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트만 코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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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stman Kodak Company
코택용의 코닥과는 다르다!! 코스닥과도!! 코딱지와도!!

1 개요

1892년, 미국에서 창립된 다국적 기업으로 카메라와 같은 영상 제품 및 관련 서비스를 제공한다. 필름아날로그 카메라를 상징하는 기업이다. 카메라의 역사에 기여한 바가 매우 크다. 설립자 조지 이스트만뉴욕 로체스터에서 지냈기 때문에 본사가 거기에 있다. 그러나 디지털 카메라의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2012년 1월 19일 끝내 Chapter 11 파산보호 신청을 했다. 대한민국에는 두산그룹 계열의 두산상사를 통해 들어왔다.

2 역사

2.1 설립

1878년만 해도 사진기는 크기와 무게가 CRT 모니터와 비슷했다. 거기에 화공약품과 유리판같은 별도의 촬영 장비까지 옮기려면 사람 두 셋이 들고 가야 했다. 그 무렵, 뉴욕에 있던 로체스터 은행 서기였던 조지 이스트만은 사진을 찍으려고 하다가 이런 무거운 장비가 필요하다는 걸 듣고 좀 더 간편하게 사진을 찍을 수 없나 하여 손수 사진기술을 배우고 여러 실험을 직접 하면서 무수한 시행착오 끝에 1882년에 필름의 초기 형태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걸 대량으로 만들자면 엄청난 돈이 들기에 여러 사업가들을 만나 설득과 시범을 보이면서 드디어 사업가 헨리 스트롱의 투자를 얻어냈고, 1883년 감광필름을 만들어내면서 상용화하는 데 성공한다. 이걸 대량으로 만들면서 자신의 성인 이스트만이 여러 언어에서 발음하기가 어렵다는 걸 생각하여 여러 논의 끝에 '이스트만 코닥'이라는 이름으로 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덕분에 설립자 이름이 이스트만 코닥이라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2.2 셔터만 누르세요. 그 다음은 저희가 책임집니다!

1887년 세계 최초 휴대형 사진기를 개발하여 이듬해 판매에 들어가는데 좀 더 편하게, 가볍게, 누구라도 마음껏 찍는다는 걸 강조하면서 본격적인 카메라 사업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카메라가 대중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코닥이 개발한 카메라와 필름은 전문가에게서나 호응을 얻었지 대중적으로는 큰 관심을 얻지 못하였다. 때문에 코닥은 당시 이벤트로만 기획된 광고에 고정적인 투자를 결정함으로써 잠재 시장을 빠르게 넓혀갔다. 무엇보다 전문가와 극지에서 활동하는 모험가들의 리뷰를 광고매체에 포함하여 과거 방식으로 사진을 찍던 전문 사진기사들의 이목을 휘어잡는 데 성공하고, 또한 파란 스트립의 원피스를 입은 '코닥 여성'[1]을 광고에 기용함으로써 젊은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 잠재 시장을 개척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카메라의 대중화를 이끌면서 시장에서 우위를 점한 코닥은 이스트만의 꿈이었던 싸고 사진 찍기 편리한 카메라를 판매함으로써 더욱더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나게 되었다. 단순무식한 상자 모양의 코닥 사진기는 당시 일회용 컨셉으로 판매되었는데, 사용자는 카메라를 사서 사진만 줄창 찍고, 필름을 다 쓰면 통째로 코닥으로 보내서 현상인화를 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코닥의 경영 방식은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당시의 코닥이라는 단어는 현재 미국에서 iPodMP3 플레이어 전체 시장을 대표하듯이, 카메라를 가리키는 대명사로 쓰이곤 했었다. 하지만 당시에 많은 이들은 빠른 성장 속에서 독과점의 형태를 이루어낸 코닥과 카메라 시장을 어둡게 생각했는데, 시장에서 우위를 점한 코닥이 독과점을 이용하여 수익을 올릴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카메라 사업을 카메라에 대한 호기심, 흥미로부터 시작한 이스트만은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기계 대량 생산으로 자신의 꿈에 그리던 1달러 카메라, 그리고 이후에 브라우니[2]를 시장에 선보임으로써 카메라 업계에서 다른 회사가 넘볼 수 없는 독보적인 위치가 된다.

코닥이 일회용 카메라나 염가형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은데, 그게 매출액 대부분이었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초기의 주름관이 달린 일안/이안 뷰 카메라 중에는 화질이나 성능에서 쓸만한 것들이 많다. 렌즈도 일회용의 플라스틱 렌즈가 아닌 독일 슈나이더-제나 렌즈를 쓴 것도 있었고. 영화용 카메라도 직접 만들었다. 무엇보다 코닥 사는 무거운 유리 건판이었던 것을 유연한 플라스틱에 젤라틴 감광제를 칠한 필름을 최초로 양산하였고 여러 규격의 표준을 만들어내어 영화 발전에 지대한 공이 있으며, 그로 인해 아카데미 상도 여러 번 탄 회사이다. [1]

2.3 특허와 코닥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성공적인 경영으로 빠르게 성장한 코닥이었지만, 당시 코닥이 고용한 과학자의 수는 고작 10명도 채 안되었다. 1911년 이스트만은 독일의 한 화학 공장을 견학하게 되는데, 이 독일 화학 회사는 700여명의 독일인 엔지니어와 화학자를 고용하고 있음을 확인한 코닥은 크게 충격을 받게 된다. 시장에서 선두를 점하고 있던 코닥이었지만, 코닥의 성공이 상품 개발과 혁신으로부터 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이스트만은 이를 계기로 연구소를 설립하고 지속적인 투자로 상품 개발에 착수한다는 중대한 결정을 내리고[3], 당시 연구소장에게 2가지의 임무를 부여하는데, 첫째는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연구해봐라.'였고 둘째는 '당신의 임무는 사진술의 미래다.'였다. 또한 이스트만은 평생동안 MIT에 기부를 하였는데 1912년 150만 달러어치의 기부를 시작으로, 죽기 직전까지 MIT에만 총 450만 달러를 기부하였다.[4] 이런 이스트만의 기부와 투자는 코닥을 단순한 카메라 필름 회사가 아닌 수많은 특허를 갖춘 견실한 기업으로 만드는 현명한 선택이었고, 코닥은 1세기 동안 특허를 통해서 가장 큰 이익을 남기는 회사 중 하나로 남게 된다.

2.4 코닥의 황금기

한때는 필름을 코닥이라고 부를 정도로 필름의 대명사가 되었던 만큼, 이스트만은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 성공한 사업가였지만 독신자였던 그는 자신을 위해 돈을 쓰기보다 사회에 막대한 기부를 하였고, 회사 직원들에 대한 풍요로운 노동조건[5], 복지에 신경쓰면서 코닥 직원들에게서뿐만이 아닌 사회에서도 대단한 존경을 받는 사업가가 된다.

1932년 코닥의 발전을 이룬 천재 사업가이자 카메라 연구자였던 이스트만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지만, 이는 코닥의 사업에서는 전혀 지장이 되지 않았다. 1930년대 후반에는 더욱 더 진보된 필름을 개발함으로써 또다시 시장을 개척하는 데 성공하는 등 코닥은 계속적으로 발전해나갔다. 비록 1950년대에 이르러서 코닥이라는 카메라 하나가 지배하던 카메라 시장이 카메라 바디, 렌즈, 필름으로 세분화함에 따라 독일의 콘탁스, 라이카, 일본니콘, 펜탁스, 캐논이 등장하게 되면서 카메라 시장에서의 코닥의 입지는 줄어들었지만, 이스트만의 카메라 철학이었던 '싸고 값싸고 편리한 카메라'를 모토로 개발된 인스터매틱 카메라로 시장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코닥은 가장 많은 이익을 올리던 필름 사업에서 착실하게 수입을 올리고 있었고[6], 과거 이스트만의 과감한 투자로 인해 특허 부분에서의 코닥의 독보적인 위치는 모두가 코닥의 앞날을 밝게 예측하는 원인이었다.

1990년대에 이르러서 코닥은 1억 대가 넘는 일회용 카메라를 판매하고, 각종 특허와 디지털 기기를 개발하는 데 성공함에 따라 대내외적으로도 큰 성장을 이루고 미국 25대 기업이 될 정도로 모든 사업가들의 귀감이 되는 기업이 되기까지에 이른다. 이스트만의 도전 정신을 이어받은 코닥은 지속적인 기술에 대한 투자와 각종 기부로 미국 사회에서 가장 선망을 받는 기업이었고 미국 공학도들이 가장 취직하고 싶어하는 꿈의 직장이기도 하였다.

심지어 코닥의 광고문구에서 나온 Kodak moment라는 말이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순간' 이라는 의미의 일반적인 숙어가 되기도 하였다.

2.5 디지털과 코닥

필름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코닥이지만, 사실 최초로 1975년에 디지털 카메라를 만든 것 역시 코닥이었다. 문제는 이를 상용화하지 않았다는 것. 1981년에 내부 보고서를 통해 디지털 카메라가 필름 시장을 위협한다고 판단하여 상용화시키지 않았다. 그리고 1981년, 일본의 소니가 마비카 계열을 공개하며 세계 최초로 디지털 카메라를 상용화시킨다. 결국 언젠가는 도래할 디지털 카메라 시대가 다가오자 선두주자였던 코닥은 후발주자가 되어 고전하게 되었다. 기사

2.6 코닥의 파산

2004년부터 매년 파산설이 흘러나오다가, 2012년 1월 19일 끝내 파산 보호 신청을 했다. 참고기사

필름 그 자체를 상징하는 전설적인 회사가 파산했다는 점에서, 이로써 카메라의 시대는 완전히 디지털로 넘어갔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가 되었다. 또한 디지털 카메라를 발명하고도 상용화하지 않는 중대한 실수 덕분에, 시대의 변화를 과소평가하다가 실패한 사례로써도 기억될 것이다.

다만 미국의 파산은 종류가 몇 가지 있는데, 코닥이 신청한 Chapter 11은 한국에서 생각하는 파산 신청과는 거리가 있고 오히려 회생 절차에 가깝다. 따라서 기업 자체가 망한 건 절대 아니고[7], 정확히는 일반 필름과 디지털 카메라 시장[8]에서 발을 뺐을 뿐 인쇄 출판 업계에서는 계속 거대 기업으로 군림하고 있다. 또한 엄청나게 많은 양의 특허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애플구글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기도 하다. 모토로라? 실제로도 코닥은 파산보호 이후 5억 2500만 달러 어치의 특허를 마이크로소프트, 삼성전자, 구글, 아마존, 애플 등이 출자한 특허 전문 기업에 팔아치웠다.

디지털 시대의 코닥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코닥 센서 특유의 결과물이나, 코닥 브랜드 자체가 어떻게 쓰일 것인지이다. 코닥의 센서 사업부는 트루센스라는 명칭으로 독립했으며, JK이미징이라는 회사[9]는 코닥 브랜드로 컴팩트 카메라와 마이크로 포서드 카메라를 제조하고 있다.

2.7 재기를 노리는 코닥

뒤늦게 지옥 스마트폰 시장에 뛰어들어 영국의 Bullitt 그룹과 합작해 데뷔작인 IM5을 2015년 1분기에 출시했다. 5인치 터치스크린에 LED플래시, 1300만 화소의 카메라를 갖춘 보급형 사양이다. 사진과 연관이 많은 기업답게 기본 카메라 어플에 WIFI를 이용하여 바로 인쇄할 수 있는 기능이 들어가 있으며 얇은 외관에 iOS처럼 최소한의 간편한 UI로 중·장년층을 타깃으로 잡았다. 그러나 반응은 영 시원치 않은 듯하다... 자세한 정보는 IM5 문서 참조.

2016년 가을에는 슈퍼 8 필름을 쓰는 아날로그 시네마 카메라를 출시한다고 한다. # 다만 디지털 시대에 맞게 USB 포트, 외장 마이크 잭, 3.5인치 LCD 등을 지원하고 음성 파일을 저장하기 위한 SD 카드 슬롯도 있다. 더욱이 옛날에 했던 서비스, 즉 셔터만 누르세요. 그 다음은 저희가 책임집니다!를 시행한다. 렌즈 마운트는 C 마운트를 사용한다.

코닥은 현존하는 유일한 영화용 필름 제조사라는 지위를 갖고 있다. 사실 코닥도 다른 업체들처럼 필름 사업을 중단하려고 했으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을 비롯한 할리우드 관계자들이 매년 일정한 양의 필름을 소비해준다는 합의를 하여 간신히 유지에 성공하였다. 이젠 필름이 예전과 같은 명성을 되찾기는 불가능하겠지만 독자적인 스타일 표현을 위한 도구로는 남을 수 있게 되었다.

3 참고항목

가수 폴 매카트니의 부인이었던 故 린다 매카트니가 조지 이스트만의 딸이나 손녀였다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다. 린다의 처녀 시절 성(姓)이 이스트만이기 때문인데, 그녀는 코닥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애당초 린다의 아버지는 원래 성이 엡스타인이었고 (유대인이었다) 나중에 이스트만으로 성을 바꾼 사람이다. 이런 소문이 나돈 게 린다가 사진 작가로 명성을 떨쳤기 때문.

폴 사이먼은 1973년 'Kodachrome'이라는 노래를 발표했다. 35mm 필름에서 유래된 제목이라고. 본격 코닥필름 판촉용 노래 처음 발표됐을 때는 인기를 끌지 못했던 노래지만, 코닥이 1990년에 이 노래를 광고 배경음악으로 쓰기도 했고, 간간히 영화 OST로 쓰기도 했다.

3.1 코닥이 관여한 필름 포맷

3.2 참고항목

  1. 젊음과 자유를 나타내었던 이 코닥 여인은 해외에서 코닥여사, 파란 옷의 여인으로 불리며 일대의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2. 간편한 조작성, 단순하고 멋진 디자인의 카메라로 1년만에 25만 개가 판매될 정도로 성공적인 제품이었다. 이 카메라는 이스트만이 고용한 화학자 브라우넬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3. 이스트만이 세운 연구소는 미국에서 설립된 최초의 상업 연구 단지 중 하나였다.
  4. 이스트만은 다른 미국 대학에도 막대한 기부를 하였지만, MIT가 기부 금액이 가장 컸던건 이스트만이 개인적으로 존경했던 대학이였기 때문.
  5. 코닥은 종신고용의 대명사로 유명한 기업이었다. 초창기에 이스트만이 주식 사업으로 번 수입을 일개 노동자에게 나눠준 일화는 유명한 일화. 그러나 1970-80년대의 미국 경제의 불황과 후지필름이라는 라이벌 기업의 등장으로 고전하던 코닥은 결국 종신고용을 포기했다.
  6. 필름은 카메라 바디와 렌즈와는 다르게 지속적으로 소비할 수밖에 없던 제품이었다. 비록 필름 한개의 값은 싸지만, 소비자는 이를 계속 구입할 수밖에 없었던데다가 인화비용에 대한 지출 역시 컸었던 점을 생각하자.
  7. 점유율과 수익성에서 고전할 뿐이지 특허는 여전히 괴물급으로 갖고 있는 회사이기에 특허만 정리해도 엄청난 현금이 나온다.
  8. 영화 필름 및 종이는 여전히 팔린다.
  9. 중국계로 알려졌으나 본사는 미국에 존재. 과거 GE 브랜드의 디지털 카메라를 제조한 회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