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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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역대 국왕
14대 헌종 왕욱15대 숙종 왕옹16대 예종 왕우
묘호숙종(肅宗)
시호문혜강정명효대왕
(文惠康正明孝大王)
작위(즉위 전)계림공(鷄林公)
능묘영릉(英陵)
왕(王)
희(熙)/옹(顒)
천상(天常)
절일대원절(大元節)
배우자명의왕후(明懿王后)
아버지고려 문종
어머니인예왕후(仁睿王后)
생몰년도음력1054년 7월 28일 ~ 1105년 10월 2일
양력1054년 9월 2일 ~ 1105년 11월 10일 (52세)
재위기간음력1095년 10월 8일 ~ 1105년 10월 2일
양력1095년 11월 7일 ~ 1105년 11월 10일 (10년)

1 소개

고려의 제15대 왕(肅宗, 1054~1105). 고려의 헌종조선단종의 대선배라면[1] 이쪽은 바로 조선의 세조 수양대군의 대선배.[2] 따지고 보면 숙종과 세조 둘의 대선배는 바로 신라에 있다. 바로 신라 41대 국왕인 헌덕왕. 그런데 신라의 헌덕왕은 애장왕제 손으로 직접 죽여 없앴는데 고려의 숙종과 조선의 세조는 조카를 쫓아내기만 했지 제 손으로 직접 죽이지는 않았다. 물론 세조는 나중에 사람을 시켜 조카를 죽이지만... 그러나 역시 영락제에게는 모두 못 미친다. 근데 업적으로만 따지면, 영락제>숙종>세조>헌덕왕. 게다가 헌덕왕 이 인간은 혜공왕 폐위 이후의 상당수의 신라 왕들이 거의 다 그랬듯이 암군 그 자체였다.

세조와 마찬가지로 측근정치를 행했다. 원래 이름은 희(熙)였으나, 요나라의 9대 황제 천조제의 이름과 발음이 같다 하여 천조제 즉위년에 개명하였다.

幼而聰慧 及長 孝敬勤儉 雄毅果斷。五經子史 無不該覽 文宗愛之 嘗曰 後之復興王室者 其在爾乎。

어려서 총명했고, 자라서는 효성스럽고 근검했으며 성격이 굳세고 과단성이 있었다. 오경(五經)과 제자백가서 및 사서를 빠짐없이 두루 공부해 문종이 “장차 왕실을 부흥시킬 사람은 바로 너다.”라며 무척 아꼈다.


고려사》숙종 총평

원래 계림공이었으며 왕자 시절부터 똑똑하고 과단성이 있어 부왕 문종으로부터 항상 "우리 왕실을 책임질 사람은 계림공이다."라고 칭찬을 받으며 자랐다. 반면 조선 세조는 세종대왕께서 수양하며 살라고 진양대군에서 수양대군으로 군호까지 바꾸어 주셨다. 더군다나 동생인 안평대군에게는 세종께서 직접 시호를 내려 주었지만, 수양대군에게는 그러지 않았다. 한 마디로 수양대군은 세종대왕에게 그냥 평범한 왕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당대에 세종대왕의 아들 중에서 세자를 제외하고는 안평대군의 명망이 가장 높았다.

하여튼 문제는 선종이 죽으면서 모든 종친과 만조백관이 그에게 갈 줄 알았던 왕위를 병석에 누운 11살짜리 자기 아들에게 물려준 것.

2 왕위 찬탈

숙부의 몸으로 병약하고 나이 어린 조카인 헌종의 왕위를 강탈했다. 형 순종선종이 연이어 일찍 죽고 선종의 아들인 헌종이 10살에 즉위한다. 숙종은 이 헌종을 폐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는데 그 과정은 헌종 항목 참조.

숙종은 사실 세조와 달리 명분으로는 그다지 꿇리지 않았다. 고려 시대에는 훈요 10조에 따라 형제 상속이 어느정도 일반화 되어있었기에 왕이 후사가 없거나 뒤를 이을 태자가 너무 어리거나 허약하면 인망이 높은 왕족을 다음 후계자로 삼는 일이 빈번했다. 거기다 헌종은 총명했으나 어려서부터 소갈증에 시달리는 허약한 몸이었는지라 병치레가 심해서 과연 왕 노릇을 제대로 할지가 불투명했다. 실제로 헌종은 즉위한 지 1년만에 왕위를 넘기고 얼마 안 가 병이 악화되어 승하한다. 반면 계림공 희는 일찍이 아버지 문종이 아낄 정도로 재주가 출중하고 유능해서 신하들이나 종친들이나 모두 차기 왕위 계승자로 여기고 있었다. 계림공 자신도 능력이 되는 야심가여서 별 어렵지 않게 다음 왕이 되겠거니 하고 기대에 부풀었지만... 웬걸, 형인 선종이 자신을 제치고 병약한 자기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줘버린 것이다. 어째 왕위 찬탈 과정은 수양대군과 비슷한데 당시 처지는 태종 이방원과 비슷하다? 계림공 본인으로서는 이래저래 실망이 크지 않을 수 없었고, 어차피 본인이 야심가인데다 조카인 헌종이 워낙 병약해서 왕위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역시 외척대표로 대권을 노리는 인주 이씨의 수장 이자의와 대립하다가 1095년 결국 그가 반란을 일으키자 선정문에서 살해하고 그 일당들을 제거한다. 결국 두려움에 떨던 헌종이 재위 1년 만에 숙부인 계림공에게 왕위를 넘기면서, 그는 고려 15대 국왕 숙종으로 즉위한다.

다만, 세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상왕이 된 헌종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 뭐 그럴 필요도 없었던 게 헌종이 상왕이 되면서 병이 더욱 악화되어 얼마 안가 승하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육신의 복위 운동 이후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시켜서 유배 보내고 결국 사사까지 시킨 세조와는 달리 숙종은 굳이 조카를 죽이는 수고를 하지 않고 자연스레 왕권을 확립시켰으니 그나마 나았다고 해야 하나.

3 업적

업적도 있어 동생인 대각국사 의천의 주장대로 주화도감을 만들어 화폐인 해동통보, 삼한통보를 생산하고 절도 많이 지어 불교를 융성케 했다.[3] 숙종이 만든 해동통보는 고려 사회에서 많이 사용되어지지 않았다. 화폐가 통용된 건 18C. 시대를 앞서도 너무 앞서나갔다. 또 불교에 대해서는 의천을 통해서 교종을 통합하여 왕권을 강화하려는 시도를 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일반적이다.

1096년 유학자들의 강력한 주장에 숙종은 6촌이내 근친혼을 금지하는 명을 내렸다. 근친혼을 막은 가장 큰 이유는 문벌 귀족들의 혼맥의 난맥상을 막기 위한 의도가 강했다. 유교적인 것은 나중 문제. 당시 신료들이나 백성들의 반응도 '중국풍속 꺼져!'에 가까웠고... 그러나 시행되자 마자 개무시 당한다. 당시 왕이건 신하건 백성이건 "그 딴 중국 풍습을 왜 우리한테 강요하나요??"하면서 무시하는 바람에 사문화되었다. 그렇지만 근친혼에 강한 거부감을 가지는 현재의 관념은 통상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특이한 것은 그의 동생 부여후 왕수(안평대군?)가 세력을 키운다는 둥, 다음 왕위에 오를 준비를 한다는 둥의 소문이 무성하자 그를 역모죄로 잡아 들였다는 것이다.[4] 숙종 자신은 조카를 몰아내고 형의 왕위를 이어받았지만 다음 왕위는 자기의 큰아들 왕우에게 물려주고 싶어했다. 사실 이 때까지도 고려에서는 형제상속이 오히려 더 자연스러웠던 듯 하다. 이 때 형제상속이 자연스럽게 보인데에는 고려 전기의 왕들의 수명이 대체로 짧았다는 점이 컸다. 40을 넘긴 왕들이 많치 않다. 그러다 보니 사후 자식의 나이가 제위를 잇기에 충분치 못한 경우가 많았던 것. 그래도 선종이나 숙종, 더 나아가 예종의 경우를 보면 정작 왕 자신은 형제상속을 별로 내켜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형제보단 지 핏줄이다인 셈. 자세한 경위는 기록에 없지만 왕수가 형제상속을 염두에 두고 나대기라도 했던 모양이다.

또한 이 시기엔 지금의 서울인 남경(南京)[5]으로 수도를 이전하려는 구체적인 움직임이 있기도 했다. 풍수가인 김위제가 국토를 저울로, 남경을 저울추에 비유하며 천도를 주장하였고, 1104년에 궁궐이 준공, 숙종이 직접 남경에 행차하기도 하였으나, 이 때 남경은 서경처럼 지역 세력이라든지 지역 중심지로서의 중요성이 크지 않아 정치적 논의만 거친 채 흐지부지 끝났다. ... 다만 당시 남경개창도감을 설치하여 궁궐터는 조성을 했는데, 그게 현재의 청와대 자리다(!). 글고 300 여년 뒤 이성계가 이 터를 둘러보곤 그 남쪽에 을 지으니 ... . 이 때 찍어 놓은 땅이 고려 멸망 이후 한반도의 중심지가 될 것을 당시 도저히 상상을 못했을 것이다.

숙종은 또한 말년에 고문개, 장홍점, 이궁제, 김자진의 난을 겪기도 한다.또한 재위기간 중에 유독 우박이 많이 내렸고 송충이가 들끓어 개경의 소나무가 많이 피해를 봤다고 한다. 당시의 유학자들은 이를 두고 왕위찬탈에 대한 천벌이라고 했대나 뭐래나.

재위 말기, 여진의 침략에 놀라 그에 대한 대비를 세우고 윤관을 기용해 별무반을 양성, 서경에 나아가 출정을 준비하려 동명왕 사당에 참배하던 중, 병을 얻어 개경으로 환궁하다가 왕성 서문인 장평문에 도착하기 직전에 수레 안에서 죽었다. 사망 당시 52세였는데 수명 또한 대후배인 세조와 똑같다. 흠좀무.

4 평가

조선의 세조처럼 조카를 폐위시키키고 강제로 왕에 오른 점에서(아니, 이쪽이 먼저다!) 도덕적인 면에서는 비난을 받아야 하지만, 능력 하나는 출중했던 왕.

조선 태종과 세조를 비교하며 세조가 훨씬 못하다고 평가받듯이 고려사 좀 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고려 광종이랑 비교 당하기도 한다. 비유하자면 역시 대후배 세조처럼(…) 광종보다 못하다는 평가를 받을만하다는 것. 광종은 피의 개혁을 함으로써 국가 초석을 포석을 쌓았던 반면, 숙종은 측근정치를 하여 외척이나 신권의 권한이 커지게 만들었으며 남경 건설 및 여진 정벌로 백성들을 고단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고려사에는 이 때에 '열 집 중 아홉 집이 비었다'라고 기록했는데, 전부 부역에 동원되거나 심지어는 부역과 징병을 피해 도망친 경우였다. 여기에다 20세기 후반의 고려사 연구자 중에서는 숙종이 시작한 여진 정벌마저 '국내 정치의 난맥을 수습하기 위해 국력을 총동원한 엄청난 삽질'로 혹평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이건 열도에서 많이 본 사례인데?

실제로 숙종 다음대 예종 시기부터, 인천 이씨들이 득세하며 문치주의가 팽배해졌으며 그의 손자인 인종대에 여러가지 혼란이 찾아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숙종이 제위를 찬탈할 때 헌종의 후견인인 이자의와 그 세력들을 제거했다. 이자의는 유명한 이자겸의 사촌으로 경원(인천) 이씨 가문. 당연히 숙종 대에는 이 인천 이씨의 득세가 제동이 걸렸다. 하지만 숙종 사후 3년 뒤 예종이 자신의 두번째 비로 이자겸의 딸을 들이면서 경원 이씨의 전횡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가 된다. 그런데 정작 예종은 또 강성군주라서 이런 전횡이 거의 없었다는 거.

하지만 이런 사실은 부왕 문종대부터 있어왔던 경향이고 여진족의 팽창(여진족이 고려의 변경을 먼저 침)으로 고려의 변경이 위험해 졌으므로 숙종의 탓으로만 볼 수 없다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또 왕권을 강화하는데 있어서도 화폐를 도입하거나 6촌 이내 근친혼을 금지, 동생 의천을 통한 불교 통합 등 왕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였다는 시각도 있다. 무엇보다도 다음왕인 예종은 숙종을 능가할 정도로 강력한 왕권을 자랑했다. 앞서 경원 이씨들이 난립했다고 하는 부분도, 정작 예종대에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다. 정작 백관들이 경원 이씨가 외척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고 했는데, 이걸 무시하고 강행처리할 정도로 예종의 권력은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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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런데 고려의 헌종은 조선의 단종의 대선배보다는 조선의 이방석의 대선배 같아 보인다.
  2. 라고 하지만 그의 처지를 보면 조선의 세조 이유보다는 조선의 태종 이방원의 대선배같다.
  3. 이 부분도 세조랑 같다. 단 세조는 죄의식을 참회하기 위해 불교를 믿었지만, 독실한 신자가 아니었다. 애초부터 세조는 불교를 개인신봉한 경우이며, 이게 단종을 죽인 것과 엮이는지는 애매하다.그리고 조선은 국교가 유교지만, 고려는 숙종의 불교 정책은 고려왕실의 사업을 그대로 계승한 것. (그러니 공통점이라 보기엔...).
  4. 왕수는 귀양을 가게 됐고, 얼마 안가 죽었다. 이후 복권시켜준다.
  5. 한양부에서 남경 승격은 선왕인 문종(고려)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