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호 전투

1950년 11월 한국전쟁중국이 개입하면서 벌어진 전투. 미군에게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악몽을 남긴 전투 중 하나이다.

장진호 전투
6.25전쟁의 일부
300px
[1]
날짜
1950년 11월 26일 ~ 1950년 12월 13일
장소
함경남도 장진호
교전국 UN군
대한민국
미국
영국

중국
지휘관 올리버 스미스 쑹스룬
결과
중공군의 전술적 승리 미군의 전략적 승리[2] [3] 동장군의 승리
영향
정작 미국 해병대의 명성이 알려짐.
병력103,520명
(실참전 30,000명)
120,000명
(실참전 67,000명)
피해규모2,500여명 전사
219명 실종
5,000명 부상
동상자 다수
25,000여명 전사
12,500명 부상
동상자 다수

1 개요

한국 전쟁 동안 벌어진 치열한 전투. 특히 세계에서는 '현대에서 미국중국이 맞붙어 싸운 전쟁'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 사건이다. 독일군소련군이 벌인 독소전쟁 도중 모스크바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함께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3대 동계 전투 중 하나로 꼽히며 또 가장 성공적인 철수 사례로 꼽히는 전투. 게다가 미국 해병대 창설 이후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로 꼽힌다. 영어로는 “Battle of Chosin Reservoir”[4]
미국 입장에선 해병대 뿐만이 아니라 미군이 한국전쟁에서 '포위섬멸작전'에 빠진 전투이다. 미군이 국지전에서 손해를 입거나 무리한 공세를 펼치다가 손해를 본 경우는 있지만 잘 짜여진 시나리오에 말려들어 수만 명 단위가 전투력 소멸 상황에 빠진 건 이 전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실제로 장진호 전투 초반시점에서 서부전선의 미8군지역에 있던 미2사단은 중공군의 작전으로 군우리에서 미군 2사단이 사실상 전멸했다.[5]이것은 책 콜디스트 윈터와 2013년에 나온 한국전쟁 서적 'korean war 한국전쟁/한국전쟁에서 중국이 말하지 않았던 것들'(왕수쩡 저, 출판사: 글항아리)에서 자세히 묘사되는데 두 책의 내용중 미2사단이 군우리에서 섬멸된것에 대해 각각 미군과 중공군 시점에서 서술된 자세한 내용이 많다. 간단히 요약하면 중공군은 미2사단의 퇴각로를 어떻게 차단시켰으며 봉쇄했는지, 미군은 어떻게 탈출했는지[6]에 대한 내용이 서술되어있다. 사실 그전에 이미 미2사단은 지난 몇일동안 중공군의 2차대공세의 전개로 수천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으며[7]군우리에서 탈출할때 다시 수천명의 인명손실을 입었으며 사단이 보유한 중장비와 화포, 물자를 거의 모두 잃었다.[8]사단의 후위에서 엄호하던 1개 연대와 배속부대만 간신히 탈출했다. 처참한 피해와 졸전(?)으로 미군 수뇌부는 미2사단을 해체(!)시키는 방안을 심각하게 고려했을정도이다.
만약 중국군이 2차대전 당시 독일군 정도의 기동력과 공군력이 있었다면 미 해병대는 전멸했을 것이다. 2차대전 아르덴 대공세 당시 101공중강습사단이 바스토뉴에서 포위전에 휘말린 적이 있는데 이와 어떻게 다른지는 추가바람. 아르덴 대공세 당시 독일군의 주 목표는 연합군을 둘로 분단시켜 섬멸하는 것이었고, 바스토뉴는 본래 주공 방향이 아니었기에 포위만 해놓고 간헐적으로 공격 시도를 할 뿐이었다. 그러나 주공이 실패하자 자연스럽게 포위해놓은 바스토뉴라도 섬멸시키는 방향으로 작전 목표가 변경되었고, 이것이 처음부터 해병대 포위섬멸을 목표로 삼았던 장진호 전투와의 차이점일 것이다. 이 당시에는 독일군이 인적자원도 항공세력도 모두 소멸했고2차대전 초기에도 병력은 정예한데 지휘관이... 아마 안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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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to-ri가 바로 고토리이며, 현재 고토리역이 있는 곳. 현 북한의 장진군 황초노동자구에 해당한다. Hagaru-ri는 하갈우리로 장진군의 인민위원회(군청) 소재지. 장진역이 여기에 있다. Hudong-ri는 복동리. 현재의 사수역 일대.
(이츠카 코토리)
철도를 이용할 수 없었지만, 전투 무대가 유담리를 제외하고는 다 철도인 장진선에서 벌어진 특이점이 있다. 멀쩡해 보이지만 열차에 탑승하고 편하게 탈출하지도 못하는 철길을 매일 바라보던 미 해병대의 한이 서려있는지, 전투 기록에 철도에 관한 언급이 자주 나온다. 그래서 장진선은 철도가 그리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는 미국에서도 그 존재를 아는 사람이 많은 듯.

1.1 미군 편제

● UN군 (사령관 맥아더)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UN군은 기존에 미8군의 지휘하에 있었는데 맥아더가 자신이 직접 지휘하겠다며 별도로 10군단을 편성하여 자신의 작전참모장 알몬드 소장[9]을 앉히고 10군단을 제8군과는 독립적으로 운용하게 하였다.[10] 그래서 제8군(제1군단, 제9군단)은 서부전선을 담당하고 제10군단이 동부전선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11] 그바람에 제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이 예하 군단장에 불과한 제10군단장 아몬드가 맥아더의 참모장이라는 이유로 그를 통해 맥아더의 최종 재가를 받는등 군 지휘체계상 있을 수 없는 불합리한 군통수체제가 만들어 졌다.

● 제10 군단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

군단장은 맥아더의 참모장 출신.[12] 맥아더의 정보참모 찰스 윌로비 장군과 함께 맥아더의 눈과 귀를 가린 Yes맨으로 불린다.[13] 히틀러의 작전참모 출신 스탈린그라드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의 재림 맥아더는 군림할 뿐 참모 회의 자체를 싫어 한다는 것을 알고, 참모회의 대신 모든 필요한 사항을 먼저 찾아 올리는 방식으로 맥아더에게 특별한 신임을 얻는다.

미군 쪽 참전용사들의 글에는 감히 맥아더 장군을 바로 까기 힘드니 무리하게 장진호로 진격하라고 한 아몬드를 까는 내용이 많다. 물론 장진호 전투 패전의 둘째 가는 책임자는 아몬드 장군이 맞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허수아비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그가 중공군이 참전했다고 보고해도 일본 동경의 사령부에서 그건 헛것을 본 것이니 무시하고 그냥 진격하라고 하니 아몬드보고 더 이상 어쩌란 말인가. 결국 가장 큰 책임자는 바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예하편제로 미육군 3사단, 7사단, 미해병대1사단(+해병항공대), 한국군 3사단, 수도사단, 영국왕실해병특공대등 10만 3천명에 달했다. 이중 장진호에는 미해병 1사단, 미육군7사단 감편된 1개연대전투단, 영국왕실해병특공대 1개중대등 총병력 3만명이 동원된다.

각 부대 배치 상황은 장진호 전투 첫날인 1950년 11월 27일 기준이다.

● 제1해병사단 (올리버 프린스 스미스 소장) – 하갈우리 주둔

장교들과 고참병들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용사들은 맞지만 이후 소집해제되어 오랫동안 각자 사회에서 생활하며 가끔 소집 훈련 받았다. 한국전쟁 후 재소집되어 사단이 결성되어 장교들은 병사들의 얼굴을 모를 지경이였다. 심지어 장교들이 각자 트럭 몇 대를 징발하여 패들턴 기지 주위에 돌아다니던 해병대원을 만나 지원자를 모집했을 정도. 해병 1연대와 5연대는 그나마 현역이였지만, 7연대는 긴급히 소집되어 절반이 예비역 출신이였다.

사단 단위의 전투로 인천상륙작전을 경험 하였다. 그러나 당시 낙동강 후방에는 인민군이 거의 없었다. 물론 인천-서울에도 이렇다 할 인민군 유력부대가 없어서 부대 단위의 전투 경험을 하지 못하고 거의 게릴라 소탕전 수준이였다.(인천상륙부대 7만5천명 Vs. 인천방어부대 1,2천명? 서울에도 대대이상급 방어부대는 전무)

● 해병7연대 (호머 리첸버그 대령) – 장진호 서안 유담리 주둔.

● 1대대 (레이몬드 데이비스 중령) – 보급선 방어[14]

● 2대대 (랜돌프 록우드 중령) – 2개 중대 유담리 동쪽 방어, F중대 보급선 방어[15]

● 3대대 (윌리엄 해리스 중령)[16] – 5연대 2대대의 양 측면 엄호

● 해병5연대 (레이몬드 머레이 중령) – 장진호 서안 유담리 주둔

1대대 (존 스티븐슨 중령) – 유담리 역 남쪽 주둔 예비대
2대대 (해롤드 로이스 중령) – 유담리에서 서쪽 낭림산맥을 향해 진격 중
3대대 (로버트 태플렛 중령) – 유담리 역 북쪽 주둔

● 해병1연대 (루이스 풀러 대령)[17] 하갈우리 남쪽 고토리 주둔

1대대 (도날드 슈먹 중령) – 고토리 남쪽 진흥리 주둔
2대대 (앨런 슈터 중령) – 고토리 주둔
3대대 (토마스 리쥐 중령) – 하갈우리 주둔[18]

● 해병11연대(포병연대) (프란시스 페리 소령)

105mm 곡사포 사용. 포대별로 1/3을 차출하여 1개 보병소대씩 만들어 싸웠다.[19]

● 해병1전차대대

● 해병1공병대대 (존 페트리쥐 중령)

● 해병1수송대대 (올린 뵐 중령)

● 해병1근무대대

2차대전 G형 편제를 기준으로 전투공병대대, 지원대대, 의무대대가 추가로 있어야 하는데 한국전쟁때의 제1사단의 해당 대대의 존재는 확인 못함. 단순히 본 위키러가 몰라서 못쓴것 일수도 있으니 확인 바람.

일반적인 해병대의 편제는 다음과 같다.
소총분대 13명 = 분대장 + 사격팀 3개(4명, Bar 1정) 13명
소총소대 44명 = 소대본부 4명(소대장, 부소대장, 전령, 무전병), 소총분대 3개(+해군위생병 1명)
소총중대 180명 = 중대본부(중대장, 부중대장, 행정보급관, 계원, 전령, 무전병), 소총소대 3개, 화기소대 (+해군위생병 7명)
소총대대 1천명 = 대대본부(대대장, 참모 5명, 주임원사, 담당관 15명 포함), 본부중대, 소총중대 3개[20]
보병연대 3,500명 = 연대 사령부(연대장, 과장 5명, 실무장교 7명, 주임원사, 담당관 20명 포함), 본부지원중대, 소총대대 3개, 화기중대(대전차)
보병사단 1만 5천명 = 사단 사령부(참모부(사단장, 참모장, 참모 8명, 과장 20명, 실무장교 65명, 전속부관, 주임원사, 담당관 16명 포함.), 본부대(의무대, 계원소대, 경비중대 포함)), 보병연대 3개, 포병연대(2,617명), 각종 지원대대
5, 7연대+각종 지원부대를 합쳐 약 8,200명의 해병대가 유담리 일대에 주둔중이였다.

여기에 미군의 특성상 각종 지원부대가 워낙 많아 사령부가 있는 하갈우리에 3천명(사단사령부+1연대 3대대), 고토리 1,500명(1연대 2대대 등..), 진흥리 1,600명(1연대 1대대 등..) 등 약 6천명 가량 주둔해 있었다.[21]
장진호에 있는 5, 7연대를 부사단장 에드워드 크레그 준장이 통합 지휘하다가 텍사스의 아버지 임종으로 27일 오후 출국한 상태였고, 양 연대 병력이 중대 단위로 워낙 뒤섞여 있어서 장진호의 해병대는 통합연대본부 체계로 운용된다.
부대 배치를 보자면 5·7연대는 유담리에 있었고 북한 72번 도로를 따라[22] 남쪽 5km 터키힐에 7연대 C중대 180명[23], 그 남쪽 7km에 7연대 F중대 246명[24] 해병 234명, 해군위생병 12명+민간인 통역관 1명, 다시 남쪽 11km 하갈우리에 사단사령부와 1연대 3대대 H·I중대, 포병대 등 해병 3,000명이 주둔 중이였고 또 다시 남쪽 18킬로를 내려간 고토리에도 해병 1,500명(해병 1연대 2대대, 3대대 G중대, 전차대대 D중대), 황초령을 넘어 남쪽 진흥리에 해병 1,600명(해병 1연대 1대대) 가량이 주둔 중이였다.

● 제1해병항공단 (필드 해리스 소장)

후방병참부대와 합쳐서 1만 명. 해병항공단은 F4U 콜세어를 이용하여 해병대와 육군을 근접항공지원하였다.

● 미육군7사단 (데이비드 바 소장)

병력 부족으로 사단 내 8천명을 한국 민간인으로 충원하여 전투력이 바닥 수준이였다.
같은 7사단이기는 하지만 2개의 서로 다른 명령계통의 부대가 장진호 동안에 있었는데, 먼저 32연대 1대대를 기간으로 하는 페이스 특수임무부대(Task Force Faith)가 해병대가 점령한 장진호 동안을 10월 26일 인수 하고, 이후 31연대를 기간으로 한 맥클린 특수임무부대(Task Force MacLean)가 다시 페이스 부대 지역을 인수하기로 되어 있었다.[25]

기본적으로 미 육군 대대의 경우 영관급 이상은 대대장이 유일했고 대대서열 2위급의 부대대장이나 중대장, 중대참모가 대위 내지는 중위였다.

장진호 동쪽의 육군 병력은 위 두 부대를 합쳐서 카투사 700명 포함 3천명 가량이였다. 해병대는 장진호에서 서쪽으로 진격하고 육군은 장진호 동안을 따라 북쪽으로 진격 명령을 받았다. 양자간에 협조는 잘 안되는 편이였다. 장진호 북쪽으로 정찰 나간 연대 수색정찰중대는 27일 오전부터 연락두절이였는데 당시는 몰랐지만 이미 전멸한 상태였다. 해병대가 27일 밤 평상시처럼 방어진을 펼친 반면에 육군은 단순히 하룻밤 자는 숙영지 개념이였다. 부대 상호간 유무신 통신도 연결되지 않았고 보급품 비축은 물론 방한복 지급도 되지 않았다. 맥아더 : 크리스마스 이전에 전쟁이 끝나는데 필요 없지 않아?[26] 장진호의 카투사들은 길을 걷거나 논밭에서 일하다가 아무런 사전 경고도 없이 강제로 끌려와 7사단에 내던져진 한국 민간인들이었고, 사단장은 카투사는 어떠한 기준에서도 전투병력으로 간주 될 수가 없다고 언급하였다.[27] 카투사들은 주로 경북지방에서 농사짓던 청년들로 영어는 한마디도 모른채 병력 보충용으로 각 소대/분대로 흩어져 배속되었다. 미군측에서는 이들을 엄청나게 비난하는데, 미해병대는 한국인들로 통합부대를 만들어 용맹하다는 평을 하며 잘 써먹었는데, 왜 7사단은 말도 안통하는 외국인들을 분산운용했는지 안타깝다.

27일밤 연대장 맥클린은 최전방이였던 32연대 1대대에 있었고, 7사단 부사단장 헨리 호스 준장이 후동의 연대지휘소에 있었다. 북쪽부터 32연대 1대대, 31연대 3대대와 57야전포병대대, 후동리에 31연대 본부와 31전차중대(전차 22대) 순으로 주둔하였다. 윌리엄 라이디 중령의 31연대 2대대가 곧 도착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연락두절 상태였다.[28]
각종 육군 부대는 남쪽 하갈우리에 600명(10공병대대 D중대 등), 고토리에 1천명(31연대 1대대 B중대 등)이 더 있었다. 육군 총원 4,500명 가량.

● 페이스 특수임무부대(Task Force Faith)

● 32연대1대대 (돈 페이스 중령) – 후동리 북쪽 11km 지점 풍유리 주둔

● 맥클린 특수임무부대(Task Force MacLean)

● 31보병연대 (앨런 맥클린 대령)[29] – 장진호 동안 후동리 주둔

● 31연대3대대 (월리엄 라이디 중령) – 후동리 북쪽 6km 지점 주둔

● 57야전포병대대 (레이 엠브리 중령)[30] – 후동리 북쪽 6km 지점 주둔

● 31전차중대 (로버트 드레이크 대위) - 후동리 주둔

● 31연대2대대 (월리엄 라이디 중령) - 함흥차사[31]

일반적인 육군부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소총분대 12명 = 분대장, 정찰팀 3명[32], AR팀 3명(BAR 2정)[33], 소총팀 6명
소총소대 50명 = 소대본부 5명[34], 소총분대 3개, 화기분대[35]
소총중대 217명 = 중대본부 17명[36], 소총소대 3개, 화기소대[37]
소총대대 1천명 = 본부중대, 소총중대 3개, 화기중대[38]
보병연대 4천명 = 연대본부, 소총대대 3개, 중화기중대[39], 수송중대, 수색정찰중대
보병사단 1만8천명[40] = 사단본부, 보병연대 3개, 포병연대[41]

● 영국 해병 41특공대(더글라스 드라이스 데일 중령) – 하갈우리 남쪽 고토리

300명. 해병7연대 배속 예정.

● 한국 전투경찰대

해병 7연대 3대대와 함께 기관총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전북도경 205경찰대대 예하 중대가 아닐까 추정된다. 그러나 마틴 러스의 브레이크 아웃에 통역병으로 중위 대접을 해준 '존 Y. 리' 라고 소개된 이종연 박사의 증언에 의하면 대원들은 고향이 서울이나 경기지방이라고 했기 때문에 전북 도경이 아닐 수도 있다. 이어 이종연 박사의 증언에 의하면 전투경찰대는 경감이 지휘하였으며 군인들 보다 나이는 댓살정도 많고 공산주의자에 대한 적개심이 아주 강했고 용맹했다고 한다. 장진호 혈전장의 한국 전투 경찰대

미 해병대+해병항공대+해병후방부대+미 육군+영국 해병특공대 총원 약 3만명에 달한다.

그 외 원산의 원포가설비행장에서 출격한 오스트레일리아 왕실 공군이 P-51 머스탱으로 지원해 주었다.

1.2 중공군 편제

중공군은 해군, 항공대, 병참부대 같은 조직이 일체 없고 죄다 보병임으로 총원 30만명에 30개 사단이라는 아주 계산하기 쉬운 편제를 갖고 있다. 미8군(워커 장군)이 담당하는 서부전선은 제13병단(이천우)[42] 소속 18개 사단이 배정되었으며, 맥아더 직할의 미10군단(아몬드 장군)이 담당하는 동부전선은 제9병단(쑹스룬) 소속 12개 사단이 배정되었다. 총사령관은 국공내전에서 활약한 펑더화이였다. 전선에 배치된 병력만 따지면 UN군과 중공군은 비슷하였다.

중공군 병사들은 솜으로 누빈[43] 카키색 코트와 바지를 입었고[44], 귀마개가 달린 털모자를 쓰고 있었다. 일부는 털부츠를 신었지만 대부분은 고무를 댄 천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개인당 80~100발을 탄약과 몇 발의 방망이 수류탄을 휴대하고 있었고 찐 쌀, 옥수수, 콩으로 된 4~5일분의 식량을 지녀 따로 보급이 필요 없었다... 는 중공군 높으신 분들 생각이고 실제로는 굶어죽을 지경. 영하 40도의 날씨에 데우지도 않은 곡식 먹다가 설사병에 빠진 것은 덤. 여기에 그 추운 겨울에도 장갑을 끼고 있지 않아 상당수가 동상으로 손발을 잘라내야 했다.[45]

연대 이하는 무선 통신 장비가 없고, 대대 이하는 유선 통신 장비도 없어 전령, 나팔, 뿔피리, 호루라기, 심벌즈(?), 신호탄, 전등으로 신호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유엔군측 장진호 전투 참가자의 수기를 보면 피리와 나팔소리에 몸서리를 친다는 기록이 많다.

전형적인 중공군은 사단은 6,500명 내지 8,500명으로 구성되어 사단 예하 3개 연대와 1개 포병대대로 편제된다. 다만 산악지형과 차량 부족, 미 공군 때문에 포병은 후방에 나두고 왔다. 중공군 부사령관 홍학지는 "보병은 박격포 몇 문을 보유한 게 고작이었다. 대형야포는 모두 국민당군으로부터 노획한 것인데, 노새가 끌고 다녀 기동성이 떨어졌고 은폐가 어려웠다. 결국 소총과 수류탄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중공군은 미군 1개 사단을 섬멸하는데 2개군, 국군 1개 사단을 섬멸하는데 1개군을 배정하였다. 이 때문에 미 해병대 1사단을 섬멸하기 위해 2개군 6개사단을 투입하게 된 것이다.
3개 사단에 1개군 편제이고 몇 개의 군이 모여 1개의 병단을 구성한다. 일반적으로 중공군의 일반적인 부대편성 방식을 보자면 1군은 1·2·3사단으로 구성되었고 각 사단은 1·2·3연대, 4·5·6연대, 7·8·9연대로 구성된다. 9병단의 경우 이러한 공식에 비추어 볼 때 25군 대신 20군이 편제 되었고, 각 군별로 89사단, 88사단, 94사단이 각각 증강 된 것을 제외하면 전형적인 중공군식 편제이다.

중공의 7월 13일 '동북변방 보위에 관한 결정'에 의하면 제13병단 - 제38,39,40,42군, 포병 제 1,2,8사단, 1개 고사포 연대, 1개 공병연대등 25만 5천명으로 구성된다.
먼저 제 38,39,40군은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의 미군의 중앙을 담당하는 국군 제 6,7,9사단을 각각 맞서도록 하였다(...) 42군은 서부전선의 원산-평양간 철도를 차단하고 산하의 124사단을 차출하여 동부전선에서 방어만 담당하게 한다. 이 124사단이 미해병1사단과 맞붙은 전투가 아래에서 설명할 "수동전투"이다.

제9병단 3개군 12개 사단은 서부전선의 13병단에 비해 뒤늦게 참전 하였다. 작전 계획은 13병단이 동부전선을 UN군을 장진호까지 유인하여 섬멸하며, 미리 후방 깊숙이 침투한 중공군 제13병단 제42군이 사창리와 신읍에서 UN군을 강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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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해병대를 포위 섬멸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운 장군은 제9병단장 쑹스룬(송시륜(宋時輪), 1907-1991)[46], 한국전 당시. 동안이다 생긴 것과는 달리 아주 불 같고 난폭한 성격의 소유자인데 그의 불 같은 성격은 중공군이 이 전투에서 미 해병대에만 집착하게 되어 나머지 부대가 무사히 빠져나가게 만들었다. 그는 당시 40대 초반이었지만 많은 중공군 장교들과는 달리 황포군관학교에서 제대로 군사학을 전공했다. 또한 홍군 초기부터 마오쩌둥의 부대에 가담하여 대장정에도 참여했고, 그 이후 20년간 국민당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계속 전투를 치룬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이론과 실전을 모두 겸비한 역전의 용사이자 전투에 잔뼈가 굵은 유능한 게릴라전 지휘자였다. 당시 중공군에는 계급이 없었지만, 한국전쟁 이후 1955년 계급이 도입되자 대장에 임명되었다. 말년에는 천안문 6.4 항쟁이 발발하자 예페이, 장아이핑 등과 함께 인민해방군이 인민에게 총구를 돌려서는 안된다는 서한을 공산당에 보낸 바 있다. 서방권에서는 장진호 전투에서 보여준 작전능력 외에도 천안문 사태에서의 유혈진압 반대를 빼놓지 않으며 높이 평가하고 있다.

  • 9병단 쑹스룬
    • 제20군
      • 58사단 하갈우리 남쪽 포위
      • 59사단 유담리 남서쪽 포위
      • 60사단 하갈우리-고토리 도로차단
      • 89사단 유담리 북서쪽 포위
    • 26군
      • 76사단
      • 77사단
      • 78사단
      • 88사단
    • 27군
      • 79사단 유담리 북쪽 포위
      • 80사단 장진호 동안 미육군 포위
      • 81사단
      • 94사단

즉 20군 4개 사단은 서쪽에서 공격해왔고 27군 2개 사단은 북쪽에서 공격해 왔다. 총 6개 사단이 참전하였다. 이후 12월 6일에 가서야 76사단과 77사단이 추가로 참전하여 하갈우리와 고토리 사이를 차단한다. 이들까지 계산하면 미군 역시 이때쯤 추가 참전한 미3사단등 각종 부대를 더해야 하니 일단 제외하고 장진호 인근의 중공군은 약 5만여 명이였다. 11월 27일부터 참전한 6개 사단은 고정적이나, 장진호 전투 막판이자 12월 이후 참전한 중공군은 자료마다 조금씩 틀리다.

2 경과

2.1 방심, 그에 따른 예정된 재앙

미국북한평양을 잃고 피신해 임시수도로 정한 강계를 공격하기 위해 장진호 방면으로 미 해병대 1만 2천여 명을 전진시켜 주둔시켰고 미 육군이 그들을 지원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중국군은 계속해서 미군에게 전쟁에 참여하겠다고 경고를 날리고 있었으나, 미군은 그 경고를 무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의 예상과 달리 중국군이 전쟁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군은 중국군을 지나치게 얕보고 있었다. 이 당시 군 사령관들이 추측했던 중공군의 규모는 약 3만 5천 명 정도였지만, 실제 들어와 있던 중공군의 수는 무려 30만 명이었다.

미군이 중국군을 얕보고 있는 증거로, 당시 미국 제10군단의 작전거리가 원산~수동[47]~신흥에 이르는 작전구역을 담당해서 480km나 되었다. 상식적으로 병참 문제 때문에라도 작전거리를 이렇게 길게 잡고 부대를 길게 배치하는 일은 없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진격 작전은 미친 짓이었다. 더군다나 이 작전의 실패로 인해서 휴전선이 지금처럼 남쪽으로 밀려내려온 걸 생각하면...

게다가 도로는 무지하게 좁아터진 산길이었고, 장진선, 신흥선 등의 경우는 아예 강삭철도로 철도를 운행하는 지경이었으니 더 이상의 설명이 必要韓紙? 미 해병대의 언급에서 딱 매복 당하기 좋은 곳이란 언급이 있을 정도였다.

설상가상으로 제10군단의 일부 부대에는 차출 명령이 떨어져 있었던 데다가, 결정적으로 지휘관병크가 터진다. 바로 중국군 포로가 실토한 정보인, 대군이 산 속에 숨어있다가 일거에 포위한다는 작전을 무시한 것이다. 그리고 예정된 재앙은 서서히 10군단을 덮치기 시작했다.

2.1.1 선견지명

하지만 높으신 분들 중에 얼간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다행히도 미 해병 제1사단장 올리버 프린스 스미스 장군은 예외에 속했고, 항상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라는 말을 평소 신조로 삼는 사람답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부대를 장진호 축선상에 집중 배치하도록 제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을 계속해서 설득하고 관철시킨 것, 충분한 탄약과 필수보급품을 하갈우리(현재의 장진읍 및 장진역 인근)에 배치해놓은 것, 진격 명령을 명령 불복종에 가까울 정도로 지연시킨 것, 야전활주로를 건설한 것 모두가 바로 스미스 장군의 공이었다.[48] 당시 창군원로들이 쓴 책을 보면 하루에 수십 km씩 달리며 독소 전쟁시 독일군을 능가하는 쾌속 진군으로 압록강까지 달려갔다고 자랑스럽게 쓰여있다.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한-중 국경선을 향하여 돌진하는 것만이 미덕인 상황에서 미 해병대는 11월 10부터 26일까지 하루 평균 1.5km로 진군하였다.
같은 미10군단 소속의 7사단 17연대가 11월 21일에 이미 압록강 까지 도달한 것과 비교하면 얼마나 진격속도가 차이가 현격한지 알 수 있다. 아마도 위의 똥별들 입장에서는 복장 터졌을 듯
이러한 기류속에 일어난 해프닝으로, 맥아더의 “크리스마스는 집에서” 운운을 스미스 사단장은 헛소리라며 비웃고 “해병은 장진호 외곽에서 압록강으로 향하면서 이미 중공군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는 비공식 전문을 워싱턴의 해병대 총사령관 크립턴 B. 케이트에서 급송 발신 했다가 나중에 맥아더에게 걸려서 깨갱한 적이 있었다. 결국 스미스 사단장은 어느 고위층을 통해서 맥아더에게 “우리들의 최후의 바람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라는 사과문과 “(우리 해병 1사단은) 단숨에 간단하게 더 멀리 진격해 버리겠다”라는 명령 복종 서신도 보낸다.

2.2 수동리 전투

서부전선의 중공군 18개 사단은 전투준비가 완료가 되어 주로 한국군을 노리며 1차 대공세를 감행 하였다. 그에 반해 동부전선의 중공군 12개 사단은 아직 도착하지 않아서 할수 없이 제42군 예하 124사단만 투입하여 고토리와 함흥 사이의 수동에서 1차적으로 미군을 상대로 지연전을 펼쳤다.

10월 30일 선두부대인 미해병 제7연대 정찰대가 수동리에 도착하였다. 이곳에는 이미 한국군 제3사단 26연대가 주둔중이였다. 이들은 미해병 제7연대와 11월 2일에 교대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한국군은 이미 10월 25일 중공군과 교전 했다며 16명의 포로를 넘겨 주었다.

11월 2일 미해병7연대가 도착하자 중공군 124사단이 공격해 왔다. 미군은 불과 1개 연대만 투입하였는데도[49] 중공군 124사단 좆망. 이후 장진호 전투에서도 이어지는 미군의 중공군에 대한 일방적인 양민학살의 데모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7연대 부연대장 프레데릭 다우세트 중령이 "중공군은 대대 규모에서는 잘 협조된 공격을 가해왔지만, 중대 이하에서는 지휘관들이 자기 생각이 없었고 지휘 능력도 부족했습니다.[50] 기찻길에서는 중대 병력의 반이 우리 기관총 사격에 쓰러졌는데도 지휘관이 호루라기를 불자 생존자들이 재집결해서 행진을 다시 시작하더군요. 우리가 다시 사격을 가하니까 마지막 생존자 열 내지 열다섯 명이 대열을 이탈해서 미친 듯이 도망쳤지요. 중공군은 병력 자체는 말할 것도 없고 개개인의 목숨도 가벼이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과 싸우려면 특별한 전술교범이 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라고 할정도로 전투 같지 않은 전투로 124사단이 괴멸하여 이후 장진호 전투에 참전하지 못하였다.[51] 7연대에서 50여 명의 사망자와 200명의 부상자가 발생 했지만 중공군은 사망자만 1,500명에 부상자는 그 두배가 나오는 등 1:30의 피아전사율을 달성하였다.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은 10월 19일 이래, 10월 25일의 국군과 최초 전투부터 중공군 포로가 나와 한국군에게 일부 인계 받았었고, 11월 1일 미군과의 첫 교전에 이어 이번 수동 전투로 16명의 중공군과 60명의 인민군 포로가 쏟아졌다.

후방의 유엔군 사령부로 소환된 포로 심문을 통해

"10월 17일부터 중국군이 동림산 기슭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중국 제 42군 124사단 제370연대 탄약소대 소속이며, 사단 및 연대본부는 장진호 남단인 하갈우리에 있고, 개전 이래 처음으로 전면적 공세를 감행한 것"
"1년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이 장개석 군대였으나, 중국이 공산화됨에 따라 사단이 항복해서 중국 공산군으로 전환되었다."

라는 매우 중요한 정보가 쏟아졌다. 그러나 이를 취합하여 동경사령부가 내린 결론은 "중국군 부대가 부대 단위로 한국에 진입했다고 확실히 믿을 만한 정보는 없다"였다. 뭥미?

이후 생각해보면 매우 중요한 전투이지만 당시에는 워낙 일방적인 양민학살이라 전투 측에도 못 끼어 아몬드 장군은 그날 일기에 "10군단 지휘부가 사용하기로 한 풀맨 기관차와 승객용 객차의 준비 상태를 검사했다"라고 쓰는 등 없던 일 취급 받았다.

2.3 맥아더의 오판

10월 5일 중공의 외상인 저우언라이가 유엔군이 38도선을 넘어서면 개입 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맥아더의 정보참모 찰스 윌로비 소장은 "미군이 38도선을 넘으면 북한으로 진입하겠다고 위협하는 중공 지도자들의 선언은 아마 외교적 공갈의 범주에 속할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

10월 15일 트루먼과 맥아더가 웨이크 섬에서 회담 하였다. 트루먼이 중공이나 소련의 개입 가능성을 묻자 맥아더는 "거의 없습니다. 만일 그들이 개전 직후 개입했다면 결정적이겠지만, 이제 우리는 더이상 그들의 개입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라고 답하였다.

11월 3일, 뭔가 이상하게 돌아감을 느낀 합동참모본부에서 맥아더에게 확실한 판단을 요구하니 '북한에 들어온 중국군의 실체를 인정하기 곤란하다'라는 태도를 보였다. 같은날 동경 사령부의 정보참모 윌로비 소장은 "단지 16,500명에서 3만 4천명의 중공군이 북한에 들어와 있다"고 발표하였다. 그 시점에 이미 중공군은 30만명이 들어와 있었다. 또한 11월 5일 UN에 제출한 특별 보고서를 통해 '소수의 의용군이 개별적으로 참전하는 수준'이라고 사건 자체를 축소하였다.

그러나 같은날 5일 맥아더는 갑자기 돌변하여 중공군 병력이 한반도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압록강의 모든 교량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또한 합동참모본부에 '대규모 병력과 물자가 압록강을 건너고 있으므로 이를 빨리 저지하지 못하면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이 희생을 치러야 한다'라 말했다. 합동참모본부는 맥아더의 돌변에 어리둥절.

더 나아가 맥아더가 11월 중순에 합동참모본부에 보낸 편지는 다음과 같다.

“2주 내에 김일성을 완전하게 항복시킬 것이며...[52] 30개쯤의 원자탄을 사용하여 압록강두만강 지역에 방사선 물질 코발트벨트 지역을 만들어 어느나라도 통과 못하게 할 것이다. 그 후 중국 장개석의 국부군 50만명 에게 코발트 활성지역의 경계를 맡길 것이며... (만주와 블라디보스토크에) B-29기를 동원, 원자탄을 투하해서 그들을 달콤하게 만들겠다.”

더 이상 이 부분을 설명하면 장진호 전투 항목과 점점 거리가 멀어지니 간단하게 말하자면, 맥아더도 눈과 귀가 있는데 중공군이 나타난 것을 모르지 않았다. 다만 대통령이 중공군이 쳐들어올지 모르니 원산 이북으로 북진하지 말라는 훈령을 무시하고, 중공군은 절대 참전 안한다며 그냥 진격해버렸다. 그리고 진격 후에야 합동참모본부에 고의로 늦게[53] 이 사실을 알렸다. 어째 2차대전 선전포고할 때 일본 방식 같은데? 그런데 중공군이 쳐들어와 호언장담이 깨져 개망신 당할 상황에서 자신의 체면 유지를 위해 크리스마스까지 빨리 전투를 끝내버리고 "사실은 쬐끔 쳐들어오긴 했는데 금방 전투가 끝났지롱~" 하고 상황 종료하려는 생각이였다. 그렇기 때문에 10월 24일 미8군 사령관과 미10군단장에게 (중공군이 안 쳐들어오니 전선유지고 보급이고 다 내팽개치고) "휘하의 전 부대를 동원하여 최대한의 속도로 국경선까지 진격하라" 라는 지시를 내리게 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맥아더를 너무 깎아내리는 것이라 그를 최대한 변호하기 위해, 맥아더가 고령에 정신오락가락으로 정말 중공군의 개입을 몰랐다는 책도 다수 있다. 더 깎아내리는 것 같은데?[54]

맥아더를 변명해주자면 맥아더는 매파의 대표자였고 그당시 트루먼은 비둘기파였다. 맥아더의 경우 만주폭격 국부군 진격등 지금이 기회니까 중공군을 때려잡아야지 후환이 없다 주의였고 트루먼은 중공의 눈치를 보는 상황이였다. 어찌보면 미국정치상황에 의해 휘둘린 상황이였다. 원론적으로 따지면 전술적 의견으로 낙동강전선때 참전하지 않은 중공군이 패주해서 전력도 없는 이러한 상황에서 참전하여 피해를 볼 이유가 없다는 것이 맥아더를 위시한 동경사령부의 판단인 반면에 북한을 완충지대로 놔두려는 정치적인 판단으로 참전한다는 중공군의 성명을 무시한 워싱턴의 문제가 더크다. 주은래의 몇 번의 성명을 워싱턴은 뻥카로 치부했고 그러한 정치적인 판단에 의해 동경사령부는 전술적인 판단을 했을 뿐이였다.

결국 예하제대에는 "그건 중공군이 아니고 니들은 헛것을 본 거니 그냥 전진하라"라는 입장에서 조금 선회하여 "그딴 쿠리[55]를 상대로 겁먹으면 되는가?", "중국이 북한과의 약속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보낸 소수의 병력", "만주에 전기 공급하는 압록강의 수력발전소를 보호하기 위해 이동하는 듯" 이라며 복장 터지는 소리만 하였다.

또한 위와 같은 이유로 중공군 1차 대공세로 이미 일부 한국군 부대가 개발살 났는데 없던일 취급 받았다. 중공군 1차 대공세는 서부전선에서는 한국군만 골라서 공격했고 동부전선에서는 중공군 9병단이 아직 준비가 안되어 124사단으로 지연전만 펼치게 하였다. 미국 측에서는 희한하게 한국군 부대만 중공군과 싸웠다고 하니 헛것을 본 것이라고 했는데, 미군측에서도 사실 교전을 하긴 했다. 심지어 상당한 포로를 잡았는데 그것이 수동 전투였다. 심지어 미 제1기병사단 8연대가 운산에서 3대대 버리고 후퇴하는 바람에 미군 6백명이 완전하게 전멸하였지만, 높은분들의 사정으로인하여 중공군 1차 대공세는 없던일이 되었다.

이후 다시 UN군이 진격하였지만 북한군이 보이지 않자 안심한 맥아더는 11월 24일 신안주 비행장에 나타났다. 그리고 여기서 워커 미 제8군 사령관과 밀번 제1군단장에게 다시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신문기자들에게 전쟁은 크리스마스 이전에 승리로 끝날 것이며 미군은 본토로 돌아갈 것이라고 장담하였다.
이것이 바로 운명의 크리스마스 대공세였다. 원래 맥아더는 추수감사절(11월 23일)까지 전쟁을 끝내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이제 와서 따질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 11월 25일 중공군 2차 대공세가 시작 되었다.

2.4 11월 27일, 조여오는 올가미

그리고는 최소한의 접촉으로 미 해병 1사단을 진흥리(현재의 삼거역 일대) - 고토리(현 장진군 남쪽 고토리역 일대) - 하갈우리 - 유담리(장진호 서부)에 병력을 배치하도록 유도했다. 중공군 쑹스룬 장군은 홍군 출신답게 밤에만 이동하는 작전을 수립, 게다가 도로가 아닌 산 능선을 타는 기상천외한 작전을 사용해가면서 주변 부대를 산 정상에 배치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배치된 중공군은 6개 사단! 해병대를 드디어 노리기 시작하였다.

10군단장 아몬드 장군은 스미스 장군을 밀어붙여 유담리까지 진격하도록 몰아붙였고 스미스 장군은 어쩔 수 없이 진격을 계속해 나갔다. 이어 목적지를 바꾸어 당초 그대로 북진하는 것을 유담리에서 서쪽으로 꺾어서 낭림산맥을 넘어 제8군과 연결하여 8군의 우측을 보호해주라고 하였다. 그러나 해병 1개 사단이 감당할 범주를 넘어섰다고 판단한 스미스 장군은 유담리 일대에서 비비적거리면서 고의적으로 태업하고 있었다.

25일 토요일 저녁. 이천우가 이끄는 중공군 13병단 18만 명은 미8군 산하 한국군 2군단과 미2사단을 기습하여 패퇴시켰다. 미8군은 대대 단위로 섬멸되는 등 대패를 당한 끝에 27일에는 전군총퇴각을 실시하였다. 8군의 후퇴 소식은 26일 10군단에 알려졌지만 아무도 해병대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집안 꼴 잘들 돌아간다
동시에 한쪽 날개를 담당하고 있던 미 10군단에 대하여 쑹스룬의 중공군 9병단 12만 명 12개 사단 중 6개 사단을 장진호에 집결시켰다. 작전은 성공했다.

운명의 11월 27일. 이미 동경의 맥아더와 미10군단은 해병사단에게 진격을 멈추라고 명령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멘붕 상태에 빠져있었다.[56] 그 바람에 해병사단은 여전히 느리게나마 조금씩 진격 중이였다. 특히 5연대 2대대 소속 D, E, F중대는 유담리 서쪽으로 진출을 시작하여 미8군과 연결하기 위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중공군 3개 사단으로 포위되어 가고 있었다.[57] 이 공격으로 드디어 양쪽에서 많은 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또한 80사단 등은 사수역 근방에 있던 페이스 특수임무부대(1개 대대)와 맥클린 특수임무부대(1개 대대 + 1개 포병대대)를 공격해서 역시 포위하였다.

해병대의 경우 장진호에서 북진하는 임무를 맥클린 부대등 육군에게 넘기고 낭림산맥을 넘어 서진하기로 되어 있었다. 일단 7연대가 유담리 일대를 방어하고 5연대를 선봉으로 하여 서진하기로 하였다. 1연대는 아직 유담리 까지 오지도 못하고 대대별로 찢어져서 각각 하갈우리, 고토리, 진흥리에 흩어져 있었다. 이때의 해병대는 중공군이 쳐들어 온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으므로 하루를 자도 강력한 진지를 구축하고 있... 을려고 했으나 땅이 파지지가 않았다. 겨우 11월이였지만 눈과 얼음의 두께는 대략 40cm정도였다. 미군의 휴대용 삽으로는 불가능 하고 전동착암기가 필요할 지경이였다. 어쨌든 부대편성은 방어대형으로 포진하고 있었다.

27일 밤부터 중공군 3개 사단이 유담리의 북쪽과 동쪽을 방어하던 3개의 중대에 큰 타격을 입었다. 먼저 사단 최북단 1403고지를 방어하던 7연대 H중대가 가장 먼저 큰 타격을 입고 후퇴해 버렸다.[58] 남쪽이자 장진호와 유담리 사이의 1282고지를 방어하던 7연대 E중대는 176명 중 120명이 사상당하지만 5연대 1대대의 지원으로 결국 방어에는 성공한다. 동남쪽으로 1,500m 떨어져 있는 1240고지의 D중대도 고지를 빼앗긴 후 재탈환하지만 중대 자체는 이후 전투불능이였다. 결국 유담리의 해병대는 포위되어 버린다.

또한 유담리 남쪽으로 하갈우리 사이의 보급로를 지키던 터키힐[59]의 7연대 C중대는 28일 새벽 2시 30분 중공군의 공격으로 6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그 남쪽에 위치한 폭스힐의 F중대[60]는 무려 81명이 사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61][62] 반면에 하갈우리와 고토리는 그날 밤 조용하였다. 오직 하갈우리의 포병대 H포대만 유담리 지원을 위해 불을 뿜었을 뿐이다.
이렇게 장진호 근방의 미 해병대는 고립된다.

한편 장진호 동안에 11월 25일 장진호 동안에 도착한 7사단 페이스 특수임무부대(Task Force Faith)는 32연대 1대대를 기간으로 하고 있었다. 급편방어진지를 구착하여 하루밤을 보내고 26일 부사단장인 헨리 호스 준장이 도착하여 하갈우리 동안의 해병대 진지를 인수하고 현진지는 곧 도착하는 맥클린 특수임무부대(Task Force MacLean)에게 인수해주라고 하였다. 맥클린 부대는 31연대 3대대, 57포병대대, 31전차중대, 31연대 수색정찰중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곧이어 맥클린 부대가 도착했지만 해병대가 아직 철수하지 않아 이날은 그냥 현위치에서 대기 하고 있었다.

운명의 11월 27일이 되자 해병대는 서진하기 위해 모두 장진호 남쪽 하갈우리로 빠졌고, 페이스 부대가 해병대 진지를 인수하여 풍유리강 하구에 주둔한다. 이어 맥클린 부대가 페이스 부대의 진지를 인수하여 후동리에 주둔한다. 한편 27일 먼저 출발한 맥클린부대의 연대수색대는 연락두절되었고(이미 그날 주간에 전멸함) 곧 도착하기로 한 31연대 2대대 역시 연락두절이였다(예상과 달리 아직 머나먼 함흥에 있었다). 27일 야간에는 장진호 동안 후동리에 부사단장 헨리 호스와 31연대 본부, 31전차중대(전차 22대)가 주둔하였고 북쪽 6km 지점 풍유리강 하구에 31연대 3대대와 57 야전포병대가 주둔, 다시 5km 올라가는 최전방에 맥클린 연대장과 32연대 1대대가 주둔하였다. 철저하게 방어 준비를 하고 취침한 해병대와 달리 7사단에게는 그저 하루 자는 숙영지 개념이여서 방어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러나 27일 해병대로부터 전날 중공군을 신문한 결과 “중공군 3개 사단이 지금 장진호 주변에 있고, 그들의 임무는 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장진호 주변에 있는 미군을 전멸시키는 것이랍니다.”, “어제 저녁에 중공군 정찰대가 해병대원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라고 통보를 해주기는 했다.[63]

27일 밤 11시부터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가장 북쪽에 있던 32연대 1대대는 312해병 전투비행대대 소속 코르세어 전투기 4대의 지상공격에 힘입어 그럭저럭 방어 해 나갔지만, 5km 후방에 있던 맥클린 부대는 대대장 2명이 모두 부상당하였고, 특히 포병대대 부대대장은 전사한다.(페이스 부대와 유선도 중공군이 끈어나 57포병대대의 포격 지원이 없었다.) 다만 후동리에는 22대의 전차들이 있어 공격 받지 않는다.

2.5 11월 28일, 포위

밤 사이에 유담리 동북쪽을 지키던 7연대 DㆍEㆍH중대가 사실상 전투불능 상태에 빠지고 유담리 남쪽의 보급로를 지키던 7연대 C중대와 F중대는 고립된다. 이로서 유담리의 5·7 두 연대는 포위되었다. 양 연대장은 상의하여 더 이상 서진을 중단하고 방어진지를 축소하기로 하였다.

한편 유담리와 하갈우리까지의 보급로를 보호하기 위해 유담리 남쪽 5km 덕동고개 북쪽 터키힐에 C중대 , 12km 지점 덕동고개 남쪽 폭스힐에 F중대가 주둔중이였다. 이들은 원형방어를 하고 있었는데 밤 사이에 포위당한 채 격전을 벌였다. 이들을 구하기 위해 7연대의 지시는 AㆍB중대는 유담리에서 터키힐로 싸우면서 내려가고 F중대는 폭스힐에서 덕동고개를 지나 터키힐로 올라오라는 것이였다. 그러나 F중대 윌리엄 바버 대위는 적의 강력한 저항과 현 진지 위치, 중대 내 수많은 사상자 때문에 7km를 북진하는 것은 불가능하여 현 진지 잔류를 요청하였다.

할 수 없이 7연대장 호머 리첸버그 대령은 아직 유담리까지 오지 못해 하갈우리에 있던 2대대장 랜돌프 록우드 중령에게 북쪽으로 이동하여 F중대와 합류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때까지 록우드 중령은 먼저 유담리에 가있던 자신의 대대 소속 DㆍE 중대가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고 F중대가 얼마나 위험한지 모른 채 본부중대와 화기중대(감편) 병력으로 ‘요리사와 제빵중대’라는 이름으로 편성하여 명령에 따랐다. 그러나 망원경으로 보니 고지마다 적군으로 가득차 있었고 광산마다 중공군이 쏟아져 나왔다. 결국 이들만으로 폭스힐까지 가는 것은 무리여서 결국 연대장을 하갈우리로 돌아가라고 지시를 내린다.
그래도 7연대 A·B중대는 통합연대지휘소를 방어하던 C중대 1소대까지 동원하여 별다른 저항 없이 폭스힐의 C중대를 구출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F중대가 있는 폭스힐까지 내려가는 것은 포기한다.

올리버 스미스 장군은 새로운 지시를 내려 5연대는 유담리를 방어하고, 7연대는 유담리에서 하갈우리로 통하는 도로를 개통시키라고 명령한다. 후방의 1연대는 고토리와 하갈우리 사이의 도로를 개통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때 하갈우리의 좁은 분지에 위치한 사령부와 물자 창고를 지키고 있는 병력은 해병 1연대 3대대 뿐이지만, 각종 지원부대가 15~20개 가량 있어 총병력은 해병대 3,000명에 육군 10공병대대 D중대증 600명이 있었다. 하갈우리 북쪽으로 올라가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데로 실패했고, 남쪽으로 시험삼아 1연대 H중대를 보냈지만 800m 정도 가다가 중공군의 집중 사격을 받고 돌아온다. 그도 그럴 것이 애당초 통로가 하나밖에 없는데 거기로 안 올 거라고 생각하는 게 이상하지.
야간전투를 대비하여 하갈우리 남쪽에 해병1연대 3대대 H중대와 I중대를 남쪽에 방어진을 구축하고, 북쪽에는 해병포병대 D, 포대가 자체방어를 하였다. 미 육군 70명에 카투사 100명으로 구성된 10공병대대 D중대는 이스트힐을 방어하는 등 각종 병참 부대에게도 일정 부분씩 방어구획이 배정되었다. 해병공병대만 조명을 킨 채 밤새도록 활주로 공사에만 전념하였다.

그날 밤 중공군 58사단 172연대와 173연대가 하갈우리를 공격하였다. 남쪽을 담당하는 해병대 H·I 중대중에서 H중대가 뚫리며 중공군이 파고 들어왔지만 전과 확대 대신 미군의 방한복 약탈하러 돌아다니다가 대대의 증원병력에 격퇴되는 등 제대로 된 공격을 하지 못했다. 다음날 새벽이 되자 중공군 시체 천여 구가 해병대 진지 앞에 널려있었다. 그에 비해 해병대의 사망자는 단 12명 뿐이였다.[64]

그에 비해 이스트힐을 담당하는 미 육군 10공병대대 D중대는 지휘관이 죽자 그냥 후퇴해버린다. 미군 중 반이 사상당하고 카투사는 대부분 흩어져 마을의 빈집에 숨어버렸다. 중공군은 이스트힐을 지나 군악대와 방어하고 있는 사단본부를 향해 돌입하였지만, 포병대의 지원으로 방어에 성공하였다. 미군은 이스트힐을 탈환을 위해 1,200발의 일방적인 포격지원, 해병항공대의 폭격의 도움으로, 비전투 행정요원과 낙오병들의 혼성부대는 밤새도록 공격해 29일 낮까지 이스트힐의 정상부 아래까지 밀고 올라간다.

사실 중공군 58사단은 27일 하갈우리를 남쪽에서 공격해야 했지만 워낙 험난한 지형 때문에 하루 늦게 도착하였다. 또한 중공군 80사단이 하갈우리 북쪽에서 공격해야 했지만 예상치 못하게 장진호 동안으로 올라온 육군에게 막혀서 협조된 공격을 벌이지 못했다.

한편 덕동고개를 지키고 있던 7연대 F중대는 전날의 전투에 발생한 77명의 사상자로 인해 방어선을 축소한 채 다시 한 번 결사적인 전투를 벌였다. 연대에서는 오전에는 북쪽으로 올라와 유담리에 합류하라 하고, 오후에는 남쪽으로 철수해 하갈우리로 가도 좋다고 하였지만 북쪽이든 남쪽이든 도저히 움직일 상황이 아니였다. 28일 밤에도 다수의 사상자를 발생시키며 적을 중공군을 격퇴하였다. 이날 중대장 바버 대위가 얻은 결론은 중공군은 "멍청했습니다. 매일 밤 거의 같은 시각에 같은 장소로 공격해 왔고, 돌격하기 앞서 나팔소리, 호루라기, 고함 지르기 등 엄청나게 시끄러운 소리를 냈으며, 우리를 기습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습니다"였다. 어째 반자이 어택과 비슷한데? 중공군은 200명의 시신을 놔두고 후퇴하였다.

28일 오전 10시 후동리의 전차들은 지원을 위해 북쪽으로 출발하지만 30분만에 중공군에게 노획된 3.5 로켓포 세례를 받아 2대는 파괴되고 2대는 길에 미끄러져 도로 옆 배수로에 처박히고 결국 후퇴한다. 헨리 호스 부사단장은 전차 한 대를 빌려타고 하갈우리로 돌아갔다.

28일 저녁 장진호 동안의 맥클린 특수임무부대에도 80사단의 공격이 재개되었다. 중공군은 낮에는 요란사격(Harassing Fire)을 하였고 밤에는 전날을 능가하는 강도로 3~4시간동안 치열한 공격을 하였다.

한편 알몬드 장군은 맥아더에게 “11월 28일 22시부로 10군단의 공격을 중지하고 후방으로 철수한 후 급편 방어로 전환하여 적의 차후 공격에 대비하겠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따라 11월 29일 새벽 3시 가장 북쪽에 있던 돈 페이스 중령의 32연대 1대대는 6km 후방의 풍유리강 하구로 후퇴하여 2개 대대와 합류하게 하였다. 부대는 60대의 차량을 타고 별 저항 없이 후퇴하였다. 중공군은 뒤에 남겨둔 보급품과 장비를 약탈하느라 사격을 중지하고 추격하지 않았다. 함께 후퇴하던 맥클린 연대장은 접근해오는 행군종대를 발견하고 31연대 2대대가 이제야 오는지 알고 기쁨에 겨워 소리치며 사격정지를 외치며 차에서 내려 홀로 400m를 뛰어갔다. 도착해보니 중공군이였다. 그들은 맥클린 대령을 포로로 잡아 끌고 갔고 미군들은 심한 충격을 받았다.[65]

후퇴 자체는 약간 무질서 하였지만 결과적으로 풍유리강 하구에 있던 57포병대대를 직접 공격 하던 중공군을 북쪽에서 후퇴한 페이스 부대가 후방에서 공격는 양상이 되어 앞뒤로 짜부된 중공군은 60명이 사살 당하고 깜짝 놀라 도망친다. 덕분에 도로가 개방되어 손쉽게 후퇴 할 수 있었다. 맥클린이 죽었다고 생각한 페이스 중령은 그의 시체를 찾다가 포기하고 대신 맥클린 특임대 까지 지휘하게 된다.

28일 오후 8시 27분 기준으로 장진호 지역의 모든 육군은 해병대 스미스 사단장의 작전통제를 받게 되었다. 페이스 중령은 풍유리강 하구의 육군 부대에 500명의 사상자가 발생 하였으며 스스로 돌파구를 개척할 전투력을 상실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스미스 장군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하갈우리에 도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날 맥아더는 워싱턴의 합동참모본부에

우리는 전혀 새로운 전쟁에 직면해 있다.

우리 전투병력의 현 상태는 중공이 선전포고도 없이 시작한 전쟁을 치를 준비가 확실히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본 사령관은 가능한 범위 안에서 취할 수 있는 조치는 다 취했으나, 본관의 통제능력을 벗어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라는 유명한 암호전문을 보낸다. 맥아더가 어떤 조치를 다 취했는지까지 신경 쓰면 지는 거다
직전까지 맥아더의 태도와 180도 다른 소식을 들은 트루먼 대통령은 언론 브리핑에서 "가공할 만한 상황이 눈 앞에 닥쳐있습니다"라고 선언하였다.
이어 맥아더는 대책회의차 일선에서 박 터지게 바쁜 알몬드와 워커 장군을 동해를 넘어 1,120km 떨어진 동경의 맥아더 사령부로 소환하였다. 동경의 전쟁대책회의에서 아몬드 장군은 10군단을 계속 전진시키겠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8군은 평양을 방어하다가 측면이 위협 받으면 후퇴하고, 10군단은 장진호에서 철수하여 함흥-흥남의 해안에 병력을 집중하기로 한다.[66] 적이 나타났으니 도망가자는 것도 작전이라고 할 수 있나?

2.6 11월 29일, 죽음의 계곡

하갈우리 남쪽 고토리에도 앞뒤로 포위되었다. 북쪽 하갈우리로는 8개의 도로장애물이 있었고, 남쪽 황초령으로는 3개의 장애물이 설치되었다. 유선통신망은 양쪽 모두 절단되었다. 16킬로 남쪽에 있던 진흥리에서도 적이 목격 되었다.

고토리에는 해병 1,500명, 육군 1,000명이 있었다. 주전력은 1연대장 루이스 풀러 대령의 지위 아래, 앨런 슈터 중령의 2대대, 칼 시터 대위의 3대대 G중대, 찰스 펙캠 대위의 미 육군 31연대 B중대, 더글러스 드라이스데일 중령의 영국 해병 41특공대였다. 정오경 해병 전차대대 D중대 합류했으나, 오후 3시경에는 해병 전차 B중대도 고토리에서 출발하였지만 합류하지 못했다.

29일 오전 9시 45분. 고토리에서 하갈우리까지의 보급로를 개통하기 위해 드라이스데일 중령의 지휘 아래 3대대 G중대, 31연대 B중대, 해병 특공대, 사단본부대 등 총 900명으로 구성된 돌파부대가 출발하였다.[67] 이미 중공군은 능선마다 우글거려 드레스데일 부대는 엄청난 양의 집중사격을 받으면서 돌격하기 시작했다. 정오가 되어도 불과 3km밖에 진격하지 못하여 브루스 클라크 해병 대위의 전차중대를 추가로 배속 받아야 했는데 결과적으로 이것이 패착이 된다.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방어력이 약한 트럭과 지프는 그냥 내빼서 전방으로 진격했어야 피해를 최소화하는데, 전차부대들이 대응 사격하느라고 길막하는 바람에 연합 해병대는 그때마다 돈좌된 채 포위 사격 받아 절단난 것이다.
오후 4시 30분, 상황은 절망적이였다. 더글러스 드라이스데일 중령은 하갈우리에 있던 스미스 장군에게 이 위험한 돌파를 계속해야 하냐고 무전으로 물어보았다. 아마도 스미스 장군 본인에게 제일 어려운 순간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증원부대가 오지 않으면 사령부가 적에 손에 떨어질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스미스 장군은 결국 "어떠한 희생이 있더라도 반드시 돌파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런데 선두 부대가 드디어 하갈우리와 고토리 중간(부성역상평역 사이)에 도착했을 때, 하필이면 탄약차에 박격포탄이 명중하여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중간 부분의 길이 끊겼고, 선두 부대(해병 G중대, 해병전차 D중대, 영국 41해병특공대)는 미친 듯이 진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국 이 탄약차 때문에 후속 부대(영국해병특공대 60명, 육군 B중대, 해병사단본부대)는 중공군의 총탄 세례를 이겨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 남겨져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 이러한 필사의 돌파로 증원된 병력은 약 400여 명. 대략 150명이 전사, 150명이 부상, 포로 160명(육군 100명, 미 해병 40명, 영국해병특공대 20명), 141대 차량 중 75대 파괴라는 엄청난 피해 속에서 이루어진 증원이었다.

간신히 하갈우리에 도착한 드라이스데일 부대는(해병 G중대 2/3, 영국해병 41특공대 등 보병 300명과 해병전차 D중대) 곧바로 10군단 공병대가 지키는 이스트힐로 올라가 방어 전투에 투입되었고, 훗날 드라이스데일 중령은 자신이 지나갔던 이 계곡에 Hellfire Valley(지옥불 계곡)이란 이름을 붙였다.
한편 남겨진 후속부대는 4토막 난 채 곳곳에서 절망적인 방어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가장 북쪽에는 10군단 연락장교 존 맥로린 해병 소령이 지휘하는 135명이 있었고, 250m 남쪽에 육군 B중대, 50m 아래 해병 사단공보관 마이클 카프라로 대위가 포함된 약간명, 100m 아래 사단 차량수송관 헨리 실리 소령의 약간명이 있었다. 모두 합해 380명 정도이며 1km에 걸쳐서 흩어져 있었으며 상호간 무전연락이 되지 않았다.

밤이 깊어오고 사방에서 나팔 소리가 불어왔지만 해병대는 방어진을 편 채 항공지원을 받을 수 있는 다음날까지 버틸 결심으로 결사 항전하였다. 이때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중공군이 항복하라고 하자, 이 말을 전해 들은 맥로린 해병 소령은

"중공군의 항복을 접수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전하라!"

"그리고 그들에게 제네바 협약에 따라 대우해 주겠다는 말도 전하라. 토바르, 물론 중공군이 그 말을 비웃을 거라는 것을 알아.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그 말을 전해. 따뜻한 음식을 먹여주겠다는 말도 잊지 말고"

해병 헌병대 길레르모 토바르 병장이 이 메시지를 갖고 한국인 통역을 대동한 채 교섭했지만 물론 실패. 3차에 걸친 교섭을 하였지만 무기만 내려놓으면 부상자들을 고토리까지 보내주겠다는 말에 속아 항복하고 만다.[68] 그나마 후방에 있던 2개 그룹은 후퇴에 성공하였다. 오후 3시경 뒤늦게 증원을 위해 참가한 해병 전차대대 B중대는 어느 정도 진격하다가 극심한 저항에 돈좌되어 하룻밤 원형 방어하다가 다음날 고토리로 복귀하였다.

한편 29일 아침 하갈우리에 있던 해병대 스미스 사단장은, 10군단 사령부로부터 유담리의 1개 연대를 이동시켜 장진호 동안에 고립된 육군 7사단 페이스 부대를 구출하고, 하갈우리와 고토리 사이의 도로를 개통시키라는 메시지를 무선으로 하달 받았다. 이놈들아 해병대 다 죽게 생겼다 능력 밖의 일이라 명령은 무시되었고, 심지어 하갈우리를 방문한 육군 7사단장 데이비스 바도 해병대의 의견에 동의하였다.

육군은 알아서 죽던지 살던지 하라고 버려두었지만, 덕동고개에 포위된 F중대의 위기는 심각하였다. 이날 아침 2인승 헬리콥터가 덕동고개에 착륙해 무전기용 전지를 전달해 드디어 무전기를 사용하여 포병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지만, 그래봤자 숨 넘어가는 중환자 상태였다. 이에 7연대의 2개 중대, 5연대 1개 중대를 동원하여 혼성대대를 만들어, 덕동고개의 F중대를 구원한 후 쭉 밀고 내려가 하갈우리까지 진출하는 것이였다. 이 용감한 부대는 출발한 지 단 몇 분 만에 도로 양쪽에서 빗발치는 기관총 사격에 그냥 후퇴해 버렸다.

애초 10군단의 작전 계획은 육군 3사단이 고토리와 함흥 사이를 책임지는 것이였다. 이에 해병대에서는 계획대로 육군 3사단이 고토리 후방의 진흥리를 인수해주면 진흥리에 있는 1연대 1대대를 고토리로 올리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 요청은 거부되었고 이 날 정오 아몬드 군단장은 함흥/흥남 방어를 위해 10군단 병력을 집결하라고 하였고, 9시간 후에는 철수계획을 제시하였다. 10군단은 해병대를 버리고, 해병대는 육군 7사단을 버리고

이제 후퇴밖에 남은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닳은 해병대 스미스 장군은 기존 유담리 북쪽은 5연대가 방어나고 남쪽은 7연대가 방어하는 작전을 버리고, 5연대만 유담리 전체를 방어하고 7연대는 하갈우리까지 도로를 개통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한편 장진호 동안 육군은 그냥저냥 버틸만 했다. 이날 오후부터 공중보급이 시작되어 그중 일부가 진내로 떨어져서 식량과 각종 탄약을 보급 받았다. 또한 해병대항공대가 지속적으로 네이팜탄, 로켓포, 기관총을 사용해서 주변 중공군을 공격해줬다. 주간에는 항공폭격이 무서워 숨어있던 중공군이 밤에 공격하는게 정상이지만 이날은 월광이 양호하여 밤에도 항공폭격을 하였다. 중공군은 미군 방어선 밖에 몰려있어서 효과만점이였다.

그러나 맥클린 대령이 그토록 기다리던 32연대 2대대는 아직도 함흥차사였다. 이날 늦은 오후에야 함흥과 하갈우리 중간의 마전동으로 이동하라는 지시를 받고 병력은 철도로 수송되고, 10군단에서 지원된 차량으로 물자를 이동시켰다. 그런데 군단본부의 실수로 2대대의 물자를 실은 군단 지원 차량들이 차량집결지에서 해산되어 버렸다. 그바람이 2대대는 하루종일 손빨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30일 아침에 북쪽으로 이동하였지만 중공군 공격을 받아 지체되었고 12월 1일 아침에야 고토리에 도착했다. 그러나 고토리 북쪽 도로는 중공군이 장악하고 있어 그냥 거기서 장진호 전투 끝날 때 까지 눌러 앉는다.

2.7 11월 30일, 풍전등화

사실 이 정도는 낭림산맥 넘어 서쪽의 미8군에 비하면 매우 양호한 편이였다. 미8군은 이미 부대단위로 기동방어를 하며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전면적으로 도주중이였다. 미2사단은 평안남도 군우리와 숙천 사이에서 중공군에게 두둘겨 맞아 30일 아침에만 3천명의 병력을 잃었다. 사단장 로렌스 카이저 소장도 도로가 마비되어 걸어서 10km를 도망갈 정도로 풍비박산이였다. 물론 대부분의 편제 장비를 내버린 채로였다.

결국 미8군의 전면적인 퇴각과 해병대의 포위라는 절망적인 소식 때문에, 이날 아침 트루먼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맥아더가 원자폭탄을 쓸 수 있게 허락할 수도 있다고 말하였고, 이는 미국 전역에 공포감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 최악의 상황에서 맥아더와 10군단 사령부는 어떠한 계획이나 지시사항도 해병사단에 하달하지 않았다. 예하부대가 이미 패주하고 있어도 후퇴 명령을 내리는 것을 서로 미루는 게 흡사 일본군을 보는 것 같다

30일 아침에 가서야 7사단장 데이비드 바 소장이 장진호 동안의 예하부대에 헬리콥터로 방문해서 처참한 상황에 대해 확실히 알았고, 10군단에 배속된 해병 상륙작전 전문가 에드워드 포니 대령의 브리핑으로 10군단장 아몬드 장군도 비로소 장진호 방면의 상황 파악을 하였다. 이에 즉각 L-19 경비행기를 타고 하갈우리로 날아가 해병 1사단장과 육군 7사단장에게 하갈우리에 집결 후 사단 내 모든 편제화기와 장비를 파괴하고 함흥으로 이동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스미스 장군은 장비파괴에 대해 거절하였다.

스미스 장군은 숙소로 돌아와 작전참모 바우저에게 아몬드 장군의 지시에 대해 역겨움을 토로하며 "지금부터 우리는 모든 것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해나가야 하며, 10군단 사령부의 지시는 에누리해서 듣고, 10군단의 지원에 의지하지 않고 적의 포위망을 돌파해 나갈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정리하자면 아몬드 장군은 해병대가 포위되었으니 장비를 버린 채 수송기를 동원하여 후방으로 후퇴하기를 원했고, 스미스는 장비를 포기할 수 없으니 이를 이용하여 후방을 향하여 뚫고 나가려고 한 것이다. 사실 수송기로 후퇴하면 활주로를 지키는 최후의 병력들은 포기할 수밖에 없다. 이때 미국 전역에서 발행되는 신문들은 그들의 전멸을 예상하고 있었고, 정부 관리들도 장진호의 해병대에게는 희망이 거의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CIA 월터 베델 스미스 국장은 오직 외교로만 맥아더의 우익(右翼)을 구출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고 알려졌다.

미육군 지역인 장진호 동안에서도 비교적 후방인 후동에 있던 부대(31연대 본부 324명과 57야전포병대, 전차중대)는 순조롭게 철수하였다. 27일 대공세 이전에 전방 수색하러 갔다가 연락 두절되었던 연대 정보수색 정찰대 생존자도 어디선가 나타나 따라붙었다. 그러나 장진호 전방인 풍유리에 있던 페이스 부대는 버려져 있었다. 전술학적으로 볼 때 먼저 풍유리 병력이 후동으로 후퇴하고, 여기서 후동의 병력과 합류하여 하갈우리로 후퇴했어야 하는데 풍유리의 후방인 후동의 병력이 먼저 후퇴해버린 것이다. 페이스 중령이 이끄는 31연대 3대대는 동쪽 방어선이 뚫리며 밤새 절망적인 전투를 했지만 대충 어떻게든 버텨냈다. 30일에도 월광이 좋아 야간 항공폭격이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은 방어선내 작은 고지를 점령 하였다. D중대(화기중대)가 고지에 역습을 가했지만 실패하였다.

하갈우리 역시 야간에 중공군 58사단과 59사단이 공격해 왔는데 해병대는 결사적으로 방어해나갔다. 밤사이에 적 사살 500~700구였지만 해병대는 거의 피해가 없어서 1연대 I중대의 경우 전사자 2명 부상10명에 그칠 뿐이였다. 이스트힐 방어전투에 참가한 영국 해병특공대는 적 시신을 장방형으로 쌓아서 2m 정도의 탑을 만들었는데, 텐트와 연결하여 바람을 막는 용도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영국 해병특공대는 얼마나 용맹한지 역습을 가해 중공군을 언덕 너머로 밀어버릴 정도였다. 시체탑이 점점 높아지는 것은 물론.

이 전투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전투에서 피아살상비는 압도적이였다. 주간에는 미군의 사기적인 항공·포병 지원으로 중공군은 방어만 하였고, 야간에야 중공군이 미군 진지로 쳐들어갔지만 기본적인 소화기 화력이 하늘과 땅 차이니 미군 1명 죽을 때 중공군은 최소한 10배에서 많으면 100배 많은 병력이 죽어나갔다. 전투마다 해병대는 절망적으로 싸웠지만 결과는 해병대에 의한 일방적인 학살이였다.[69] 후술하겠지만 진정한 적은 추위였다. 미군이든 중공군이든 얼어죽는 사람이 전사자를 능가할 지경이였다.

2.8 12월 1일, 변화된 양상

사상자의 증가는 정말 심각한 문제였다. 하갈우리의 사단의무대에서 후송되어 좀 더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아야하는 부상자는 600명에 달했다. 유담리에서도 적어도 500명의 부상병이 있을 것으로 예상 되었다. 결국 유일한 해결책은 부상자의 항공 수송 뿐이였다.

이에 공사가 절반도 안 끝난 야전활주로에서 C-47 수송기 한 대가 시험 착륙하였다. 관제탑은 무전기를 탑재한 지프가 대신하였다. 활주로가 짧아 엔진을 역회전 시키는 위험한 착륙이였다. 다행히 착륙에 성공하고 30분 후 24명의 부상자를 태우고 이륙하는데도 성공하였다. 지상에 있던 전 병력은 그 모습을 보고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바로 이 비행장이 전멸을 막았다. 그날 오후에는 4대의 수송기가 보급품을 실고 착륙하였고, 그 중 1대는 랜딩기어에 손상을 입어 활주로 옆으로 치워지고 나머지 3대는 부상병을 태우고 이륙하였다. 이제 해병대는 살았다.

그동안 하갈우리의 방어선이 공격 받는 극히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해군공병대만은 열외되어, 적의 포화에 노출될 위협을 감수한 채 불 켜놓고 밤새도록 작업하여 마침내 부분적으로나마 활주로 개통에 성공하였다. 부상병들이 후송되는 것은 물론 함흥·흥남·원산에 있던 해병대 행정부대원과 부상에서 회복한 500명의 병력이 보충병으로 기꺼이 이 지옥의 한복판으로 날아왔다.

아침 8시. 유담리의 7연대의 남은 2·3 대대가 전차 한대를 앞세우고 하갈우리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하였다.[70] 이는 하갈우리에서 도로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유일한 M-26 퍼싱 전차였다. 비록 철수하지만 해병대의 사기는 살아있었는데, 흥남으로 돌아가 재편성하여 다시 돌아와 중공군에게 진짜 매운맛을 보여줄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있을 정도였다.

뒤이어 5연대도 출발하였는데 가장 후방에 있던 5연대 1대대가 후퇴하면 바로 뒤따라 중공군이 밀고 내려왔다. 포병을 동원하여 겨우 적의 전진을 막아내고 있었다. 이윽고 밤이 되자 5연대에서 각 중대별로 너무 힘들어 현 진지를 사수하겠다고 요청하였지만 연대장은 모두 거부하고 무조건 하갈우리를 향하여 공격하라고 지시하였다.
유담리에서 후퇴할 때 불도저는 180cm의 기다란 구덩이를 파놓았고 낙하산 천에 싸인 85구의 시신을 합동으로 묻었다.[71] 그리고 존 크래번 군목이 성경 구절을 낭독하면서 그들의 명복을 빌었다. 다행히 휴전 후 별도의 회담을 통해 모두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문제는 장진호 동안의 육군이였다. 풍유리의 페이스 대대장이 이끄는 31연대 3대대를 중심으로 한 페이스 부대는 전날의 야간 전투를 겨우 막아내었지만 방어선이 뚫리고 작은 고지가 점령 되었다. 중공군은 이날 이례적으로 주간 공격을 하기도 하였다. 아침 10시. 페이스 중령은 항공기 공격을 유도하며 조종사에게 “우리 부대와 하갈우리 사이에 아군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런데 조종사는 “죄송합니다. 없습니다.”라고 답변 하였다. 결국 페이스는 하갈우리로 철수를 결심 하였다.

후퇴 순서는 페이스 부대(32연대 1대대), 57 야전포병대대,[72] 중박격포중대, 31대대 3대대 순이며 15대공포 대대 D포대의 반괘도 차량은 대열 중간 중간에 배치했다. 약 3천명의 병력이 22대의 트럭으로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태워야 할 부상자가 너무 많아 사전에 트럭에 실어놓은 시신들을 트럭 밖으로 던져버렸고, 시신들은 떨어진 자리에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600명의 부상자를 포함 수천 명의 육군 병력은 코르세어기의 도착을 기다렸다.

이윽고 1시가 되자 코르세어기가 나타나고 병력은 출발하였다. 그런데 코르세어기가 네이팜탄을 떨어드렸는데 너무 가까워 불길이 차량 바로 앞쪽에 떨어져 일부 병사들이 불기둥으로 변하였고, 눈밭을 구르며 제발 총으로 자신을 쏴달라고 애원하였다. 그 순간 공포에 휩싸인 병력들은 도로를 따라 무질서하게 달리기 시작하였다. 그때까지 건재하였던 소대, 중대간의 편제가 무너져 버린 것이다.

그날 10군단장은 가용가능한 항공자원 중 절반을 장진호 동안에 배정하였다. 막강한 항공지원을 받을 수 있었지만 정작 지상에 있던 육군은 싸울 생각이 없었다. 특히 운전병들이 집중적인 사격을 받고 죽어 운전대를 잡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부상자는 계속 늘어났지만 이미 트럭에 부상자로 가득 차서 더 이상 태울 수가 없었고, 새로 발생한 부상자는 그대로 버려졌다. 심지어 중간에 다리가 폭파되어 있어서 차량 행렬이 막혀버렸다. 얼어붙은 늪지로 우회하여 반궤도 차량이 일반 트럭을 견인줄로 견인하는 방식으로 도섭하였다. 이렇게 힘들게 하천을 극복하면서 진격 했지만 하갈우리 북쪽 7km 지점에서 선두 차량 2대의 운전병이 사살되었고 이로서 차량행렬 전체가 멎어버렸다. 결국 병사들은 개별적으로 얼어붙은 호수를 건너 탈출하였다.

오후 5시경 페이스 중령은 필사적으로 병력들이 다시 싸우도록 지시를 내렸지만 모두 넋이 나가있었다. 페이스 중령은 전투를 거부하며 트럭 짐칸에 스스로 묶으려고 했던 카투사 두명에게 싸우라고 지시하였는데 그들은 일본말로 "나는 다쳤습니다"라고 반복해서 말하였다. 이에 페이스 중령은 둘 다 사살해 버렸다. 물론 이와중에 훨씬 많은 훈련을 받고도 도망치는 미군은 한 명도 쏴죽이지 않았다.[73]

병사들이 얼어붙은 호수를 건너가자 중공군들이 사격하기는 더욱 편했다. 주변에는 아무 장애물도 없었고 보름달에 의해 훤하였다. 어떠한 엄폐물 없이 외롭게 달려가던 병사들은 하나씩 사살되었다. 페이스 중령 역시 이때 가슴에 총을 맞고 쓰러져 지휘력을 상실하였다.[74] 중공군들은 저항이 없는 미군 차량행렬을 돌아다니며 부상병들을 일일이 쏴죽이고 모든 차량에 불을 질렀다. 살아남은 장교들도 지휘하기를 포기하고 도주하거나 한 오두막에 단체로 틀어박혀서 모든 것을 포기하였다. 이로서 페이스 부대는 와해되고 이때 부터는 개인이나 그룹 단위로 개별 행동은 한다.

그나마 페이스 대대 정보장교 로버트 존스 대위가 부상병 150명을 이끌고 행군을 했고 약간의 트럭들이 이를 뒤따랐다. 이제는 부대가 아니라 동상 걸린 발로 쩔뚝되는 부상자 집단이 어떠한 대형이나 계획 없이 그져 남쪽으로 걸어가는 수준이였다. 겨우 3km 걸어 갔는데 파괴된 전차 2대가 길막하였다. 우회로를 만드는 악전 고투 속에 밤 21시경에야 비로서 후동리에 도착 하였다. 그러나 전술했다시피 후동리에 있던 맥클린부대 연대 본부는 이미 텨텨텨. 도착하자마자 중공군의 사격에 운전병은 전사하고, 전복된 트럭의 부상병은 땅바닥으로 쏟아져 나왔다.

여기서 육군은 크게 3토막으로 나는데, 첫 번째 부류가 가장 현명했는데 정보장교 로버트 존스 대위는 도로로 이동 하는 것을 포기하고, 도로와 평행하게 놓여져 있던 철로로 진입하기로 한다. 그러나 호반과 너무 가까워서 위험했다. 차량행렬 중에 몇 대만이 존스 대위를 뒤따랐다. 이동중 중공군의 공격을 받고 대부분 얼어 붙은 장진호로 도망 갔다가 그대로 하갈우리 해병대 방어진지에 도착했다.

두 번째 부류는 페이스 대대 D중대 소대장 제임스 캠밸 중위가 포함된 75~100명의 병사들이였다. 이들은 한 포병장교의 지휘로 그냥 도로로 진격하다가 중공군의 공격에 후퇴하여 다시 차량으로 돌아 온다. 이때가 밤 22시. 도저히 방법이 없어서 그냥 포위된체 차량에서 1시간 동안 버틴다가 중공군의 박격포 공격이 차량으로 다가 오자 죽기살기로 다시 진격한다. 그러나 선두 차량의 운전병 3명이 전사 하자 또 돈좌되어 버린다. 중공군 병사들이 차량대열 후미로 접근하자 병사들은 기동로 확보를 위해 차량 4대를 도로 좌·우로 밀어 굴려 떨어트린다. 전복된 차량에서 시체들이 쏟아졌고 주위의 부상병들은 비명을 질렀다. 캠밸 중위는 선로 밑 배수로를 따라 기어 갔다. 1.2km를 이동하자 여러 병사들이 계속 합류 하였다. 이동중 국군(?)을 만나 해병대가 어디인지 물어 보았다. 국군이 도로를 갈으키며 미군 지프차들이 매일 그 길을 따라 내려갔다고 말했지만 켐벨은 의심스러워 그냥 호숫가를 따라 걸어 갔다. 3km를 더 내려가 일행이 17명으로 늘어날 때 쯤 해병대 전차 부대를 만난다. 이들 외에도 대충 걸어가다가 하갈우리 까지 간 병사들이 꽤 있었는데 심지어 다음날이 2일밤 22시경 페이스 대대 임시 중대장 스미스 중위가 이끄는 무리나 D중대장 비거 대위가 이끄는 무리가 하갈우리에 도착하기도 하였다.

가장 한심했던 세 번째 부류는 그냥 다 포기하고 풍유리강 하구와 후동리 사이에서 죽치고 앉아 있던 무리들이였다. 이들은 얼어죽거나 중공군의 포로가 된다.
당시 하갈우리 북쪽 호수 방면은 해병수송대대가 방어하고 있었고 전면에는 지뢰지대가 있었는데 너무 추워서 터지지 않는 바람에 육군 병사들이 통과하는데 이상 없었다.

12월 4일 페이스 부대의 생존자를 파악 했을 때 전체 1053명중 17%인 181명만 살아 돌아왔다. 다른 육군 부대들도 비슷하였다.

2.9 12월 2일, 브레이크 아웃

문제는 고립된 덕동고개의 F중대였다. 사전 계획대로 5연대가 유담리 방어를 전담하고 7연대가 먼저 남쪽으로 진격하여 덕동고개의 F중대를 구출하고 이어서 하갈우리까지 뚫고 내려가야 했다. 먼저 7연대 1대대가 12월 1일 야간에 산길로 진격하였다. 그동안 미군은 주간에만 움직였고 그것도 차량을 이용하여 길로만 다녔기 때문에 중공군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그런데 F중대 방어진지까지 6km를 걸어가야 하는데 평지가 아니라 1520고지를 지나가는 6km였다. 깜깜하여 방향을 잡지 못해 수시로 대열이 멈춰섰었는데, 그때마다 너무 추워서 얼어죽을 지경이였다. 1520고지 정상에 올라가자 너무 지쳐서 도미노처럼 쓰러져 버렸다. 흠좀무한 것은 정상에 있는 참호에서 중공군 얼음덩이를 꺼냈는데 놀랍게도 아직 살아있어서 눈동자만은 움직였다. 결국 중공군 방어 전초 병력은 대부분 얼어 죽어버려 7연대 1대대 병력은 저항 없이 1520 고지를 차지할 수 있었다.

잠시 휴식 후 F중대가 있는 덕동고개 폭스힐로 이동하는데 이동 중 가벼운 전투를 반복하였다. 중공군도 미 해병대도 너무 춥고 힘들어 본격적인 전투가 일어나지 않았다. 우연히 서로 마주치면 너무 힘들어 총을 들어올리지 못할 지경. 대대장부터가 1520고지 정상에서 휴식 중 참호를 파다가 기관총 세례를 받아 이마를 스쳤는데 귀찮다고 그냥 그 자리에 드러누워 자버렸다.

결국 F중대의 방어선에 도달했는데 언덕은 수백 명의 중공군 시신들로 뒤덮여 있었고, F중대에 다가갈수록 점점 많은 시신이 쌓여있어 흙 한 번 안 밟고 시신만 카페트처럼 밟고 이동할 지경이였다.[75] 심지어 F중대에는 중공군 시신으로 바리케이트를 쳐놓았다. 이 합류한 시점이 12월 2일 오전 11시 25분이였다.

F중대는 5일간 격전으로 전사 26명, 실종 3명, 부상 89명등 총 118명의 사상자가 있었다(중대원+대대 화기중대 일부+해군 위생병 합계 246명). 장교는 7명 중 6명이 부상당하였을 지경. 당시 F중대에게는 중공군 포로가 2명이 있었다. 7연대 1대대 B중대 소대장인 중국계 츄엔 리 중위가 포로 심문을 하니 놀랍게도 장개석 밑에서 싸웠던 국민당군 출신이라고 했다.

한편 하갈우리 북쪽 호수지역을 방어하던 수송대대장 올린 뵐 중령은 해군 위생병과 운전병만 데리고 얼어붙은 호수를 지프로 이동하였다. 중간에 마주친 중공군에게 싸울 의사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총들을 얼음판에 올려두고 부상자를 지프에 싣고 후송하였다. 가끔 총알이 날라오는 위험한 상황이였다. 얼음판과 근처 호숫가에는 수백명의 육군 병사들이 흩어져 있었다.

구조 작전은 다음날 12월 3일에도 계속되었다. 이때는 더 많은 병사들이 구조작전에 동참하였다. 중공군은 이들을 보고만 있기도 하고 때로는 총을 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올린뵐 중령은 용감무쌍하여 이에 아랑곳 하지 않았고, 심지어 도로까지 올라가 불타버린 차량 행렬을 뒤져 모두 전사한 것을 확인하였다. 모든 차량이 시체들로 가득 차있었는데 무려 300명 가량 되었다. 이틀간 구조한 육군 병사는 300명에 달했고 자력으로 탈출한 몸 성한 병사들은 385명에 달했는데 이들은 모두 하갈우리를 방어하던 해병 1연대 1대대에 배속되어 임시대대로 편성되고 해병대 장비로 무장하였다.[76]

그러나 이때 육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서 전쟁은 나와 상관 없다는 식으로 행동했고 어떻게든 꾀병으로 부상자 수송기를 타고 탈출하려고만 했다. 해병 사단장이 육군 장교에게 부대통제력 비슷한 것이라도 행사하라고 할 정도였다. 해병대원들은 육군 장교들을 무기와 부상자를 포기한 죄로 모두 군법회의에 회부해야 한다고 회고할 정도였다. 대공세 직전 소련군이 작성하여 중공군에게 배부된 팸플릿에 의하면 "미국 해병대원들은 미 육군 병사들에 대하여 오만하고 냉소적인 태도를 취한다"라고 되어있었지만, 실제로는 그 이하로 해병대원들은 미 육군을 멸시할 정도였다.

그러나 육군 당국에 의해 장진호 동안의 육군 행위들은 과장되어, 병사들은 영웅이 되었고 페이스는 뛰어난 지휘관이 되어 사후 명예훈장까지 수상하였다. 유담리의 해병 4.5개 대대는 중공군 3개 사단을 막아내며 성공적으로 후퇴한데 비해, 풍유리-후동리의 육군 2개 대대는 중공군 1개 사단을 상대로 방어는 괜찮게 해내었지만, 그과정에서 풍유리의 페이스 부대만 남기고 후동리의 부대가 먼저 후퇴해버린 것이다. 남겨진 풍유리의 페이스 부대는 외롭게 후퇴하다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개발살.
장진호 동안에서 육군이 벌인 졸전에서 어떻게든 의미를 쥐어짜낸다면, 중공군 80사단의 공세를 3일 동안 막아내며 수천명을 사살하여 하갈우리 북동쪽을 방어해낸 것이다. 역사가 로이 애플맨에 의하면 "장진호 동안에 주둔해 있던 보병 7사단 병력은 해병부대가 하갈우리를 방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여유를 제공한 셈이 되었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수백 명의 부상자를 후송할 수 있었던 야전활주로의 완성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전투의 결과는 그리 칭찬할 만한 것이 못 되었다. 육군 병력은 어쩔 수 없이 희생양의 역할을 하여야만 했고, 그 희생양이 도살된 꼴이 되었다."

2.10 12월 3일, 전사상 가장 완벽한 철수작전

유담리에서 후퇴하던 2개연대의 부상자 수는 어마어마했다. 차량으로 이동하는 부상자 1천명에 도보로 이동하는 부상자 800명이였다. 중간에 합류한 폭스힐에 주둔해있던 F중대의 부상자를 태울 자리가 없을 지경이였다. 자리가 없어 부장자들은 지프 보넷 위에 3명씩 눕혀놓아 추위와 총알 세례에 그대로 노출되게 해놓았고, 시신들은 대충 길가에 묻거나 트럭 흙받이(Fender), 심지어 대포의 포신에 묶어놓기까지 했다. 살갗을 찢어대는 혹독한 날씨에 극심한 피로로, 행군이 정지할 때마다 다들 그 자리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중공군도 상황이 좋지 않아 제대로 공격해오는 부대가 없었다. 대부분의 경우 저격병 한두 명이 공격해왔는데 그때마다 미군은 공습 요청으로 처리했다. 중간에 방어호에 있던 중공군들은 꽁꽁 얼어붙어 있었는데, 숨 쉴 때마다 입김이 나오고 후레쉬를 비추면 눈이 불빛을 따라 돌아가서 살아있다는 것을 알 정도였다. 심지어 도로 곳곳에 미군이 피워놓은 화톳불에 중공군들이 몰려와 해병들과 함께 불을 쬐다가 몸이 녹으면 다시 산비탈로 올라가는 일이 발생할 정도였다.

23km라는 짧은 거리를 무려 이틀 반 동안이나 행군한 끝에 도착 12월 3일 오후 7시가 다 되어 선두부대가 하갈우리 방어선 북쪽 끝 검문소에 도달하였다. 해병대는 며칠동안 세면과 면도도 못해 몰골이 엉망이고 피곤에 절여져 있었지만, 그 시점부터 어느 하사관 한 명의 페리스 아일랜드식 억양의 구령에 맞추어 발을 구르며 행진하였고, 머리를 높이 들고 해병의 노래까지 부르며 검문소를 통과하였다.

몬테주마의 홀에서 트리폴리의 해변까지

우리는 조국을 위해 땅에서 바다에서 싸운다네
첫째로 우리의 권리와 자유를 위해 그리고 명예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자랑스러운 미합중국 해병대라네 -해병의 노래

참전용사들은 당시 트럭에 실려있던 전사한 해병들의 시신들이 하사관이 외치는 집합 구령을 듣고 다시 살아나서 트럭을 내려와 행진대열에 합류할 것 같다고 했을 정도였다. 이로서 군사 전문가 드류 미들턴이 명명한 전사상 가장 완벽한 철수작전 중의 하나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7연대의 선두가 하갈우리에 도착한 것이고, 아직도 뒤를 지키기 위해 유담리에 해병 5연대 2대대가 남아서 방어하고 있었고, 덕동고개 쪽의 터키힐에서는 7연대 3대대가 통로 확보를 위해서 방어진을 치고 있었다. 오후 늦게는 유담리에 남아있던 해병포병 11연대도 철수하기 시작하여 그야말로 2대대만 남았다. 서부전선의 육군 2사단의 경우 후위를 맞았던 대대가 통째로 철수하지 못하고 버려지기도 하였다. 중공군이 화낼까봐 뻔히 보이는 적에게 총도 쏘지 못하게 하였다. 중공군은 해병포병대가 철수하면서 박살내어 폐허가 된 유담리 주변 가옥을 약탈하고 있었다. 선두 부대가 하갈우리에 도착했다는 시점에서는 5연대 2대대와 앞서 철수한 부대가 후미와 1.5km 떨어져 있었다. 그들이 철수할 때까지 터키힐에서 통로 확보할 7연대 3대대는 이미 첫날에 작살난 이후 여기저기에서 병력을 끌여들어 겨우 정수의 1/3 정도 채우고 있는 사실상 중대급 부대였다. 어둠이 깔리자 구호소에 있던 병사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절망만이 남아있었다. 이 최악의 상황 속에서 해병은 역시 해병이였다. 그 상황에서도 일부의 병력들이 북쪽으로 이동하며 후위부대의 후위를 맡기 위해 지정된 진지로 이동하였다. 그러고 나서야 대대장 해롤드 로이스 중령은 출발 명령을 내렸다. E중대를 선봉으로 빠르게 이동하였다. 순식간에 터키힐을 지나쳐갔고, 그 바람에 터키힐의 7연대 3대대가 최후미를 담당하게 되었다. 공병대가 부서진 다리를 고치고, 연료가 떨어져 대포들을 포기하고 가는 악전고투 속에 하루가 지난 12월 4일 오후가 되어 이들도 하갈우리에 도착하였다.

다행히 먼저 후퇴한 7연대처럼 이들도 산발적인 저항 외에 부대 단위의 공세를 받지 않았다. 유담리-하갈우리의 통로만 12월 1일부터 4일까지 공격을 안 받은 것이 아니라 하갈우리, 고토리, 진흥리 모두 공격이 뜸했다. 11월 27일부터 초기의 중공군 대공세 때 이미 작살나서 더 이상 공격할 여유가 없기도 하고 살아남은 병력도 너무 추워서 공격할 힘도 없었다. 무엇보다 해병 코르세어기가 도로 양쪽에 네이팜탄으로 화력 터널을 만들어 주어 솜으로 누빈 옷을 입고 있던 중공군들은 심지처럼 타올랐다.

하갈우리 동안의 육군 페이스 부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고 이동했다면 해병항공대의 지원으로 무사히 철수가 가능했을 텐데 위에서 언급했듯이 장교들은 지휘하기를 포기하고 인가로 숨었고, 병사들은 저격당한 운전병 대신 운전대 잡기를 두려워 했다. 그 바람에 제대로 된 공격도 받지 않고 알아서 산발적으로 흩어져 도망가다가 전멸해 버리는 추태를 일으켰다. 의지드립 치겠다는 건 아니지만 동일한 조건이라도 정신력이 부족하면 어떤 파멸적인 사태가 발생하는지 비교할 수 있는 부분.

2.11 12월 4일, 우리는 다른 쪽으로 진격 중이라고

5연대와 7연대는 포병부대와 대전차 중대 행정 중대에서 병력을 차출하여 보충해 주었음에도 병력이 반도 차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대로 보충병 500명도 새로 도착했다.

이날 공군 전투 수송사령부의 윌리엄 H. 터너 장군도 직접 하갈우리로 날아와 최대한 수송기를 보내 포위된 병력들을 항공편으로 철수 시키겠다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해병대 스미스 사단장은 보유한 중화기와 장비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에 거부하였다.

군단장 아몬드 장군도 왔었는데 언제나처럼 무한 낙관론만 설파하다가 돌아갔는데,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으며 B-17과 B-29 폭격기가 함흥까지 완벽하게 엄호를 제공할 것이라는 소리였다. 그리고 사단장과 두 연대장, 그리고 수송대대장에게 무공십자훈장을 수여했고 돌아가는 길에 고토리를 방문하여 지금까지 아무것도 한 게 없는 육군 31연대 2대대장 월리엄 라이디 중령에게도 같은 훈장을 수여하였다.

최고의 방문객은 여러 언론사의 특파원중에서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마거릿 히긴스 기자[77]였다. 그녀는 스미스 장군에게 "후퇴인가요?"라고 물었다.

"후퇴라뇨? 젠장, 후퇴가 아니오, 우리는 다른 쪽으로 진격 중이라고!"

"Retreat, hell! We're not retreating, we're just advancing in a different direction."

라는 불후의 정신승리로 대답했다. 이 말은 미 해병대의 불굴의 의지를 상징으로 둔갑해 전해지게 된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날 오후 내내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다가 영국인 기자에게 "확실하게 말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후방이 없으면 후퇴가 아닙니다. 포위당해 있을 때는 후퇴, 아니 철수조차 할 수 없습니다. 유일한 방법은 돌파해 나가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공격해야 하며,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하려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아마도 너무 길어서 좀 더 간단하게 줄여져서 24시간도 안되어 미국 전역의 신문들의 전면에 장식된 것 같다. 스미스 장군의 부관 마틴 섹스톤 대위는 'Hell'이라는 단어는 안 썼다고 확신했고, 연대장 알파 바우저는 'Heck(뭐라고?)' 이라는 단어를 썼다고 했다. 어쨌든 위의 일화는 약간 와전 된 듯. 오히려 그날 해병대원들은 마거릿 히긴스 기자가 교만하다고 분개했으며, 그녀 역시 기사에 해병대원들이 바다까지 나올 의지가 있는지 궁금하다며 부정적인 상황만 썼다.

스미스 장군의 저 명언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덜 유명하지만, 당시 1연대장인 루이스 풀러대인배급 발언도 잘 알려져 있다.

"우리는 포위됐다. 이제 문제는 간단해졌다. 우리는 이제 모든 방향으로 공격할 수 있다.

당시 해병대원들도 "해병 1명은 중공군 20명에 필적하며, 중공군이 장진호에서 제1해병사단을 포위했을 때 곤경에 처하게 된 것은 그 불쌍한 놈들 자신이다"라는 농담을 하곤 했는데 이러한 정서가 사단장부터 병사들까지 깔려있었던 것 같다.

이제 슬슬 후퇴해야 했는데 들리는 건 고토리 남쪽에 5km 지점에 있는 황초령의 다리의 7m 가량이 파괴되었다는 절망적인 소식이였다. 다른 좁은 계곡의 가파른 경사에 걸쳐있어 다른 우회로는 찾기 힘들었다. 이는 1t짜리 M2 장간조립교 부품 4개를 공수투하하여 고토리로 보내면, 고토리에 주둔한 육군 58 교량중대가 이를 수령하여 설치하기로 하였다. 문제는 한 번도 이를 공수투하 해본 적이 없었다.

여담으로 이날 미 해군 최초의 흑인 해군 비행사 제스 브라운이 피격당해 하갈우리 인근에서 불시착했다가 사망한다. 이후 미국 최초로 흑인 이름을 딴 녹스급 호위구축함 D-1089함 '제스 브라운'호로 그를 기리게 된다.

이날 맥아더는 중공이 북한에 100만 대군 집결중이라고 발표한다. 중공군 40만명이 압록강 넘어와서 1차 대공세 할때는 한국군이 헛것을 본것이거나 소수의 의용군이 참전했다고 하고, 이후 도저히 중공군 참전을 부정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지자 100만 대군이 참전했다고 뻥튀기 하는등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너무 극단적인 행보를 보여준다. 전후 한국의 반공물에서 나오는 중공군 100만대군 운운은 이때의 맥아더의 발표에 의한 듯. 이후 중국은 26만명이라고 주장하고 미군은 30만명으로 추산한다. 원래 공포에 걸리면 실제 이상으로 적이 많아 보인다.

2.12 12월 5일, 탈출 준비

12월 1일의 시험비행을 이착륙을 거쳐, 12월 2일부터 5일까지 하갈우리의 임시활주로에서는 무려 4천명 이상의 해병과 육군 부상자들을 공수 했다. 중간에 육군의 꾀병 환자들이 끼어들어 의무관들의 3단계에 걸친 후송 지시가 있어야만 후송 가능했다.

최종적으로 부상자 4312명과 시신 173구가 후송되었고, 보충병 500명과 보급품이 하갈우리로 도착하였다.

서부전선의 미8군은 평양을 포기하고 후퇴하였다. 다음날 한국군마저 후퇴하여 평양은 북한의 손에 넘어갔다. 동부전선에서는 미보병7사단이 압록강 혜산진에서 신흥리로 철수 완료 하였다. 서울에서는 국립박물관이 중요물품을 부산으로 소개하기 시작 할 정도로 전황은 절망적이였다.

2.13 12월 6일, 하갈우리 탈출

드디어 하갈우리에서 고토리로 탈출이 시작되었다.

이때의 부대 배치를 보자면 하갈우리 북쪽에는 여전히 중공군 79·59·58·80사단이 남아있었고, 이날부터 새롭게 하갈우리와 고토리 사이의 18km 구간에 중공군 76·77 사단이 추가 투입되었다. 고토리에서 황초령을 지나 진흥리까지는 여전히 중공군 60사단이 차단 중이었고, 진흥리 남쪽에서 수동을 지나 마전동까지는 유담리 북쪽에 있던 중공군 89사단이 남하하여 차단하였다. 즉 기존에 중공군 6개사단과의 전투도 버거운데 새롭게 2개 사단이 늘어난 것이다. 그래도 기존의 6개 사단은 이미 지난 대공세 때 전투력이 아작이 난 상태여서 더 이상 공세할 여력이 없었고, 진흥리 후방은 미 보병 3사단 구역이라 3사단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78]

탈출은 다시 한 번 해병 7연대가 선도하고, 5연대는 하갈우리를 지키고 있다가 후위를 방어하며 천천히 이동한다. 차량이 1천대 가량 있었지만 동상 방지를 위해 운전병과 부상병을 제외하고 도보로 이동한다.

해병 7연대 2대대가 폭스힐의 영웅 F중대의 잔존 병력을 선두로 도로를 따라 이동하고 1대대는 도로 우측 능선을 따라 전진한다. 12월 2일부터 7연대에 배속된 육군 7사단 31연대의 잔존 병력은 임시 대대를 만들어 도로 좌측 능선을 따라 전진한다. F중대는 착검 돌격까지 해대며 용감하게 적진을 뚫고 진격하였는데 이번에도 문제는 육군이였다. 좌측 능선으로 이동하는 육군은 총 한 방 안 쏘고 순순히 항복하는 중공군 포로 수백 명을 잡을 정도로, 이미 중공군의 전투 의지도 최악이였다. 그런데 문제는 육군의 전투 의지도 최악이라 포로 인계한 병사들이 그대로 눌러앉는 것은 물론, 남은 병력들도 중공군이 공격해오자 싸우지 않고 일제히 도로로 도망쳤다. 능선 위에서 부는 바람에 얼어버릴 것 같아 휴식이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7연대 부연대장 프레데릭 다우세트 중령이 거부하면 사격하겠다고 당장 능선 위로 올라가라고 했지만 육군 최선임 지휘관인 베리 K. 핸더슨 육군중령은 오후 늦게 도로로 내려와, 임시 대대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고 말했다.

그에 반해 해병대는 밤새도록 취사병, 제과병, 운전병, 군악병까지 동원되어, 모든 해병은 소총을 잡고 일선에서 싸웠다. 이 상황에서도 자기 고유의 업무를 하는 건 군종과 영현등록반 정도였다. 이후 천주교계에서 거의 성자 취급 받는 7연대 군종신부 그리핀 중위도 이날 부상당해 후송되었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행군이 너무 힘들어 대열이 멈출 때마다 쓰러져서 발로 세게 걷어찰 때까지 일어 지 못했다. 중공군 포로들은 동상 입은 채 함께 걸어가고 있었고, 피난민들은 침투의 우려 때문에 대열 밖에서 거리를 두고 따라왔다.

전투 첫날인 11월 27일부터 이상 행동을 보이던 7연대 3대대장 윌리엄 해리스 중령은 이날까지 계속 이상행동을 하였다. 다시는 적의 포로가 되지 않겠다며 비상식량과 구급약품을 가득 채운 배낭을 메고 골짜기 위쪽으로 사라졌다. 병사들이 수색을 하였지만 찾지 못하여 그의 아버지 해병항공단장 피일드 해리스 소장에게 아들이 실종되었다는 보고가 들어갔다.

이날 몰아치는 눈보라와 중공군의 공격 때문에 주간에 단 5km밖에 행군하지 못했다.

한편 후위를 담당하는 5연대는 아직도 하갈우리에서 전투 중이였다. 먼저 아침 8시 30분 이스트힐 확보를 위해 D·F중대가 공격하여 고지를 피로 물들이고 300명의 포로를 잡으며 고지를 탈환하였다. 이때 발생한 해병대 60명의 부상자는 하갈우리에서 마지막으로 수송기를 통해 후송된 환자가 된다.

이날 오후 2시 40분 하갈우리의 통신 중계설비가 해체되었고, 이제는 스미스 장군이 머물고 있는 고토리의 무선 중계소가 사단의 주 통신소가 되었다.

그리고 그날밤 한국전쟁에서 최초로 인해전술(人海戰術)이라는 용어가 확실하게 등장한다. 5연대가 방어하는 하갈우리로 3시간에 걸쳐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밀고 들어왔다.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규모의 대병력이였다. 해병대는 전차, 야포, 박격포, 로켓포, 기관총 등 모든 화기로 방어하였다. B중대 오빌 맥멀린 중사는 M-1 소총 8발로 8명의 중공군을 사살하는 신기를 보여주었고, F중대장 우엘 피터스 대위는 백린탄을 다리에 맞아 살이 불타고 있고, 뼛속까지 태우고 있는데 군의관에게 '군의관, 빨리 좀 할 수 없어요? 중대로 복귀해야 한다니까'라고 외칠 정도로 감투 정신이 충만하였다.

미해병 제5연대장 머레이 중령은 해병들이 유담리 탈출을 성공한 것은 중공군이 유리한 곳에 병력을 집중하는 대신, 굳이 포위하기 위해 병력을 분산 배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미군은 목숨걸고 후퇴 할 때 국민당군이나 중공군 처럼 산넘어 도망가지 않고 차량을 타고 도로로 도망 가기 때문에 포위하겠다고 산악 지역까지 병력을 배치할 필요는 없었다. 미군을 그동안 상대했던 국민당군 처럼 생각한 중공군의 오판

한편, 하갈우리 남쪽 평지에는 3백호 1천여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상당수의 주민들이 정든 고향을 포기하고 미 해병대를 따라 피난을 선택하였다. 혹한의 추위속에 먹을 걱정, 자는 걱정 따위는 아예 하지 앉고 무작정 걸어갔다. 미 해병대는 이러한 피난민들이 부대에 섞이지 않도록 총칼로 위협하며 일정 거리를 유지하게 하였고, 중공군은 수시로 그 틈바구니로 들어와 미 해병대를 공격하였다. 미 해병대가 응사하면 중간에 죽어나가는 건 피난민들 뿐이였다. 이들은 수많은 시신 남기며 결국 흥남까지 따라가 그 유명한 흥남 철수를 한다.

2.14 12월 7일, 해병대 진흥리 집결

아침이 되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중공군 시체더미가 하갈우리 A중대의 진지에서부터 철도 옆의 보급품 야적장을 거쳐 이스트힐의 산기슭까지 널려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1천구 이상은 되었다. 이에 비해 방어의 주력이었던 5연대 1대대는 전사자 10명, 부상자 43명이였다.

7연대가 도로를 따라 순조롭게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에 따라 이제 5연대도 하갈우리를 버리고 출발할 시간이 되었다. 3대대가 다시 한 번 선봉에 섰다. 적의 저항은 거의 없었고 길가에는 중공군 시체들이 쌓여있었다. 순식간에 모든 부대들이 하갈우리를 빠져나가자, 유담리에 이어 이번에도 5연대 2대대가 후위에 후위를 담당하기 위해 홀로 남았다. 그중에서도 E중대가 마지막으로 떠났는데 이들은 후퇴하면서 모든 장비와 보급품을 해체하거나 불태웠다. 이때의 불길을 18km를 지나 고토리에서도 보일 정도였다. 이들이 따라 많은 수의 피난민들도 따라가고 있었고, 중공군은 감히 미군을 공격하지 못하고 피난민들을 공격했는데 겁에 질린 피난민들이 미군 속으로 뛰어들자 미군들은 총검으로 위협하여 대열에서 나가 100m쯤 뒤를 따라오게 하였다.

그날밤 사단의 마지막 부대가 고토리에 도착하였다. 1만명의 병력과 1천대 이상의 차량이 하갈우리에서 오는데 거의 40시간이 걸렸다. 드디어 유담리, 하갈우리, 고토리 일대에 퍼져있던 해병대 3개 연대가 집결하였다. 물론 대대 단위로 가자면 가장 쌩쌩한 1연대 1대대가 황초령을 넘어 진흥리에 있었다. 그들에게는 진흥리에서 나와 황초령의 파괴된 교량을 감제하는 1081고지를 점령할 임무가 주어졌다.

하갈우리에는 무려 1만 4천명[79]의 병력들이 몰려있어 만약 중공군에게 포병이 있다면 한순간에 피바다가 펼쳐질 상황이였다. 물론 중공군에게 대포는 없었다. 그동안 새롭게 발생한 부상자를 후송하기 위해 마을 북쪽의 길이가 짧은 정찰기용 활주로를 이용하였다. 여기에 이착륙할 수 있는 구식 해군 뇌격기를 통해 200명을 후송하였지만 다음날 폭설이 내려 남은 부상자 400명은 지상에 대기하였다.

5·7연대는 탈진 상태였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단 하루의 휴식도 없이 다음날 미명을 기해 출발하기로 하였다.
가장 중요한 강철제 M-2 답교 부품 4개조 Set는 예정대로 공수투하 되었다. 총 8개 중에서 4개는 적의 수중에 들어가거나 떨어지면서 파괴되었는데 운 좋게도 해병대가 확보한 남은 4개가 풀세트를 이루었다. 이는 그대로 찰스 워드 중위가 지휘하는 육군 58 답교중대에게 인계되었다. 또한 해병대가 처음으로 육군에게 의지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날 태평양지구 미 해병사령관 르무엘 쉐퍼드 중장이 비행기편으로 현장 방문을 왔었는데 가는 길에 그동안 어디엔가 숨어있었던 마가렛 하기스도 함께 데려간다.

2.15 12월 8일 이후

유담리, 하갈우리의 탈출 작전처럼 이번에도 7연대가 선도하는 것까지는 동일한데, 고토리 방어만은 새롭게 합류한 1연대 2·3대대가 담당하게 되었다. 그동안 후위만 담당하던 5연대는 그 중간을 맡았다. 진흥리의 1연대 1대대가 물론 황초령까지 마중 나오기로 했다. 기존 1대대의 담당 구역이였던 진흥리의 철도야적장은 미 육군 3사단의 대대급의 Dog 특수임무부대가 담당하기로 했다. 이들의 반은 전투 경험이 없는 극동-태평약 지역 부대에서 차출된 병사들이고 나머지 반은 징집된 남한 민간인들이였다.

Dog 특수임무부대와 교대한 1대대는 새벽 2시에 이틀치 식량을 갖고 황초령을 감제할 1081 고지로 출발하였다. 그런데 그곳은 이미 중공군 60사단이 점령하고 있었다. 이날 전에 없었던 폭설이 몰아쳤는데 덕분에 중공군의 눈에 띄지 않고 10km를 행군하여 그들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단점이라면 경사지를 올라가던 병사 한 명이 발을 잘못 디뎌 인간 썰매처럼 아래쪽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면 전체 분대가 함께 쓸려 내려갔다.

1081 고지의 전투에서 중공군과의 교전에서도 피해를 입었지만 A중대의 경우 밤 사이에 무려 67명이 동상을 입었고 그 중 7명이 발을 절단할 정도로 엄청난 비전투 손실을 입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르세어 항공 지원에 힘입어 다음날 정오쯤 1081 고지를 탈취한다.

고토리에서 출발한 최선봉의 7연대 B중대는 이날의 전투를 포함하여 거듭된 전투로 180명의 병력 중 27명 남았다. 진격이 순조롭지 않자 연대장은 7연대 3대대에게 예비대를 투입하라고 했지만 3대대에는 완전편제 1천명 중 G중대 50명, H중대 40명, I중대 30명 등 120명이 남아있었을 뿐이었고 이미 전부 전방에 투입된 상태였다. 즉 예비대가 없었다. 7연대 2대대 D·E중대는 이미 12월 1일에 작살나 5연대에 3대대에 배속된 상태였다.

12월 9일 황초령 고개마루의 도수장을 점령하기 위해 B중대는 1개 소대를 투입하라고 명령 받았지만, 중대 총원중 남은 병력은 반개 소대밖에 안된다고 보고하였다. 그래도 그냥 공격하라는 명령에 할 수 없이 전체의 무려 절반인 14명을 C중대 일부 병력과 함께 투입하였다. 다행히 도수장에는 얼어죽어가는 25명의 중공군밖에 없었다. B중대는 이들을 모두 사살하고 뒤이어 항복하러 온 몇 명의 중공군은, 극도로 피곤하여 엉덩이를 땅에 붙이고 앉은 채로 대충 몸수색을 하고 접수하였다. 이어 도수장은 다수의 항복하러 온 비무장 중공군에게 포위된다.

어쨌든 황초령 고개마루의 끊어진 다리 양쪽이 이로서 확보되었다. 이제 헌병대의 경호를 받는 육군 58 답교중대가 교량부품을 싣고 나타났다. 막 다리를 설치하려고 하는데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였다. 준비한 부품은 7m였는데, 끊어진 다리는 9m였다. 이에 중공군 포로를 시켜 철도 침목을 날라 돌출부에 목재 받침을 설치하는 것으로 해결하였다. 3시간 후 오후 3시 30분 다리 사용이 가능해졌다.

다리가 완성되어 해병대가 막 건널 때 1연대 1대대의 1081고지 전투도 끝났다. 고지에는 중공군은 500여 명의 시신이 널려져 있었다. 덕분에 해병대는 1대대의 엄호 아래 순조롭게 철수하였다.

이번 후퇴 작전에도 어김없이 육군은 측면 엄호를 포기하고 도로까지 내려와 행군종대에 끼어가는 추태를 보여줬다. 이에 5연대 3대대장 테플렛 중령은 무슨 문제 있냐는 육군 임시대 지휘자 앤더슨 중령에게 "너희들 같은 쓰레기 군인들이 우리 측면에 있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우리가 알아서 하마"라고 외쳤다.
마지막으로 남은 고토리 부대는 미 해병, 미 해군위생병, 미 육군, 영국 해병특공대 시신 117구를 매장하면서 철수하였다. 그리고 고토리는 폭파되었다. 1연대 수색중대원들이 전차 10대를 호위하며 최후방을 지켰다. 처음에는 피난민들을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일만 하다가, 나중에는 중공군에게 작살나자 전차들을 버리고 승무원들은 튀었고, 수색중대원들만 결사적으로 싸우면서 마지막으로 황초령 답교를 건넜다.

그 시간이 12월 11일 오전 2시 30분이였다. 몇 시간동안 홀로 남아 있던 해병 공병대는 그제야 안심하고 답교를 폭파시켰다.

해병대가 산악지대를 벗어나 막 진흥리에 도착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대포와 박격포 포탄 세례, 저격병의 사격이 쏟아졌다. 알고 보니 미 육군 3사단이었다. 이에 해병대의 육군 혐오는 극에 달하게 된다. 이 육군 개쉐키들아

같은날 제10군단은 한반도 동북부에서 완전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현재 남은 병력은 총원 10만5천명에 전차 및 기타 차량 1만7,500대였다. 병력은 중공군을 약간 상회하였고, 압도적인 기갑/항공 전력에 보급까지 빠방했지만, 병사들은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무엇보다 동경에 계신 그분이 싸움을 포기 했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동부전선의 중공군은 완전히 개발살나 있어서 더이상 싸울 수 없는 상태였다.

이들의 후퇴를 위해 4척의 고속항모, 1척의 경항모, 2척의 호위항모가 배치되었다. 화력지원용으로 중순양함 2척, 구축함 6척, 로켓함 3척이 배치되어 총합 200척이 됭케르크 이후 최대 규모의 해상철수작전을 수행하였다.

미1해병사단이 장진호에서 사투를 벌릴때, 그보다 북쪽에 있던 미7보병사단과 한국군 1보병사단은 큰 방해를 받지 안고 철수 했다. 미1해병사단이 철수할 때는 미3보병사단이 후위를 맞아 엄호 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은 장진호의 전투에서 이미 사실상 괴멸한 상태라 쫒아 오지 못해 이렇다할 전투가 없었다. 중공군 역시 전의를 상실하였다. 아니 전의가 있어도 더이상 싸울 여력이 없어 몇달 후 벌어지는 중공군 3차대공세에 동부전선의 중공군 12개 사단 전체가 참여하지 못했다. 당시 서부전선의 중공군의 18개 사단만 3차 대공세에 참가하여, UN군은 서울까지 뺒기며 작살 났었는데(일단 동경사령부의 맥아더가 전의를 상실하여 싸움을 포기한 상태라 무질서하게 일방적으로 도주하는 상태였다.), 만약 동부전선의 중공군 마저 3차 대공세에 참가 했다면 한국은 부산까지 밀려 졌을 것이라는 시각이 있다. 다만 실제로는 중공군이 보급품이 떨어져 각 대공세마다 15일씩만 진격하다고 현 위치를 포기하고 후방으로 돌아 갔다. 만약 중공군의 보급품만 충분했다면...

해병대는 12월 15일 흥남 부두를 떠났고 한국군은 물론 10만 명의 피난민과 동승하였다. [80]

12월 24일 마지막 남은 병력인 미해군 UDT에 의해 흥남 부두는 대폭팔을 일으키며 황무지가 되어버렸다.

3 결과

이 전투에서 미 해병 1사단은 1만 5천명 중 전사상자가 4천명이 넘어갈 정도로 막대한 손실을 기록했다. 나머지 병력도 죄다 동상. 미군이 치른 대규모 현대전 중에서도 상당한 희생을 치른 셈. 전사 700명, 실종 200명, 부상 3,500명, 동상등 비전투 손실 6,200명. 동상자의 1/3은 바로 복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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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흥에 묻힌 제1사단 전사자들. # 출처.

그러나 중공군의 기대에 비하면 매우 부족하였다. 처음부터 해병 1사단을 전멸시킬 생각이였지만 그들은 오히려 포위하였던 중공군 6개 사단을 작살내고 함흥으로 행군하여 빠져나갔다.

장진호에서 해병대와 교전한 중공군은 자료마다 다르지만 대략 6~7개 사단이다. 6개 사단까지는 확실하고 7번째 사단부터는 불분명한 감이 있다. 해병1사단장은 "사단이 7개 중공군 사단에 괴멸적 타격을 입혔고, 다른 3개 사단에 대해서도 부분적 타격을 입혔습니다"라고 해병 사령관에게 보고하였다.

반면 중공군 9병단의 피해는 10월 15일~12월 15일 중에 전사 2만 5천, 부상12,500명이 발생했다.[81] 팽덕회는 12월 8일 모택동에게 보낸 전보에서 중공군 9병단에서 6만명의 보충병이 필요하다가 알렸다.

이 전투에서 최소 6개 사단을 투입했지만 미 해병대를 완전히 섬멸한다는 작전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으며, 미 해병대와 격전을 이어가는 바람에 10군단의 다른 사단들이 안전하게 철수하는 것을 눈 뜨고 바라보기만 했기 때문이다.[82] 여기에 더해서 미군은 중국군보다 더 좋은 무기와 압도적인 물자 지원, 화력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에 중국군에게 2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강요한 데다가 북한의 강추위에 의해 대부분의 전력이 전투 후 동상으로 인해 발이 묶였다. 게다가 국공내전의 경험 때문에 보급 부대의 중요성을 망각한 바람에 현지 물자를 징발할 수 없는 가난한 북한의 산악지대에서 중국군의 보급 상황은 바닥에 가까울 정도로 떨어져서 불필요한 희생을 늘렸다.

참고로 중국군의 보급 상황이 얼마나 비참했나 하면, 3일 동안 먹은 것이 얼어붙은 날감자 2개라든지, 수문교 재건을 방해하기 위해 파견된 중공군이 극심한 추위에 얼어붙어서 항복하려고 총을 버리려고 해도 총이 얼어붙어서 손에서 안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이와 같이 열악한 보급으로 전투는 커녕 움직이는 것도 어려웠기 때문에 요지의 중요성과 방어진지의 견고함에 비해 의외로 미군이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쑹스룬 장군은 직접 향후 보급 체계를 전면 개편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83]

이런 이유로 인해 하갈우리 원진 전투 때는 중국군의 화력이 1선 병사에게 집중되고, 후방의 연료나 탄약에는 별로 사격을 가하지 않았는데, 이는 보급은 적에게서 구한다는 중국군의 기본 보급 방침도 있었고, 만일 연료나 탄약에 사격해서 불바다를 만들면 당장 이길 수는 있지만 험악한 산골짜기에서 물자가 없는 미군 포로와 중국군이 함께 사이 좋게 굶주리고 얼어죽을 것을 우려한 것의 합작품이라고 한다.

여하간 이 때문에 중국군은 더 이상 미군을 추격하지 못했고 결국 흥남 철수를 허용하게 된다. 더불어 이 작전에 참여한 중공군 제9병단은 재편성 및 보급을 위해 한동안 최전선을 떠나게 되며, 총계 10만명에 가까운 인원이 후방에 잔류하게 됨으로서 중국군의 차기 작전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1.4후퇴등 주요한 작전에는 아예 빠지고 51년 3월에야 전선으로 복귀한다. 만약 제9병단이 멀쩡하여 제 13병단과 함께 좌우 원투 펀치를 날렸으면 과연 UN군이 어디까지 후퇴 했을지 예상 하는 것 조차 두렵다

또한 중국군 수뇌부는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을 경험하고 더 이상 전쟁을 끌어봤자 미국을 이기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 전쟁 전 북한의 영토를 유지하는 선에서 전쟁을 끝내자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리고 더 이상 보급 부대를 무시하면 안된다는 판단을 내려서 상부에 보고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이러한 현실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미국을 종이호랑이라 판단, 현지 사령관들의 부정적인 의견에도 불구하고 남한을 해방시키겠다면서 대대적인 남진을 명령한다. 그리고 1.4 후퇴 이후 연합군이 다시 전열을 재정비하고 반격을 시작하자 큰 피해를 입는다. 이후 양자 모두 더 이상 상대를 섬멸하고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는 것은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결국 휴전협상으로 이어진다.

한편 중공군의 전력 및 한국전 개입 가능성에 대한 오판, 군우리에서의 참패, 서울을 빼앗기고 평택까지 후퇴하는 등 맥아더의 명성은 땅에 떨어졌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맥아더는 즉각 중국 연안을 해상 봉쇄 하고 중국 산업시설을 폭격이나 함포 사격으로 파괴하며, 장개석 군을 중국 본토로 상륙시킬 것을 권했다. 워싱턴 정부는 이를 중공군에 패배하여 당에 떨어진 자존심과 명성을 회복하려는 무모한 기도라고 판단 하였다. 결정적으로 51년 1월 28일 맥아더는 수원에서 리지웨이 장군을 만나며 기자들 앞에서 확전을 의미하는 발언을 일삼았으며, 거듭된 워싱턴 정부의 언론 플레이 자재 요청을 무시하였다. 이어 3월 24일에는 워싱턴으로 부터 받은 비밀 전문을 "지금이 휴전협상을 개시하기 적절한 시기"라는 것을 언론에 알렸으며,비밀 전문? 그거 먹는 건가요? 우걱우걱 4월 5일 맥아더가 다시 장개석군을 투입하여 확전해야 한다는 서한이 미하원 의회에 공개되는 바람에 이에 빡친 트루먼 대통령은 4월 11일 그를 파면하였다.

이에 대한 트루먼이 사적으로 밝힌 견해는 다음과 같다. "문제는 그가 식민지 총독이자 극동지구의 황제가 되고 싶어했다는 거지. 자신이 미군의 총사령관인 미국 대통령의 지시를 받는 일개 장군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는 거야"

이에 앞서 50년 12월 23일 워커 미 8군 사령관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후임으로 임명된 육군 참모차장 매튜 리지웨이 중장은 26일 한국으로 도착하자마자 아몬드 제10군단장을 불러 제10군단이 제8군에 예속한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84]잘못된 지휘 체계를 이제야 바로 잡은 것이다.

이후 아몬드는 군단장으로 반년 더 유임되었고 유엔군의 재반격시기에 북한에서 철수를 최소의 인적 및 물적 손실만으로 성공시킨 공로로 중장 진급에 성공했으나미쳤음? 대패를 당한 원균이 최소한의 손실만 당했다며 선무1등공신에 임명한 꼴[85]진급은 그게 끝이었다. 그는 1951년 상반기에 있었던 굵직한 전역, 전투에서 제10군단장으로 지휘를 했고 전쟁이 진지전으로 변해가던 51년 7월 이임되어 미 본토의 육군대학 학장으로 임명되었고 1953년 전역했다.

그에 반해 장진호 전투를 훌륭하게 수행한 스미스 소장은 대장 예편하게 되었다.

4 동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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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에서 얼어죽은 미군 시신

한참 유담리를 향해 진격하던 11월 초에 첫 눈이 내리기 시작하고 기온이 서서히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장진호 주변의 위도는 북위 40°30',[86] 고도는 평균 1,200m지만 이 일대는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지역 중 하나로 겨울철 평균 기온이 영하 30도인 극한지대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모스크바의 강추위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심심하면 영하 35도의 강추위가 양군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미처 방한복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던 미군은 두껍게 옷을 껴입었어도 동상자가 속출했다. 중국군이라고 미군보다 사정이 나을 건 없었다. 그리하여 양군의 사상자는 교전보다 이 강추위 때문에 훨씬 많이 발생하게 된다. 한마디로 한국전쟁모스크바 전투.

하지만 추위로 따지자면 장진호 전투는 모스크바 전투는커녕[87] 그보다 더 추운 스탈린그라드 전투와도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추웠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영하 30도 이하는 전투 기간 내내 딱 한 번 기록[88]되었지만, 장진호에서는 영하 30도 이하를 밥 먹듯이 기록했는 데다가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시속 60km의 칼바람이 내내 몰아쳐 체감기온은 그보다도 훨씬 아래였다.

참고로 스탈린그라드 기온 측정 역사상 최저기온은 영하 32.6도이며 1월 평균 기온은 영하 9.6도 정도인 반면에 장진군1월 평균 기온이 영하 20.6도다. 철원의 1월 평균 기온은 영하 5.5도 정도니 얼마나 추웠을지 상상해 보자. 그나마 비교하자면 1940년 유례 없는 추위를 기록해 수십 만의 소련군이 떼로 얼어죽은 겨울전쟁이 비슷한 기온을 기록했을 정도이니 장진호 전투는 가히 인류 역사상 가장 추운 전투 중 하나라고 할 만한 수준이었다.

낙동강 전선에서는 38도가 넘는 극심한 더위로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을 하였다. 백선엽 장군의 1사단 방어진지를 인수해야 하는 미군이, 시체 안 치워주면 인수 안하겠다고 한 건 유명한 일화. 반면에 장진호에서는 산더미처럼 시체가 쌓여있었지만 시체가 얼어붙어 냄새가 나지 않았다. 국토 면적이 캘리포니아 주의 절반밖에 안 되는 조그마한 나라에서 온도 차이가 왜 이렇게 심한지 미군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여름에는 아프리카 급 열대지대, 겨울에는 핀란드 급 강추위[89]

진지 구축을 하면 땀 때문에 옷이 얼어붙을 지경이었고, 이럴 경우 땀에 젖은 옷을 그대로 입고 있으면 그대로 얼어붙기 때문에 옷을 벗는 것보다 더 많은 체온을 손실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결국 이걸 막기 위해서 영하 35도를 오르내리는 혹한 속에서 훌렁 벗고 작업해야 했다고 한다.[90] 물론 이것도 한 번에 옷을 벗는 것이 아니라 일하면서 한 겹씩 옷을 벗은 후, 서서히 일의 강도를 줄이면서 다시 한 겹씩 옷을 입는 아주 번거로운 작업을 수행해야 했다.

게다가 땅이 단단하게 얼어붙었기 때문에 일반 야전삽으로는 땅을 긁기만 해도 쉽게 부러졌으며, 중국군에게서 노획한 곡괭이가 그나마 제대로 땅을 팔 수 있는 장비였다고 한다. 만일 땅에 바위가 많거나 단단한 지형이라면 깡통에 폭약을 넣고 한 방향으로 터뜨리는 급조 성형작약탄만이 유일하게 땅을 팔 수 있는 도구였다.
추위로 인해 얼어붙은 땅바닥은 공중 보급에 악영향을 주었다. 통상적인 낙하산에 보급 물자를 묶어서 투하하면 적어도 40%는 땅바닥과 격돌해서 완전히 파손되었다. 덕분에 공중 보급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사태인 물자가 사방에 흩뿌려져서 회수하기 힘들다는 점과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실제로 공중 보급시 제대로 부대에 전달되는 양은 25% 정도였다고 한다.

추위는 사람 뿐만이 아니고 장비에도 위력을 발휘했다. M1 카빈은 가스압이 추위로 인해 낮아져서 발사 불능에 가까운 상태가 자주 생기는 데다 백병전시 쉽게 개머리판이 박살나서 무용지물에 가까웠다. 카빈 소총으로는 중공군의 방한복을 뚫지 못한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작동불량도 심각했으며 이 때문에 병사들은 “카빈은 그저 가지고 다니는 것일뿐, 마지막을 위한 무기이다. 머리를 겨누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M1 개런드는 카빈보다는 추위에 잘 견뎌서 가능하면 카빈을 버리고 개런드를 구하려고 애썼다.

기관단총이라고 사정이 나은건 아니라서 장기간 동안 제대로된 정비를 받지 못한체 추위에 노출된 기관단총들은 전투 초장에서 30발 탄창을 끼운 볼트액션총이 되어 버리기 일쑤였다.
기관총과 차량, 전차는 최소한 2시간에 1번씩 작동시키지 않으면 얼어붙어서 작동할 수 없게 되며, 수냉식 기관총은 물을 넣으면 얼어터지므로 특수 부동액을 넣거나, 아예 냉각수를 넣지를 않았는데 그렇게 사용해도 과열이 되지 않을 정도로 날씨가 추웠다고 한다. 여담으로 무더운 베트남전쟁을 다룬 위 워 솔저스에선 과열된 박격포를 소변을 누어 식히지만, 장진호에선 수냉식 기관총의 냉각수가 얼어 소변을 누어 덥힐려고 했지만 잘 안통했다.

박격포는 발사 자체는 잘 되지만 포판이 얼어붙은 지면과 충돌해서 박살나기 일쑤였고, 야포는 불발이 많아지고 추운 날씨로 인해 공기 밀도가 높아져서 사정거리까지 감소했다. 심지어 수류탄도 얼어붙어서 불발되는 경우가 발생하였다.

추운 날씨는 식사까지 방해했다. 씨레이션 깡통을 따뜻하게 먹으려고 모닥불에서 가열했더니 바닥은 다 타고 위는 여전히 얼어있었다는 말까지 나오는 판이었다. 이걸 굳이 먹은 해병들은 심각한 장염과 포풍설사에 걸렸다. 대표적인 것이 추수감사절 기념으로 나온 칠면조인데, 취사장에서 칠면조에 눈을 쏟아붓고 가열하였는데 이거 먹고 죄다 설사해서 상당수 인원이 죽다 살았다. 이 때문에 씨레이션에서 동결된 고기스튜, 콩요리, 육류등은 가능한 안먹었다. 대신 캔디, 비스킷, 크래커등 마른 것들이 인기가 있었으며, 심지어 이것만으로 배를 채우는 경우도 있었다. 이 때문에 PX에 있던 물자를 소각하려다가 그 대부분이 캔디나 과자였기 때문에 장병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단점으로 육식위주의 식생활을 하던 미군들의 체중이 미친 듯이 줄어들었다.

물론 생리현상도 추위는 간과하지 않았다. 야외에서 설사를 한 번이라도 하면 항문까지 동상에 걸리기 때문에, 이질과 같은 병이 있는 사람은 지옥 중의 지옥을 맛보아야 했다.

의료분야에서도 추위는 맹위를 떨쳐서 부상자는 잠시만 눈 위에 두어도 바로 동사했고 병사들에게 무기력증을 선사했다. 미군보다 물자가 부실한 중국군의 상태는 미군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전장에서 멍 때리고 있다가 총 맞거나, 그대로 포로로 잡히거나, 집단 투항을 하기도 하는 등 양쪽 군대의 사기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혈액과 모르핀도 얼어붙어서 의무병이 아예 모르핀 앰플을 계속 입 안에 넣고 있어야 했으며, 수혈팩은 겨드랑이에 끼고 체온으로 덥혀서 얼지 않도록 조치해야 했다.

이 강추위에 대해 '브레이크 아웃'이란 장진호 전투의 미 해병대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서적에서는 한 가지 아이러니를 다루고 있다. 그것은 부상자들에게 감아놓은 붕대에 맺힌 피가 얼어붙어서 지혈 효과를 줬다는 것. 인터뷰 대상자가 "하여간 지혈은 정말 잘 됐다" 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붕대를 교체하기 위해 장갑을 벗으면 바로 동상이며, 부상자의 상처 부위를 보기 위해 옷을 자르면 역시 동상이기 때문에 붕대 교체 대신 침낭에 쑤셔넣는 것이 구호소에서 했던 치료 방식이였다.

이 전투에서 부상자를 실어 나르기 위해 H-19 헬리콥터가 크게 활약했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SCR-300통신기와 610-야전전화기 배터리가 강추위로 인해 급속히 소진되어 부대들간에 통신이나 포병과 연락하여 포격지원을 받기 힘들었다. 육군 맥클린 연대장이 사실은 예하 보병 대대 함흥에 있었지만 연락 두절되어 그사실을 모르고, 근쳐까지 온지 알고 달려가다가 중공군에게 잡힌 것도 이런 이유. 덕동고개의 영웅 해병대 F중대도 배터리 소모로 통신이 두절되어 개고생 했었다. 추위가 배터리 전자를 생산하는 화학반응을 방해 했기 때문.

한마디로 말해서 모든 것이 얼어붙는 추위가 장진호 전투의 진정한 승자였다.

5 뒷이야기

엄청난 희생을 치른 전투라서 그런지, 살아남은 이들은 미군 역사상 처음으로 동상을 입은 피해에 대한 보상금을 받았으며, 미 해군의 타이콘데로가급 이지스 순양함 CG-65의 이름을 이 전투를 치른 곳을 따서 초신(Chosin)이라고 지었다. 장진(長津)을 일본식 독음으로 읽으면 초신(ちょうしん)이 되는데, 당시 미군은 장진호에 대한 한국어 지도가 없어서 일본어 지도를 보고 초신이라고 불렀기 때문. 지금도 chosin이라고 부른다. 덤으로 이 계열 순양함 네임십(함급 이름의 기준인 1번함) 타이콘데로가의 어원은 미국 독립 전쟁 때의 격전지다.[91]
또한 한국전 관련 책에는 반드시 장진호 전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큰 충격을 안겨줬다. 'Chosin Few[92]'(장진호 전투 생존자 모임)라는 미 해병대 참전용사 모임도 있을 정도. 흠좀무 한 게 기념공원을 일부러 장진호와 비슷한 느낌의 알래스카에 조성해 놓았다. 미군들은 장진호에서 알래스카의 향기를 맡았던 듯.

미군이 극한지에서 전투를 치러 본 경험은 장진호 전투가 유일[93]하기 때문에 장진호 전투는 장차전 대비에서 중요한 경험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는 것도 한몫하고 있다.
한국전쟁의 명예 훈장 수훈자 131명 중 13명이 장진호 전투 생존자였던 만큼 미군에게도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 사진은 장진호에서 포위당한 채 사투를 벌이고 있던 미 해병대원을 찍은 사진으로, 추위를 피하기 위해 이것저것 몸을 감싸고 손에는 얼어붙은 깡통을 들고 있으나 다른 방향으로의 공격과 살아야 한다는 의지에 찬 눈빛이 인상적인 사진이다. 사진을 찍은 데이비드 더글러스 던컨은 1950년도의 US 사진가 공적상을 받았다.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때는 모든 것이 얼어붙을 것 같이 매섭게 추운 아침이었다. 그야말로 매일 아침을 맞이하는 것이 감사 그 자체였다. 그것도 그럴 것이 저녁이면 그 밤이 샐 때까지 견딜 수 있을 수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인생이 짧게도 또는 영원 같이도 느껴지는 세계다. 여기에서 해병대원에게 "크리스마스날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내일을 달라"라고 대답하는 세계인 것이다.[94]

이 전투가 얼마나 상황이 안 좋았는지, 전투 중에 미국 해병대 포병 부대가 중국군 보병 부대와 직접 교전해서 100여미터 남짓한 거리에 대고 가진 포를 쏴대서 중국군 보병을 격퇴한 사례도 있다.

여담으로 미군의 방한복인 M-51 파카(일명 개파카)가 제작되어 보급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장진호 전투로 참혹한 추위를 겪은 미군은 그 이전의 모델인 M-48 파카로는 더 이상 안 된다고 판단을 하게 되었다.

이 전투의 영향으로 현재도 주한미군에 배치되는 미군 장병들은 미군 의류체계 중 최상위 등급의 방한복 체계를 지급받고 있다.

투시 롤(Tootsie Roll)이라는 사탕과 관련된 에피소드도 있다. 장진호에서 적에게 포위된 미 해병대가 후방 보급부대에 박격포탄을 보내 달라는 통신을 보냈는데, 통신을 받은 후방 부대에서는 '투시 롤'이 해병대원들 사이에서 박격포탄을 일컫는 은어인 줄 모르고 진짜 투시 롤 사탕을 잔뜩 공수해 버렸다(...)[95] [96]하지만 잘못 보내진 투시 롤은 박격포탄보다 유용했다. 식량도 얼어붙어 먹지 못하는 상황에서 투시 롤은 유용한 식량이 되어주었고, 구멍 난 연료통에 녹여 붙이면 추위 때문에 금방 굳는 점을 이용해 피탄당해 구멍난 연료통을 땜질할 때 투시 롤을 쓰기도 했다. 그야말로 적에게 포위된 해병대를 살린 사탕인 셈. 그래서 지금도 장진호 전투 참전용사 모임에는 투시 롤이 제공된다고 한다. 출처.미해병대 박물관의 장진호 전투 코너에 있는 마네킹의 발밑에 이 초콜릿의 포장지가 놓여있다. 유튜브
정말 사소한 여담이지만, Warhammer 40,000에서도 이 장진호의 이름을 딴 초신 행성이 있다. 설정상에서만 존재하는 행성으로, 극한의 아이스 월드이며, 중공군 오크들이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수동전투에서 얻은 중공군 선전 소책자를 보면 “미국의 전력은 탱크, 비행기, 야포 등 전력적으로 우위일 뿐, 강제징집되었으며 공격의지가 없고 죽음을 두려워 한다. 한편 죽음에 대하여 과감하지만 보급이 끓어지면 전쟁은 그것으로 끝이다. 매우 약하다. 후방을 계속 괴롭히면 후퇴하고 만다.” 라고 나와 있다. 미국을 너무 약하게 표현하여 실소가 나오면서도, 묘하게 2차대전 장시의 일본군의 선전책자에 나오는 미군에 관한 내용과 비슷하다.

병사들이 암호를 종종 잊어먹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지난달 월드 시리즈는 누가 이겼느냐?”라고 물으면 “양키가 이겼다. 필리스가 4회 연속...”하고 대답하는 것으로 대체하였다. 2차대전때 유명한 에피소드로 아르덴 대공세 당시 오마 브래들리가 비슷한 문제에 대답을 못했다. 헌병이 뉴욕이라는 힌트까지 줬는데 뉴욕 양키스 대신 뉴욕 자이언츠라고 대답하여 잡혀갈 뻔했지만, 브래들리가 스파이짓 하기에는 너무 늙었다는 이유로 풀려난적이 있었다.

5.1 장진호의 UN군과 중공군은 몇 명인가?

이 문서에서는 UN군은 전체 103,520명 중에서 실참전 30,000명이며 중공군은 120,000명 중 실참전 67,000명이라는 전제하에 작성되었다.

그런데 한국 쪽에는 중공군 12만명이라는 대병력을 겨우 해병대 1만 2천명이 10:1로 싸운 전투로 묘사하고 있다. 2010년에 열린 국내 장진호 전투 기념 행사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보낸 축전에서도 이러한 내용이 들어있다. 하지만 이것은 미군은 실참전 병력 중 순수한 보병만 계산하고 중공군은 장진호에 있지도 않았던 동부전선의 중공군 전체를 계산한 과장이다.[97]
동부전선을 담당하던 이때 미10군단은 예하 병력이 해병 1개사단, 육군 3사단, 육군 7사단, 한국군 2개사단과 적지만 다양한 국가의 UN 참전군으로 편제되어 10만 3천명에 달했다. 이 중에서 순수하게 장진호 전투에 참전한 병력만 따지면 미 해병 1사단과 미 육군보병 7사단 예하 3개 보병대대+제57야전포병대대, 영국군 코만도 부대 900명이 있었다. 당시 미 해병부대는 지상병력인 1만 5천명 외에도 주로 지상지원을 하는 공중포대 개념의 제1해병항공대와 후방지원을 담당하는 해병·해군 부대를 합쳐 1만명이 더 있었다. 즉 참전했던 해병대 2만 5천명에 미 육군+영국군 하여 총 3만명이다. 그런데 이것을 미육군과 영국군을 제외시켜 버리고, 해병항공대와 후방부대까지 몽땅 제외시켜서 1만 5천명으로 최소화 시켜버린 것이다. 여기에 사단 내 지원부대도 제외시키고 아예 보병과 포병만 세서 1만 2천명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였다. 이것은 미 육군에 대한 능욕은 물론 병력 중 상당수가 항공대와 후방지원부대인 미 해병대의 특성을 무시한 것이다. 이럴 거면 장진호 전투 추모행사에 참석한 해병항공대 참전용사에게 돌아가라고 하던가

그에 비해 중공군은 항공대가 없고 후방부대가 미비하여 12개 사단 12만명 전체가 순수한 보병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1개 사단 당 1만명이라는 계산하기 좋은 편제를 갖고 있다(실제로는 사단별 6천~8천). 그런데 이 중공군 12만명은 동부전선 전체에서 미군 3개 사단, 한국군 2개 사단을 담당한다. 이 중에서 장진호 전투에 참가한 부대는 약 6개 사단으로 마틴 러스의 책 등 관련 서적에는 사단 정수도 못 채웠다고 나와있다. 그런데 한국 쪽에서는 장진호에서 용감무쌍한 미 해병대가 중공군 12만 명을 무찔렀다고 하는데 그럼 장진호 전투를 제외한 다른 전선에서 미 육군과 한국군을 격파한 중공군은 유령인가?

과거 똘이 장군 같은 반공물이 범람했던 시절에야 중공군 100만 대군이 밀려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초기의 중공군은 서부전선에 18만명, 동부전선에 12만명을 투입 한 것이 전부이다(미군 자료는도합 30만, 중국 쪽 자료는 26만명. 진실은 그 중간 어딘가에). 이는 UN군 42만명 비하면 오히려 적었고, 순수한 UN군 지상부대 5개 군단 15개 사단 2개 여단 23만명과 비등한 정도이다(미군 12만, 한국군 10만, 기타 UN군 1만 2천명). 다만 중공군의 특성상 항공대나 병참부대가 없는 순수한 보병들이기 때문에 일선의 UN군 보병이 보기에는 엄청나게 많아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중공군이 보기에는 UN군 후방의 무제한 적인 병참부대와 항공대가 인해전술로 보이겠지

즉, 중공군이 100만 대군의 인해전술을 펼친되는 고정된 관념으로 보면 미 해병대 1개사단을 상대로 투입한 12만명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실제로 30만 병력의 중공군은 한미군의 15개의 사단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기 때문에 미군 1.5개 사단을 상대로 6~7개사단 6만7천명을 투입한 것도 일부러 1개 사단을 괴멸 시킬 목적으로 작정하고 투입한 것이다.

정작 미국 쪽에서는 1만 2천명 vs 12만명이라는 개념이 없는데 한국 쪽에서 일방적으로 미군을 띄워주기 위한 무리수. 가끔 중공군 15만명이라는 표현도 나온다. 3만명은 뭐지?

영문판 위키를 보면 미군 3만 vs 중공군 6만 7천명으로 되어 있는데, 이를 참조했을 가능성이 높은 한글판 위키에는 중공군은 7개 사단 12만명이고, 해병대가 10배의 병력을 물리친 전투라고 되어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미군이 3만명이 참전한 것은 확실하지만, 중공군은 몇 개 사단이 참전한지 자체가 불분명하다. 초기 11월 27일의 대공세에는 확실히 6개 사단이 참전하였고, 12월 이후 몇 개의 사단이 더 참가한 듯 하지만 불분명하다. 국내에 소개된 중국 쪽 책에는 한국전쟁 자체를 상당히 자화자찬해 놓았는데 주로 미8군과 싸운 서부전선이 중심으로 나오고 동부전선은 흑역사 급인지 9병단이 해병 1사단을 전멸시켰다고 간단히 나온다.

6 관련 작품

● East of Chosin (한국어판 책명: 장진호 동쪽 4일낮 5일밤의 비록)
1990년 로이 애플맨 作, 국내 발간(2013년 6월 1판), 허빈 역, 다트앤(출판사명)
장진호 전투의 바이블로 위의 '브레이크 아웃'도 이 책을 참고하였고, 영문판 위키백과는 거의 이 책을 참고하여 기술되었다. 로이 애플맨은 2차대전의 미군 공간사를 쓴 사람이다. 즉 그가 쓴 책이 기준이 되는 것이다.
이전 버전에선 국내 미 번역으로 표기되어있었으나 수정자가 이 책의 한국어판을 과거에 구입한 관계로 수정 기술한다.
이 책은 그동안 장진호 전투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미 육군 제31보병연대를 집중 조명한 책으로 장진호 전투 기간동안 31연대의 행적을 다뤘다. 책명이 장진호 동쪽인것도 바로 31연대가 그곳에서 전투를 치렀기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브레이크 아웃외 관련 서적들에서 짧게 기술되었던 31보병연대의 행적은 바로 이 책에서 충분히 다 나와있다고 할 수 있다. 원 저자인 故 로이 애플맨 선생은 미국의 저명한 역사가로 2차대전과 한국전쟁에 종군한 전문사관 장교(최종계급: 중령, 복무기간: 1941-1945,1950-1954)[98]로 양 전쟁 관련 저서를 다수 집필했다. 역자인 허빈 대령(예)은 1962년에 임관, 갑종장교 출신으로 월남전 참전용사이며 1991년 퇴역했다.

● 브레이크아웃(1950 겨울, 장진호 전투)
1999년 마틴러스 作, 국내 출간 2004년 임상균 역, 나남출판
한국전쟁 때 해병대원으로 참전한 마틴 러스 카네기 멜론 대학교 문학부 교수가 집필한 다큐멘터리 서적으로, ROTC 출신 금융인인 임상균이 순전히 좋은 책을 국내에 알리겠다는 이유로 번역하였다.

단, 당사자이자 동양인인 한국인에게는 거북한 느낌이 들 책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중공군을 계속 동양인을 비하하는 은어인 '국(gook)'이라고 부른다. 다만 상황이 상황이니(적=동양인) + 해병대니까(...)로도 볼 수 있고, 어차피 다큐멘터리이니 수정할 수도 없는 부분이다.[99] 또한 당시 혼란에 빠진 미 육군이 철수하면서 부대가 사실상 와해될 상황이 되자 독전을 한답시고 미군 카투사로 있던 한국인 두 명만 즉결처형하고 나머지 말 안 듣는 미군들은 그냥 놔둔다든지 하는 장면도 있다.
전쟁 후 한국군 내에 떠돌아 다니는 최전방의 추위에 대한 루머(예 : 총 들고 가다가 얼어서 손이 총에 붙었다. 녹이려고 침 발랐는데 혀도 붙었다)들은 의외로 여기가 출처일지도 모른다.
장진호 전투 전체를 조망하기 위해 가장 읽기 좋은 책.

● 장편소설 《얼어붙은 장진호》
2007년 고산 고정일 作, 동서문화사
● 장편소설 《불과 얼음-장진호 혹한 17일》
고산 고정일 作, 동서문화사
얼어붙은 장진호를 개작한 것이 불과 얼음이다. 문체가 1인칭 수필에 가까워서 시점이 뒤죽박죽이라 사전 지식 없이 읽으면 상당히 헷갈린다. 한국인의 눈으로 본 장진호 전투라 한국인들 등장이 많이 나온다. 한국인 카투사를 능욕하는 마틴 러스의 책과 비교하면 같은 사건을 전혀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장진호 동안의 페이스 지대가 전멸했을 때 수송대대장 올린 뵐 중령이 위험을 무릅쓰고 미육군 생존자를 구조한 것으로 나오지만 고정일의 책에는 한국인이 구조 시킨 것으로 나온다.

● 한국전쟁에서의 소부대 전투기술
2008년 러셀 A. 구겔러 作, 조상근 편역, 북갤러리
한국전쟁중 미군은 대대 이하급의 19가지의 전투 사례가 나오는데 그중 6번째가 “페이스 특수임무부대의 장진호 전투”이다. 전반적으로 글이 매우 딱딱하고 인물이 너무 많아 머리에 거의 안들어 오는 편. 다만 장진호 전투는 잘 알려져 있어서 사전지식이 있으면 이부분은 읽을만 하다. 다른 자료들이 매우 해병대 입장에서 맹렬한 육군 까기로 일관되어 있어서 육군도 나름 열심히 싸웠다는 측면에서 참고할만한 자료.

● 폭스중대의 최후의 결전(The Last Stand of Fox Company)
2009년 바드 드러리 & 톰 크라빈 作, 2014년 배대균 옮김
덕동고개의 영웅들 7연대 2대대 F중대(폭스중대)의 시점에서 작성되었다. 마틴 러스의 책이 유담리의 미해병대 주력과 장진호 동안의 미육군, 하갈우리의 해병사령부 등 모두 다루고 있고, 그 중 한 부분으로 덕동고개 폭스힐의 F중대가 나오지만, 이 책은 F중대만 다루고 있다. 첫날 덕동고개에서 원형방어하고 있던 F중대가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사상자로 인해 방어진이 축소되는 전술 지도가 압권.
다만 번역의 질은 썩 좋지 않다. 75페이지의 “이 늙은 당나귀야. 나는 당신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고 있다. 나는 2차세계대전의 고참병이야. 그것이 모두이다”라는 훌륭한 왈도체는 구글 번역기의 도움 받은 것으로 의심된다. 번역가는 베트남 파병까지 갔다온 해군 의무관(소령) 출신의 신경정신과원장인데, BAR를 보로닝 자동소총이라고 하고 톰슨기관단총의 별명이 ‘시카고 타자기’라는 것을 몰라 서로 다른 것인 것처럼 쓰였으며, 계급으로서의 ‘테크니컬 서전트’를 훈련중사라고 번역하는등 기초적인 군사지식이 부족한 느낌이다.

● 아, 장진호 - 6.25전쟁 어느 학병의 수기
2010년, 이종연, 북마크
위의 <브레이크 아웃>에서 '존 Y. 리' 통역장교로 소개된, 한국인 이종연 박사(예일대 법대 J.D)의 6.25 전체를 조망하는 글
당시 고려대학을 다니던 이종연은 전쟁이 터지고 미해병대에 통역을 구한다는 말에 지원 했다가 미해병1사단을 따라 장진호 전투에 참가 하였고, 이과정에서 중위 대우를 받게 되었다.
제목은 '아, 장진호'이지만, 6.25 발발과 그 원인부터 휴전회담까지 6.25 전체를 다루었다. 그중에서 직접 겪은 장진호전투도 비중이 있기는 하지만 6.25전쟁 책 치고 상당히 얇팍한 편(196페이지)이기 때문에 장진호 전투도 상당히 빠르게 넘어간다. 그리고 <브레이크 아웃>이나 다른 장진호 전투 연구자들의 글에는 이 박사의 증언이 비중있게 소개되지만, 의외로 이책에는 장진호 전투에 대한 개인 체험담은 하갈우리 이장집에서 기도 사건 외에는 전혀 안나온다. 제목에는 분명히 '수기'라고 되어 있는데? 이 문서에서도 장진호 전투에 참가한 한국 전투경찰대가 경기/충청지방 사투리를 썼다는 이 박사의 증언을 기재해 놓았는데 정작 <아, 장진호>에서는 이런 내용이 전혀 없다.
전반적으로 평범한 한국전 책이며, 장진호 전투에서 리얼한 개인 체험담을 기대한 독자에게는 좀 심심하다. 한마디로 장진호 전투 내용은 없어! 제목 누가 지은거야!

● 그을린 대지와 검은눈 - 1950년 한국 전쟁의 영국군과 오스트레일리아군
2011년, 애드루 새번 지음, 책미래
영국기자가 쓴 영국군+오스트레일리아군 이야기. 책의 주된 주인공은 영국27여단으로 낙동강 전선때 부터 용감히 싸우다가 중공군 대공세때 미8군에 소속되어 있다가 개발살 난다. 영국27여단은 2개 대대밖에 없어 병력 부족이였는데 뒤늦게 오스트레일리아 1개 대대가 배속된다. 참고로 영국27여단과 미8군이 중공군 대공세에 포위되어 며칠동안 사투를 벌일때 미10군단은 그사실을 몰랐다. 그 후로도 한참동안 알아서 중공군 아가리 속으로 걸어들어 가는 이야기를 읽다 보면 속에서 천불이 난다.
또 하나의 주인공은 영해병특공대 41코만도 부대이다. 초기에는 북한 후방에 침투하여 철도 폭파등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다가 보병 부대처럼 조직 개편후 미해병 1사단에 배속된다(...). 장진호의 비극을 듣고 증원을 위해 급속히 진격하는데 그곳이 바로 '지옥불 계곡'(...)
책에서는 영국군도 한국인과 중국사람을 'Gook'이라고 부르는데, 작가는 1898년에 미군이 필리핀 모로족을 토벌할때, 게릴라의 멸칭인 goo-goo에서 나왔다는 설을 제기한다.전혀 아닌거 같은데? 또 한 가지 가능성은 당시 한국인들이 아메리카사람들을 볼때마다 "저는 국입니다!(Me, gook!)"라고 말한 데서 유례되었을 수도 있다고 한다. 호오! Young gook인! 꽤 그럴듯 했어.

그 외에도 할리우드에서 장진호 전투를 배경으로 한 영화 '혹한의 17일', '1950', '아! 흥남(이건 한미 합작)'을 제작 중인데 계속 무소식이다. 강원도에서 촬영한다는 말만 있다. 강원도 철원 철의 삼각지대나 양구 펀치볼 쪽에서 촬영하면 그럴듯한 혹한지옥이 나올 수도 있다.
  1. 사진에 보이는 대부분의 검은 점들이 전부 중공군이다(...)
  2. 당초 목적이었던 UN군을 포위 섬멸하는데는 실패하였으며 10배가 넘는 전사자가 발생하였으나 UN군을 후퇴시키는데는 성공하였다.
  3. 중공군은 UN군을 포위 섬멸에는 실패했으나 후퇴시키는데는 성공해서 전술적으로 승리를 거뒀고 UN군은 포위섬멸을 뚫고 후퇴에 성공했다
  4. '장진'의 일본식 발음인 Chosin이 쓰였다. 당시 미군이 가진 작전 지도가 일제시대 때 일본이 작성한 것을 영어로 옮긴 건에 불과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5. 밑의 주석의 내용과 같이 11~12월 기간동안 미2사단의 인명손실은 8천명에 달했는데 군사적으로 보면 부대의 인명손실이 30%이상이라고 하면 부대로서의 기능이 없다고 간주, 재편성이 요구된다. 한국전쟁의 수많은 전투에서 미군을 위시한 유엔군이 중공군의 포위기동으로 부대가 와해된 사례는 많이 있고 장진호 전투에서도 대표적으로 호수 우측에 있던 미7사단 31보병연대와 하갈우리를 증원하려했던 영국해병특공대(드라이스데일 임무부대)도 그랬다. 하지만 기껏해야 그 규모가 연대급까지였고 이 당시 미2사단은 사단 자체,전체가 붕괴했다!미2사단의 사단깃발은 노획되진 않은게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6. 당시 급박했던 상황의 일화을 제시하면, 미2사단장과 몇몇 사단참모들(중,대령급 주요참모들인데 이들도 일부 죽었다.)과 호위병이 지프 몇대로 출발했는데 1-2km 안가서 지프를 버리고 도보로 탈출했다.(봉쇄구간은 10km였다.) 도중에 무리를 지어 남쪽으로 가는 장병들을 계속 만났는데 독려를 해도 반응하는 장병들이 거의 없었고, 어떤 장교가 이끄는 차량 종대는 부상자가 많아서 이동할수없는 어떤 그룹을 만났는데 어쩔수없이 무시하고 지나쳤고, 전차를 모는 전차병들은 겁에 질려서 도로 전방에 누워있는 부상자들을 무시하고 그냥 깔아뭉개고 지나갔고, 사단 공병대대는 돌파중 낙오되어 갇혔고 대대장의 지시로 군기를 소각하고 중장비들을 파괴한후 대대장과 주요 간부들과 과반수의 병사들은 포로가 됬다. (2016년 현재 이 부대의 후신격 공병대는 매년 이 날 야간에 군기를 소각하는 의식을 치른다고한다.) 사단 의무대는 공병대와 비슷하게 붕괴했는데 공군의 오폭으로 의무대가 후송중인 부상자들이 죄다 죽었다.
  7. 가장 먼저 미2사단 우측에 있던 한국군 2군단이 붕괴되면서 측면에 대한 중공군의 압력이 거세졌다. 미8군이 평양-숙천선으로 퇴각하면서 미2사단을 후미부대로 지정했는데 이때문에 11월 30일까지 사력을 다해 방어했다고한다. 2차 대공세에서 중공군 수뇌부는 미군에 큰손실을 주는 것도 목표로 했는데 당시 유엔군의 위치상 한국군을 제외하고 맨우측에 있던 부대가 미2사단으로 중공군의 측면,후방침투선상에 금방 포착되었다. 미2사단의 극심한 손실엔 이런 요소들이 작용했다.
  8. 수정자는 과거에 국방부 전사연구소에서 발간한 6.25전쟁사 서적을 본적이 있는데 그중 청천강 전투 관련 기록을 본바로는 2차대공세 직전 미2사단의 장병총원은 1만 8천명이었는데 38선으로 퇴각한 시점에선 1만명만 있었다. 어느 보병대대는 정원이 900명이었는데 38선 퇴각이 완료된 12월 중순 시점에선 생존자가 불과 37명(!)이었고 보병연대의 정원은 3800명이었는데 3개보병연대의 생존자는 각각1500명~2200명정도였다.
  9. 군단장이면 중장급이여야 하지만 당시 다른 군단장도 소장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어차피 바지사장이기 때문에 고의적으로 자신의 심복인 소장을 군단장에 임명하였다. 동경사령부에서 맥아더 원수의 지휘를 받기 때문에 예하 소장 사단장들이 소장 군단장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10. 그런데 미8군 역시 맥아더의 부하이다. 이미 미8군을 지휘하고 있는 맥아더가 직접 지휘하겠다며 미10군단을 별도 지휘라인으로 편성해 놓았다는 사실이 위키러들은 이해가 안 갈 것이다. 그 시절이나 오늘날의 미군이나 한국군 관계자들은 모두 이 부분을 납득하지 못하고 있으니 위키러들도 괜히 이해하려 머리 싸매지 말자. 포기하면 편해(...) 맥아더를 신봉하는 한국전쟁의 창군 원로들도 유일하게 이 부분만은 반드시 깐다. 여담으로 많은 사람은 이렇게 추측한다. 아이젠하워원수가 유럽총사령관으로서 대부대를 지휘한 반면에 아이젠하워를 가르친 맥아더는 필리핀지구 사령관으로서 이러한 대부대를 지휘하지 못하였다 그에따른 한풀이로 밖에 설명되어지지 않는 이상한 편제였다.
  11. 1950년 10월 말 미군 10군단이 원산에 상륙한 이후 먼저 있었던 한국군 1군단과 함께 동부전선을 담당했고 서부전선은 미8군이 담당했다. 이때 한국군 2군단은 미8군에 소속되어 미8군의 맨우측 전선에 배정되었다. 즉 미8군과 미10군단 사이의 80km의 틈을 최약체인 한국군 3개 사단이 담당했고 중공군은 이곳을 후들겨 팼다. 한국군 3개 사단은 괴멸되고 그 틈으로 중공군이 미8군을 포위했다. 상황이 이렇게 최악인데도 미10군단은 그냥 앞으로 전진 했다. 즉 미8군을 포위한 중공군이 굳이 미 10군단 후방을 파고들어 포위할 필요가 없던 것이다. 알몬드의 미10군단은 알아서 중공군 품속으로 들어갔다.
  12. 영문 위키피디아의 내용에 의하면 아몬드는 2차대전 전후 1946년 도쿄로 부임, 극동사령부의 인사참모부장을 지내다 49년 참모장으로 임명되었고 그가 10군단장이 될 때까지 지냈다.
  13. 뿐만 아니라 맥아더의 사령부엔 태평양 전쟁 시절부터 맥아더를 보좌했던 장성들(진정한 Yes맨들)이 많았다. 필리핀 함락당시에는 '바탄반도의 갱'들이라고 불렸다.
  14. A중대 유담리 남쪽 방어, C중대 1소대 그 아래 위치한 연대통합지휘소 방어, B중대 그 아래 방어, 5km 남쪽으로 내려가 감편C중대 일명 '터키힐' 방어.
  15. D, E 중대만 먼저 도착하여 임시로 1대대장이 지휘하게 된다. 본부중대와 화기중대는 아직 하갈우리까지밖에 못 왔고 이후 F중대는 주보급로를 방어하기 위해 유담리 남쪽 12km 지점에 있는 신흥리 남쪽 덕동고개, 일명 ‘폭스힐’을 방어하게 된다.
  16. 해병1항공단장 필드 해리스 소장의 아들. 2차대전 일본군 포로 생활 때문인지 27일 정신이상적인 행동을 하였다. 그날밤 사단 최북단에 있는 3대대 H중대부터 뚫렸고 너무 쉽게 후퇴 명령을 내렸다. 전투 후반 실종되었다. 이 전투 당시 만 32세였고 슬하에는 2녀가 있었다#.
  17. 은근히 명언충. 무슨 말만 하면 두고두고 회자 되어 역사에 기록된다. 장진호의 유명한 명언은 대부분 이사람이 한 말. 2차대전때는 화염방사기를 처음 지급 받고 "이거 착검은 어디다가 하는거야?"라고 한사람이다.
  18. 2개 중대만 하갈우리에 있었고 G중대는 고토리 주둔.
  19. 전투 기간 동안 모든 교전 지역에서 극심한 병력 손실에 보병이 부족해서 각 거점에 있던 지원부대 병력을 보병으로 편성해서 보충했다.
  20. 해병대는 육군과 달리 화기중대가 별도로 편제 되어 있지 않고 대대본부에 소속 되었다.
  21. 비전투병력들이기는 하지만 '모든 해병은 기본적으로 소총수다'라는 개념하에 기본적으로 보병 교육을 받았다. 이 비전투병력들은 장진호 전투 최후의 순간에 소총을 잡고 결사적으로 싸운다. 현대 한국군에서도 가끔 나오는 미군은 비전투병력도 싸웠다는 일화가 바로 이때의 상황이다.
  22. 폭 12발자국의 꼬불꼬불한 험한 도로로 해병들은 군주보급로 MSR : Main Service Road 라고 칭함
  23. 1개 소대는 연대본부 경비를 위해 차출되어 감편된 상태
  24. 대대 화기중대 81밀리팀등으로 보강된 상태.
  25. 참고로 7사단 17연대는 흥남에서 북쪽으로 160km를 진격하여 10월 21일 압록강에 도달 했었고, 나머지 부대들은 아직 흥남 근처에 있었다. 심지어 맥클린 특수임무부대의 기간병력인 31연대 2대대도 흥남 주둔중. 즉 해병1사단도 부대가 분산되어 있었지만, 미7사단에 비하면 애들 장난 수준.
  26. 어째 전쟁이 6주만에 끝나니 방한복이 필요없다고 주장한 독소 전쟁의 히틀러가 생각난다.
  27. 마틴 러스의 <브레이크 아웃> 274쪽에는 카투사들은 훈련도 못 받았고 봉급도 받지 못했고, 가족들과의 연락도 끊겼으며, 빈약한 장비에 보급도 엉망이었으며 군인이기 보다는 전쟁포로처럼 행동하려는 보충병력으로 채워져 있다고 나와있다. 그러나 카투사들이 쓴 수기에는 한국전쟁 극 초기에 제주도 모슬포에서 훈련 받았고 미군과 동일하게 장비가 지급되어 매고 다니느라 죽을 고생 했다는 전혀 반되대는 기록이 나와있다. 주간 조선의 카투사 875명 그들이 대한민국을 구했다도 참고 바람. 또한 <한국전쟁에서의 소부대 전투기술>이라는 미국 책에서는 카투사가 페이스 부대에서 단지 50명 밖에 안된다고 나와 있다. 마틴 러스의 기록이 의심스러운 부분. 전반적으로 해병대는 육군 7사단의 무기력함을 한없이 비난하고, 7사단은 모든 잘못은 카투사 때문이라고 매도하는 경향이 강하다.
  28. 후에 밝혀진 것이지만 이때까지도 아직 함흥에 있었고 11월 30일에야 고토리에 도착한다. 이후 전투의지 부족과 극악의 전투력으로 아무 도움이 안되지만 장진호 참전용사는 맞다.
  29. 연대수색대, 중박격포중대, 의무대 포함
  30. 일부 감편되었고, 대신 15대공포대대 D포대 배속. M16 대공장갑차(반궤도 차량 탑재 4연장 50구경 기관총), M19 대공전차(2연장 40밀리 보포스 기관포)로 무장
  31. 11월 27일에 하갈우리에서 싸운부대만 기재해야 하는데, 부대의 중요성 때문에 일단 기술은 한다. 27일까지 하갈우리에 도착했어야 하는데 아직 함흥에 있었고 심지어 통신두절이라 맥클린 대령은 그 사실은 모르고 근쳐까지 오고 있는 걸로 착각하고 있었다. 11월 30일에 이르러서야 고토리에 도착한다.
  32. 정찰병 2명+부분대장. 그냥 대열의 선두에 선다는데 의미가 있다
  33. AR사수 2명에 부사수 1명이 기본 편제이다. BAR 자체가 부사수가 필요 없고 단지 BAR 전용 탄창을 휴대할 뿐이다. 그런데 AR팀 3명이라는 것 때문에 BAR 3정으로 계산하는 오류가 자주 보인다. 다만 AR팀 2명에 사수, 부사수 체제로 운용되는 경우는 있는 것 같다. 교리상으로는 분대장이 팀장 역할을 한다.
  34. 소대장, 부소대장, 향도병, 전령2명
  35. 분대장 + 30구경 기관총 운용팀 2개
  36. 중대장, 부중대장, 선임하사, 서무계, 취사반 4명, 보급계 2명, 수송반 7명
  37. 60mm 박격포 3문, 30구경 수냉식 기관총 3정
  38. 81밀리 박격포 6문, 57밀리 무반동총 2정, 30구경 기관총
  39. 4.2인치 박격포 6문
  40. 2차대전 당시 미군 보병사단의 자체 정원은 14,000명이었지만 한국전쟁 시점에선 18,000명으로 증가했다. 사단에 배속된 부대들을 고려하면 한국 전쟁 당시 미군 사단의 평균적인 인원은 2만을 가볍게 넘는다.
  41. 105밀리 대대 3개, 155밀리 대대 1개
  42. 중공군은 계급이 없기 때문에 장군 호칭 생략.
  43. 겉은 카키, 안은 하얀색인데 상황에 따라 뒤집어 입었다고 한다.
  44. 매우 두텁고 따뜻하여 미군들이 주워서 애용하였다. 워낙 두꺼워 고기압에 의하여 약해진 총알을 상대로 방탄복 역할도 하였다는데, 그보다는 추운 날씨에 모든 것이 얼어붙는 바람에 여기에 튕겨 위력이 감해진 총알에 맞은 탓일 가능성이 크다. 중공군 코트를 입은 어느 미군은 갑자기 몽둥이로 두들겨 맞은 고통으로 쓰러졌다가 일어나니 총알 몇 방이 관통 못하고 튕겨나간 것을 알고 깜짝 놀랐을 정도
  45. 이 시기만 해도 대부분 북중국 출신으로 추위에 강하며 국공내전 때 활약했던 베테랑 위주라 실전 경험이 풍부하였다. 전쟁 후반에는 중공군의 병력이 급증하면서 소모시킬 목적으로 남중국 출신으로 추위에 약한 국부군 포로 출신자들을 소모시키기 위해서 무리하게 차출하여 내보낸다.
  46. 생년에 대해 다소 이견이 있다. 중국 쪽에서는 1899년생이라고 기록한다. 그 정신 없던 1900년대 전후로 이름 없는 집안에서 태어난 인물이라 이상하게 여길 부분은 아니다. 어쨌든 전쟁 외에도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등으로 원체 드라마틱했던 시대에 여든을 넘겼으니 꽤 장수한 편.
  47. 현 함경남도 수동구. 고원군에서 떨어져 나왔으며, 평원선(현 평라선 평양 - 고원 구간)이 통과한다. 당시 철도상으로는 평원선만이 현 북한 일대에서 동서로 철도를 통해 병력과 물자 수송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철도였기 때문에 이 노선을 잃는다는 것은 좌우로 UN군이 갈라진다는 의미였기 때문에 나름대로 중요한 곳이었다. 참고로 원산에서 평양까지 철도로 이동하려면 고원군을 출발하여 수동, 양덕, 성천, 순천을 거쳐 평양으로 가는데 이 거리가 대략 250km 정도 된다.
  48. 스미스 장군은 장진호 근방을 헬기로 시찰 후 작전 수행이 불가능한 곳이라고 말했다. 이때 만들어 놓은 야전활주로로 이후 보급을 받고 부상자를 수송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그러나 착공은 하였지만 완성은 공병이 밤낮으로 작업을 강행한 끝에 12월 1일에 이루어진다.
  49. 당시 5연대는 후방의 신흥계곡, 1연대는 아예 행정상륙한 원산에 막 출발하려고 하는 단계였다. 7연대와 1연대는 무려 270km나 떨어져 있었다.
  50. 중대 이하의 부대에서는 지휘관의 계급이 없다는 것은 치명적임이 극에 달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중대장조차 자신을 지휘관이 아닌 병졸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프레데릭 다우세트 중령은 중공군의 이 문제점을 짚은 것이다.
  51. 이 점 때 문에 만약 중공군의 124사단이 장진호 전투에 참전하여 포위망이 완성되었으면 미 해병대가 전멸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물론 동부전선의 중공군이 큰 피해를 안 입었다면 중공군 제9병단이 3차 대공세 때 참가하여 UN군은 부산까지 뺏겼을 것이라는 것이 일반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수동 전투에서 1개 사단이 괴멸한 중공군은 나비효과로 이후 고생한다.
  52. 이때의 주장이 추수감사절(11월 23일)까지 전쟁을 끝나겠다는 것인데, 이후 크리스마스까지 전쟁을 끝내겠다는 것으로 말을 바꾼다.
  53. 연락 담당 참모가 근처에서 노닥 거리다가 정오에야 출두하는 방식으로
  54. 정말 맥아더를 깍아내리기 위한 입장을 찾아보자면 좌파적 도서인 <한국전쟁 5가지 미스터리>에선 맥아더가 이미 이때부터 대통령병에 걸려서 국민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기 위해서 전투를 크리스마스까지 끝내기 위해 무리수를 둔 것이라고 나와 있다.
  55. 미국에서 일하는 중국인 노동자라는 비칭.
  56. 독소 전쟁 이전 스탈린은 절대로 독일이 안 쳐들어올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독일이 기습적으로 쳐들어 오자 스탈린은 그 충격에 일주일간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고 그 기간 동안 소련군은 완전히 작살났다. 그러나 정신 차리고 방에서 나온 스탈린은 전군 현 위치에서 절대 사수 명령을 내리며 최고 사령관으로서 지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맥아더는 스탈린보다 못하였다. 초기에는 멘붕에 빠져 어떤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정신 차린 후 기껏 내린 명령은 서울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도망가라는 것이고, 며칠 뒤 내린 명령은 부산을 통해 일본으로 후퇴하라는 것이였다. 이놈들아 한국사람 다죽게 생겼다
  57. 중공군 79사단이 북쪽, 89사단이 북서쪽, 59사단이 남서쪽을 담당하였다.
  58. 정신이 온전치 못했던 3대대장 해리스 중령의 너무 빠른 듯한 후퇴 명령이 아쉽기는 하지만 다음날 밝혀졌듯이 중대 장교 7명 중 1명만 남고 중대원은 40명 뿐인 절망적인 상황이였다.
  59. 11월 24일까지는 7연대 B중대가 이곳을 지키고 있었는데, 추수감사절(11월 23일) 기념으로 받은 칠면조 뼈다귀가 쌓아놓은 더미가 있어서 C중대가 ‘칠면조 언덕’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1개 소대가 연대 본부를 지키고 있어서 감편되어 180명 정도 있었다.
  60. 대대 중화기 중대의 81밀리 박격포팀등의 증원이 있어 218명 주둔
  61. 사상자중 사망자는 24명인데 중공군 시체는 350구정도 널려 있었다. 폭스중대가 1/10이 사망한데 비해 그날 공격해온 중공군 대대는 반이상이 사망했다. 나머지 반도 부상이나 미군포로 신세라 사실상 전멸.
  62. F중대에 대해 간단히 한줄 썼지만 이들을 주인공으로한 책 “폭스중대의 최후의 결전”은 27일밤의 전투까지가 책의 절반일 정도의 혈투였다.
  63. 이날 육군의 대응에 대한 증언이 엇갈리는데 해병대 쪽에서는 육군이 그냥 쳐잤다고 하고, 육군쪽에서는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사계청소도 했으며 중·소대별 사격구역을 나누는등 충분한 방어 준비를 했다고 한다. 일단 육군쪽 자료에서는 페이스 부대의 A중대는 북쪽을 방어하고 C중대는 도로 건너 동쪽, B중대는 그 아래쪽을 방어한 것으로 되어 있다. 대대 본부는 방어진지에서 1km도 떨어지지 않은 민가쪽에 설치
  64. 사실 하갈우리의 미군에 비해 중공군 2개 연대 병력이 조금 더 많은 정도였다. 그런데 화력이 워낙 넘사벽이니 중공군의 실패는 예정되어 있었다. 174연대를 예비대로 빼놓고도 미군과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정도이니, 이번 경우는 중공군이 미군을 너무 얕잡아 본 결과이다.
  65. 앨런 맥클린은 포로가 된지 나흘째 사망하였고, 대충 묻혔다. 그토록 바라던 31연대 2대대는 아직도 함흥에 있었다. 11월 30일에야 고토리에 도착한다.
  66. 그런데 실제로 해병사단에게 철수 지시가 내려온 것은 30일이다. 아몬드 장군은 맥아더의 무조건적인 Yes맨인데 왜 맥아더의 지시를 안 따랐을까?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겠지만, 이 당시 맥아더든 아몬드든 해병대에 대해 죽던 살던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육군은 이미 후퇴하고 있던 상황에서 해병대만 30일까지 철수 지시를 못 받아 고립된다.
  67. 여담으로 영미 해병대가 연합 작전을 벌인 것은 이때가 사상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1900년 중국에서 일어난 의화단의 난.
  68. 이들 중 일부는 12월 7일 영미 포로를 돌려준다는 중공군의 제안에 폭스힐의 영웅 7연대 F중대가 찾아왔다. 중대라고 해봤자 20명밖에 안 남았지만 이들은 하갈우리 쪽으로 다시 역주행하여, 약속된 장소에서 수십 명의 미 육군 병사와 2명의 영국 해병특공대원을 인수해왔다.
  69. 생각해보면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은 정말 잘 싸웠다. 두 배 많은 미군을 주간 공격으로 몰아붙여 후퇴시켰으니... 혹시 해병대가 아닌 미 육군이라서?
  70. 7연대 2대대에 있던 D, E중대는 작살이 나 있는 상태여서 D-E중대라는 이름으로 통합된 체 5연대 3대대로 배속되었고, 12월 27일 가장 먼저 괴멸된 7연대 3대대 H중대는 20명 남아있었다.
  71. 적지에 가매장하고 후퇴한 것은 미 해병대 역사상 5번 이내에 드는 사례이다.
  72. 57 포병대가 전날 먼저 철수 했다는 자료도 있는데 이날 후퇴 병력 3천명이라고 하는 것으로 추정했을 때 전날 철수한건 전체의 일부병력으로 57 포병대 대대본부가 아닌가 싶다.
  73.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후퇴하는 아군 병력을 쏴죽이는 것은 한 번 생각해볼 만한 문제이다. 한국전쟁 첫날에 방어전이 내던져졌던 생도 1기생이 후퇴하던 입학 4일차 생도 2기생을 쏴죽이기도 하고, 살인장군으로 악명 높은 백인엽 장군은 병사들 쏴죽이는 것이 일상사였다. 전부 부족한 지휘력을 공포에 의해 병력을 통제하려는 것이였고 결과는 실패였다. 한국전쟁의 다른 사례를 보면 부하에게 권총을 쥐어주고 "내가 후퇴하면 나부터 쏴라!" 라고 하고 돌격하는 바로 위의 백인엽의 형이 승리하였다. 나는 뒤에 있을 테니 너부터 돌격하라면서 부하들을 쏴죽이는 지휘관 치고 제대로 된 사람이 없다.
  74. 중공군이 설치한 도로장애물 지대를 개척 하다가 수류탄 공격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는 자료도 있다.
  75. 이때 전투보고에는 F중대가 적어도 1천명 이상 사살했다고 하고, F중대장 바버는 자신들과 H포대의 포격과 코르세어의 폭격으로 보수적으로 잡아도 2천명 이상 죽었다고 말했다. 피아살상비율이 무려 1:77이다.
  76. 여기서 논란이 있는데 엉터리 지휘를 한 페이스 대대장은 사후 명예훈장을 받았고, 목숨을 걸고 300명을 구출한 올린 뵐 대대장은 무공십자훈장에 그쳤다. 후술하지만 해병대에 수여되는 무공훈장은 육군에 비해 매우 짠 편이다.
  77. 처음으로 퓰리처 상을 받은 여기자. 대한민국 해병대한테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칭호를 준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데 귀신 잡는 해병대 일화에는 논란이 존재한다. 대한민국 해병대 문서 참조.
  78. 진작 3사단에게 인수인계했어야 하는데 아직도 도착 안했다. 다음날인 12월 7일에서야 3사단내 65보병연대 2대대, 독 특수임무부대가 도착하여 방어한다.
  79. 4312명의 부상자를 후송시키고, 수백 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으며, 진흥리에도 1천 6백명의 해병대가 주둔해 있는 상황에서도 아직 이정도의 병력이 남아있었다. 미군 1개 사단 병력이 2만명에 가깝고 추가로 워낙 풍부한 후방지원부대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
  80. 미군의 방어선 안에 있던 9만 1천명의 피난민은 안전하게 후퇴하였지만, 방어선 밖에도 약 10만명의 피난민들이 미군을 따라 이동하였다고 한다. 게릴라 침투 위험 때문에 방어선 밖의 피난민은 안으로 들어 올 수 없었다. 이들은 결국 흥남 탈출의 그 순간까지 제지당해 탈출에 실패한다. 이런 엄청난 피난민이 발생한 이유중 하나가 미군이 핵공격을 할 것이라는 소문 때문에 대피했다고 한다. 실제로 맥아더는 핵을 쏘고 싶었는데 미정부에서 막았다.
  81. 정확한 피아사망 비율은 미군은 육군을 추가해야 하고, 공산진영의 특성상 중공군은 언제나 불분명하여 정확히 따지기 힘들지만, 몇십 대 1 정도 나온다.
  82. 이 전투의 결과에 대하여 영문 위키피디아는 아예 중국군의 Pyrrhic victory, 즉 피로스의 승리로 기술하고 있다. '상처 뿐인 승리'라는 의미.
  83. 이것은 당시 중국군 군사 전략이 인민전쟁 노선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중공군은 자국 내에서 전쟁을 치른다는 기본 전제하에서 모든 면이 발달해서 이런 류의 전쟁을 전혀 상정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84. 미리 일본에서 맥아더 원수를 만나서 전권을 부여받았다고 한다. 다만 아몬드의 경우 맥아더의 후원을 받고있던 자라 그를 완전히 배제시킬 순 없었고 리지웨이 자신이 보기엔 아몬드의 장점(?)이 분명히 있었긴 해서 그를 유임시켰다. 책 콜디스트 윈터의 내용에 따르면 리지웨이는 부임후 아몬드를 만나 장시간 독대를 해서 군기(?)를 잡았다고한다.
  85. 미 육군 수뇌부는 이것을 맥아더 원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표시라고 했다. 51년 3월까진 맥아더의 영향력은 컸고 그를 달래기 위한 여러가지 회유책(?)을 썼다. 아몬드의 계급을 올려준 것도 일환였던것같다. 물론 맥아더가 해임된후 그의 후원을 받았던 측근들은 깡그리 망했다. 참고로 원균이 대패한 칠전량 전투도 당대에는 죽은자가 없는 전투로 불렸다. 안싸우고 배만 버리고 육지로 죄다 도망가서. 원균은 공식적으로 실종이였고 수사급 2명을 제외한 나머지 장수들은 한명도 안죽었다. 아군이 거의 안죽고 철수하는데 성공했다니 원균의 공이 매우 크다.
  86. 마드리드나폴리와 비슷한 위도다! 새삼 기후의 차이를 느낄 수 있는 부분.
  87. 모스크바의 1월 평균 기온은 영하 8.6도에 불과하다. 참고로 남한에는 모스크바보다 더 추운 곳이 없다.
  88. 이 기록은 스탈린그라드 전선의 돈 강 전선에 있던 부대가 기록한 자료다.
  89. 우리나라에서야 4계절이 뚜렷한 나라라는 것을 자랑거리라고 하지만, 미군의 참전수기를 보면 항상 한국은 여름은 지독하게 덥고, 겨울은 지독하게 춥다는 말이 빠지지 않는다. 말이 4계절이 뚜렷한 거지, 연교차가 극심한, 굉장히 지랄맞은 기후이다. 연교차가 극심하지 않은 기후에서는 긴 팔 하나로도 4계절 내내 버틴다.
  90. 11월 말, 12월 초의 초겨울인데도 불구하고 저렇게 추웠다. 당시 체감온도는 영하 50도 전후로 추정된다. 한반도 기준으로 제일 추운 12월 말부터 1월 중순 사이에는 영하 40도, 비공식적으로는 영하 45도까지 찍는다. 영하 45도에서 10m/s 정도의 바람이 불면 체감온도는 영하 70도까지 내려간다.
  91. 미 해군 타이콘데로가급 이지스 순양함들의 함명은 모두 미군이 참전했던 격전지명에서 가져온 것이다.
  92. '선택받은 소수'라는 뜻의 chosen few와 발음이 유사하다. 미국식 작명 센스!
  93. 미군이 한겨울에 치른 전투는 서유럽의 벌지 전투 등 다른 곳에서도 있지만, 추위로 사람이 픽픽 죽어나가는 극한지와는 거리가 멀다. 비록 1945년의 벨기에는 기록적인 수준의 추위를 기록했지만 그래봤자 서유럽 날씨로 1945년 벨기에의 1월 평균기온은 -6℃ 정도에 불과했다. 가장 추운 날로 기록된 것이 화씨 10도 정도(약-12℃). 물론 이 정도로도 전투하기에는 꽤나 고생스러웠겠지만, -30℃를 밥 먹듯이 찍은 장진호와는 전혀 다르고 극한지라고 하기도 힘들다.
  94. 이 일화는 어느 한 병사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묻자 그 병사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나에게 내일을 주십시오!"라고 대답하는 일화로 퍼져나갔다.
  95. 이런 식으로 은어 때문에 명령 전달이 왜곡될 수 있기 때문에 지금도 군대에서는 정신교육 시간에 각종 은어를 쓰는 것을 자제하자는 식의 교육을 많이 한다.
  96. 그 진짜 투시 롤을 받은 해병대는 죄다 멘붕했고 일부 해병대원들은 보급기에다 욕설과 함께 가운데 손가락을 날려주기도 했다(.....)
  97. 비슷한 예로 국내에서 가장 흥행했던 영화 명량에도 당시 위기가 얼마나 절박했는지와 조선군을 뛰우기 위해 조선군 배가 12척, 일본군 배를 333척이라고 과장해 놓았다. 당시 조선군의 배는 12척설(?), 13척설이 있고 일본군 배는 133척설과 333척설이 있었는데 조선군은 가장 작게 잡고 일본군은 최대치로 잡은 것이다. 조선군이 13척이였다는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고, 일본군은 133척은 참전했고 200척은 후방에서 대기한 것 같은데 이 부분만 논란이 있다.
  98. 전간기 시절 석사학위를 취득, 역사학자로 활동했고 군대에서 경력을 살려 육군 전사(戰史, 전쟁 역사)팀에 소속되어 근무했다
  99. 다른 미군책에는 중공군에게 "Hey Gook! 니네들이 좋아하는 조상님 곁으로 보내줄게!" 하며 총을 쏴대는 장면이 있다. 우리 민족 역시 조상님을 신봉하는데 읽기 거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