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삼국지)

劉熙

1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생몰년도 미상

유정의 아들이자 유복의 손자, 유홍의 형.

254년에 유정이 사망하자 그 작위를 계승했으며, 동생인 유홍이 사마염과 동년배라는 것으로 볼 때 정확한 생년은 알 수 없지만 사마염의 생년으로 추정하면 적어도 236년 이전부터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적벽대전이 일어나기 전날 밤에 조조가 시를 읊다가 유복이 시어 중에 불길한 구절이 있다고 말했다가 창에 찔려죽으면서 졸지에 상을 당하게 되었는데, 이 때 유복의 아들이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했다. 그런데 삼국지연의의 오류로 인해 여기서 유복의 아들이 유정이 아닌 유희로 나오면서 손자가 아들이 되었다.

정소문 삼국지에서는 이 장면에 대해 유희가 유복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라고 지적하면서, 이런 오류를 대할 때마다 작자는 왜 이런 것까지 왜곡했는지 의심스러워진다고 했다. 그리고 유정의 이력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의 대를 이은 아들이 유희라고 했다.

2 후한 말의 황족

생몰년도 미상

212년 9월 21일에 다른 황자들과 함께 왕으로 봉해지면서 유희는 제음왕이 되었으며, 210년에 조비가 천자를 칭하면서 한나라가 멸망시키고 위나라를 건국하자 다른 황자들과 함께 열후로 격하되었다.

2.1 창작물에서

삼국지를 품다에서는 2주년 기념 이벤트의 일일 퀘스트인 귀물을 보는 자에서 등장하는데, 200년에 헌제가 심한 두풍과 심화병에 시달려 도사 육담을 불러 굿을 하도록 해서 몸을 돌보게 하자 조조가 헌제를 찾아갔다가 열흘이나 방문을 거부당해 수상히 여겨 유희를 찾아간다.

유희는 어머니가 궁의 신녀라 신기가 뛰어나고 귀물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녔으며, 유희는 조조가 찾아올 것을 알고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 황궁에서 누군가가 아버지인 헌제를 해치우기 위한 사술을 부린다는 것을 파악해 조조의 지시를 받은 장료와 함께 귀물이 있는 황실의 종묘로 가서 조사하기로 한다.

귀물의 존재에 대해 믿지 않는 장료에게 귀신들린 멧돼지, 귀신들린 곰을 사냥해 귀물의 피를 구해오게 하며, 장료가 귀물의 피를 가져오자 그 피를 장료의 몸에 특별한 술식을 새기는 것으로 심안을 눈뜨게 해서 장료가 귀물을 볼 수 있게 한다. 귀신을 부르는 귀연향을 피워 귀신 홍춘, 귀신 춘앵 등의 귀물을 불러 생전에 궁중의 나인이고 수라간을 지키고 있다가 이무기 화신인 육담이 궁궐에 터를 잡아 쫓겨났다는 사연을 들으며, 한고조가 흰 이무기를 죽였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흰 이무기의 후손이 황실 전복을 노린다고 파악했다.

또한 어보 생황을 사용하면 귀물을 복종시킬 수 있고 육담이 이를 훔쳐내 부하들에게 보물을 지키게 하면서 귀물 우두머리를 물리치면 어보 생황을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며, 장료가 어보 생황을 구하자 유희는 자신이 어보 생황을 부는 동안 장료에게 육담에게 목을 베도록 지시하면서 황궁으로 찾아간다. 황제의 방에 찾아가자 육담이 주문을 외워 헌제의 혼을 빼앗아가려고 했으며, 유희는 장료와 함께 이를 저지하러 가면서 육담이 한고조에게 죽은 흰 이무기의 아들이라는 것을 듣는다.

유희는 어보 생황을 불어 육담을 괴롭게 해 이무기임을 드러내게 하고 장료가 육담의 목을 베어 사라지게 했는데, 헌제는 깨어나서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자 유희는 장료에게 귀물에 관한 일은 자신, 장료, 조조와의 비밀로 하기로 한다.

3 후한 말의 인물

생몰년도 미상

자는 성국(成國) 또는 유희(劉熹).

북해 출신으로 정현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경학에 능통해 관직에 임명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으며, 사섭이 교주를 통치하면서 교주가 살기 좋아지자 유민들이 전란을 피해 남하하는 일이 많았다.

허정, 원휘 등 유명한 학자들도 몰려들 정도였으며, 유희는 헌제 때 교주로 피난을 가서 정병, 설종, 허자 등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기존에 지어진 석명을 보충하고 맹자주 등을 지었으며, 그가 지은 석명은 국어사전으로 글자를 형상에 비유하고 가차해 소리글자를 고증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지은 것들은 모두 망실되었지만 석명에 관한 일부 남아있는 내용들은 중요한 자료로 연구되고 있다.

오나라에서 위소손호의 명으로 감옥에 갇힐 때 옥리를 통해 올린 글에서 유희가 지은 석명에 대해 지적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