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추존 국왕 | |||||||||
목조 이안사 | 익조 이행리 | 도조 이춘 | 환조 이자춘 | 덕종 이장 | 원종 이부 | 진종 이행 | 장종 이선 | 익종 이영 |
원의 천호(千戶) | |||||
이나해 | ← | 이자춘 | → | 이성계 |
묘호 | 환조(桓祖) | |
시호 | 연무성환대왕(淵武聖桓大王) | |
본관 | 전주(全州) | |
능묘 | 정릉(定陵) | |
성 | 이(李) | |
휘 | 자춘(子春) | |
배우자 | 의혜왕후(懿惠王后) | |
아버지 | 이춘(李椿) | |
어머니 | 경순왕후(敬順王后) | |
생몰기간 | 1315년 ~ 1361년 1월 |
李子春
1315~1361
1 소개
몽골식 이름은 오로사불화(吾魯思不花)이다. 도조와 경순왕후 박씨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이다.
2 일생
1315년에 태어난 이자춘은 형 이자홍이 일찍 죽고 그의 어린 아들이자 조카인 이천계가 너무 어려 천호를 이어받지 못하자 나중에 어른이 되면 돌려주기로 하고 일단 물려받았다. 하지만 이천계가 어른이 되어도 벼슬을 돌려주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천계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곡필로 보인다. 왜냐면은 이자춘이 죽자 자신이 적장자임을 내세워 이성계를 죽이고 벼슬과 재산을 찾으려다 실패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이천계는 이자춘과 이성계보다도 일찍 고려에 투항해서 관직을 얻었지만 함부로 노비를 죽여 살인 혐의로 사형당했다.
원래 자신의 외손자에게 천호 자리를 잇게 하려던 쌍성 총관[1]은 이자춘이 몹시 거슬리게 되었고 이에 쌍성 지역에 있던 백성들을 대상으로 호구 조사를 실시해서 불안하게 만들었다. 왜냐면은 이자춘이 이 지역 고려 사람들을 이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당시 원나라가 안으로는 황위 계승권으로 내분이 일어났고 밖으로는 홍건적이 일어나 안과 밖으로 원나라는 몰락하고 있었다. 당시 고려에서는 공민왕이 즉위해 원나라를 배척하는 정책으로 고려의 자주권을 찾고 잃은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개혁을 실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단 쌍성 총관부를 탈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쌍성 총관과 사이가 좋지 못했던 이자춘은 1355년 개경으로 가서 몰래 왕을 만나 고려에 투항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이에 힘을 얻은 공민왕은 기씨 일족을 제거하고 유인우에게 군대를 주어 쌍성을 공격하도록 했다.
원래 공민왕은 이자춘에게 미리 사람을 보내 소부윤을 내리고 자신의 어대를 증표로 주면서 내응해줄 것을 요청했다. 결국 왕의 요청에 이자춘은 내응했고 유인우의 군대는 결국 쌍성을 무너뜨렸다. 이렇게 함경남도 일대는 99년 만에 고려의 손으로 들어왔고 이자춘은 쌍성 회복의 공으로 대중대부 사복경으로 올라 개경으로 이사했다. 그 뒤로도 군기감 판사, 천우위상장군 등을 지내다가 1360년에는 영록대부 장작감 판사 벼슬로 삭방도[2] 만호 겸 병마사까지 승진했다. 하지만 1361년 지병으로 숨을 거두었고 30여 년 후, 아들 이성계가 왕에 오르자 환조[3]로 추증되었다. 그가 죽자 개경 사람들은 이제 동북면에는 사람이 없다...라고 했지만 그 아들은...[4] 그외에 이화나 이지란도 있었다.
환조에게는 3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첫 부인은 화주, 즉 영흥의 천호였던 최한기의 딸 최씨로 나중에 의혜왕후(懿惠王后)로 추존되었다. 둘째 부인은 이자춘의 여종 출신이었던 이씨로 이름은 내은장이었다. 그리고 셋째 부인은 역시 여종 출신인 김씨로 이름은 고음가였다. 다만 김씨는 나중에 정빈(定嬪)으로 추증되어 정빈 김씨라고 부른다. 그는 함흥 동쪽 귀주동에 있는 정릉(定陵)에 묻혔고 그의 부인 의혜왕후 최씨도 정릉과 같은 산에 묻혔는데 능호는 화릉(和陵)이다.
야사에 따르면 이성계가 쓰던 명검인 전어도(傳御刀)를 준 사람으로 나온다. 이 검은 그가 조상 무덤을 옮기다 발굴해낸 것이라고 하는데, 이방원이 제작한 복제품이 실유물로 남아있다. 150CM짜리 괴물검. 이성계는 용의 후손이라고 병장기가 안통해서 못죽이던 우왕을 이 검으로 손수 베어죽이고 그 뒤 우왕이 가지고 있던 사진참사검이 저주를 내려 이성계의 수하들이 피를 토하며 죽어가자 무학의 조언에 따라 사진참사검 옆에 이 검을 꽃아 저주를 막았고, 두 칼은 3일 밤낮으로 싸우며 울다가 전어도는 박살나고 사진참사검은 금이 가 동귀어진했고 이것들을 무학 대사가 거두어 갔다는 야사가 있다.
3 자식
- 왕비: 의혜왕후 최씨
-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
- 정화공주(貞和公主) 이씨 -삼사좌사(三司左使) 용원부원군(龍原府院君) 조인벽(趙仁璧)[5]에게 출가
- 후궁: 이씨
- 완풍대군(完豊大君) 이원계(李元桂) - 이성계의 이복 형. 일단 출신상으론 후궁 출신으로 서자기 때문에 '대군'이 아니라 '군'으로 추증받아야 하지만 예외인 경우이다. 다만 고려시대 땐 다처제가 가능하기도 했고, 이름도 동생인 이성계나 사촌인 이천계와 같은 계자 돌림으로 보아 서자 취급은 아니었던듯 하다. 당시 고려시대 땐 어머니의 혈통이나 권력에 따라 후계가 결정되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천호 집안인 이성계가 후계가 된듯하며 나중엔 고려에서 벼슬을 하기도 했다. 이성계의 형 답게 무장으로써 능력도 뛰어나 왜구를 무찌르는등 활약을 했다. 하지만 위화도 회군 이후 고려쪽에 충의를 가졌는지 고려를 무너뜨리려는 이성계와는 길이 갈려 결국 자살 하였다. 다만 형제간에 우애는 좋았다고 하며 자기 아들들에겐 (고려의 신하인)자신과 상황이 다르니 숙부인 이성계를 도와주라고 했다.
- 후궁 : 정빈 김씨(定嬪 金氏) - 본래는 이자춘의 여종. 이자춘이 죽자 이성계는 그녀를 개경으로 데려와 극진히 모셨으며 심지어는 그녀의 노비문서를 불태워 버리기까지 했다.
4 대중매체
- MBC 신돈에서 배우 전병옥이 연기하였다. 기철 일파의 농간에 넘어가는 조소생과는 달리, 고려의 정세를 한 눈에 파악하는 현명한 모습을 보여줬다. 죽기 전 이성계한테 “오로지 우리 가문이 살 길은 고려에 충성하는 것 뿐.”이란 유언을 남기면서 죽었다.
- SBS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단 1회 뿐이지만 원로배우 이순재가 특별출연하여 엄청난 존재감을 뿜어낸다.
그런데 이 때 이자춘은 잘해야 40대 초반이었다. 그야말로 엄청난 노안...조소생의 난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아들 이성계에게 대의와 가문의 미래를 위해 조소생을 배신하고 고려를 위해 싸울 것을 주장하여, 결과적으로 이성계가 조소생을 배신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게 나온다.
- ↑ 참고로 이 사람은 조광조의 가문인 한양 조씨이다. 천호 벼슬 문제로 이성계 집안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어찌어찌해서 방계후손 중 하나가 환조를 돕게되고 그 와중에 그 사람의 후손만 대가 이어지게 되면서 개국공신 집안이 된다.
- ↑ 지금의 강원도 북부 7군 지역
- ↑ 환조(桓祖) 연무성환대왕(淵武聖桓大王)
- ↑ 부친이 사망한 해인 1361년에는 아직 20대의 애송이에 불과했지만 그 해 가문의 사병과 함께 개경을 침공한 홍건적을 털어 버리고 다음 해엔 고려의 변방을 집적대던 원나라 장수 나하추를 털어 버렸다.
- ↑ 판도판서 조돈의 아들 조인벽은 의정부 찬성사로 초대 쌍성 총관을 지낸 조휘의 증손자이다. 다만 아버지가 방계 후손이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총관 자리는 잇지 못했다. 나중에 조선 개국공신이 되었고 그의 아들 조온도 출세했다. 쌍성 총관의 직계 후손들은 조선이 건국되기 전의 혼란기 때문에 대가 끊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