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후한 말 위나라의 인물
王必
(? ~ 218)
후한 말 위나라의 인물.
조조의 부하로 삼보의 난 때 조조가 연주목으로 임명되자 왕필이 사신으로 파견되어 헌제에게 글을 올렸다.
주부, 승상장사 등을 지냈으며, 여포가 조조에게 붙잡힐 때 줄을 느슨하게 해달라고 하자 주부였던 왕필은 여포는 사나운 무리이고 그 무리들이 가까이 밖에 있어 느슨하게 해주면 안된다고 진언했다.
승상장사일 때 조조가 병사를 맡아 허도의 일을 감독하도록 남겼고 218년 봄 정월에 소부 경기, 사직 위황, 태의령 길본과 그의 아들 길막, 길목 등이 공모해 반란을 일으켜 허도를 공격해 자신의 진영에 불을 질렀는데, 공격하는 자가 누군지 몰라 김위와 친했기 때문에 그의 집으로 달아나 의탁하려고 했다.
밤에 김위를 부르자 김위의 집안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해 얘기했는데, 그들이 길막 등으로 착각해 왕장사가 이미 죽었냐면서 그대의 무리들이 일을 이뤘다고 하는 것을 듣고 다른 길로 달아났다. 일설에는 그의 장하독이 오늘 일이 어느 집안인지 아시는데 거기로 들어가겠냐고 물으면서 부축을 받아 남성으로 달아났으며, 날이 밝아오자 길막 등이 왕필이 죽은 줄 알고 흩어졌다가 패배했다고 한다.
왕필은 전농중랑장 엄광과 함께 그들을 토벌했지만 10여일이 지나 상처 때문에 죽었다고 하며, 조조가 왕필이 죽은 것에 크게 분노해 한의 백관들을 업성에 불러 오게 했다가 불을 끄러 나온 자는 왼쪽, 끄러 나오지 않은 자는 우측에 섰다. 많은 사람들이 불을 끄는 것이 반드시 죄가 없을 것이라 여겨 모두가 왼편에 붙었는데, 조조가 불을 끄러 나오지 않은 자들은 반란을 도운게 아니라면서 끄러 나온 자들이 실제 적이라면서 모두 죽였다고 한다.
조조는 왕필에 대해 자신이 어려운 고비를 겪을 때부터 따르던 사람으로 충성스럽고 유능하면서도 부지런하며, 마음이 쇠나 돌처럼 굳어 훌륭한 관리로 때를 놓쳐 오랫동안 왕필을 부르지 못했다는 얘기를 할 정도였다.
반란의 상세 사항은 무제기에서 주석으로 나온 위무고사, 삼보결록, 헌제춘추, 산양공재기 등에서 인용되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무능한 관리로 나와 사마의가 술을 너무 좋아하고 성품이 너그럽기만 하고 엄하지 못해 이 일을 맡기기 힘들다고 할 정도였으며, 왕필이 김위의 집에 들어갔다가 김위가 반란에 가담한 것을 알게 된 것은 김위의 아내가 왕필을 죽였냐고 한 것 때문으로 나온다.
1.1 미디어 믹스
나레이션인 배철수가 소개하기를 '소크라테스같은 인물'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소크라테스란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아닌 공처가 소크라테스를 뜻한다. (...)
조조가 위왕에 자리에 오르면서 수도를 업으로 옮기게 되어 허도를 책임질 책임자로 그 누구도 예상못한 왕필을 앉히는데, 이것은 조조가 아직도 자신에게 반항하는 한실의 신하들을 걸러내기 위해 미끼로 왕필을 내세웠던 것.
조조의 예상대로 김위와 경기, 위황등의 한실의 신하들은 정월대보름 행사에 맞춰서 쿠데타를 일으키고 어림군을 장악하지만, 이미 모든 사실을 파악하고 있던 조조는 하후돈과 기갑부대를 보내 반란군과 반란에 가담한 백성들을 잔인하게 진압한다.
왕필은 반란이 일어나기 전 김위와 술을 마시다 허도에 불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집을 나서다 경기가 쏜 화살에 맞아 사망. 만화 본편에서는 화살에 맞은 채 도망치다가, 조조가 모든 뒤처리를 다 끝낸 뒤에 뒤늦게 반란 소식을 알리고 픽 쓰러져 죽는다. 이 때 주위 사람들의 표현이 일품. '올림픽 마라톤 때 시상식에 폐회식까지 다 끝난 뒤에 들어오는 선수 같구먼.'. 조조도 저 바보의 꼴을 보라며 비웃는다.
여담이지만 본편 한정으로 왕필의 아내는 악처 수준을 넘어 의부증 증세가 심각한 것 같다. 남편이 퇴근하면서 옷에 묻혀온 머리카락을 보고 바람을 피웠다고 마구 구타를 하더니 머리카락을 안 묻혀오자 "니가 이젠 대머리 여자랑 바람핀다 이거제? 일루 와. 니 오늘 죽었어~!!!"라고 할 정도(...)
2 위나라의 상서랑
王弼
(226 ~ 249)
연주 산양군 고평 사람으로 자는 보사(輔嗣).
어려서부터 총명하면서 배우기를 즐겨 십여 살 때 유가와 도가의 이치에 대한 논의를 좋아했으며, 문필이 좋아 예능이 있었고, 변론을 좋아하였으며 이에 능했기 때문에 부하의 인정을 받았다.그는 천박하였지만 온화하였고, 주연을 좋아하였으며, 음률에 통달하였고, 투호를 잘했다.
하안이 그를 만나보고 감탄하여 '공자께서 젊은 후배가 무섭다고 했거늘, 이 사람이야말로 하늘에 내린 사람이다'라고 말했으며, 성인은 정이 있으면서도 거기에 걸림이 없어 성인에게는 희로애락의 감정이 없다고 하는 하안의 주장에 반대했다. 도가의 학설에는 하안에 미치지 못했지만 하안을 넘는 설도 많았다고 하며, 다양한 분야의 지식인을 비판하여 당시의 지식인들로부터 미움을 받았다고 한다.
도덕경, 주역 등의 고전에 주석을 달았는데, 세설신어에 따르면 노자의 주석을 달던 하안이 왕필이 노자의 주석을 듣고 있다는 걸 알고 스스로 부끄럽게 여겨 쓰던 것을 그만두고 도덕론을 저술했다고 한다. 또한 하안, 하후현 등과 함께 현학의 청담 기풍을 창시해 정시지음(正始之音)이라 일컬어졌다.
하안과 관련해서 하안이 지은 도덕론과 관련된 일화 이외에도 세설신어에는 하안의 집에서 담론을 논한 일화와 배휘와 대화한 일화가 있다.
하안의 집에서 담론을 논한 일화는 다음과 같다.
하안이 이부상서가 되었을 때 지위와 명망이 높아 당시에 담객들이 가득찼는데, 왕필은 이 당시에 20살도 채 안된 나이였지만 하안을 찾아갔으며, 하안도 왕필의 명성을 들었기 때문에 지난 번의 담론에서 제기된 이론중에 논리적으로 가장 뛰어난 것를 골라 왕필에게 "이 이론에 대하여 나는 논리적으로 지극한 것이라 생각하는데, 다시 반론을 펼 수 있겠냐?"라고 묻자 왕필은 곧바로 반론을 펼쳤고, 이를 들은 좌중의 사람들은 하안이 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왕필은 스스로 문제 제출자와 응답자가 되어 자문자담을 하면서 담론을 전개했는데, 좌중의 사람들 모두가 따라가지 못했다고 한다. |
배휘와 대화한 일화는 다음과 같다.
왕필은 약관의 나이에 배휘를 방문해 배휘가 "대저 무(無)라는 것은 진실로 만물의 바탕이 되는 바로서 성인은 기꺼이 언급하려 하지 않았는데, 노자는 끊임없이 부연 설명했으니 왜 그러한가?"라고 물었다. 왕필은 "성인은 '무'를 체득했고 '무'는 또한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유(有)'에 대해서 언급했으나 노자와 장자는 아직 '유'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항상 부족한 바를 설명했던 것입니다."라고 했다. |
배휘와 관련된 일화는 학문적으로도 의의가 있는데, 현학의 경향을 설명하는 주요 예시가 된다. 배휘의 말처럼 대저 그전까지의 유교에서는 무니 현이니 하는 따위의 글자에 대해서 학자들은 논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휘가 무와 성인의 관계에 대해서 논급한 것은 그 당시의 학문적 경향이 이미 고전 유교와는 거리가 있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왕필의 답변은 더욱 현학적이라 할 수 있다. 성인 즉 공자는 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왕필은 성인이 무를 체득했으나 무는 설명할 수 없는 것임을 알기에 논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해석했다. 또한 왕필이 부연하기를 노장은 부족했기에 부족한 바를 항시 설명했다지만, 공자가 무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은 왕필의 해석대로라기보단 공자가 무 같은 형이상학적 개념과는 무관하거나 무심했다고 여기는 편이 사리에 맞다.
다만 왕필이 무를 논함에 있어서 공자를 언급하며 공자가 훨씬 더 높은 경지라서 아예 말하지 않았다는 것은 나름대로 절묘한 부분이 있다. 노장 사상은 굳이 일을 꾸미지 않고도 일을 하며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성인의 이치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공자가 무에 관해 말을 하지 않은 것은 그럴 듯하다. 또한 후한의 인물인 왕충의 저술에서도 볼 수 있듯이 공자는 여러 문인들을 기르고 예로부터 내려오는 많은 문헌과 구전들을 차별없이 힘써 연구하였고 다듬은 공로가 크므로 제일 가는 지식인이자 성인으로 널리 인정받았다. 많은 제자백가는 공자로부터 비롯되고 또 고대 중국의 수많은 고전 텍스트들은 공자의 손길이 닿은 바가 크므로 공자의 그림자는 무시할 수 없다. 왕필 역시 아마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손자병법이 물의 특성을 비유해서 궁극적인 용병술을 설명하는 것 처럼 노자 역시 물의 특성을 도에 비유하니, 노자 또는 도덕경 그 자체로도 많은 사상가들에게 철학적 화두가 되었고,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일찍이 상서랑에 임명되었다가 처음에 왕려, 순융 등과 사이가 좋았지만 왕려가 자신의 황문랑을 빼앗았다고 여겨 왕려가 왕필을 증오했으며, 순융과 끝까지 좋게 지내지 못했다. 249년에 조상과 하안이 피살되자 이에 관련되어 면직되었다가 가을에 역질로 죽자 사마사는 "하늘이 나를 버리셨도다!"라고 탄식하면서 식견 높은 사람들도 이를 애도를 했다고 하며, 아들이 없어 가문이 단절되었다. 워낙 어린 나이에 죽었기 때문에 도덕경 주석을 할 때 여성의 성기를 이해하지 못한 흔적이 있다. 왕필이 도덕경을 주석한 나이는 16살
주역에 주석을 달았다. 주역의 수많은 주석들 중, 왕필의 주석은 공자의 십익(十翼)이후, 우번역 등과 함께 최고의 주로 꼽혔으며, 고려,조선시대 잡과 과목에도 들어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
유명록에는 정현을 비웃다가 역질에 걸려 죽은 일화가 있다.
왕필이 역의 주석을 지을 때 번번이 정현을 고루한 유생이라면서 영감쟁이의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했는데, 정현의 유령이 나타나 젊은 나이에 경솔하게 문구를 견강부회하면서 나를 함부로 책망하냐고 했다. 정현이 떠나자 왕필은 속으로 몹시 두려워했고 얼마 후 역질에 걸려 죽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