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사


조선의 추존 국왕
목조 이안사익조 이행리도조 이춘환조 이자춘덕종 이장원종 이부진종 이행장종 이선익종 이영
원의 천호(千戶)
신규 책봉이안사이행리
묘호목조(穆祖)
시호인문성목대왕(仁文聖穆大王)
본관전주(全州)
능묘덕릉(德陵)
이(李)
안사(安社)
배우자효공왕후(孝恭王后)
아버지이양무(李陽茂)
어머니이강제(李康濟)의 녀(女)
생몰기간? ~ 1274년

1 소개

조선추존왕이자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다. 묘호는 목조.

전주 이씨 시조 이한의 18대손으로 고려 말기 사람이다. 원래 이한은 신라 시대 사공을 지냈고 그와 부인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이자연은 시중, 손자 이천상은 좌복야를 지냈다. 이천상은 아간을 지낸 이광희를 낳고 이광희는 사도 삼중대광 이입전을 낳고, 이입전 후로 이긍휴, 이염순, 이승삭, 이충경, 이경영, 이충민, 이화, 이진유, 이궁진, 이용부를 거쳐 고려시대 내시집주 이린에 이르렀다. 이린은 고려 중기 무신정권의 초기 권력자 이의방의 동생으로 형이 이루지 못한 임금의 자리는 결국 이의방의 방계 자손인 이성계가 이루게 된다. 이린은 대장군 이양무를 낳고 이양무는 상장군 이강제의 딸 이씨와의 사이에서 이안사를 낳았다.

2 일생

穆祖聞之, 遂徙居江陵道 三陟縣, 民願從而徙者, 百七十餘家

(中略), 適前日山城別監, 新除按廉使, 又將至。
穆祖恐禍及, 挈家浮海, 至東北面宜州 止焉。
民一百七十餘戶亦從之, 東北之民, 多歸心焉。
於是, 高麗以穆祖爲宜州兵馬使, 鎭高原以禦元兵
時雙城以北, 屬于開元路。
元 散吉大王來屯雙城, 謀取鐵嶺以北, 再遣人請穆祖降元, 穆祖不得已率金甫奴等一千餘戶降。
散吉聞于元帝, 元爲立斡東千戶所, 給降金牌, 爲南京等處五千戶所, 首千戶、兼達魯花赤。_太祖實錄, 1 總書
①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가 이 소식을 듣고는, 드디어 강릉도(江陵道)의 삼척현(三陟縣)으로 옮겨 가서 거주하니, 백성들이 자원하여 따라서 이사한 사람이 1백 70여 가(家)나 되었다.
전일의 산성 별감(山城別監)이 새로 안렴사(按廉使)에 임명되어 또 장차 이르려고 하니, 목조는 화(禍)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가족을 거느리고 바다로 배를 타고 동북면(東北面)의 의주(宜州, 곧 덕원(德源)이다)에 이르러 살았는데, 백성 1백 70여 호가 따라갔고, 동북의 백성들이 진심으로 사모하여 좆는 사람이 많았다.
이에, 고려에서는 목조(穆祖)를 의주병마사로 삼아, 고원을 지켜 원나라 군사를 방어하게 하였다.
이때 쌍성(쌍성은 곧 영흥이다) 이북 지방이 개원로에 소속되었고, 원나라 산길 대왕이 와서, 쌍성에 둔 치고 있으면서, 철령 이북 지방을 취하려고 하여 사람을 두 번이나 보내어 목조에게 원나라에게 항복하기를 권하니, 목조는 마지못하여 김보노 등 1천여 호를 거느리고 항복하였다.
② 산길이 이 사실을 원나라 황제에게 알리니, 원나라에서 목조를 위해 알동천호소를 세우고 금패를 내려 주어 남경 등처 오천호소의 수천호로 삼고, 다루가치를 겸하게 하였다. _태조실록, 권 1 총서

원래 이안사는 20대 초반까지 본관인 전주에서 살았다. 이 지역의 한 기생을 좋아했는데 하루는 그 고을 별감이 그 기생을 취했다. 그래서 화가 난 이안사는 별감에게 따졌고 싸움까지 일어났는데[1] 문제는 이게 고을 현감까지 알게 되었다. 현감은 이 문제를 도지사급이었던 안렴사에게 알리는 바람에 이안사는 투옥될 위기에 처했다. 당시는 몽골과의 전란기라 호족들은 스스로 집안과 재산, 인명을 지키기 위해 가병을 거느리고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안렴사는 이 가병 때문에 직접 체포하지 못하고 조정에 구원병을 요청했다. 이를 알게된 이안사는 조정에서 미적거리는 사이에 집을 정리하고 가솔과 가병, 재산을 가지고 강원도 삼척으로 떠났다.

여기까지 끝났으면 좋을련만 전에 싸웠던 그 별감이 여기 안렴사로 임명되어 온다는 소식에 다시 북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번에 정착한 곳은 지금의 함경남도 원산에 해당되는 함길도 의주였다.[2] 이안사는 여기서 나라 군사와 싸워 공을 세우고 조정에서는 의주 병마사에 임명했다.

하지만 막상 병마사가 된 이안사는 고려를 배신했다.민족반역자 이안사가 있는 원산에서 가까이 있는 쌍성(영흥)에 원나라 대군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 부대를 지휘하고 있던 원나라 산길왕은 두 번에 걸쳐 회유했고 이안사는 백성 천여 호를 이끌고 원나라에 투항했다.[3][4] 이 때가 고려 고종 41년, 1252년이었다. 귀순한 이안사는 두만강변의 경흥부 알동에서 살았는데 천호 벼슬을 받고 22년 동안 그 지위를 누리다 원종 15년인 1274년에 죽었다. 나중에 고손자 이성계가 왕이 된 후 그를 목조[5]로 추존했는데 경흥부 알동에서 죽은 이안사의 무덤은 경흥성 남쪽에 마련되었다. 하지만 조선 태종 10년인 1410년에 함흥 북서쪽에 있는 달단동 가평사로 이장되었고 능호는 덕릉(德陵)으로 정해졌다.

목조의 부인 이씨[6]는 효공왕후(孝恭王后)로 추존되었다. 효공왕후는 원래 경흥부에 장사되었다가 태종 때 덕릉과 같은 곳으로 이장되었고 능호는 안릉(安陵)이다. 현재는 덕릉과 안릉의 소재지는 함경남도 영광군이다

3 자식

자식들로는 효공왕후 이씨 사이에서 6남을 보았다.

  • 안천대군(安川大君)[7] 이어선(李於仙)
  • 안원대군(安原大君) 이진(李珍)
  • 안풍대군(安豊大君) 이정(李精)
  • 익조(翼祖) 이행리(李行里)
  • 안창대군(安昌大君) 이매불(李梅拂)
  • 안흥대군(安興大君) 이구수(李球壽)
  1. 근데 사실 그 기생은 관기 즉 관아의 노비였다. 이안사가 건드린게 잘못
  2. 이때 이안사를 따른이들이 170여 호였다고 한다.
  3. 근데 그 증손자인 이자춘은 원을 배신하고 고려를 섬겼고 또 그 아들인 이성계는 알다시피. 이 집안 참 통수가문인듯
  4. 참고로 이 기록의 출처는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권 1 총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5. 정확히는 목조(穆祖) 인문성목대왕(仁文聖穆大王).
  6. 여담이지만 훗날 세종이 이씨가 본관이 달라도 원래는 한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것을 생각했기에 왕비 간택에서 이씨를 제외시켰다. 그래서 조선 유일의 이씨 성을 가진 추존왕비다.
  7. 목조부터 환조까지 추존왕들의 자식들의 군호는 나중에1872년 12월에 조선 고종이 추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