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오 2세

라틴어 Iulius II
이탈리아어 Giulio II
영어: Pope Julius II


율리오 2세, 라파엘로 산치오
교황명율리오 2세 (Iulius II)
세속명줄리아노 델라 로베레 (Giuliano della Rovere)
출생지제노바 공화국 알비솔라
사망지교황령 로마
생몰년도1443년 12월 5일 ~ 1513년 2월 21일 (69세)
재위기간1503년 11월 1일 ~ 1513년 2월 21일
문장
역대 교황
215대 비오 3세216대 율리오 2세217대 레오 10세

1 개요

가톨릭교회의 제216대 교황. 가난한 양치기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추기경이던 숙부의 도움으로 신부가 되었으며, 숙부가 교황 식스토 4세로 즉위하자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전임인 비오 3세가 재임 기간을 1달도 못 채우고 사망하는 바람에 뒤 이어 교황이 되었다[1].

2 전사 교황

교황이 되기 전 델라 로베레 추기경이던 시절에 숙부덕을 보지 못하고 찬밥신세였다고 한다. 숙부 식스토 4세는 자신의 누이의 아들들을 선호해서 고종사촌들이 잘나가는걸 지켜만 봐야했다고... 역시 종조부가 교황 갈리스토 3세였던 이었던 로드리고 보르지아 추기경과 대립하는 사이였고, 교황 선출에서도 경쟁했다. 그러나 숙부덕에 수입이 많은 교구와 직위를 차지하고 스페인 추기경들의 몰표를 받은 보르지아 추기경이 당선되고,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되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프랑스로 도망, 이후 프랑스군을 선동하여 교황령을 침공하게 하기도 한다. 이후 알렉산데르 6세프랑스와 협상하고 델라 로베레 추기경과도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자 이를 받아들이지만, 이후 알렉산데르 6세가 죽자 그 아들 체자레 보르지아로 대표되는 보르지아 가문을 박살내는데 온 힘을 쏟아 결국 성공한다.

교황이 된 이후에는 교황령의 힘과 권위를 강화하고 교황령이 주도하는 이탈리아 통일[2]을 위해 계속해서 전쟁을 벌였고, 심지어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기도 하여 '전사 교황'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결국 비극으로 끝나고 만다.

먼저 이탈리아 내의 강대국으로 이탈리아 북동부에 세력을 쌓아올리고 있던 베네치아 공화국을 치워내기 위해 프랑스스페인을 끌어들여 1509년에 캉브레 동맹을 결성. 베네치아의 세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그리고 그 베네치아와의 전쟁에서 크게 활약하여 베네치아 대신 이탈리아 북부의 지배자가 되려는 프랑스를 몰아내기 위해 1510년에 베네치아와 스페인을 끌어들였다[3]. 그리고 그 결과 프랑스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이번에는 스페인이 이탈리아 북부의 지배자가 되려 시도했다.

이번에는 스페인을 몰아내기 위해, 율리오는 1512년에 신성로마제국과 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신성로마제국은 율리오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프랑스가 다시 이탈리아로 세력을 넓혀올 것을 경계할 뿐 스페인과는 단 한 번도 교전을 벌이지 않았는데, 이렇게 된 원인은 희대의 엄친아 카를 5세 때문.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스페인 왕은 사돈간이었고, 때문에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맏손자이자 스페인 왕에게는 외손자인 카를 5세(스페인에서는 카를로스1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위와 스페인 왕위를 모두 물려받아 즉위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은 프랑스가 이탈리아로 다시금 세력을 넓혀올 것만 견제하면 그뿐 자기네들끼리 싸울 이유는 전혀 없었고, 결국 율리오는 끝내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실의에 빠진 채 병사하고 만다[4]. 그리고 율리오가 죽은 지 14년 뒤인 1527년에 카를 5세의 군대가 로마를 약탈, 율리오의 꿈이었던 '교황령이 주도하는 이탈리아 통일' 은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이렇듯 율리오가 외국과 동맹을 맺어 다른 외국을 치워내려 하다가 끝내 외통수에 걸리고 만 것은, 교황령 자체의 힘을 키우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군사력이 미약하던 교황령은 성전(聖戰)을 명분으로 이탈리아 중소도시국가들의 힘을 빌리거나 용병을 고용하거나 했는데, 그런 것들은 프랑스나 스페인 같은 대국과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못했다. 결국 한 나라의 힘을 빌려 다른 나라를 공격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작전을 쓴 것은 좋았지만, 그 '오랑캐' 가운데 하나가 자신을 공격할 때의 대비는 전혀 해놓지 않았던 것[5].

3 예술가 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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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와 절친한 친구였으며, 그밖에도 브라만테와 라파엘로 산치오를 포함한 예술가들도 크게 후원하여 예술을 중흥시키기도 하였다. 라오콘을 사들인 것이 그의 재위 4년째인 1506년이었는데, 이때부터 교황들은 예술품을 본격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1506년은 바티칸 미술관이 시작된 해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특히 숙부 식스토 4세가 지은 바티칸 시스티나 경당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에게 유명한 천정화 천지창조를 그리게 하였으며, 브라만테에게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재건축과 벨베데레 궁전의 건축을, 라파엘로 산치오에게는 자신의 초상화를 비롯한 여러가지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또한 자신의 무덤에 쓸 조각상들을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에게 의뢰하였는데, 그 조각상들이 바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모세 상, '죽어가는 노예' 상, '반항하는 노예' 상들이다. 다만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와의 관계에는 애증도 얽혔기 때문에 자주 바가지를 긁어대었고,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도 반항하다 못해 삐쳐서 고향 피렌체로 도망갔다가 율리우스가 보낸 사람이 어르고 달래서 겨우겨우 로마로 돌아가기도 했다.

4 평가

'르네상스' 라는 말을 학술 용어로 고착시킨 대학자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는, 율리오를 '교황령의 구세주' 라고 평가했다. 사실상의 전임 교황[6] 그런데 부르크하르트는 대학자이긴 하지만 문화사 중에 미술사 전공으로 주전공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이니 예술을 사랑하고 예술가들을 후원한 율리오 2세에게 좋은 평가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율리오와 동시대 인물로 교황령 소속 관료로 근무한 적도 있는 역사가 프란체스코 구이차르디니는, 율리오의 외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치명적인 동맹, 치명적인 무기.' 애초에 16세기에는 프랑스나 신성로마제국은 거대화된 관료 국가가 되어서 이탈리아 중부 손톱만한 영지의 국력인 교황령 자체로는 도저히 상대하거나 조종할 위치는 진작에 지나갔었다.[7]

현재에 와선 르네상스 시대 막장 교황의 대표주자인 알렉산데르 6세보다 더 못한 평가도 많다. 알렉산데르 6세는 개인적인 정욕과 공사 분간이 안된 경우라면 율리오 2세는 교황보다는 세속 군주나 장군이 더 어울릴 사람이라는 것이다. 교황 역사상 유이하게[8] 스스로 갑옷을 입고 정벌하여 세금 안 내는 신자들을 토벌하는 자체가 막장 중에 상막장짓으로 온건한 가톨릭 성향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에게는 사후 갑옷 입은 군인 교황이 천국에서 문전박대 당했다는 익명의 비판극을 발표했고, 종교개혁 시기 개신교 진영에선 전쟁에 미쳐서 피에 굶주린 흡혈귀란 비판까지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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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분열과 개신교 탄생의 원흉이라고 알려진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사전에 본래 있던 성당을 증축하는 선에서 끝낼 계획을 마음에 안 든다며 폐기해 버리고는 아예 처음부터 다시 지으려고 했는데 사실 후임 교황 레오 10세의 사치와 전쟁질로 인한 재정 파탄 문제가 더 컸다. 성 베드로 대성당 재건축은 15세기 초 교황이 다시 로마로 귀환하면서 로마가 심각할 정도로 황폐화되어[9] 로마 재개발(?) 사업으로 교황청은 물론 로마 시의 숙원사업이었기 때문.
  1. 이전 항목에는 비오 3세가 '반 보르자 가문 운동' 을 시작했다고 했지만, 출처가 의심스러운 내용이다. 일단 비오 3세는 재위기간이 1개월 미만이라는 데에서 알 수 있듯 즉위할 때 이미 병이 깊은 몸이었기에 보르자 가문을 어떻게 할 수 있을 턱이 없었으며, 그래서였는지 체사레 보르자의 교회군 총사령관이라는 직위와 로마냐 공작이라는 직위를 그대로 인정해주었다.
  2. 당시 이탈리아는, 여러 도시국가들로 나누어져 약하다는 것을 노린 프랑스, 신성로마제국, 스페인 등이 한참 땅따먹기를 진행중이었다. 이를 서둘러 막기 위해, 이탈리아를 통일하려 한 것.
  3. 이 과정에서, 스페인의 남부 이탈리아 지배(1504년에 정복)를 인정해야만 했다. 이로써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 스페인의 영향력은 급격히 커졌는데, 이는 스페인 출신의 교황 알렉산데르 6세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4. 이전 버전에서는 본 항목이 베네치아와 프랑스의 이탈리아 지배를 막은 '업적을 세웠다' 라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었으나, 그것은 스페인이 북부 이탈리아까지 자신들의 천하로 만들려 하기 이전까지의 이야기.
  5. 이런 면에서 보면, 오늘날에는 흑역사 취급받는 알렉산데르 6세를 비난할 수 없게 된다. 율리오와는 달리 아들 체사레 보르자와 협력하여 로마냐 공국이라는 새로운 국가를 창건하여, '오랑캐가 자신을 공격할 때의 대비' 를 착실히 해나가고 있었기 때문.
  6. 전임 교황인 비오 3세의 치세는 1개월 미만이니까, '사실상' 없는 셈.
  7. 중세 교황권이 세속 군주보다 높던 시절은 황제가 제국 내 정적들인 공작들의 반발을 이용하거나, 황제 가문 호엔슈타우펜 가문이 어이없게 남계 단절되고 명맥이 끊겼을 때나 가능했다. 세속 군주들은 황제만 되었다하면 신앙심이 줄어드는(?) 기적을 보여왔다. 사실 중세 초기엔 동로마 황제와 그의 대리인 라벤나 총독에게 들볶였고 랑고바르드족이니, 고트족이니, 노르만이니 하는 오랑캐(?)들이 교황령과 이탈리아를 노렸기 때문에 세속적인 보호는 황제에게 더 의지하거나 영향력 하에 놓인 기간이 길었음.
  8. 이전에도 교황이 스스로 토벌군을 이끌고 정벌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11세기 노르만인들이 남이탈리아를 침략해서.. 그런데 노르만인들은 가톨릭으로 개종한 상태였다! 남이탈리아에 교황 소유의 장원이 많았기 때문이었는데 전투 결과 사로잡혔지만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9.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이전하면서 로마시 인구가 격감하여 10만 인구중 2만여로 줄었고, 귀환 당시 건물사이로 여우가 굴을 파고 밤중엔 성벽사이로 늑대가 출몰하며 주요 건물들은 거의 허물어져간 상태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