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합중국 해군 4 원수 | ||||
체스터 니미츠 | 어니스트 킹 | 윌리엄 홀시 | 윌리엄 리히 |
윌리엄 대니얼 리히(William Daniel Leahy)
1875년 5월 6일 ~ 1959년 7월 20일
여자와 어린이들을 죽여서 이길 수 있는 전쟁은 없다. Wars cannot be won by destroying women and children.
1 개요
미합중국 해군의 제독. 미해군 역사상 4명 뿐인 해군원수이다. 태평양 전쟁 당시에 합동참모의장[1]을 지냈다.
2 생애
1875년 5월 6일 아이오와의 햄턴에서 아일랜드계 미국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마이클 리히는 남북전쟁 참전용사 출신 변호사였다. 아버지를 따라 미국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려고 하였으나 대신 미국해군사관학교에 진학했고 1897년에 47명 중 14등으로 졸업했다. 준사관[2]으로 미국-스페인 전쟁에 참전했고 태평양 쪽에서 근무했다. 1899년에 정식으로 소위 임관이 된 후 미국-필리핀 전쟁과 의화단 사건 등에 참전했고 1907년 해사로 돌아왔다. 이때가 첫 육상직이었다.
이 후 행정 보직으로 워싱턴에 근무하던 중 1913년에 해군차관보로 부임한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함께 일하면서 둘은 점차 친구 사이로 발전하게 된다. 이때의 인연으로 리히는 루스벨트의 최측근이 된다. 후에 여러 요직을 역임하면서 오랫동안 루스벨트의 조언가로서 군사적, 전략적 안목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1927년에 제독[3]이 되었고 1937년에 대장으로 진급하였으며 1939년까지 해군참모총장을 지냈다. 1939년에 전역한 뒤 푸에르토리코 총독으로 파견되었고 프랑스에 대사로 파견되기도 했는데 이 때 루즈벨트는 도움이 필요할 때 다시 복직시키겠다며 전폭적인 신뢰를 그에게 전하였다.
결국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이 뒤집어지자 1942년 리히는 다시 현역으로 복귀했고 해군참모총장인 어니스트 킹과 육군참모총장인 조지 마셜, 육군항공대사령관인 헨리 아놀드을 통솔하고 대통령에게 군사적 자문을 할 자리로 신설된 최고사령관 참모장이 되었다. 해군 대장인 리히가 제복군인으로 최고 지위에 오른 이유는 당시 각군의 참모총장들보다도 고참이었고 루스벨트 대통령의 신임도 있었겠지만, 규모와 정치적 영향력이 큰 육군이 통합 직책을 이용하여 해군을 자기들 밑으로 두려는 것 아니냐는 해군의 우려 섞인 반발을 사전에 무마하려는 정치적인 의도도 있었다.[4] 1944년 12월 15일에는 해군원수로 진급했는데 이는 미 해군의 첫 원수였다. 전후 1949년에 합참의장을 오마 브래들리에게 위임했다.
뒷줄 가장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이 리히 제독이다. 앞줄은 왼쪽부터 영국 총리 클레멘트 애틀리(1883-1967)[5], 해리 S. 트루먼, 강철의 대원수고 뒷줄은 리히 본인, 영국 외교장관 어니스트 베빈(Ernest Bevin, 1881-1951)[6], 미국 국무장관 제임스 번즈(James F. Byrnes, 1882-1972), 소련 외교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Вячесла́в Миха́йлович Мо́лотов, 1890-1986)이다. 팔짱 낀 미소 외교장관들에 주목하자
1959년 7월 20일에 사망했다. 그의 업적을 기려 리히급 미사일 순양함 네임쉽에 그의 성이 붙었다.
아들인 윌리엄 해링턴 리히(William Harrington Leahy, 1904-1986)도 미국해군사관학교(1927년 졸업)를 나와서 해군 소장까지 지냈다.
3 평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적인 격동기에 미군의 최선임 자리에 있던 인물이지만 밑에 있었던 장성들이 워낙 역사에 길이 남을 거물들이라 좀 묻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라이트한 밀덕들에게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나 체스터 니미츠, 커티스 르메이 등의 주요 전선 사령관들의 이미지가 더 강렬한지라 이름은 들어봤는데 누구더라...? 하는 공기 수준의 존재감에 그치는 편.
그러나 자세히 파고들고, 루스벨트와 이 시기 미군의 전략 정책에서 리히의 역량은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자문역에 가까운 위치였지만 루스벨트를 움직이는 조언가이자 측근이었으며 동시에 마셜, 킹, 아놀드와 같은 개성이 강한 자기 분야의 최고 지휘관들의 의견을 조율하고 연합군의 작전 구상안을 제시했다. 당시 각군의 참모총장 셋이 사이가 별로 안좋았는데,[7] 마셜과 킹은 각각 작전 주안점이 유럽과 태평양이라 시시때때로 싸웠고, 아놀드와 킹은 폭격 전략을 논의하다가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8] 이런 상황을 조율하며 연합군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이 양반도 뛰어난 리더이자 상당한 먼치킨임을 알 수 있다.- ↑ 당시의 명칭은 달랐다. Chief of Staff to the Commander in Chief로 최고사령관 참모장이란 뜻이다. 그 최고사령관은 당연히 대통령. 오마 브래들리 때 합참의장으로 표현이 확정됐다.
- ↑ 당시에는 바로 해군소위로 임관하지 않고 1-2년 정도 견습사관(준사관)으로 근무한 뒤에 정식으로 임관했다.
- ↑ 당시 미 해군엔 준장계급이 없었다. 대령에서 바로 2성제독(해군 소장)으로 진급하는 식이었다. 때문에 해군 대령이 제독으로 진급하는데 근속기간이 오래걸렸다. 니미츠, 킹, 리히, 헐시 제독도 대령 생활을 거의 10년, 그 이상을 지내고 소장으로 진급했다. 현재의 준장급 제독들이 맡을만한 보직들은 근속년수가 높은 고참 대령들이 맡고 타군의 준장급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고 초임대령과 제독진급이 확정된 대령사이의 짬 차이기간은 매우 넓었다.. 태평양 전쟁이 터지고 해군 군사력과 해군 장병의 T/O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총력전의 영향으로 전쟁 종전 무렵 미 해군의 장병수는 400만명으로 확장되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본래 지원제였던 해군과 해병대도 징병제를 도입하면서 인력을 충원했다.)이것들을 지휘할 제독 T/O도 많아지면서 1943년 미 해군은 준장계급을 신설하고 소장진급까진 아니지만 연륜이 있는 대령들을 준장으로 진급시키기 시작했다. 다만 그 이상의 짬이 되었던 대령 세대는 1944년까지 소장으로 진급했고 그 이후로는 미 해군 대령의 장성진급은 준장부터 시작하게됬다.
- ↑ 전후 미 국방부가 장설될 때도 육방부화를 우려한 해군의 저항 탓에 해군장관 제임스 포레스털을 초대 국방장관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 ↑ 1945년부터 1951년까지 총리. 노동당 소속. 전임자는 윈스턴 처칠이었고 후임자도 처칠이었다.
- ↑ 노동당 소속
- ↑ 특히 킹과 다른 둘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 ↑ 2차 대전 말 미 해군 태평양 함대사령부는 일본의 항구를 봉쇄하기 위해 일본 본토 근해에 기뢰살포 작업을 진행하고자 육군항공대의 폭격기들을 항구 봉쇄로 돌린 적이 있었다. 그러자 당시 일본 각지를 공습하고 있던 폭격기 부대의 사령관 커티스 르메이 장군은
일본을 석기시대로 되돌리려면당연히 도시에 대한 폭격을 더 해야 하지, 항구 봉쇄해서 뭐에 써먹느냐고 툴툴대다가 상관인 아놀드 장군에게 기뢰살포 작업에서 기존 공습작전으로 옮겨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아놀드 장군이 킹 제독과 담판을 지으려 했으나, 킹 제독은 "그럼 해군은 빠질 테니까 육군끼리 잘 해보시든지."라며 배째라 식으로 나갔고 아놀드 장군을 아무 말도 못하게 만들어버렸다. 어찌됐든 이후 태평양 함대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르메이 장군에게 협조해줘서 감사하다는 서신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