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디난트 1세

1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역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페르디난트 1세막시밀리안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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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rdinand I
생애1503년 3월 10일 ~ 1564년 7월 25일
재위 기간(신성 로마 제국 황제)1558년 1월 5일~1564년 7월 25일
재위 기간(헝가리크로아티아)1526년 12월 16일~1564년 7월 25일
재위 기간(보헤미아 국왕)1526년 10월 24일~1564년 7월 25일
재위 기간(오스트리아 대공)1521년 4월 28일~1564년 7월 25일

1.1 개요

카스티야의 후아나 여왕의 차남. 그 유명한 카를 5세의 동생이다. 스페인에 있는 알칼라 데 에나레스에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인 아라곤의 왕 페르난도 2세와 같은 달에 생일이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페르난도 2세는 플랑드르에서 자란 이방인 카를보다는, 스페인에서 태어나 성장했고 자신의 이름을 따 이름을 지은 페르디난트(페르난도)를 더 좋아해 페르디난트에게 아라곤 왕위를 물려주려 했지만 사망할 당시 페르디난트가 어렸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페르난도 2세의 희망과 형제의 유년시절과는 정반대로, 카를 5세는 이후 거의 스페인 통치에 골몰했고, 페르디난트는 거의 평생을 신성로마제국 통치에 전념했으며, 카를의 후손은 스페인을, 페르디난트의 후손은 오스트리아·보헤미아·헝가리를 통치하게 된다.

성인이 되고 나서 형인 카를 5세가 외할머니 영지 (베네룩스, 프랑슈콩테 등) 외가의 스페인, 할아버지 영지 오스트리아를 차례로 물려받고 1519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선거에서 당선되자 가장 큰 영토인 스페인왕 노릇을 해야돼서 국내에 자주 체류 할 수 없기 때문에 제국통치평의회 의장으로 동생 페르디난트를 임명한다. 카를 5세는 팔츠 선제후를 제국 섭정으로, 동생 페르디난트를 자신의 대리인으로 임명하여 둘에게 제국을 맡겼고, 스페인으로 떠나기전 오스트리아 대공 직위를 페르디난트에 물려주며 사실상 분가 시키게 된다. 그러나 프랑수아 1세와 경쟁하며 치룬 1519년 황제 선거에서 세습은 포기한다고 공약한데다가 1520년 아헨에서 대관식을 치루면서도 재차 공약 준수를 선언했기 때문에 페르디난트를 바로 후계자로 지명하긴 어려웠다. 1526년, 1529년 투르크전쟁 방어를 성공적으로 치룬 공적으로 1530년 차기 황제를 미리 선출하는 선제후 선거에 페르디난트를 출마 시켰고 단독출마라 당연히 당선되면서 신성 로마 제국의 차기 황제이자 로마왕 (독일왕)으로 불리게 된다. 사실 황제선거 치루기 이전 독 신성로마제국 군주는 대관식 이전 로마왕(독일왕)으로 불렸는데 차기 주자라는 뜻고 있고 독일왕으로 군주라는 직위 뜻도 있기에 사실상 1530년부터 독일의 군주로 봐도 무리가 없다. 왜냐하면 형 카를 5세는 10년씩 15년씩 독일 자리를 비웠고 1547년 이후에는 독일에 온 적이 없기 때문.

1.2 헝가리오스만 제국

1526년 헝가리보헤미아의 왕인 로오슈 2세는 술레이만 대제의 침공을 받아 모하치 전투에서 전사한다. 페르디난트 1세는 자신의 아내 안나가 로오슈 2세의 여동생인데다 로요슈가 생전에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면 자신에게 왕위를 넘기겠노라고 약속했다는 사실을 앞세워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고, 이 점이 받아들여져 헝가리 왕의 지배를 받던 보헤미아의 왕이 된다. 또한 1527년에 세틴 성에 있는 크로아티아의 귀족들에 의해 만장일치로 크로아티아의 왕(역시 헝가리 왕이 겸임해 왔다)이 되었으며 확고부동한 승계권을 확립하였다. 세틴 의회에서 페르디난트는 크로아티아를 오스만 제국의 침공으로부터 지키고 크로아티아 인들의 역사적인 권리, 자유, 법, 풍습을 존중할 것을 약속했다.

로오슈 2세의 비서인 니콜라우스 올라우스는 헝가리 왕위 계승권 문제에서 스스로 페르디난트 1세의 편에 가담했으나, 로오슈 2세의 아내이자 페르디난트와 카를 5세의 여동생인 마리아 왕대비가 헝가리 여왕의 자리를 그와 함께 보유했다. 1526년 브라티슬라바에서 페르디난트 1세는 헝가리의 왕으로 선출되었으나 이는 헝가리 귀족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지는 못했고, 당시 헝가리 귀족 대다수는 트란실바니아의 귀족으로 중앙 정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 온 야노슈 자포야를 국왕 야노슈 1세로 옹립했다.

야노슈 1세의 즉위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페르디난트는 헝가리를 침공했고, 1527년의 타르칼 전투에서 승리하는 등 야노슈를 헝가리 전역에서 몰아냈다. 하지만 야노슈는 오스만 제국의 신하가 되는 조건으로 지원을 요청했고, 쉴레이만 대제는 1532년에 친히 군대를 이끌고 헝가리로 향하여 헝가리 동부와 중부에서 합스부르크군을 몰아냈다. 이후 합스부르크 황가와 오스만 제국은 1533년에 콘스탄티노플 조약을 체결하여 야노슈를 헝가리의 유일한 왕으로 인정하고 헝가리 중부 및 동부를 그가 통치하는 것을 인정하며 페르디난트는 헝가리 서부만을 통치하기로 했다. 단, 그나마도 오스만 제국에 연공을 바치는 조건으로. 하지만 페르디난트는 헝가리 왕위에 대한 야망을 버리지 않았고, 1538년에 너지바러드 조약을 체결. 아들이 없는 야노슈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한다면 자신이 그 뒤를 잇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1540년 7월 7일에 야노슈의 아들인 야노슈 지그몬드 자포야가 태어났고, 야노슈 자포야는 그로부터 보름 뒤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 야노슈 지그몬드 자포야가 야노슈 2세로서 즉위하게 되었지만, 눈 뜨고 왕관을 도둑맞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 페르디난트는 다시 군대를 일으켜 헝가리를 침공했지만 이번에도 쉴레이만 대제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달려오는 바람에 충공깽. 결국 합스부르크 황가와 오스만 제국은 1545년에 강화를 맺었고, 2년 뒤에 체결된 에디르네 조약으로 야노슈 2세가 헝가리의 왕으로 인정받았다.

페르디난트 1세가 제일 위험했던 순간은 1529년 술레이만 1세가 1차 빈 포위를 감행해 보헤미아로 피신했을 때였다. 1532년에 오스만 제국은 또 빈으로 진군했으나 그 도중에 쾨세그(독일에서는 귄스라고 불렀다)라는 마을에서 발목이 잡혀 퇴각했다. 같은 해에 오스만과 콘스탄티노플 조약을 체결하어 헝가리를 합스부르크가가 지배하는 서부와 야노슈 자포야가 다스리는 중부 및 동부로 나누었다[1]. 1554년에는 사절인 오기에르 기셀린 드 뷰스벡이 페르디난트의 사절로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코스탄티니예에 파견되어 헝가리 영토에 대한 국경 조약에 대해 상의하기도 했다[2].

1.3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신앙으로 인해 10년간 독일 제후들과 분쟁을 벌인 후에, 카를 5세는 각 제후들이 영지내에서 종교를 결정할 수 있다는 내용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 결정하기로 했다. 카를 5세는 참석하지 못했고 페르디난트 1세에게 종교 문제와 영토 분쟁을 해결할 권한을 위임하였다. 회의에서 페르디난트는 제후들을 회유하고, 위협하고, 설득하여 3가지의 중요한 원칙을 합의했다. 각 제후들은 자신의 영지 내에서 자신이 믿는 종교를 영지의 공식적인 종교로 지정할 수 있으며, 다른 교파를 따르는 신도들은 재산을 처분하고 다른 영지로 옮길 수 있었다. 세 번째는 기사와 자유도시들은 이 결정에서 제외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페르디난트의 선언이라 불린다.

1555년 이후 아우크스부르크 평화 조약은 제국 내에서 루터파와 가톨릭의 공존을 관리하는 정당한 법률 문서가 되었으며 가톨릭 교도와 루터 교 신도간의 많은 갈등을 해소했지만 근본적인 결함을 안고 있었다. 우선 페르디난트 1세는 토론을 통해 종교상의 예외를 성급하게 결정지었다. 철저하게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논의가 널리 받아들여지지도 못했고, “영주가 믿는 종교가 그 지역의 종교를 결정한다.”는 원칙을 지원하지도 못했다. 그 결과, 모두를 커버하지도 못하였고, 심지어 잠재적인 법률 문제마저도 그러했다. 또 루터 교의 처우는 해결되었지만 칼뱅 파를 믿는 신교도들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못했다.

1.4 통치 방식

페르디난트 1세가 차지한 헝가리의 서부는 로얄 헝가리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로얄 헝가리군주로서 그는 중앙 집권 정책을 펼쳤으며, 이 시대의 다른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절대 군주정을 추진했다. 1527년 헝가리 왕위에 오른 뒤에 페르디난트는 자신의 영토에 헌법을 발표하고, 헝가리의 브라티슬라바, 보헤미아의 프라하, 슐레지엔의 브레슬라우에 오스트리아 스타일의 기관을 도입했다. 이 영역에서 일어난 귀족들의 반발은 페르디난트에게 1559년에 오스트리아의 감독으로부터 기관들이 독립하는 것을 인정하게 했다.

1547년 보헤미아가 반란을 일으켰다. 독일의 신교도 제후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페르디난트 1세가 보헤미아 군을 보낸 다음이었다. 페르디난트는 카를 5세로부터 스페인 군을 불러 진압한 다음에 보헤마이 도시들의 특권을 제한했고 도시의 권한을 제어하기 위해 새로운 관료 체제를 도입했다.

1.5 황제로 즉위

페르디난트는 그 전까진 카를 5세와 거의 트러블이 없었는데, 1546~1547년에 카를과 협력해 프로테스탄트 세력인 슈말칼덴 동맹을 무찔러 뷔르템베르크를 탈환한 뒤 문제가 발생했다. 이후 카를 5세는 뷔르템베르크에서 페르디난트 1세가 갖고 있던 권리를 회복시키지 않았고, 장남인 필리프(뒤의 스페인의 왕 펠리페 2세)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물려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형제의 갈등은 1553년 카를 5세가 필리프의 황위 계승권을 포기하는데 동의하면서 겨우 끝났다. 이후 독일의 왕위 계승권은 페르디난트 쪽으로 넘어간다.

1556년, 카를 5세는 퇴위하면서 스페인과 네덜란드 지역을 펠리페 2세에게,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는 페르디난트 1세에게 물려줬다. 이로써 실질적인 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 독일권 합스부르크 세력의 톱이 되었으나, 퇴위한 형 카를이 에스파냐에 아직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선제인 형을 존중하여 정식으로 즉위하는 것은 계속 미루고 있다가, 1558년 형 카를이 에스파냐의 은둔지에서 사망하자 비로소 황제로 즉위했다. 황제로서의 공식 통치 기간은 그가 사망할 때까지 6년 남짓 이어졌다.

이후 1564년 빈에서 사망했으며, 체코 프라하에 있는 성 비투스 대성당에 매장되었다.

2 오스트리아 제국황제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
프란츠 1세페르디난트 1세프란츠 요제프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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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하지만 폐하, 외계인을 닮으셨습니다.

생애: 1793년 4월 19일~1875년 6월 29일
재위기간: 1835년 3월 2일~1848년 12월 2일

프란츠 1세의 장남으로 1번 항목의 먼 후손. 어릴 때 간질 때문에 고생했으며, 성장하면서 간질 증상은 완화되었지만 거듭된 합스부르크-로트링엔 왕가의 근친혼 탓으로[3] 평생 언어장애와 정신지체 증상을 앓았다. 뇌에 물이 차는 수두증(hydrocephalus)을 앓고 있었고 그 때문에 초상화나 사진을 보면 머리가 비정상적으로 큰 것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그는 재위 당시 정치적으로 실권을 갖고 있던 적이 전혀 없었다. 주로 오스트리아의 외교관 메테르니히와 페르디난트 1세의 동생들이나 친척들이 의회를 만들어 섭정하는 식으로 통치했다. 황후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마리아 안나를 맞아들였지만 성관계를 치르려 할 때마다 간질 발작을 일으켰기에 평생 동정이었고 당연히 자식도 생기지 않았다.

페르디난트 1세의 정신상태를 알 수 있는 일화로, 평소 좋아하던 살구 페스트리(Marillenknödel)를 살구가 수확철이 아니라 먹을 수 없자 황실 요리사에게 "짐은 황제이니라, 짐은 페스트리를 원하노라!(Ich bin der Kaiser und ich will Knödel!)"라고 명령했던 일이 있다. 기본적인 사리판단도 거의 불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와도 비교되는 멍청이 황제. 이 사람의 제위와 메테르니히의 경력을 끝장낸 1848년의 혁명이 터졌을 때도 메테르니히가 불순분자들이 혁명을 일으키려 한다고 보고하자 한다는 대답이 "하지만 그거(혁명 작당질) 불법 아닌가?"

정치 형태상의 문제 등의 요인으로 오스트리아는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더구나 그의 재위 동안 메테르니히와 오스트리아 제국이 주도한 '빈 체제'의 와해는 점차 결정적인 것이 되었지만 메테르니히는 경찰과 검열을 통한 강압통치를 계속해 원성을 샀다. 1846년에는 명목상 독립국이던 크라쿠프 자유시의 폴란드인들이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에 의해 삼분된 조국의 해방을 위해 궐기하자 다른 두 나라의 양해를 얻어 무력으로 진압, 크라쿠프를 오스트리아 영토로 병합해버리기도 했다. 안 하느니만 못한 일의 전형

하지만 한 번 혁명과 자유의 물결이 프랑스영국에서 일어나고 이탈리아와 독일권에서도 부글부글 끓고 있던 상황에서 언제까지 강압적인 반동정치가 유지될 수는 없어서 결국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을 도화선으로 그 해 3월 비엔나와 베를린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당시 오스트리아 내각의 주요 인물들은 모두 물러나야 했고 메테르니히는 재빨리 사직하고 영국으로 망명했다.[4] 당초 혁명의 불길에 놀란 황실은 옛 수도인 인스브루크로 몽진했으나 혁명세력과 협상하여 수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정부와 황실의 보수적인 자세, 혁명과 개혁에 대한 미온적이고 반동적인 입장에 분노한 시민들이 다시 봉기하자 황실은 오스트리아 영토를 떠나 보헤미아로 몽진해야 했다. 1년 사이 두 차례나, 그것도 시민봉기로 일어난 혼란으로 황실이 피난한 사건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렸으며, 황실과 내각내에서도 현재의 상태로는 수습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고 이미 사임하여 망명한 메테르니히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노릇이라 실질은 어쨌건 최고통치자인 황제에게 책임을 물게 한다는 방침이 결정되어 1848년 12월 2일, 페르디난트 황제가 퇴위했다.

퇴위하기 전 황제는 남동생 프란츠 카를 대공(1802~1878)에게 양위했으나 형과 정신상태가 크게 다를 바 없었던 프란츠 카를 대공은 아내 조피 대공비(1805~1872)과 원로들의 권고에 따라 자신의 아들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제위를 양보했다.

퇴위한 페르디난트는 주로 보헤미아에 머물렀으며 82세로 장수한 끝에 1875년 6월 29일에 사망했다. 프라하에서는 프라하 왕궁에 살며 적당히 늙은 전직 황제 뒷방 영감으로 지방 명사 대접을 받았으며 본인도 프라하 생활을 마음에 들어하여 종종 산보를 나서면 친근한 이웃으로 대접받은 모양. 개인적인 인품도 모나지 않고 순박사실 순박하다기보다 그냥 멍청한 쪽이지만한 편이라 프라하 시민들은 그를 선량왕 페르디난트(Ferdinand Dobrotivý)라고 불러줬는데, 이것도 사실 당시 문맥과 어조를 생각해보면 선량왕보단 "호구ㅋㅋㅋㅋ왕ㅋㅋㅋㅋㅋ 페르디난트"에 가까운 별명이다. 게다가 이걸 또 주워들은 빈 시민들은 여기에 이중으로 독일어 버전의 말장난을 더해 선량왕 페르디난트(Ferdinand der Gütige)에서 G와 F의 위치만 살짝 바꾸어 끝장난 (혹은 볼장 다 본) 구티넌드(Gütinand der Fertige)라고 부르며 놀았다. 군주로서의 업적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대신 신민들에게 무한한 드립의 소재를 재공해준 것을 그나마 업적이라 봐줘야 할까(…).

3 불가리아의 국왕

불가리아 국왕(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
(없음)페르디난트 1세보리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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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rdinand Maximilian Karl Leopold Maria of Saxe-Coburg and Gotha
생애: 1861년 2월 26일~1948년 9월 10일
재위기간(불가리아 공): 1887년 7월 7일~1908년 10월 5일
재위기간(불가리아 차르): 1908년 10월 5일~1918년 10월 3일

불가리아의 국왕으로 원래 독일 작센의 통치가문 베틴가문 에른스트 게열인 작센코부르크고타 출신이었다.[5]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에서 태어났다. 오스트리아군 장교로 있다가 불가리아 공이던 바텐베르크의 알렉산더의 퇴위로 불가리아 국회에서 후임 공으로 선출되었다. 1908년부터 차르 칭호를 사용하였다.

제 1차 세계대전에서 동맹국에 가담했으나, 패전해 장남 보리스 3세에게 양위하고 코부르크에서 은거하다 사망했다.

4 루마니아의 국왕

루마니아 왕국의 국왕
카롤 1세페르디난트 1세미하이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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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1865년 8월 24일~1927년 7월 20일
재위: 1914년 10월 10일~1927년 7월 20일
본명 Ferdinand Viktor Albert Meinrad of Hohenzollern-Sigmaringen.

호엔촐레른 가문(슈바벤계) 당주 레오폴트의 차남으로 독일 지크마링겐에서 태어났다. 루마니아의 초대 국왕으로 뽑힌 숙부 카롤 1세가 자녀가 없자 그 후계자로 정해졌다.

하필 그가 왕위를 이어받은 시점이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였는데, 루마니아는 1916년에 연합국 편에 참전했다. 이 소식을 듣고 빌헬름 2세는 호엔촐레른 족보에서 페르디난트 1세를 파버렸다.

1년 만에 동맹군에게 전 국토가 점령당했으나, 동맹국 패전 후 루마니아는 영토를 2배로 늘릴 수 있었다. 1922년 대관식을 올렸다.

왕세자 카롤은 악명 높은 플레이보이였다. 부인인 그리스와 덴마크의 공주 엘레니와 이혼하고 유대계인 마그다 엘레네 루페스쿠와 동거하자 페르디난트 1세는 왕세자의 왕위 계승 자격을 박탈, 1927년 7월 20일에 왕세손 미하이 1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사망한다. 그러나 카롤 2세1930년에 다시 왕위를 이어받는다.
  1. 오스만 제국은 이후 야노슈 2세가 즉위한 이후 헝가리로 출병한 1541년에 헝가리를 삼분하여, 서부는 합스부르크 황가, 동부(트란실바니아)는 야노슈 2세, 중부는 자신이 직접지배하게 된다.
  2. 여담으로 이때 오기에르는 오스만빠가 되어 돌아온다. 오늘날까지도 그가 남긴 기록이 전해지는데, 오스만에 대한 그의 평가를 한두 문장으로 정리하면 '완전 킹왕짱. 왜 우리는 저렇게 못하지?' 정도.
  3. 프란츠 1세와 황후 마리아 테레사는 친가와 외가 쪽으로 모두 사촌이었다.
  4. 혁명이 진압되고 새 황제가 즉위한 뒤 메테르니히는 귀국하여 1855년까지 살았다. 그는 젊은 새 황제의 조언자이나 원로로서 프란츠 요제프 1세 치세 초기의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통치체제의 유지에 일조했다.
  5. 작센왕국은 베틴가문 알브레히트 계열인데 에른스트 계열이 원래 본가이고 작센왕국 알브레히트 계열이 방계이다. 16세기 종교전쟁시 황제에 줄서서 찬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