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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興寅君
1815 ~ 1882

조선의 역대 영의정
이유원이최응서당보

1 소개

조선 후기의 문신(文臣)이자 왕족. 남연군의 네 아들 중 셋째아들로, 본명은 이최응(李最應). 호는 산향(山響)이며 시호(諡號)는 충익(忠翼).

2 일생

동생인 흥선 대원군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어쨌든 친형제라서 상당한 권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865년(고종 2년)에 둘째 조카인 고종이 왕좌에 올랐던 시절 동생인 흥선 대원군이 주도하였던 경복궁 중건 때 영건도감제조를 지냈다.

흥선 대원군이 문호개방 및 통상수호조약에 반대하자 문호개방 및 통상수호조약을 지지하면서 동생과 대립했다. 결국 유림들의 반대로 사직했는데, 이 때부터 흥선 대원군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이후 조카며느리인 명성황후와 친밀해졌고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잃는데 도움을 줬다. 1873년 동생이 실권을 잃자 명성황후의 도움으로 호위대장,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라 고종의 국사(國事) 보좌를 맡았다. 1880년 통리기무아문의 신설로 총리대신에 임명되었으나 다음 해에 유림들의 반대로 물러나 영돈녕부사가 되었다.
1882년 잠시 경기도 광주부유수로 임명되었다가 다시 영돈녕부사가 되었다.

동년에 임오군란이 일어나 동생인 흥선 대원군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던 구식 군대 군인들에 의해 명성황후 지지자 및 문호개방 주동자라는 이유로 살해되었다.

매천야록은 흥인군의 최후에 대해서도 상당히 처참하게 적어놓고 있는데, 임오군란 때 병사들이 집을 둘러싸자 도망가려고 담장을 타 넘다가 떨어져 그 곳이 터져 비참하게 최후를 맞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황현이 어지간히 이 사람을 싫어했던 모양. 흠좀무

슬하에 완영군 이재긍이라는 아들을 하나 두었는데, 그는 후사없이 25살이란 나이에 요절했다. 그렇게 절손될 뻔했지만 먼 방계[1]의 손자 뻘인 아이를 이재긍의 아들로 입양시켜 대는 이어졌다. 문제는 그 사람이그 유명한 을사오적 멤버 이지용(...).

3 기록에서

그 대원군의 형제임에도 평가는 당시나 지금이나 영 좋지 못하다. 당장 생전부터 평이 안 좋음을 알 수 있는게, 임오군란 당시 구식 군인들이 그렇게 추종해 마지않던 대원군의 형제였음에도 타겟이 되었다는 것부터 대원군의 형이라는 쉴드도 안먹힐 정도로 평이 나빴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나마 대원군도 천하의 개쌍놈이였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대원군은 실책만큼이나 성과도 분명하다보니 흥인군만 비교되어 안습해진다. 그래도 그냥 개인이 무능하다는 정도에서 끝나면 좀 낫겠지만, 그가 속한 민씨정권도 평이 좋지 않고, 게다가 후손놈이 역사에 길이 남을 희대의 병크를 저지른 탓에...

매천야록에 의하면 영의정을 지낼 때 일본과의 조약을 맺을 것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누군가가 "일본과 화해하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옳다"라고 했는데 또 누군가가 "아닙니다. 왜놈들과 싸워야 합니다"라는 의견에도 "옳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싸웠다가 지면 어쩔 건데요?"라고 반문하자 또 "옳다"라고 했고, 또 다른 사람이 "싸워도 이기지 못하면 그 때 가서 화해하죠"라고 하자 또 "옳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결국 그 회의는 여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끝장나고 말았는데, 이 이야기가 도성에 퍼진 이후 ㅠㅠ정승유유정승(唯唯政丞)[2]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조선 최장재임 영의정의 진정한 후계자. 한반도의 역사상 첫번째 예스맨

그리고 물고기 어(魚)와 노나라 노(魯)자를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무식해서 과거시험을 볼 때 시험관으로 임명되었음에도 뭐가 잘 되었고 뭐가 잘못된 건지 구별을 못해서 운이 좋으면 붙었고 운 없으면 떨어졌다고 한다. 흥인군이 시험관으로 임명되었다는 정보가 퍼지면 응시생 중 문장 솜씨가 부족한 사람들은 야! 신난다~를 외쳤다고 한다. 대원군은 형이 욕심만 많고 이렇게 무식했기 때문에 집권 전부터 형을 대놓고 무시했다고 한다. 하여튼 매천야록에 기록된 흥인군은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

다만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매천야록의 기록처럼 아주 멍청한 사람으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종친의 좌장격 인물로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적도 있었다는 사실을 소개하고 있고, 대원군에게 불만을 가지고 조카인 고종과 협력하며 대원군이 실각된 후 '유유정승'이라 불린 매천야록의 기록과는 달리 고종이 친정하는 조정의 중심인물로서 국정 현안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분명하게 피력하는 인물로 나온다. 임오군란 때 병사들에게 맞아죽는 최후는 같다. 여기서의 묘사가 실록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실제 흥인군은 그렇게까지 사람 자체가 우둔했다기보다는 아무래도 서화에도 능한 교양인이었던 동생에 비해 교양이 부족했던 면이 매천야록 등의 야사에서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흥인군 역시 철종 때에는 동생과 함께 종친이 본받아야 할 모범적인 인물로 칭송받았다는 기록이 있다.[3]

이두호 화백은 만화에서 더 꼴사납게 끔살된 거로 그렸다. 병사들이 집으로 돌격할 때 보물을 가득 넣은 곳간 열쇠를 챙기려다 병사들에게 걸려 결국....

4 미디어에서

KBS명성황후에서는 사극의 사망전대로 유명한 이영후가 이 역을 맡았는데, 개념을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린 발언을 생각 없이 하며 목소리만 크고 어리숙한 인물로 등장한다. 우스꽝스럽게 그려져 이 드라마에서 개그 캐릭터 기믹을 맡았다. 특히 신정왕후와 철인왕후 면전에서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를 까는(...) 장면은 보는 사람이 손발퇴갤할 정도. 보다 못한 흥선대원군이 직접 "형님!"이라며 버럭한다. 그러자 오히려 너무 분하고 억울해서 그랬다고 눈물을 짠다. 이외에도 눈치 없거나 생각 없는 언행으로 동생에게 욕 먹는 장면이나 대놓고 동생이 무시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임오군란 때 폭동을 일으킨 군인들이 대궐로 습격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대궐을 빠져나와 집으로 도망갔으나, 막상 군인들이 대궐로 가기 전에 흥인군의 집부터 습격하는 바람에(...) 그 뒤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1. 400년을 거슬러 올라가(...) 세종대왕의 적5남 광평대군의 가계에서 골랐다.
  2. '유유(唯唯)'는 "예, 예"라고 대답하는 소리를 나타내는 한자어다.
  3. "엎드려 원하건대, 환첩(宦妾)은 한결같이 우리 조종의 법으로 단속하여 제어하고, 종친(宗親)의 기거(起居)는 한결같이 남연군·흥인군·흥선군을 본받도록 하소서." - 철종실록, 철종 3년 7월 10일. 부교리 김영수의 상소에서. 남연군과 그 아들들인 흥인군 형제는 다른 종친들에 비해 신중한 처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