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흥신

1 개요

윤흥신 (尹興信, ?~1592년)은 조선 중기의 무관으로 임진왜란 발발 당시 다대포[1] 첨사였다. 본관은 파평 윤씨로 중종 시절 권신으로 알려진 악명높은 윤임[2] 다섯째 아들이다. 아버지가 을사사화숙청될 당시에는 나이가 어려 죽음을 피한 대신에 신분이 노비로 떨어졌지만 선조에 의해 윤임의 명예가 복권된 후 다시 양반의 신분을 회복하자 바로 무과에 응시해 장수가 되었다.

2 임진왜란

부산진 전투 직후 일본군 일부는 동래성으로 향하고 일부는 다대포와 서평포를 공격해왔는데 4월 13일의 첫 번째 공격은 격퇴하여 시간을 벌었으나 익일 4월 14일에 벌어진 전투에서 휘하 병력이 불과 800명밖에 없어서 거의 19,000명에 육박하는 왜군을 상대로 분전 끝에 전사하였다. 다대포진성 전투 항목 참조. 지금의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1동 사무소 옆에 윤흥신을 기리는 '윤공단'이 세워져 지금까지 남아있으며, 동래구충렬사에도 배향되었다.
  1. 지금의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일대
  2. 윤원형과 달리 윤임에 대한 평가는 다소 논란이 있는 편이나 어느 쪽도 '악명'과는 거리가 멀다. 다만 악명과는 별개로 윤임이 정치적으로 현명하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 하는 분위기. 윤임이 좀 더 현명하게 처신했다면 사화는 피할 수 있었다는 의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