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후한의 인물
왕충(후한) 문서 참조.
2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王忠
생몰년도 미상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무장. 옹주 부풍군 사람.
조비의 막장짓의 피해자 중 한 명.
2.1 정사
젊어서 정장을 지냈지만 이각, 곽사의 집권으로 장안 일대의 치안이 막장이 되자[1] 왕충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인육을 먹었다. 이렇게 굶주림에 시달리던 끝에 고향을 버리고 무관으로 갔다. 위치상 형주 북쪽 경계인 남양군의 서쪽이다.
남양 일대의 군벌이었던 누규는 유표를 의지하고 있었는데, 누규는 왕충에게 유표에게 귀부할 것을 제의했지만, 왕충은 이에 반발해 오히려 다른 유랑민 무리들과 함께 누규를 격파했다. 이 과정에서 누규의 군사들 일부를 흡수해 1천의 무리를 거느려 조조에게 귀부했다. 이 사건 때문에 삼국지 11의 특정 시나리오에는 누규가 군주로 등장하기도 한다. 정사 정혼전에 정태가 왕충과 함께 동탁을 암살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이 이 왕충을 말하는지 확실하지가 않다. 같은 시대는 아니긴 하지만 한자만 다른 왕수의 아들 왕충도 있다.
이후 조조를 따라 각종 전투에 참여했다가 199년에 유대와 함께 차주를 죽인 유비를 상대하러 갔다가 이기지 못하고 유비한테는 "너희 같은 놈들은 100명이 와도 안 무서우니 조조나 끌고 오라."는 소리까지 들으며 연의에서보다 안습한 모습을 보여준다.
기록상 확인되는 왕충의 행적은 많지 않지만 중랑장을 거쳐 양무장군으로 승진해 도정후에 봉해졌고, 조비 시대에는 경거장군까지 승진해 있었다.
213년에는 다른 여러 신하와 함께 위공 취임을 청하는 문서를 썼다. 이때 조조 수하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 중에서도 앞자리에 이름을 올리고 있고 그것도 무려 하후돈의 다음 순서로 이름을 올리고 있기 때문에 전기는 남아있지 않지만 당시 영향력이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물론 유훈 같은 인물이 하후돈 앞자리에 들어갔으니 그렇게 볼 수 없다는 의견도 있지만 유훈은 능력은 둘째로 치더라도 젊어서부터 조조와 친분을 가진 유력 가문 출신으로 회남에 대세력을 형성했던 원술이 공중분해되자 그 잔당을 긁어모아 그대로 조조에게 갖다바쳤기에 대단한 총애를 받으며 당시 초법적인 권세를 휘둘렀던 양반이었다. 그와 관련된 두기의 일화도 있다.
명단 앞자리에 이름이 올라간 인사들 중 현대에 그렇게 유명하지 않은 경우에는 집안도 받쳐주고 독자적인 세력이 있어서 이걸 조조에게 바치고 귀부한 무리로 봐야 되는데, 이렇게 볼 경우 왕충은 경조 지역의 최말단 관리였기에 문벌이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더욱이 거지떼나 다름없던 난민 출신인데다 소수의 무리로 조조에게 귀부했기 때문에 실력으로 그 레벨까지 올라간 게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220년에 세워진 비문 상존호비에서도 위나라 주요 신료들의 명단과 서열을 열거하고 있는데, 왕충은 경거장군, 도정후로 총 46명 중 일곱번째의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으며, 장료, 장합, 서황 같은 오자양장 멤버들은 물론 조진, 조휴 같은 황족들보다도 상위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이걸 순전히 개인의 능력으로 봐야 하는지 다른 요소가 있었는지는 안 나와 있기 때문에 무능한 높으신 분들로 볼 여지는 존재한다. 일단 능력에 대한 기록이나 인품이 좋았냐 나빴냐의 기록도 없는데다가 출세를 하는데 능력이 좋아야 한다는 법도 없기 때문에 섣불리 판단하기는 어려우나 능력이 있다면 적어도 그 점이 기록이 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무능한데 줄타기를 잘해서 출세를 했을 가능성도 높다는 것. 게다가 위에는 구품관인법이 있었다는 점도 변수인데 1천의 무리를 거느려 조조에게 귀순했던 점을 감안하면 나름대로 유력자이기도 했으니 그 덕을 봤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어쨌든 크게 출세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조비가 오관중랑장이던 시절, 조조를 수행하는 왕충이 식인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조비는 광대를 시켜 무덤에서 해골 하나를 도굴한다. 그리고 그걸 왕충의 안장에 매달게 해서 웃음거리로 삼아 자신의 싸이코패스적 성격을 여과 없이 과시한다.아빠, 이 녀석 인육먹었데요 인육! 꺄하하, 재밌죠? 재밌죠? 아마 이 두개골도 이 놈이 먹은 걸껄요? 어디서 이 딴 놈이 아버님 옆을 호위해! 꺄하하하하하!
이후에도 별 기록은 없으나 배송지가 인용한 오질별전의 토막 일화로 등장해 224년에는 조비의 총신 오질이 수도로 입조하자 조비는 오질의 이름으로 연회를 열고 상장군 이하 고관들을 모두 참석하도록 했다. 술판이 질척해지자 오질은 광대를 시켜 조진의 비만한 체구를 놀렸는데, 그 놀림이 심하자 조진은 부끄럽고 화가 나 오질에게 따지자 왕충은 조홍과 함께 오질을 거들면서 "오질 장군께서 장군의 비만을 걱정하시는 것이니 장군이 살을 빼셔야겠소.'라고 조진을 조롱한다(...) 이에 조진이 더욱 화를 내며 칼을 뽑아들며 좌중들을 욕했고, 오질도 조진을 욕해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주삭이 나서 말려보려 했지만 오히려 더욱 분위기가 개판이 되어 연회가 끝난다.
오질은 조비의 측근으로 조비의 태자 즉위에도 공헌한 인물인데, 현재에 남아있는 기록은 거의 없지만 조비는 오질을 매우 총애했고 심지어 견씨를 시켜서 접대할 정도로 문자 그대로 파격적인 총애를 받았다. 오질 또한 이를 믿고 방자함이 극심했다고 평가된다.
이때 오질의 관직은 정확하진 않지만 시기상 아마 북중랑장이었을 것이고 반면 조홍은 표기장군, 왕충은 경거장군으로 위나라 전체를 통틀어서도 그보다 높은 자리는 손에 꼽아야 할 정도로 최고위직의 반열인데다 개국공신에 군부의 대원로 격에 해당하는데, 이런 양반들이 고작 북중랑장에 아들뻘 되는 오질이 안하무인으로 상장군을 능멸하는데, 그가 조비의 심복이란 이유로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아부하는 걸 보면 은근히 안쓰러운 대목이다.
더군다나 조홍과 왕충이 나란히 조비한테 찍힌 양반들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더욱 눈물이 날 지경.
2.2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가 서주를 차지할 때 공격하는 것만 나오는데, 조조가 원소를 상대하는 동안 유비가 차주를 죽이고 서주를 차지하자 유대와 함께 시간벌이를 할 목적으로 유비를 공격한다. 제비뽑기를 통해 먼저 공격하는 것으로 결정했지만 바로 관우에게 사로잡히며, 유비한테 잘 대접받고 돌아갔다가 조조한테 죽을 뻔 했다가 공융의 도움으로 살아난다.
2.3 미디어 믹스
삼국지 8~11 |
삼국지 13 |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최하권에 진입할 정도의 쓰레기적 능력치를 지니고 있다.이름부터 충이더니 진짜 충이네 백하팔인까진 아니어도 거의 근접하다.
삼국지 8에서는 주제에 유대군에서 군주 빼고 무력이 가장 높다는 이유로 반동탁 연합군에서 자주 참전하나, 전법이 난격 LV.2뿐이라 별반 활약은 못 한다. 사실 다른 수하인 원유나 교모의 무력이 크게 낮지 않고 전법도 더 좋아 AI의 뻘짓.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45/무력 58/지력 23/정치력 25. 특기로는 분전 하나 가지고 있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42/무력 58/지력 21/정치력 29/매력 20으로 역시나 쓰레기. 회복 특기가 있어 무특기는 면했다.
삼국지 11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39/무력 57/지력 21/정치력 27/매력 49로 역사를 반영하여 조비의 혐오 무장으로 들어가 있다. 의리도 낮은 데다가 조조군 소속이라 쓸모는 없다.
삼국전투기에는 헬싱의 아카드로 나온다. 인육을 먹은 포스 때문에 그런 듯.
3 삼국시대 촉나라와 위나라의 인물
王衝
생몰년도 미상
광한군 사람으로 아문장이 되어 이엄이 강주도독을 지낼 때 그의 휘하에 있었지만 이엄의 미움을 받으면서 처벌될 것이 두려워 위나라로 투항했으며, 위나라에서 악릉태수로 임명했다.
왕충은 위나라로 투항한 후에 맹달에 가서 과거 맹달이 유비를 떠나 조조에게 갔으므로 명공(제갈량)께서 이를 갈면서 처자식을 죽이려 했지만 유비가 허락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간접적으로 제갈량이 맹달의 처자식을 죽이려 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맹달은 이를 믿지 않으면서 제갈량은 다른 사람을 돌아보는 것에 있어서 근본과 끝이 있어 결국 이와 같이 할 수 없다고 하면서 명공(제갈량)에 대해 사모하는 마음도 줄지도 않았다고 한다.- ↑ 당시 인구수 총 30만 가구가 넘었던 경조 일대가 2년 사이에 전멸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