 서부는 주부토(지금의 부평, 부천), 금천구-관악구-영등포구(+광명시) 일대는 잉벌노(조선시대 시흥), 서초구-동작구(+과천시, 안양시, 군포시) 일대는 동사힐(지금의 과천) 소속으로 이어졌다. 이들이 서울에 편입되는 것은 후술하겠지만 현대에 들어와서의 일이다.
  3. 종로구, 중구 전역이 사대문 안은 아니다. 물론 과거에는 그러했지만 주변 지역을 편입하여 사대문 밖의 일부 지역도 종로구, 중구 관할구역이다. 예를 들자면 동대문구에서 편입된 종로구 창신동, 숭인동, 서대문구에서 편입된 종로구 행촌동, 구기동 일대, 성동구에서 편입된 중구 신당동 등. 그래서 동대문이 동대문구에 없고 서대문(터)가 서대문구에 없는 것이다.
  4. 보통 사대문안만을 진짜 서울로 치는데, 아주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인근 10리 이내 지역도 서울이었다는 것을 명심하자. 하지만 사실상 주택과 상점이 들어선 시가지인 사대문 안과 근교 농어촌 분위기라서 단순 행정구역상만 한성인 성저십리 지역은 환경상 구분된다.
  5. 신혈면이 양주에서 고양으로 넘어간 것은 1906년
  6. 1914년에 잠실/신천 일대가 고양군 편입. 여기에 대해 부연한다면 당시의 한강은 지금의 잠실 인근에서 마치 여의도 부근처럼 중간에 섬을 두고 위/아래로 흘렀다. 위로 흐른 개울은 지금의 한강이고 아래로 흐른 개울은 지금의 석촌호수 부근이다. 그런데 1914년 당시에는 위쪽보다 아래쪽이 더 넓어서 아래쪽 경계를 강북/강남 경계로 보았고 그 결과 지금의 잠실지역(석촌호수 북쪽)이 고양군으로 편입된 것이다. 이후 물길의 변화로 위쪽 강이 더 넓어졌고 결국 1970년대 잠실지구 개발 당시 아래쪽 강은 아예 매립해서 강(개울)으로의 역할이 소멸되고 그 흔적으로 석촌호수 정도를 볼 수 있다.
  7. 그러나 한성부, 고양군 여부는 자료마다 분분하다.
  8. 당시 금천/시흥군 동면 지역으로 금천/시흥의 중심지였다.
  9. 옛 포이동 쪽에 광주군-과천군 간 경계 오류가 있다.
  10. 이 휘장은 도성 주의에 경계선을 두르듯 원을 그렸다. 선에서 튀어나온 모양은 도성 주변이 산에 둘러싸였음을 뜻한다. 그 안에 경성부의 '京(경)'자를 넣었다. 이러한 전체적인 모양은 1996년 이전의 서울시 휘장에 까지 반영되었다.
  11. 도성에 경계를 두어 둘러 막은 것이 발전하는 경성부의 모습을 상징하기에 부족하고 미술적인 효과도 떨어진다하여 개정하였었다. 전체적으로는 경성부의 '京(경)'자를 도안화한 것으로 위에 있는 山(산)은 북한산을, 아래의 山은 남산을 뜻하며 가운데의 작은 원은 경성부의 시가지를 의미한다.
  12. 1895년 행정구역 대개편 때는 한성부 산하의 한성군으로 변경되었다가 1년만에 도로 원상복구.
  13. '경성'이란 표현은 고려, 조선 시대에도 쓰였다. 다만 이 경우는 고유 지명이 아닌, 한 나라의 임금이 거하는 '수도(서울)'라는 의미로 쓰였던 것. 여하간 '서울'이란 이름도 이 경성의 직역 또는 그 연장선에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분명한 것은, '경성(게이조)'이란 이름이 일본이 만든 신조어는 아니라는 점. 당대 명백한 성곽도시였던 서울의 모습이 '京+城'의 명칭을 당연시하게 했을 가능성이 있다.
  14. 1911년 즈음에 발행된 '경성부전도'에 따르면 두모면 지역 중에 구한말에 성저십리로 신규 편입된 지역(광진구 서부 지역)은 양주군 고양주면과 통합하여 뚝도면으로 개편되었고, 문제의 은평면 일부가 고양군 신도면으로 이관되고, 난지도가 경성부 행정구역에 슬그머니 포함되는 내용이 담겨있다. 그리고 우이동, 장위동, 수색동(지금의 은평차량기지 자리)쪽에 미세한 경계조정이 이루어졌다.
  15. 참고로 '사대문 안'은 아니었지만 경성부 관할로 남게된 곳은 동대문 바로 바깥 동네였던 숭인동과 창신동, 서대문과 서소문 바로 바깥 동네였던 무악동, 천연동, 만리동 등, 그리고 마포나루가 있던 마포동과 도화동 등이 있다.
  16. 옛 한강방(漢江坊)의 '한'과 둔지방(屯芝坊)의 '지'에서 따온 것.
  17. 옛 연은방(延恩坊)의 '은'과 상평방(常平坊)의 '평'에서 따온 것.
  18. 다만 북한리는 고양군 신도면에 편입되었다.
  19. 1949년 서울특별시 확장 이전까지 경성부 시가지였던 곳은 동네 이름에 '~가'가 붙는 경우가 많다(보문동1가, 한강로2가, 문래동3가 등).
  20. 당시 일본인들이 현재의 중구 지역에 많이 거주하였기 때문에, 전통적인 서울의 중심지였던 종로구 대신 이 지역을 '중구'로 명명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21. 즉, 정릉천 이남
  22. 연희면의 나머지 영역은 은평면에 편입되었다.
  23. 북면의 나머지 영역은 동면에 편입되었다.
  24. 현재의 인공폭포와 선유도 일대에 해당된다.
  25. 지금의 광명시 광명동, 철산동, 하안동 일대 및 소하동 북부
  26. 만일 이러한 경성부 추가 대확장이 단행되었다면 지금의 부평, 부천, 양천 일대는 드넓은 평지를 기반으로 강남급의 어마어마한 번화가로 개발되었을 것이다. 그랬으면 강남은 지금도 언주면 깡촌으로 남았을지도?
  27. 단, 이중에서 부평구 및 계양구 남부, 서구 지역은 1940년 인천부 편입에 따라 경인시가지계획지구와 별개인, 인천부 시가지계획구역(현재의 인천광역시 도시계획구역)으로 편입되었다.
  28. 참고로 1911년 경성부의 영역은 영등포와 잠실 부분을 빼면 1949년 서울시의 영역과 거의 비슷하다.
  29. 이들 지역은 한때 서울특별시 행정구역으로의 정식 편입이 고려된 적이 있다. 이들 도시계획구역은 1982년(광명시 북부), 1986년(부천시 오정), 1990년(과천시), 1995년(고양시 신도, 남양주시 별내, 구리시 갈매)에 차례대로 해제되었다.
  30. 1936년 상도천 및 반포동쪽과 1949년 잠실쪽 사소한 경계 오류는 넘어가자.
  31. 예를 들면, 서울시에서 발간한 역사 관련 서적에 실린 지도에서는 1973년 진관동 서울 편입 내용이 누락되었다든지, 몇몇 중고교 지리부도에서는 구한말 한성부의 경계로 1914년에 축소된 경성부의 경계를 써먹는다는지(...).
  32. 현재의 구로구 구로동, 신도림동, 영등포구 대림동, 동작구 신대방동 일대까지
  33. 단 신도면 북한리, 효자리 지역은 재편입되지 못하였다.
  34. 1936년 영등포의 경성부 편입으로 시흥군 북면의 잔여지역인 지금의 구로동, 신도림동, 대림동, 신대방동은 시흥군 동면으로 이관되었다.
  35. 도림리와 번대방리(대방동)가 1936년과 1949년에 나뉘어서 편입되었기 때문에, 1949년에 편입된 지역에 '신'자가 붙게 된 것이다.
  36. 구 부평도호부 지역 중 1940년 인천으로 편입된 곳
  37. 지금의 시흥시 북부(구 소래읍) 포함
  38. 지금의 영등포구, 구로구 동부, 동작구 일대. 다만 영등포(대림동, 구로동, 신대방동, 신도림동 포함)는 이미 행정상 6.25 이전에 서울특별시로 편입된 상태였다. 그러나 당시의 영등포는 행정구역은 서울 소속이었으나, 당시만 해도 독자적인 지역정체성이 남아있었다.
  39. 지금의 금천구, 관악구, 광명시 일대. 1963년 서울 대확장 이전에는 '시흥'이라고 하면 보통 지금의 금천구 일대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았다.
  40. 부평평야. 영등포 일대의 평지도 부평평야의 일부다.
  41. 이들 지역을 서울특별시와 별개의 행정구역으로 만들기보다는, 서울특별시에 편입시키고 경무대, 서울시청 등의 주요 관공서를 신수도 지역으로 이전하고 기존의 강북지역은 이름만 서울특별시 행정구역으로 남기는 식으로 했을 가능성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42. 단순한 저개발국이 아니라, 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식량 원조로 버텨내기에도 빠듯한 상황에 거창한 도시계획 따위는 꿈도 꿀 수 없었다는 얘기다.
  43. 신규편입지가 서울시 행정구역 편입과 동시에 서울시 도시계획구역에 편입된 것은 아니다. 행정구역은 내무부(현 안전행정부), 도시계획구역은 건설부(현 국토교통부) 소관이기 때문.
  44. 이는 1914년 구지면과 망우리면이 구리면으로 통합되기 이전, '망우리면'의 영역에 해당된다.
  45. 동면 중 유일하게 편입되지 않고 남은 안양리는 안양읍으로 편입되어 '신안양리'가 되었다가, 안양시 승격과 함께 석수동이 되었다.
  46. 현재의 서울특별시 경계선이 완성된 때가 바로 이 때이다. (1995년의 안양천, 창릉천 과 2015년의 위례신도시쪽 경계 미세조정을 제외하면)
  47. 이로서 흥인지문이 동대문구에서 종로구 영역 내로 편입되게 되었다. 현재 동대문구에 동대문이 없는 이유가 이 때의 조정 때문.
  48. 덕수궁이 있는 동네이다. 즉, 이때까지만 해도 서울시청 바로 코앞까지가 서대문구 관할이었다.
  49. 충정로2~3가는 서대문구로 남았다.
  50. '연'희동의 '남'쪽이라 하여 새로 이름지었다.
  51. 미아동(혹은 미아리)이라 하면 흔히 그 유명한 '텍사스촌'을 떠올리는데, 사실은 바로 이 길음동에 있다. 길음동이 과거 미아동의 일부였기 때문.
  52. '용'두와 '답'십리에서 한 글자씩 따왔다.(...)
  53. 서울 편입 배제의 결과가 1981년 광명시 승격.
  54. 2014년 해양수산부 장관 인선때 장관후보자가 1970년대 말에 지금의 광명시 지역의 땅을 사둔 전력때문에 투기 논란이 있었다. 해당 후보자가 광명시(당시 시흥군 서면) 땅을 사두었을 시절에는 당국이 광명리, 철산리의 서울 편입 여부를 두고 갈팡질팡했었고 부동산 업계에서는 해당 지역의 서울 편입설이 나돌았었다.
  55. 도시계획 지구 통틀어 현재의 진관동만이 1973년에 서울시에 행정편입
  56. 이쪽은 다른 곳과 다르게 1970년 5월경에 서울시 도시계획 구역에 편입되었다. 육군사관학교 부지 확장과 관련하여 도시계획 구역으로 편입.
  57. 물론 한진아파트랑 철산동 재건축 아파트 자체는 서울도시계획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은 아니고 이러한 단지들의 전신에 해당되는 옛 주공아파트단지들이 서울시 도시계획의 일부로 조성되었다는 뜻.
  58. 원래는 지금의 철산동, 하안동 일대에 구로공단 근로자를 위한 대규모 아파트 단지 조성이 예정되어있었으나 당시 시흥군 서면 북부지역의 서울 편입이 무산되면서 지금과 같이 소규모 단지로 축소된 것
  59. 서울시도시계획에서 해제된 1983년 이후에 기획, 공사된 것이니 직접적으로는 해당안되지만 서울시 입김이 많이 들어가는 분야이기에 간접적으로 포함
  60. 과천, 광명쪽과 다르게 죄다 혐오시설만 박아 놓았다(...)
  61. 1.21사태 때 6관구사령관 김재규 소장이 서부전선을 제대로 방어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탈탈 털린 것도 이와 관련.
  62. 이 때 도봉동과 창동은 노원구에 도봉구에 도봉동이 없다니, 도곡동은 서초구로 보냈으나, 1년 만에(1989년) 도봉동과 창동은 도봉구로, 도곡동은 강남구로 환원되었다.
  63. 80년대 주택가가 형성되었던 목동 지역의 대문들에는 서울특별시 강서구 목동이라는 패찰이 붙어 있는 곳이 2015년 현재, 아직도 많다. 그 패찰들은 모두 80년대부터 붙여진 아주 오랜 유물인 것
  64. 성수동 중 동일로 동부 지역은 노유동이 되었다가 2008년 8월 자양동에 흡수되었다.
  65. 가리봉동 중 남부순환로 이남 지역은 금천구 가산동이 되었다.
  66. 지금의 한진택배 물류센터, 국민일보 인쇄공장 등 철산교 서울방향 인근. 구로쪽에 유수지 일부와 지금의 롯데물류센터(당시에는 정비소나 공장이었다) 자리는 서울에 편입되지 못했다. 참고로 지금도 일부 지도는 1995년 경계 조정 이전의 경계를 쓰는 경우가 간혹 보인다(...).
  67. 엄밀히 말하면 안양천 쪽은 경계조정이라기 보다는 철산3동 월경지가 서울시에 편입된 것에 가깝다.
  68. 안양천 둔치내부의 구불한 경계를 조정한 것. 다만 그 문제의 독산동(12단지옆 근린공원, 안천중, 안천초, 독산한신 등)은 서울로 계속 남게되었다.
  69. 1973년 목감천쪽 경계조정 당시에 정리되지 못한 일부 경계를 조정한 것. 너무나 자잘하게 꼬여서 그런지 1995년 경계 조정때는 안양천쪽과 다르게 주민들의 별다른 반대가 없었다.
  70. 서울특별시 송파구 거여동과 장지동의 각 일부가 경기도로 넘어갔다.
  71. 미국은 워싱턴 D.C.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뉴욕이나 시카고처럼 아무리 큰 도시라고 해도 카운티(county)와 주(state)가 따라붙는다. 우리로 치면 부산광역시라고 해도 경상남도 부산 카운티 부산시... 이런 식이 되는 셈. 그런데 간혹 시(city) 가운데 어떠한 카운티에도 속해 있지 않은 경우가 있는데 이런 시가 바로 독립시이다. 그러나 독립시라고 해도 결국에는 주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수도로서의 개념을 제대로 살리려면 워싱턴 D.C.처럼 서울특별구역(District of Seoul)이라는 개념을 만드는 것이 더 정확했다고 여겨진다. 존 하지도 그렇고 당시 미군정이 뭐 아마추어였지만.
  72. 사실 한자 뜻만 보면 아주 틀린 소리는 아니다. 特(달리하다), 別(나누다).
  73. 하지만 서울숲의 '서울'이 이 일반명사 서울이라고 해석할 수는 있다. 고유명사 서울 안에 있는 숲이 아니라, 일반적이면 최대한도로 개발되기 마련인 한 나라의 수도 안에 숲이 있다는 의미로... 그러나 현재는 그렇게 사용하지는 않는다.
  74. 비유문으로 알아들을수는 있을지언정, 서울이라는 단어가 일반 명사라고는 알지 못할것이다. 하지만, 꼭 어색하게 느껴진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우리나라 고전소설들만 많이 읽어봐도 일반명사로서의 서울이 많이 사용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젊은층이 책을 잘 읽지 않는단 사실은 차치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