永宣君
1870-1917년
이전의 조선식 초상화 기법과는 다르게 얼굴이 그려진 영정. 쓸데없이 리얼하다
조선의 왕족이자 대한제국의 황족이자 친일파이자 천하의 개쌍놈. 본명은 이준용(李埈鎔), 자는 경극(景極), 호는 석정(石庭)과 송정(松亭). 고종의 친조카이면서 동시에 고종의 강력한 정적이었다. 고종의 옆에 명성황후가 있다면 흥선 대원군의 옆에는 영선군이 있었다고 할 수 있을까.
흥선 대원군의 장남 흥친왕 이재면과 첫 부인 남양 홍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밑으로 동생 이문용이 태어났지만 20세에 요절하여 독자나 다름없는 처지가 됐다.
이래도 응 저래도 응 하는 아버지 흥친왕이나 부인에게 조종당하는 고종과는 다른 호탕하고 활달한 성격과 시원시원한 대답과 사소한 꾸중에도 굴하지 않는 성격이 흥선대원군의 마음에 들었다고. 그덕에 흥선대원군은 아들 흥친왕 대신 손자인 영선군에게 더 큰 기대를 걸었다 한다. 죽기 직전에 대원군이 사이가 틀어진 아들 고종을 찾았던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 전에 "준용이는 어디 갔느냐"며 영선군도 애타게 찾았다고 한다.[1]
1884년 개화파 내각에 의해 관직에 오른 뒤 다음해에 과거에 급제하여 규장각과 예문관에서 여러 벼슬을 지낸다. 그러나 1874년 권좌에서 축출당한 흥선대원군은 1881년 이복 삼촌 이재선을, 1885년 흥친왕을 왕으로 앉히고 다시 섭정을 하려는 쿠데타를 기도했으나 실패하자, 이때부터는 영선군에게 기대를 걸고 영선군을 왕위에 앉히려고 노력했다.[2]
영선군은 할아버지인 대원군이나 유길준보다는 덜 적극적으로 협력했지만 삼촌 고종의 눈밖에 나서 명성황후 암살의 조선인 협조자 중 한사람으로 지목되어 일본으로 망명 아닌 망명을 하였다고 한다.
1899년에는 흥선대원군도 사망한 이후였지만, 여전히 존재했던 대원군 파벌에 의해서 영선군을 추대하는 쿠데타 시도만 3건이 발각된다.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에게 영선군의 입국 허락을 요구하지만, 고종은 끈질기게 거부했다고 한다. 오히려 1904년에도 일본에 있던 반역자 14인[3]을 송환하라고 요청하는 일까지 있었다. 그래서 고종 강제 퇴위 직전인 1907년 7월 중순에야 거의 밀입국의 형태로 귀국했다. 정식귀국 허가가 나온 것은 고종 퇴위 이후였다.[4]
이후 영선군은 자신이 황제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잠시 품었지만[5] 을사늑약으로 모든게 다 헛것임을 알게 되면서 좌절하고, 이후 친일파로 전향한다[6][7].
1909년부터 1910년까지 친일 단체인 신궁봉경회 총재를 맡아, 한국의 건국 시조인 단군을 일본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아마테라스에 부속되는 구도로 신궁에 함께 배치하여 한국 역사를 일본 역사에 종속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추진한 바 있다. 1910년 영선군(永宣君)에 봉해지고 보국숭록대부에 승진, 대한제국 육군 참장이 되었다.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에는 조칙에 따라 아버지 이재면이 이희공(李熹公)에 봉해졌는데, 이재면이 곧 사망하자 이준(李埈)으로 개명하고 공위를 계승하여 이준공(李埈公)이라는 호칭을 받았다. 1912년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두 차례나 결혼했지만 자식이 없어서 흥친왕의 대가 단절되나 싶었지만 간신히 첩 전순혁과 사이에서 딸 이진완을 뒀다.[8] 하지만 끝내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사후 의친왕의 차남 이우가 양자로 입적되었다.[9]
몸이 뚱뚱하면서도 걷지 않고 하인들을 시켜서 가마를 타고 다닌 이준용을 두고 윤치호는 양돼지라고 노골적으로 비난, 디스했다.- ↑ 대원군이 죽을 무렵에 영선군은 일본에 가 있었다.
- ↑ 청나라와 일본 대사관을 찾아가 왜 영선군이 왕이 되어야 하는가를 꾸준히 설득했지만 청나라나 일본 모두
그런 기상있는 임금이 집권하면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힘드니쌩~. 사실 이 경우는 100% 흥선대원군이 섭정으로 집권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외세를 빌린 왕실 쿠데타를 지원해봤자 상대에게 빌미를 줄 뿐이기도 하고. - ↑ 이준용, 박영효, 이규완, 유길준, 조희연, 장박, 이범래, 이진호, 조희문, 구연수, 이두황, 신응희, 권동진, 정난교
- ↑ 박영효도 정확하게 같은 형태로 귀국했다. 일단 밀입국하고, 고종 퇴위가 확인된 다음에 정식귀국의 형태를 밟았다.
- ↑ 1909년 이근택 등과 손잡고 이완용을 몰아낸 다음에 정권을 장악하려고 했다. 당연히 일본을 밀어내는 것은 아니고, 당시 상황을 용인하는 상황에서의 내부 권력 싸움. 이준용이 연관된 쿠데타 시도만 이걸로 4번째이다(1899년의 시도는 하나로 취급).
- ↑ 초기에는 반일주의자였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빠르면 을미사변 이전, 늦어도 일본 망명시기에는 친일파로 전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 아버지 흥친왕 이재면과 함께 포함되었다.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도 선정되었다.
이런 인간이 조선의 왕이었다면.... 부르르 - ↑ 이진완은 후에 윤보선의 동생 윤원선과 결혼하여 2남 2녀를 뒀다.
- ↑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당시 영선군의 부인이 고종에게 운현궁의 대가 끊어지게 되었다고 하소연하자 고종이 이우의 손을 잡고 양자로 선택했다고 한다. 어쨌든 순종실록 부록에는 "태왕 전하의 뜻을 받들어 이강 공의 아들을 이준 공의 대를 이을 아들로 삼다"라고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