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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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살문과 삼문. 용주사에서만 볼 수 있는 모습.

龍珠寺 드래곤볼
용주사 저녁종이 비암산에 울릴때~

1 개요

경기도 화성시 용주로 136(구 송산동 188)에 위치한 조선 시대의 사찰. 사도세자와 비의 무덤인 융건릉의 근처에 있다. 정조아버지의 넋을 기리기 위해 직접 세운 대표적인 왕실 원찰인 조포사였다. 조계종 소속.

2 역사

본래 이곳은 아무것도 없었으나, 절에서 사격(寺格)을 높이기 위해서 근처에 있었던 갈양사(葛陽寺)라는 절을 이었다라고 말하고 있으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정조사도세자의 무덤을 이장할때 같이 더불어져서 만든 절이다.
갈양사라는 절은 기록을 통해볼때 고려시대(10세기)에 확장되었던것으로 보인다. 이는 '갈양사사적기'라는 기록인데, 문제는 이 기록이 이능화의 조선사찰전서에 남아있는 기록이라 원본을 확인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 고승들이 지방의 사찰을 '산소(山所)'로 정하고 거기에서 말년을 보낸 전통이 여렀있어서 갈양사도 그러한 절로 보인다. 따라서 고려고승인 혜소가 자신이 거처할 장소로 삼아서 내려왔으나 언제서부터인가 도중에 망해서 폐사지가 되었다.

그러던 중 18세기 조선 시대에와서 뒤주에서 죽은 비운의 아버지였던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해서 정조의 명으로 지어지게 된다. 1779년에 정조가 옛날 수원부 읍치(현재 화성태안3지구)를 현재 수원 화성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사도세자의 묘를 새로 조성하여 현륭원(顯隆園)이라 한 뒤 근처 가까운 곳에 있었던 갈양사 터 위에 새 절을 새우기 시작하여 1780년에 공사를 시작하고 마쳤다. 특기할 것은 정조가 직접 명하여 국가공사로 이루어졌으며, 그 비용도 각 궁가와 중앙 및 지방의 관가로부터 시주를 받아 충당하였다. 숭유억불이 기본이었던 조선시대에는 상당히 드문 케이스였던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더욱 특기할 점은, 수원 화성행궁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육순잔치를 크게 베풀고 난 다음날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현재 융건릉)에 재를 지낸것이다. 혜경궁홍씨와 사도세자는 동갑이었으므로, 아버지 생신날 어머니의 육순잔치를 하고, 다음날 무덤에 성묘한것이다. 따라서 이 절에 유명한 문화유산 중에 하나인 대웅전 삼세여래후불탱에는 '자궁(慈宮=왕의 어머니)저하수만세'라는 간기가 있는데, 이는 죽은 아버지의 명복과 살아계신 어머니의 만수무강을 동시에 빈 것이다.

일반적인 절의 경우는 승려들이 시주를 받아 승려장인들이 설계와 시공을 전적으로 담당하여 이루어졌지만, 용주사의 경우는 관아 주도로 비용을 전국에서 모았을 뿐만 아니라 관청을 담당하던 장인과 승려장인이 모두 참여하였다(결국 전국적으로 삥뜯었다는 슬픈이야기...).

3 조포사

조포사(造泡寺)라는 뜻은 사실 두부를 만든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두부를 포(泡)라고 하였으며, 왕릉이나 원에 딸려 제사에 쓰는 두부를 만드는 절을 조포사라고 불렀던 것이다.[1] 즉, 능침사찰을 조포사라고 한다.

이와 같은 조포사에는 신덕왕후 정릉에 딸린 흥천사봉국사, 경국사가 있으며, 성종 선릉에 딸린 봉은사, 세조 광릉의 봉선사, 그리고 이 용주사 등이 있다. 이러한 절들을 위축전, 자복사라고도 했다.

물론 흥선대원군의 삼각산 화계사태조회암사 같이 조포사가 아니더라도 개인적 후원으로 번성했던 왕실원찰도 있었다.

4 가람

불교 탄압이 심했던 조선시대지만, 왕이 세운 조포사였기 때문에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있는 절이다. 그 덕분에 거의 산으로 들어가는 절만 남은 다른 곳과 달리 비교적 평지에 넓게 펼쳐진 절이기도 하다.

비록 회암사처럼 본격적인 궁궐 형식은 아니지만, 그래도 다른 일반적인 절과 다르게 궁궐, 관아 건축의 양식이 섞여있는 절이다.

  • 일주문과 사천왕문 : 여느 절이라면 세속과 절의 경계를 나타내는 일주문이 있어야 하지만, 이 절에는 일주문과 사천왕문이 없었다. 다만 요즘 가면 사천왕문을 볼 수 있는데, 최근에 다시 세워진 것.
  • 홍살문 : 국가에서 효심이 지극한 인물에게나 내렸던 홍살문이 있다. 이 것은 다른 절에는 찾기 힘든 요소로, 사도세자와 정조의 위패를 모신 능침사찰이기 때문이다.
  • 삼문과 돌길 : 홍살문을 지나 만나는 삼문 역시 궁궐양식이다. 좌우에 7칸의 행랑을 지닌 문으로, 문이 세 개가 있다고 해서 삼문이라 부른다. 돌길 역시 다른 절에서 찾아보기 힘은 것으로, 마치 궁궐에 있는 어도를 연상케 한다.
  • 천보루 : 삼문 안쪽의 5층 석탑을 지나면 누각인 천보루가 보인다. 누각 자체는 다른 절에도 있지만, 천보루에는 궁궐 형식이 섞여있다. 목조 기둥 아래에 높은 돌로 만들어진 석조기둥을 볼 수 있다. 이는 경회루 등 궁궐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또한 천보루 좌 우로 행랑이 건설되어 대웅전을 보호하듯이 둘러쳐진 모습은 조선시대의 절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참고로 천보루는 창건 당시에 지어진 건물이지만, 돌기둥 옆의 공간을 막아 방으로 쓰는 것은 최근에 행해진 개조다.
  • 대웅보전 : 그리 크지 않은 건물이지만, 몇가지 모습에서 꽤 높은 격식을 지닌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기둥 밑의 돌인 초석을 자연석이 아니라 다듬어진 장대석을 쓰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것도 법적인 차이가 있었다. 그 외에도 연화무늬 대신 삼태극 등의 무늬를 쓴다던가, 지붕에 작은 치미가 올라가있는 모습은 여느 절과는 이질적인 모습으로, 관아 건축을 담당했던 인력들과 왕의 후원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점이다. 조선 후기 건축답게 공포가 다포식이며, 팔작지붕이다. 편액 좌우로 용이 조각되어 있는 용 조각이 인상깊다.
정조가 아버지를 위해 지은 절답게 장려한 감로탱화[2]가 그려져 있다.

5 가는 방법

지하철 1호선 병점역에서 후문으로 나가 용주사 방면으로 가는 버스를 타면 된다. 대부분 산 속에 틀여박혀 있는 절들에 비해 대중교통과 연결되는 몇 안 되는 절 중 하나.

6 기타

근래에 들어서 효행 박물관 및 효행문화원이라는 템플스테이 건물을 짓고 있다. 용주사 템플스테이는 은근히 도시근처에 있다는 지리적 이점때문에 조계종 템플스테이 수익의 순위권이라고 한다. 절 스님이 사업을 잘 하는듯. 사천왕문을 만드는 등 삽질을 많이 하고 있다. 기존 가람의 특성에 대한 이해 없이 건축물을 신축하여 그 뜻을 훼손한다는 측면에서 곱게 봐줄 수 없는 일. 나름 역사적 가치가 큰 절인데 주변에 자꾸만 콘크리트 건물들이 늘어가는게 보기에 좋지만은 않다. 2012년 1월 현재 본당인 대웅보전이 지난 2011년 집중호우로 기와가 유실되어 보수공사중이었고 2012년 5월 현재 마무리 된 상태.

용주사와 융건릉 사이 6천평의 땅에 한국토지주택공사에서 거대한 아파트 단지를 신축하려고 했다. 2007년에 발주를 시작한 아파트공사는 용주사 전 주지 정호스님과 경기문화연대라는 시민단체가 막았지만, 이분들이 영 보수적마인드로 투쟁한다고 난리쳐서 결국은 새누리성향과 새누리성향이 싸우는 이상한 현상으로 변질되었다. 그리고 이 단체에 수원 화성 오산의 정치적으로 지역주민에게 잘보이려는 분들이 오셨다 가시는 뭐랄까 탁아소느낌으로 변질되어서 결국 이 단체는 진만 다뺴고 나중에 정조대왕문화진흥원으로 이름을 변경하려하였으나.. .결국 그놈이 그놈이지

그리고 구제발굴로 시작된 화성화산동 유적에는 조선시대 정조의 무덤이 이장되기 전의 원래 건릉 자리에 있던 조선왕릉의 재실터와 정자각터가 그대로 있었던것. 더군다나 융건릉은 고려시대 읍치가 있었던 곳이기 때문에 고려시대 건물지부터 통일신라 건물지까지 떼거지로 발굴되었다. 이런곳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아파트를 짓겠다고 하니 이런병신들

2010년까지 이 말도 안되는 짓거리로 시끄러웠고, 2011년에 중단할려고 고려한다는 기사까지는 떴는데 어떻게 되었는지 아시는 분은 추가바람. 결국 짓고 있는 듯 하다. 그만해 이 미친 놈들아 참고로 이미 도로가 나는지 융건릉과 용주사를 잇는 산은 이미 다 파헤쳐져 있다(…). 한국의 개막장 개발근성을 보여주는 한가지 사례가 되었다. 덤으로 2016년 현재 이러한 토지구역사업에 각종 이권단체에 용주사까지 엮이면서 절 주변이 항상 시끄러운 상황.

축구선수 박지성의 부모가 자주 다녔고, 박지성과 여러모로 인연이 깊기도 한 절.

  1. 정약용의 저서 아언각비에는 "두부란 숙유(菽乳)다. 이름은 본래 백아순(白雅馴)인데, 이를 방언이라고 생각해 따로 이름하여 포(泡)라고 하였다. 여러 능원(陵園)에는 각각 승원(僧院)이 있어 여기서 두부를 만들어 바치게 하였으니 이 승원을 조포사(造泡寺)라고 하였다"라고 쓰여있다.
  2. 영가의 극락왕생을 비는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