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인터뷰에 의하면 홍익대학교 서양화과 출신이지만 중퇴했다고 한다. 한때 중퇴라고 안 밝히고 슬그머니 홍대 서양화과 출신이라고 넘겼으나 2000년대 초반에 유명인사 학력위조가 연달아 밝혀지며 파장이 커지자 은근슬쩍 중퇴 사실을 밝혔다.
원래 만화가가 될 생각이 없었다. 화가가 되고 싶었으며 만화가라는 직업 자체를 환쟁이라고 낮잡아봤다. 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서 일본 만화를 베껴그리는 번안 만화가가 된다. 당시엔 저작권 개념도 전무했고, 외국문화상품이 거의 정식수입되지 못하는 '문화쇄국주의'시대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원작 만화를 그대로 복제해서 팔면 작품에서 드러나는 왜색(일본느낌) 때문에 검열에 걸린다(저작권은 부차적이다. 소소한 문제...). 그래서 배경이나 인물을 한국인으로 고쳐서 고대로 베껴그린다. 물론 작화수준은 일본 원작보다 훨씬 조악해진다.
본격적으로 만화가 생활을 시작한 것은 69년도 소년중앙에서 '투명인간'을 연재하면서 부터. 꿈은 화가였지만 밥벌이의 일환으로 만화계에 입문한 상황이다 보니 상술했다시피 데뷔 초부터 스스로가 만화가라는 것을 탐탁치 않아했다고 한다, 게다가 만화가란 인식이 지금보다 훨씬 안좋았던 때라 자격지심이 매우 심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술자리에서 동창이 '너 요즘 돈 잘 번다면서?' 라고 하자 술김에 "그래, 나 만화그린다 어쩔래?" 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술자리의 친구들은 벙졌다고.
1969년 소년 중앙이 나오면서 일거리가 늘었다. 당시 유명 소설이나 영화를 만화하 하거나, 상술했듯이 일본 만화를 수입해서 그걸 현지화(?) 시키는 게 유행했는데 이두호는 일본 만화를 우리식으로 번안하는 능력이 뛰어났던 지라 만화출판사들이 '이두호만 있어도 만화 잡지 한 권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고[1].
이후 스스로 만화가라는 자각과 자부심도 없는데다가 화가라는 꿈을 버릴 수 없었던 상태에서 만화를 계속 그리는 것은 정신적으로 힘든 일이었다. 결국 80년대 초 같이 화실을 쓰던 동료작가 한희작에게 2년간 '대필'을 해줄 것은 부탁했다고 한다. 전면 대필은 아니고 스토리와 중요한 인물 얼굴은 이두호 본인이 하기는 했지만 사실 상 그 2년간은 '만화를 놓은' 시기였다. 그 2 여년간 소원대로 유화를 맘껏 그렸지만 전혀 성과가 없었고 결국 생계를 위해서 다시 만화를 그린다.
여담으로, 그 2년 동안 자기가 그린 유화 작품 중에 거대한 캔버스에 가시철조망만 빼곡히 그린 걸 가장 자랑스러워한다고 전한다. 이곳저곳에서, 특히 후배 만화가들에게 은근 자랑스럽게 아직도 "그건 내가 더이상 앞으로 나아갈 길이 없다, 는 상징을 담은 그림이었다" 라고 설명하곤 한다고. 하지만 그정도 상징과 표현이라면 화가로 나서기에는 턱도 없는 역량이다. 이미 약간 앞선 시기의 피카소, 잭슨 폴락, 마르셸 뒤샹 같은 네임드의 표현 수준과 비교해볼 것도 없다. 웬만한 화가 습작생에게도 안 먹힐 자랑이다. 쉽게 말하면, 지도를 그리라니까 괴발새발 약도를 그리는 수준. 80년대 초반이면 백남준이 1984년에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란 비디오아트 작품으로 세계최초 위성생방송과 인터랙티브 공연을 선보인 때다. 어줍잖은 사물 한두 가지 붓질해놓고 거창한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시대는 지나간 셈.
만화가로서의 자격지심과 화가로서의 자부심읭?? 화가야?? 때문에라도 성인물 같은 건 가급적 손을 대지 않으려고 했단다. 그러나, 성인대상 사극은 주간지에 연재한 게 많다. 다만 윤승운(항목나오듯이 성인물을 안 그렸다고 알려졌으나 그도 성인 사극물을 그린 바 있다.)같은 경우도 이렇게 알려졌지만 적어도 윤승운은 자부심이니 뭐니 그렇게 말한 적은 없다.
2 비판
상술했다시피, 표절과 저작권침해로 가득한 경력이 당연히 비판대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백'이나 '한국 만화의 거장'이란 타이틀을 얼렁뚱땅 챙겨버린 점 때문에 진짜 문화계를 아는 사람들의 복창이 터져나가고 있다. 요즘 세대는 이두호를 전혀 모르긴 하지만 문제는 '거장'이 함부로 남용되면 문화계 전체 수준 자체가 함몰된다는 점.
한 가지만 조금 기술해보자면, 데뷔 초기의 타이거 마스크의 표절작이 있다[2]. 후배만화가 박무직이 대표적인 비판자다. 표절은 100% 순금 순도로 맞다. 이두호 본인도 표절은 인정하면서도 "그땐 너도나도 그런 시기였다."라는 말로 무마하며 한번도 예술가로서의 반성과 참회는 없었다. 물론 당시엔 일본의 문화가 잘 안 알려졌기에 Y세대 제갈공두나 태권V등 많은 표절작들이 있었기에 저 말이 틀린건 아니다 그렇지만 표절행위가 정당화 되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세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로 지내면서 은연히 교수파워를 받은 지라, 20~30대 일부 생각없는 제자들홍위병이 뭣도 모르고 "우리 선생님이 그땐 다들 베꼈댔어요. 버르장머리 없게시리, 어르신 화백님 용안 앞에서!" 투로 말하고 표절 과거마저 비호받기도 한다. 표절을 신랄하게 지적·비판했던 박무직도 무참히 까이다가[3] 일본 만화판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박무직은 일본에서 자신이 비난하던 한국만화계 병폐인 문하생 착취[4]를 그대로 따라하는 통에 당시 이두호를 옹호하던 사람들에게 결국 박무직도 선배들을 비난할 자격이 못됐다고 신나게 욕먹었다.
70년대 새소년에서는 6백만불의 사나이를 그리기도 했다. 내용은 당시 전세계적으로 인기가 들끓던 동명 제목의 미드와는 무관하다. 내용은 무관하면서 설정은 멋대로 스토리에 차용했다(드라마의 무기 개발 박사가 한국인 여자 얄숙이를 입양했다는 둥...). 결국 저작권 문제때문에 클로버문고 단행본은 얄숙이와 오스틴 대령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왔다(...)
또한 원더우먼도 월간 잡지에 연재했다. 당시 한국에서 방영되고 있던 실사 드라마 원더우먼의 인기에 편승한 해적판 만화였다(...). 그밖에 미국 드라마 뿌리나 영화 벤허를 만화로 그렸던 바 있다(....). 몇몇 경우는 창작으로 넣었다해도 이것도 결국은 표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이두호도 위에 나오듯이 그땐 그랬다고 변명이나 하지만 같은 만화가들도 무수하게 그랬고 심지어 2000년 초반까지도 해외 영화나 여러가질 만화화하다보니 이런 비난에 대하여 입다문다. 이런 점은 한국만화게도 덩달아 비난받을 점이다. 허영만, 이현세, 고유성,장태산 등 많은 만화가들이 이런 흑역사가 있다.
3 반론(?)
당시 문화예술계 전반에서는 저작권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외국의 선진 문물을 우리식으로 차용해 재제작하는 것도 하나의 작업 방식으로 인정하고 있었고누가 어떻게 뭘 인정해? 그냥 돈이 되니까 쉬쉬한 거지. 반성할 건 변명없이 반성하자 만화의 경우 다른 것들 보다 쉽게 볼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많이 이용했다. 예를 들어 소설 같은 것들을 만화로 만들었고 영화를 수입한 회사가 아예 이걸 만화로 그려달라고 하기도 했다. 일종의 홍보 및 전파제 역할을 한 셈이다. 또한 성인층을 대상으로 하는 영화나 드라마 같은 것을 아동용으로 바꿀 때도 즐겨 써먹었다.
당시 출판사는 파워가 컸기 때문에 만화가가 말 안들으면 바로 만화계에서 퇴출이었다. 그려라 하면 그려야 하는 때였다. 타이거마스크의 경우 하기 싫다고 뻗대다가 결국 그리긴 했는데 이름은 안싣는 조건으로 그렸지만 이름을 기재 안하면 출판 등록이 안되는지라 출판사에서 마음대로 이두호 이름을 실었다고 한다. 자꾸 이래놓고 돈받았다 뭐다 욕하지만 그 시절, 만화가에게 주던 돈은 형편없었다는 것이나 기억하자. 70년대 , 길게 말할 거 없이 합동출판사를 보면 안다. 무협만화로 유명한 고 이재학이 여기서 억지로 일본 순정만화를 베껴 그리게 강압하여 먹고 살고자 어거지로 그려야했던 것이라든지 둘리로 유명하신 김수정 화백도 여기서 표절만화를 강압하여 그리다가 차라리 만화가 안한다며 세일즈맨에서 애니 하청일이라든지 여러 직장을 오고가야 했듯이 이런 거 못그린다고 하면 만화계를 떠나야 하던 시대이다. 이런 표절을 억지로 강요하고 마지못해 그려도 주던 돈만 해도 아주 형편없어서 합동에서 이런 표절 만화가 생활을 하던 김수정이 분노하여 그만두고 잠깐 세일즈맨 생활을 했는데 만화책 1권을 그려 받던 돈의 4배는 이 세일즈맨 기본급으로 줬다고 할 정도였다.
더불어 이두호 말고도 위에 서술한대로 만화계에서 과거 표절에 대하여 입다무는 것도 문제이다. 장태산만 해도 비록 80년대 중순 연재작이라고 해도 매드 맥스를 고대로 베낀(주인공 옷차림이나 여러가지로 트레이싱 가까울 정도로!) 가디언 엔젤 2088을 90년대에까지 재연재했다. 그쯤되면 비디오나 공중파로 이 영화를 봐서 어느 걸 베꼈는지 많이 알게된 시절임에도. 이전 글에서 나오듯이 이두호와 비교된다며 나오던 김형배는 태권브이 표절에 대하여 후회한다는 거였지, 정작 그도 닥터 후라든지 인디아나 존스를 그대로 베껴 만화로 연재하고 책까지 내던 것에 대해선 입다물고 언급도 하지 않았었다.
다 같이 문제이니 이두호를 뭐라고 하지말자가 아니라,이전 글에서도 이런 문제를 이야기하면 이두호 옹호론자들의 물타기라능 반응 이 시대를 겪으면서 이런 표절 논란에서 그리 언급되지 않은 만화가 최신오는 90년대 새벗이라는 잡지에서 만화계 이야기를 언급하다가 "그시대, 표절을 언급하면 다른 만화가에게도 왜 그런 걸 거론하냐며 옹호하고 되려 언급한 만화가가 뭐 잘났냐며 비난받기 일쑤라서 입다물어야죠..."라고 이런 만화계의 풍토에 대하여 씁쓸한 감정을 내비쳤다. 최신오가 겪은 이야기로 70년대 일본으로 사업나간 지인을 통해 일본만화책 여러권을 사서 소장해 일본어는 몰라도 그림체를 보며 참고하곤 했는데 한 선배만화가(지금도 유명한 만화가라고만 언급)가 그 책들을 빌려갔다.그리고 얼마뒤에 연재하던 그의 작품에 이 일본만화에 나오던 배경이나 디자인이 그대로 베껴 그려져 연재한 걸 보고 아연실색하였지만 그때는 뭐라고 하지도 못했다고 한다. 이두호나 한국만화계의 어둡던 표절에 대한 만화가들부터 아무렇지 않게 여기던 시대의 초상이라고 봐야겠다.
4 기타
홍윤성을 대단히 싫어해서 홍성윤 대감[5]이 하인인 장독대에게게 살해당하는 대체역사물 덩더꿍을 비롯해서 스포츠 조선에 홍명희의 임꺽정[6]을 그려서 화제가 되었고 이후 째마리,판돌이[7]등등의 사극 작품으로 성인대상 사극으로 인기를 끌었으나 임꺽정의 후일담과 인간화된 이순신[8] 그린 작품 파행이 조기종영됨으로서 사실상 주요 활동을 중단하였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본격적으로 일러스트레이션쪽으로 참가한 작품이 꽤 있다. 80년대 국민학교 국어교과서에 한국전쟁을 다룬 고지의 태극기나 전래동화인 소가 된 청년 부분은 그의 일러스트.
더불어 이현세, 허영만 등과 같이 1997년 청소년보호법 파동 - 만화 유해 매체물 소동 당시 애를 먹었다. 음대협의 고발로 같이 구속된 동료 스포츠신문 만화가들과 함께 검찰에 기소유예되어 "신문연재 만화를 청소년에 유해하지 않게 그리겠다"는 서약서를 요구받은 그는 법을 안 바꾸면 만화를 안 그리겠다며 절필을 선언했고 ‘만화 표현의 자유 수호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공동대표를 지내며 그해 민가협에서 주최한 양심수 석방 캠페인 '하루감옥체험'에서 원수연, 장태산 등 동료 만화가와 함께 참가했고, 1998년부터는 한국만화가협회 회장을 맡아 한국만화의 표현수위를 확장하기 위한 활동에 매진했다. 2003년 기나긴 공방 끝에 승소를 했다. 당시 청소년 보호법 만화계 상황
게다가 만화 공격으로 악명높은 YWCA의 선정성 시비를 받지 않은 덕에 1989년 서울 YMCA 우수만화작가로 선정된 것[9]을 시작으로 1993년에 서울 YWCA에서 <두손이>로 우수어린이만화작가상을 수상받았고, 이후 1995년에 <임꺽정>으로 한국만화문화상 저작상, 2004년 코믹어워드 대상, 2006년 고바우만화상, 2007년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 ↑ 칭찬 아닌 칭찬... 그 만화 잡지 한 권이 데즈카 오사무처럼 순수창작이었다면 지금 '대가'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겠지만...
- ↑ 사실 표절보다 정도가 심해서 그냥 베꼈다는 게 올바른 표현...
- ↑ 하지만 박무직도 잘난게 아닌게 무턱대고 표절한다고 비난하며 이두호를 주로 거론했다는 점. 박무직이 존경했다는 황미나도 마지못해 이런 표절만화를 그려야 했다든지 까고보면 줄줄이 나옴에도 이런 건 거론하지 않아서 비난하는 의견에게 지가 존경하는 선배는 덮어버리고 거론도 안하는 이중논리라는 비아냥을 받아야 했다.
- ↑ 문하생들에게 돈도 제대로 안주고 그냥 대충 밥먹여주고 잠재워주고 그림이나 배운다는 투로 버티는게 수두룩했다! 심지어 문하생을 집안일 청소를 시키거나 아주 머슴처럼 부려먹는 것도 흔했다. 만화가 고행석이 이런 문하생 생활을 겪다가 욕과 같이 나와버렸고 수소문 끝에 당시 드물게 돈도 꼬박꼬박주고 일을 다하고 나면 자유시간을 인정하여 평판이 좋던 선배만화가 박기준에게 갔는데 경쟁률이 장난아니라서 어렵사리 들어가 그의 곁에서 문하생 생활을 잘 지냈고 이후로도 친하게 지낸다고 한다. 때론 문하생이 그린 그림이나 줄거리를 억지로 빼앗아 버리는 경우도 허다했는데 박무직 항목에서도 나오듯이 이러한 병폐가 박무직 화실에서 그대로 나왔기에 박무직이 두고두고 욕을 먹을 수 밖에 없다. 내로남불이라느니 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른다느니...
- ↑ 홍성윤 대감의 상관은 양수대군
- ↑ 물론 원작에서 약간 설정을 달리한 부분도 있고 미완인 원작을 나름 정리해서 끝을 내었다
- ↑ 왕족이지만 세도가 김안동과 조풍양의 세력다툼과 어른의 사정으로 신분을 숨기고 평민으로 사는 이범원(알다시피 조선 왕이었으나 안동 김씨에게 허수아비로 이용당하던 강화도령 이원범(철종: 1831~1863/제위 1849~63이 모델이다.)이 왕이 되는 일대기
- ↑ 이순신과 임차손이 평생을 둔 친구로서 그들의 우정은 노량해전까지 나온다. 역시 여러 떡밥(심지어 정여립과 임차손의 연관까지 포함해서)을 전혀 회수하지 못하고 끝났다.그나마 차손이 원수이던 서림을 목베는 이야기로 끝내긴 했다.
- ↑ 그러나 이두호도 그렇고 이 선정에 대하여 만화가들은 시큰둥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전해인 1988년 우수작가로 선정된 이진주만 해도 웃으면서 우수작가 상패를 받고 집에 와서 상패를 내던졌다고 한다. 허구헌날 만화 공격을 벌이던 짓이나 하니 만화가들은 당시만 해도 여러 언론에 시끄럽게 구니 차마 이 단체에 대들지 못하던 터라...이두호에 대한 책자에서도 이 상받아서 집에 그냥 두고 어디에 둔지 몰라라고 웃으며 당시 껄그러운 기분을 이야기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