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의방

연립정권의 집권자
고려 18대 의종 / 정권 성립이고무신정권 성립
이의방
이의방
정중부
무신정권의 집권자
무신정권 성립1대 이의방2대 정중부

이의방
李義方, (1121 ~ 1174)
고려무신. 무신정권의 사실상 첫 번째 집권자.

1 개요

고려의 무신. 본관과 출신 모두 전주다. 즉, 전주 이씨로 그의 동생인 이린이성계의 6대조다. 반역자로 규정된 이의방과 혈연관계가 있다는 사실이 걸렸는지, 전주 이씨 족보에는 이의방의 이름이 누락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무신정권의 첫 번째 집권자(실권자)로 본다. 이고가 잡은 권력이 이의방보다 강했던 때가 잠시 있었으나 이고가 권력을 잡았던 기간이 너무 짧았고, 이고가 권력을 잡았던 때는 사실상 이고와 이의방, 정중부 세 명이 서로 눈치보며 견제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1.1 무신정변을 주도하다

1170년 8월에 무신정변 당시 직책은 근위대 하급장교에 해당하는 견룡행수(牽龍行首)였다. 견룡군은 왕을 가장 가까이에서 호위하는 부대로, 로마 제국 근위대 프라이토리아니의 예를 봐도 알수 있지만 이런 근위 부대는 왕실에서 정변을 일으키기 최적의 위치였다는 이야기. 그는 이고, 채원 등과 하급 장교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고, 정중부 등 고위장군들이 온건론을 주장할 때, "문신의 관을 쓴 놈들은 한낱 서리라도 싸그리 죽여야 한다"고 말하면서 문신들을 철저히 색출, 숙청했다.

의종을 폐위한 뒤, 9월에 그의 동생인 익양공 왕호를 명종으로 옹립한 후 응양 용호군 중랑장이 되었다가 곧 대장군 겸 전중감에 올라 정권을 장악해 최초의 무신집정이 되었다.

10월에는 외가의 고향인 금구를 현으로 승격시켰으며, 정중부, 이고와 함께 벽상공신으로 책봉되었다. 1171년 1월에는 자신을 죽이려고 대장군 한순, 장군이었던 한공, 신대예, 사직재, 차중규 등이 모의하자 차중규를 유배보내고 나머지는 죽였다.

1.2 정권 장악

1171년 1월에 모반을 도모하던 이고를 제거하고, 그 직후 4월에 다시 모반을 도모한 채원을 제거했다. 이고와 채원의 반역이 연달아 일어났던 것을 본다면 둘이 이의방과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것으로 추론해 볼 수 있고 이를 통해 천하 최고의 권력자가 된 이의방은 중방(重房)을 강화하여 고위급 무신들을 끌어들이는 유화책을 시도했다.

1.3 의종 시해와 계속되는 반란

1173년 8월에 조동북면병마사 김보당과 살아남은 문신들이 의종의 복위를 내세워 9월에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에 이의방은 군을 동원하여 진압하였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후환을 제거하기 위해 10월에 이의민을 경주로 보내 유폐 되어있던 의종을 척추를 접어 시해하면서 대대적인 역풍을 맞게 된다. 이로 인해 조정 여론 등이 악화되었고 개경 승도의 난, 조위총의 난이 연달아 일어났다. 참고로, 국사를 처음 배우는 사람들이 자주 착각하는 사실인데, 이의방과 이의민은 우연히 이름 비슷할 뿐 형제 관계는 아니다. 애초에 이의방은 전주 이씨, 이의민은 정선 이씨로 본관부터 다르고 출신 배경도 매우 다르다.

1174년 1월에 귀법사의 승려 100명이 성 북문을 침입하자 이를 반격하여 해산시켰으며, 귀법사, 중광사, 홍호사, 홍화사 등 여러 절의 승려들 2천명이 모여서 성문을 공격하자 군사들을 이끌고 이들을 죽이면서 그 절들을 모두 불살라버렸다. 귀법사는 광종, 홍호사는 선종이 창건한 절이다. 이 절들은 개성 부근에 위치한 근왕 사찰로서, 근왕의 의도로 이의방을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말리는 형인 이준의를 죽이려고 했지만 정중부의 만류로 넘어갔다. 여담으로 이때 이준의를 죽이려다가 이준의가 달아나서 실패하자 화를 참지 못했는지 칼로 스스로 자신의 가슴을 찌르고 쓰러졌다고 한다. 사실 정중부 역시 이준의를 체포해 죽이려 했으나 정중부의 부인이 굳이 다른 집 형제 싸움에 간여할 필요는 없다고 만류했고, 정중부가 부인의 말을 받아들여서 이준의는 무사히 넘어갔다. 이 살벌한 형제 싸움은 나중에 둘이 조용히 화해해서 해결했다고 한다. 이후 좌승선이 되면서 딸을 바쳐 태자비로 삼아 사평왕후가 되었다.

1.4 처참한 말로

집권 후 정치적으로 입김이 세졌고, 이후 좌승선이 되면서 딸(훗날 사평왕후)을 왕태자비왕태자(훗날 강종)와 정략결혼까지 시켰다. 1174년 9월에는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보낸 원수 윤인첨이 패하자 서경 사람인 상서 윤인미, 대장군 김덕신, 장군 김덕재 등 여러 사람을 죽였다.

이후 최숙을 먼저 파견하고 직접 출진하였지만 추위로 인해 패배하면서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귀환하였으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12월에 선의문 밖에서 정중부의 아들인 정균의 부하였던 승려 종참에게 암살된다. 그의 가문은 멸문당했고 딸 또한 역적의 자식으로 몰려 태자비에서 쫓겨났다. 어째 우리 역사엔 장보고도 그렇고 이자겸도 그렇고 권신이 딸을 왕가에 시집보내려다 좋은 꼴 당한 인물이 별로 없다.

일설에는 십팔자위왕의 도참설을 신봉하여 왕이 되고자 하였는데 정작 자신은 왕이 되지 못하고 역적으로 죽었지만 그의 동생인 이린이 이의방이 척살당한 후 동북면으로 도망가 전주이씨 집안을 존속시켰고, 결국 이린의 집안에서 태조 이성계가 탄생고려를 무너뜨리면서 예언은 현실이 되었다.

친형인 이준의와 함께 무신정권으로 고려를 망친 죄로 반역열전에 올랐기 때문에 전주 이씨 족보에서 이름이 삭제당했다.

2 집권기에 일어난 반란의 영향

무신정변의 주동자이자 무신정권의 첫번째 집권자이기도 해서 그런지 무신정권 후대의 집권자들과 비교해봐도 비정상적으로 이의방의 집권기간 동안 반란이 많이 일어났다.

평양이 1174년 9월에 일어난 조위총의 반란으로 완전히 초토화되어 묘청의 난 이후 간신히 숨만 붙어있던 서경세력이 산소호흡기를 제거당해 완전히 몰락한 시기도 바로 이때이다. 진압은 정중부 집권기에 되었으나 이미 이 시기에 고려 제2 도읍이라는 타이틀은 없어지고 전쟁터가 되어버렸다. 종교가 국가 정책에 정면으로 클레임을 걸어 집권자를 살해하려 하는 시도를 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의방 집권기 때부터이다.

이의방 집권기에 수많은 반란이 일어나고 진압당해 무신정권에 반대하는 세력들과 이에 동조하는 기존의 구세력들이 세트로 사라지면서 후대의 집권자들은 '민란'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반란을 접하게 되는데, 이는 기존의 반란이 중앙정부에 반감을 가진 지방 핵심 세력에 동조한 지방군대의 군사행동이었다고 정의한다면, 민란의 성격은 이와는 판이하게 다른, 주동자부터 군대를 형성하고 있는 병사들까지 전부 백성들인 형태였다.

진압 과정 또한 달랐는데, 기존의 반란이 주동자를 포함한 핵심 세력만 제거하면 의외로 쉽게 진압되는 형태를 지니는 반면, 민란의 경우에는 핵심 세력을 제거한다고 해서 진압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반란군의 세력이 불어나는 등의 결과를 가져왔다.

단순히 김보당, 조위총 같은 반란 수괴들만 잡아 죽일 궁리만 하면 되었던 이의방의 경우와 달리 함부로 진압했다간 반란 규모가 눈덩이 처럼 커질 수도 있는 민란 진압 방법을 놓고 골머리를 앓았을 후대의 무신정권 집권자 중 누가 그나마 마음이 편했을까?

3 사극 무인시대에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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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에서 방영한 전 사극 무인시대에서는 서인석이 연기를 맡았다. 공홈의 설명에 의하면 "공포정치의 철퇴를 휘두른 고려의 로베스피에르이다". 극중에서는 주무기인 도깨비 방망이 철퇴를 들고 다니면서 숱한 사람들의 머리를 박살냈다. 이 사실은 정도전 제작발표회 당시 출연자인 서인석이 직접 언급하기도 했다(...).

서인석의 연기력이야 두말할 것 없었지만 무인시대의 방영 시작 날짜가 태조 왕건이 종영한지 1년이 채 안 된 시점이었기 때문에 여전히 서인석 하면 견훤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많았다. 무엇보다 이의방 연기에 대해서도 "견훤이랑 똑같다", "견훤이 부활했다" 는 평이 많았다. 이의방이 의종이 폐위된 후 비어있는 용상에 앉아 망상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왠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초반에는 과격한 액션씬이 많다보니 견훤의 모습과 많이 겹치지만 아무래도 황제의 이미지와 그냥 권력을 좀 가진 무신의 이미지가 완전히 똑같을 수는 없기 때문에 이의방 집권기 후반으로 갈수록 견훤과는 다른 자신만의 색깔을 찾기는 한다. 실제로 서인석도 그 견훤 얘기 안 들을려고 많이 노력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부 시청자들이 무인시대 때는 물론 지금까지도 사극에서 서인석만 보면 무조건 견훤 얘기부터 꺼내는 걸 보면 아마 한동안은 견훤 꼬리표를 떼기는 어려울 듯하다. 더구나 태조 왕건 이후 11년이 넘어서 출연한 사극인 대왕의 꿈에서도 견훤 드립이 나올 정도다.

이 드라마의 이의방은 어떠한 인물이다 라고 정의내리기 힘든 캐릭터이다. 물론 후반에 가면서 부정적인 면모가 두드러지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양면성이 상당히 많은 캐릭터이기 때문. 과격하고 저돌적인거 같으면서도 한편으로 무신정변 소장파 중에서 가장 교활하면서도 지혜로운 인물이기도 하며, 무비와 외도를 하면서도 한편으로 뇌물과 벼슬팔이를 배척하는 청렴한 모습을 보이며, 권력에 욕심이 많고, 무비의 자식을 황제로 만들겠다는 야심이 넘치면서도 한편으로 어쩔 수 없이 의형제들을 죽이게 되면서 고뇌하는 등, 긍정적인 모습과 부정적인 모습을 동시에 보여준다.

WANG☆ 光★ 취ㅣ☆. 여→기→ 대렿하였소히따↗

환관 왕광취[1]의 목을 들고 의종에게 찾아가 "폐하, 왕광취를 기다리고 계셨사옵니까?"라면서 말하는 것과 의종에게 왕광취의 목을 던지며 "왕광취, 여기 대령하였소이다!"라고 외치는 장면이 꽤 유명하다.[2] 그 후 삿대질을 하며 내뱉은 황제는 폐위되셨소이다!포스 역시 후덜덜하다. 여러모로 충격적인 장면인 만큼, 명대사로서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다[3]. 하지만 모 드라마로 인해 개그장면으로 전락하였다

처음은 이고, 채원과 함께 황제 의종을 폐위시키고 자주적이고 강한 고려를 만들기 위해 거병했다는 대의를 관철하려 하나, 점차 품었던 대의를 잊고 권력을 탐해가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거병 직후 의종 대신 역량 있는 대령후 왕경을 옹립하려고 하나 이를 실행하지 못하고 익양후를 왕위에 올리게 된다.[4] 초반부에는 상당히 인간적이고 청렴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천민 출신이라며 동료들에게 따돌림 당하는 이의민을 보살펴 주며, 다른 무인들의 부인들과 함께 사치를 부리는 아내를 꾸짖는 등의 모습이 그 예다.

또한 동료이자 쿠테타 주역인 이고, 채원과 달리 매우 냉철하며, 정치적 판단 능력도 어느정도 있는 모습을 보인다. 가령 이고, 채원이 문신들을 모조리 쳐 죽일려고 할때, 강직하기로 유명한 문극겸을 보호해주거나, 의종폐위를 논할때, 정중부가 소장파 무신들을 이용해먹을려고 하자 이의방은 역으로 정중부를 비난을 대신 맞아줄 존재로 이용하고자 하는 등, 말그대로 막가파인 이고, 채원과 달리 앞날을 내다볼 줄 알며, 정중부 못지 않게 교활한 모습도 자주 보인다. 사실상 극초반부 무신 소장파를 지켜낸 존재라고 할 수 있는데, 뭔가 갈등이나 문제가 생기면 대걔 이의방의 냉철한 판단으로 해결했기 때문이다. 또한 정중부 일파가 소장파에게 반역혐의를 뒤집어씌울려고 하자 병사들에게 간지 폭풍이 철철 흐르는 연설을 하여 아군의 사기를 높이고 정중부 측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등, 호걸스런 모습도 자주 보인다.

그러나 나중에는 자신을 믿고 의종을 죽인 이의민을 버리려 하기도 하고 조강지처인 아내는 나몰라라하고 전왕의 간사한 애첩과 수작을 부려 왕위를 찬탈하려 하는[5] 권신의 모습이 그려지기 시작한다. 나중 일이지만 이의민도 애첩에 빠져 조강지처를 나몰라라 하는 모습이 그려지는데 초반부 이의방의 처와 이의민의 처가 당시 무신집안의 어려운 사정 때문에 형님, 아우하며 의지하며 지내는 안습한 모습이 그려진다. 그런데 남편들이 흑화하면 할수록 아내 쪽도 마찬가지여서 이의민이 의종을 죽여 이의방도 궁지에 몰려있는 상황에서는 자신의 남편은 어차피 내 남편은 당신 남편 명령을 따른 것 뿐이니 우리들을 내칠 순 없는 것이다고 하는 이의민의 처에게 이의방의 처는 겉으로는 약도 챙겨주고 잘 대해주지만 속으로는 물귀신처럼 끌어들이는구나하면서 불쾌해한다. 하지만 권력에 타락해 가긴 해도 인간성이 완전히 소멸한게 아니라서 이의방의 정치적 입지에 걸림돌이 될 것이다는 무비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정에 휘둘려 의종을 죽인 이의민을 버리지 못하고 공혜태후가 이의방을 다루기 위한 목줄로 쓰기위해 후첩으로 온 임씨가 정균을 연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나서 임씨를 해방시켜주는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런 양면성이 무인시대의 이의방의 특징이다. 때문인지 이의방이 죽고 측근들도 대부분 죽거나 정중부에게 줄을 설 때도 이의민과 그의 처는 이의방의 남은 가족을 도와주었다.

더욱이 이의방이 타락해가면서 이의방의 특징이자 장점이던 교활함 마저도 퇴색한다. 점차 성격이 독선적으로 변하고 그나마 있는 참모(무비 라던지)의 말도 듣지 않다보니 아군은 별로 없는데 적은 계속해서 들어나는 상황이 벌어진다.

51회에서 퇴장했다. 시신으로의 등장까지 치면 52회. 각색을 거친 장면이기는 하지만 죽을 때는 혼자서 정균의 군사를 수백 명 쳐죽이며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하루 종일 사투를 벌이다가 탈진하여 죽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 드라마에 나온 대부분의 무인 집권자들의 죽음이 상당히 미화 혹은 과장되어 있긴 하지만 이의방은 특히나 드라마틱하게 각색되었다. 그냥 칼 한 번 맞고 죽게 만드는 것은 별 재미가 없어서였는지(...) 극중에서는 정균의 칼에 찔리고도 죽지 않고 도망치며, 정균의 군사들에게 발각되었을 때는 이미 치명상을 입은 몸에 또 병사들의 칼을 여러 번 맞으면서도 혼자서 다 물리친다.이의민 다음의 최강자. 수백 명이 죽고 병사들이 겁을 먹어 접근조차 못하는 상황이 오자 궁수를 불러서 쏴죽이려고까지 했지만 이미 기력을 다 소모하고 누적된 부상으로 이의방은 그대로 주저앉아 사망한다. 피투성이가 된 채 내뱉었던 마지막 대사 "누구도…… 대 고려의 벽상공신의 목을, 가져갈 수 없다."는, 이의방이 마지막까지 자신에 대한 프라이드 혹은 권력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정균의 칼에 찔린 후 도주한 동굴안에서 잠시 눈을 붙이다 꿈속에서 이고에게 난신적자란 비난을 듣고 자신의 행보를 돌아보며 울부짖은 점이나 죽기 전 이고와 채원과 고려 부흥의 결의를 맺을 때 만든 백마털 장식을 여한이 넘치는 눈으로 바라본 것을 보면 적어도 지금의 자신이 잘못되어 있다는 사실은 자각했던 것 같다. 단지 권력에 대한 집착이 더 컸을 뿐.

드라마 내 무력본좌를 뽑자면 이의민이나 두경승 정도를 제외하자면 최상급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인물. 힘은 이의민보다는 딸릴 지언정 무예솜씨가 뛰어나다보니 왠만한 적들은 철퇴로 쉽게 깨부시고 다녔다. 조위총의 아들 쯤은 무기도 안쓰고 그냥 주먹으로 제압해 버릴 정도(아무리 상대가 청소년이라고 했지만 상대는 무예를 익힌데다 칼을 들었다.). 젊은 시절에는 견룡군에 들어가길 거부하는 이의민을 여러번 주먹으로 제압하기도 했다. 이의민의 힘이 강하긴 하지만 무예를 배운적이 없다보니 이의방을 한대도 때리지 못하고 계속 얻어맞기만 했던 것.

작중 이의방만의 특징이 있는데, 싸우기전에 손바닥에 침을 뱉고선 철퇴를 쥔다.
  1. 배우는 유병준.이 분에겐 가장 안습한 연기 캐릭터
  2. 의종이 보현원에서 환궁 한후 반란 주동자인 이고, 이의방, 채원을 제거하라는 혈서를 왕광취에게 전달하여 환관들과 함께 이 사람도 따르겠소! 이 3인방을 회경전에 유인하여 암살하려다 역관광을 당한다. 이의방에게 쇠뇌를 쐈지만 빗나갔고 뒤에서 이의민과 이영진, 조원정이 들이닥쳐 환관들을 썰어 사면초가 상태에 이르자 이의방의 철퇴에 참교육을 받는다.기합 소리와 비명소리가 아주 찰지다 퉷 이야아아아압 퍽! 아악!
  3. 드라마가 끝난지 10년이 넘어서도 구글 같은 일부 포털 사이트에서는 황제라는 말만 쳐도 자동완성 검색어로 뜨며 무인시대를 치면 연관 검색어로도 뜰 정도였다.
  4. 이는 대단히 그럴 듯하고 고증을 살린 묘사이나, 실제로 당시 대령후 경은 의종 11년 의종에게 반역 누명으로 천안부로 귀양 보내진 후 이미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의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무인시대에서는 정중부에 의해 몰래 살해당한 것으로 묘사. 김경응이 대령후 역을 맡았다. 이수광의 동명의 작품에서는 정중부가 옹립하려는데 이의방이 막는 것으로 묘사. 결국 셋째인 익양후 왕호(고려 명종)이 보위에 오르게 된다.
  5. 정확히는 애첩의 아들을 왕위에 오르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