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미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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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 출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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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만에 너무 많이 달려졌다 1996년에 복귀했을 때 프리 스케이팅 경기 출전 모습. 이 의상은 나중에 아사다 마오가 물려 입었다.

いとうみどり
伊藤みどり

1969년 8월 13일~

일본의 여자 싱글 (前) 피겨 스케이팅 선수.

1 성장 과정

나고야 출신으로 5세 때부터 스케이팅을 시작한 미도리는 만 8세에 트리플 점프를 성공시킨다. 이 타고난 점프력의 천재 소녀를 발굴해낸 게 우리에겐 아사다 마오 전(前) 코치로 유명한 야마다 마츠코[1]. 야마다는 이 어린 소녀의 재능이 범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10세에 미도리의 부모가 이혼하자마자 자신의 집에서 기거하게 했다.

2 주니어 시절

1981년 세계 주니어 피겨 스케이팅 세계선수권 대회에 만 11세 나이로 출전한 그녀는 당시 주니어 여자 싱글에서 이례적으로 3-2 콤비네이션 점프[2]를 성공시켰고 전 세계 빙상계를 들썩였어야 됐으나... 컴펄서리[3][4][5]에서 20위를 받는 데 그쳐 쇼트 7위, 프리 1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종합순위 8위로 아쉬운 데뷔전을 치뤄야 했다. 이듬해인 1982년에도 쇼트와 프리가 1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컴펄서리가 19위에 그쳐 종합순위는 6위에 그친다. 그 해 가을엔 오른쪽 발목 골절로 주니어 세계선수권을 결장했으며 1984년에도 쇼트와 프리가 1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컴펄서리가 13위에 그쳐 종합순위는 3위에 그친다.

지금이야 여자 주니어에서도 트리플 5종(토, 살코, 룹, 플립, 러츠)은 물론 주니어 시절 쿼드 살코도 뛴 선수[6]가 있다지만 1980년대 초반엔 트리플 5종 점퍼를 모두 구사하는 여자 선수는 아무도 없었으며 여자 싱글, 그것도 주니어에서 발육 조건이 딱히 우세한 것도 아니고 120cm를 넘을랑말랑한[7] 소녀가 보여주는 어마어마한 점프력은 이전까지 보지 못한 큰 충격이었다.

1984년 NHK 트로피에서는 트리플악셀을 시도했고, 실패했지만 갈라에서는 성공했다. 뭐지;; 15살밖에 안된 소녀가, 남자 선수도 하기 힘든 걸 해낸 거다. 일찍이 트리플악셀을 데이빗 젠킨스가 수행하는 동영상이 있긴 하지만 실제 경기에서는 1978년에 등장했고 한때 김연아 선수의 코치였던 브라이언 오서가 선수시절에 미스터 트리플악셀로 불리기 시작한 때가 80년도 중반쯤이다. 85년도에 쿼드 연습을 하다가 발목부상을 입었다고 하는데, 커트 브라우닝이 처음으로 쿼드토룹을 성공시킨게 1990년인 걸 고려하면 말그대로 남자보다 앞서가는 선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매번 나가는 대회마다 그놈의 컴펄서리 때문에 주니어 시절 내내 국제 대회에서 포디움을 밟아보질 못했다. 하지만 차츰 피겨 호사가들 사이에서 '일본의 작은 소녀 선수가 점프력이 그렇게 대단하다더라' 란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여자 싱글 3-3 콤비네이션 점프는 주니어, 시니어를 막론하고 이토 미도리가 최초로 시도해서 최초로 성공시켰다. 이때 당시 붙은 별명이 벼룩처럼 잘 뛴다고 해서 jumping flea(...)[8]

85년도에 발목부상을 입었는데, 원인은 쿼드러플 연습이라고 한다[9]. 안도 미키도 주니어때 쿼드를 뛰었다지만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이토 미도리가 얼마나 파워풀한 점퍼였는지 알 수 있다[10].

3 1988 캘거리 동계올림픽

피겨 스케이팅 역사에서 여자 싱글의 카르멘 전쟁(Battle of the Carmens), 남자 싱글의 브라이언 전쟁(Battle of the Brians), 페어의 G&G로 요약 가능한 1988 캘거리 동계올림픽 그 자체가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이지만 이토 미도리에게도 화려한 올림픽 데뷔전이었던 것. [11] 컴펄서리에서 10위를 받아서 이미 메달은 저 멀리 물 건너 갔지만 작은 체구의 동양인 소녀에게서 일반인의 눈으로 봐도 높이가 여타 다른 여자들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남자 싱글 수준의 체공 높이, 프리 로테이션[12]이 걸릴래야 걸릴 수가 없는 회전 스피드에 안 그래도 카르멘 전쟁과 브라이언 전쟁으로 피겨 스케이팅에 전세계인의 관심이 모아져 있는 와중에 미도리는 고유의 점프력, 회전 스피드를 전세계 매스컴이 보는 앞에서 뽐냈다.

4 캘거리 동계올림픽 이후

올림픽 후 카르멘 전쟁의 두 주인공이 은퇴하고 1988/89 시즌에 2회 NHK배 월드 챔피언십에서 여성 피겨 스케이터로서 최초로 트리플 악셀을 성공시킨다.


백문이 불여일견.

영상에서의 트리플악셀은 1996년 복귀했을 때 내셔널 프리 프로그램에서 수행한 것이다. 4년만의 복귀라 위의 사진과 체형이 많이 다르다.

1989년 프랑스 파리에서 세계 피겨 스케이팅 선수권 대회에서 아시아인으로는 최초로 우승했다.

1990년 핼리팩스 세계선수권은 88년 캘거리 피겨 여자 싱글 동메달리스트이자 일명 '컴펄서리의 여왕' 질 트레너리가 차지하고 이 대회를 마지막으로 은퇴했는데 후술할 논란 때문에 가는 길이 썩 개운치는 못했다.

논란의 핵심은 '심사위원들만 알아볼 수 있는 질 트레너리의 컴펄서리가 프로그램 구성과 점프, 스핀 모든 게 완벽했던 미도리에 비해 그리 뛰어났냐' 였다. 미도리가 컴펄서리 10위를 하고 나머지 부문은 모조리 1위를 했는데[13] '질 트레너리는 중계도 안하는 재미 없는 컴퍼서리에서만 이토 미도리를 이겼을 뿐 모든 경기에서 이토 미도리에게 완패했다' 에서부터 '월드 챔피언 자격이 없다' 라는 반응이 터져나왔다. 질 트레너리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토 미도리는 단지 점퍼(jumper)에 불과하다', '컴펄서리 10위한테 우승을 줄 수는 없지 않느냐' 라는 반응이었고 이 논란이 점점 커져 결국 ISU에서 싱글 피겨 스케이팅에서의 컴펄서리의 존폐를 논하는 수준에 이르렀다.[14]

피겨 스케이팅 싱글 부문에 컴펄서리가 삭제되자 일본 뿐만이 아니라 전세계 여자 싱글은 이토 미도리 원탑 체제가 유지될 거라 예상했다. 근데 이번엔 예술성 문제가 발목을 붙잡았다. 정상급의 점프력과 탑 10에도 못 끼는 컴펄서리 사이의 괴리감이 심해서 그렇지 연기력이나 다소 괴랄한 패션 센스[15], 예술성이 부족하단 평은 쭉 있어왔다. 그런데 컴펄서리 삭제 후 미국체조발레 유망주들이 하나둘 싱글 스케이터로 전향하고 어린 나이에 컴펄서리 자체를 뭐가 뭔지 도무지 이해를 못해 꿈을 접었던 빙상 꿈나무들[16], 여기에 싱글보다 컴펄서리가 비교적 먼저 폐지된 페어 스케이팅 꿈나무들도 뛰어든 건 덤이다(...) 페어에서 싱글로 전향한 대표적인 예가 92년 동계올림픽에서 이토 미도리를 꺾고 메달을 딴 크리스티 야마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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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 메달 시상식에서. 왼쪽부터 낸시 캐리건(미국. 동메달),[17] 크리스티 야마구치(일본계 미국인, 금메달), 이토 미도리(일본. 은메달)

카르멘 전쟁 이후 다소 침체되나 했던 피겨계에 일본인vs일본계 미국인[18]이란 라이벌 구도는 되려 일본에서 지금 우리나라 김연아 못지않은 아니 그것을 훨씬 초월하는 규모로 피겨 스케이팅 붐을 일으키게 된다. 그러나 부담감이 너무 컸던 탓인지 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일본계 미국인 크리스티 야마구치에게 패해 은퇴를 선언했으나 1996년 시즌에 복귀, 세계선수권에서 종합 7위에 올랐다.

92년 은퇴 이후 프로스케이터로서 World Professionals 등에 참가했다. 말이 프로스케이터지, 현역 때와 다를 게 없었다.[19] 95년 NHK트로피에 스페셜 게스트로 등장하였고, 푸치니의 네순도르마를 갈라로 선보였다(갈라에서 3Lz, 3A, 3T-3T라는 미친 구성;;[20]). 여자 선수 중에는 3A-3T를 수행한 기록이 영상으로 남아 있는 유일한 선수이며, 94년 올림픽에 참가했으면 우승하고도 남았을 텐데 참가하지 않은 것을 아쉬워 하는 사람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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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국에서 개최된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 개회식에서는 최종주자로 성화를 점화하는 영예를 차지했다.

5 평가

그런데 사실 한국과 일본이 전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은 아주 예전(80~90년대!)부터 남자 싱글에선 쿼드러플까진 몰라도 트리플 악셀조차 없는 선수들은 탑싱 취급을 못 받을 정도로 트리플 악셀이 정착되어 있다는 것이다. 일단 세계선수권 영상을 보면 탑싱은 물론이고 중위권 선수들만 되도 다들 트악은 당연하게 시도한다. 그러나 남자 싱글과 여자 싱글에서 트리플 악셀의 위상은 당연히 다르다. 이토 미도리 이후 여자 싱글에서도 트리플 악셀러들이 드물게 등장했으나 그 20년 동안 제대로 된 트리플 악셀이라는 평을 받는 사람은 이토 미도리가 유일하다. 위상이 다를 수밖에 없다. - 리그베다 위키 피겨스케이팅 항목 中

토냐 하딩부터 나카노 유카리, 루드밀라 넬리디나, 키미 마이즈너, 아사다 마오에 이르기까지 세대를 뛰어넘는 점프력은 일단 체공 높이 자체가 다르다. 마음만 먹었으면 4바퀴도 돌았을 거 같은데 부상 우려 때문에

남녀를 불문하고 세계 피겨 무대에서 정상권에 올랐던 최초의 아시아인으로 90 후반-2000년대 초반 사이 아시아 선수들이 세계 피겨 무대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는 데 기초를 닦았다. 예나 지금이나 북미 피겨가 강조하는 것은 '우아함' 과 '교감', 동유럽러시아가 보다 많은 운동량과 스피드를 내세웠다면 피겨팬들이 일본 피겨를 보는 시각은 '어딘지 모르게 2% 부족한 포스트 이토 미도리'. 이토 미도리 이후 사토 유카, 스구리 후미에, 온다 요시에, 안도 미키, 아사다 마오 등 수많은 여성 싱글 스케이터들이 나타났지만 아라카와 시즈카[21]나 스즈키 아키코[22]를 제외하곤 하나같이 예술성 부족 논란에 시달렸다. 이를 두고 일본을 제외한 전세계 피겨팬들과 스포츠 언론들이 그녀를 평할 때마다 나오는 소리가 있다.

일본 피겨 스케이팅의 빛이자 그림자.

아마 이토 미도리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세계선수권-동계올림픽을 동 시즌에 재패한 일본인 여자 싱글 챔피언이 나타나기 전엔 살아생전에 이 평가를 떼긴 힘들 듯 싶다.

국내외 피겨팬들은 점프 위주로 프로그램을 짜고 어렸을 적부터 필살기고난도 점프를 익하게 하려는 이토 미도리에 대한 환상이 일본 피겨맘들의 광적인 점프 열풍에 있어서 김연아 키즈들의 미래가 되지 않을까 내심 걱정 중.

6 기타

자신의 외모에 대해 자신감이 없어보이는 듯한 발언을 자주 했다.[23] '카타리나 비트를 보며 피겨 스케이터의 꿈을 키웠는데 난 저렇게 예쁘지도 않고 데비 토마스처럼 육감적이고 탄력적인 몸매를 가진 것도 아니니 내세울 수 있는 건 피 나도록 노력해 점프를 선보이는 것 뿐이었다' 취지로 한 것이긴 한데 진짜 피 나도록 노력하긴 했다.[24] 근데 라이벌인 크리스티 야마구치는 같은 동양계인데 그렇게 예쁘거나 키가 크진 않아도 팔다리 비율은 가늘었는데 미도리는... 역시 신은 공평하다 신이 공평하긴 그거 다 근육으로 점프 뛰는 거지 뭘로 뛰어 발목, 어깨, 허리, 골반은 물론 특이하게도 침샘 부상에도 자주 시달렸는데 그 이유도 남다르다. 점프 높이가 워낙 높고 회전 스피드도 빠르다 보니 어렸을 땐 떨어지는 요령을 몰라서 떨어질 때 충격량이 너무 큰 나머지 뇌진탕 후유증이 남아있어서 그렇다고. 흠좀무...

역사적으로 봤을 때에도 그 점프 높이는 감히 비교할 수가 없다. 트리플악셀(90년도 세계선수권 프리 기준) 높이가 약 64cm라는데 요즘 남싱 쿼드보다 훨씬 더 높은 것이다(주석에 나온 웹사이트에서는 하뉴 유즈루 선수와 페르난데즈 선수의 쿼드토룹 높이가 60cm, 하뉴 선수의 트악 높이가 47cm라고 나온다.)[25].

88년 캘거리 올림픽에서 1위를 한 카타리나 비트가 2종 4트리플(살코, 토룹), 92년 알베르빌 올림픽에서 1위를 한 야마구치가 3Lz-3T, 2A, 3F, 3T, 3Lo(실패), 2S, 3Lz, 2A, 미도리가 2Lz-3T(원래는 3Lz-3T), 3A(실패), 3F-2T, 3Lo, 3A(후반부에!!!), 3S, 2A인데, 94년 릴리함메르 올림픽에서 1위를 한 옥사나 바이울이 3Lz, 3F, 3Lo, 3S, 2A, 2T, 3T, 2A-2T, 2위였던 첸루가 3Lz+2T+SEQ, 2A, 3S, 3Lo, 3Lz, 3T, 3F, 2A였다. 그 6년 사이에 여싱에서의 기술 수준이 엄청나게 발전했다가 나중 2년 동안은 갑자기 하락했다. 이토 미도리를 중심으로 토냐 하딩, 수리야 보날리, 크리스티 야마구치 등의 선수들이 갑자기 등장했다가 비슷한 시기에 은퇴를 하다 보니 일어난 현상인 듯 하다.

2001년 재팬 오픈에 출전했을 때에는 프리스케이팅에서 트리플악셀을 시도했고, 랜딩에서 스텝아웃이 되었다랜딩이 문제였지 점프 높이하고 비거리는 여전히 ㄷㄷ. 2011년부터 2013년까지 ISU가 주관하는 성인 피겨대회에 참가했고, 2011년과 2013년에는 더블악셀을 시도해서 성공했다. 한국나이로 45살인데 시도하는 거 자체가 흠좀무 직캠 찍은 사람 후기 보니까 2011년 연습에서는 트리플토룹하고 트리플살코도 했다 카더라.

일본 피겨의 선구자로 잘 알려져 있지만 간혹 피갤에서는 까이는 듯 하다. 해설가로도 오래 방송에 나왔는데 아라카와 시즈카(토리노 여싱 금메달)와 해설 스타일이 정반대이다. 현역 시절 둘도 없을 점퍼여서 그런지 선수들의 기술에 대해 비판적인 경향을 보인다. 굳이 예를 들자면 안도 미키가 세계선수권에서 쿼드살코를 뛰었을 때 트리플살코라고 해설하는 등 기술적인 면에서는 상당히 깐깐하다[26]. 예전에 무라카미 카나코 선수를 김연아에 빗대는 듯 언론의 주문에 약한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27]

일본 피겨 스케이팅이 20년 넘게 이토 미도리의 그림자를 못 벗어나고 있단 평과 반대로 정작 일본 빙상계에서 그녀의 입지는 매우 좁은 편이다. 이에 대해선 96년 복귀가 악수가 됐다는 평이 대다수인데 일본 스포츠계는 우리나라 연예계와 생리가 매우 흡사해서 좀 냉정하게 말하자면 선수들 역시 연예인과 같은 일종의 상품이다. 차이점이라면 가수가 음악, 배우는 작품으로 아이돌은 이미지 메이킹과 마케팅을 통한 일종의 환상을 판다면 선수들은 성적과 그와 관련된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선보이고 사람들은 거기에 열광한다는 점인데 일본 언론과 피겨팬들은 이토 미도리의 96년 복귀가 실패하자 그녀의 이미지는 '금메달을 따지 못한 무관의 여왕' 에서 순식간에 '옛날엔 좀 날렸지만 지금은 한 물 간 선수' 로 전락시켜버렸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우리나라 사람들과는 달리 노장의 투혼에 그렇게까지 박수 쳐주지 않는다는 점도 있다. 되려 정점에 있을 때 내려오는 걸 더 아름답다고 보는 견해가 강하다.
  1. 안타깝게도 이 코치의 제자들은 플러츠를 뛰는 사람이 많다. 이토 미도리부터 아사다 마오무라카미 카나코까지.
  2. 정확히는 트리플 러츠-더블 토룹.
  3. 피겨 스케이팅 중 도형 그리기 종목. 이게 전체 성적의 30%(팩터 0.6)을 이루고 1984년 당시는 3개 과제에 각 4.0 만점으로 총 12점 만점으로 이루어졌다. 문제는 이걸 관중들이 보면 뭐가 뭔지를 하나도 모르기 때문에 방송사에서도 그냥 중계를 안했다. 재미도 없고
  4. 컴펄서리 심사 후 쇼트 프로그램이 전체의 20%(팩터 0.4), 프리 종목이 전체의 50%(팩터 1.0)이며 최종 순위는 각 부문별 상대 순위와 팩터의 곱을 합한 숫자가 적은 사람부터 1, 2, 3위를 결정했던 게 컴펄서리가 있던 시절 채점제다.
  5. TV 송출이 시작됐을 적만 해도 당시 우리나라 방송계는 피겨 자체에 아예 문외한이었던지라 주로 쇼트고 프리고 싸잡아서 피겨 규정 종목이라고 초월번역했다(...)
  6. 우리나라에서도 김해진이 시니어 데뷔 전에 트리플 5종 점프를 모두 소화해낸 바 있다. 물론 2016년 현재는 종합선수권 여자 싱글 마지막 그룹쯤 되면 주니어 데뷔도 안 한 선수가 트리플 러츠-트리플 토룹을 뛰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7. 성장기였던 점을 감안해야 하지만 그거 감안해도 이토 미도리의 최종 프로필상의 키는 145cm라는 게 함정.
  8. 91년도 Trophy Lalique, 1992년 올림픽 연습에서는 트리플악셀-트리플토룹 콤비네이션을 성공시키기도 한다. 유투브에 관련 영상이 있으므로 참조 바람.
  9. http://ljhsrmunseykano.pbworks.com/w/page/18392903/Midori%20Ito
  10. 발목 부상이 있었는데에도 NHK에는 출전했다고 한다.
  11. 사실 1984 사라예보 동계올림픽도 출전 자격이 있었지만 일본선수권에서 컴펄서리를 망해 컴펄서리 10위로 출발해서 쇼트마저 점프를 넘어져 5위, 프리 1위로 2위를 해서 출전하지 못했다.
  12. 몸이나 발을 틀어서 반 바퀴 이상 회전을 넣고 점프하는 것. 이토 미도리 이전의 여자 선수들에겐 이거 자체가 정석이었다.
  13. 특히나 기술성 관련된 부분에 있어선 더더욱.
  14. 근데 전자 쪽이 압도적이었다. 카르멘 전쟁으로 재미 톡톡히 본 빙상연맹의 흥행성 앞에선 보수성도 그게 뭔가요 우걱우걱
  15. 안도 미키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비도 아닌 레인코트 비스무리한 걸 입었는데, 태풍에 휘날리는 비닐 우산을 보는 거 같단 혹평을 받았다.
  16. 정말 아주 쉽게 간단히 설명해주자면, 심사위원들이 주제를 주고 그 주제에 맞게 빙상 위에다 도형이나 선을 그리면 된다.
  17. 2년 후 릴리함메르 동계올림픽의 유력 금메달 후보였지만, 국대 동료였던 토냐 하딩이 사주한 피습으로 부상을 입어 은메달로 만족해야 했다.
  18. 일본에서는 일본계 미국인인 크리스티 야마구치에게 관심을 가지고 접근했으나, 크리스티 야마구치는 "나는 미국인입니다."라고 잘라 말했다고.
  19. 오히려 더 기량이 증가한 것 같은 모습을 볼 수 있다. 프로 경기에서 여자 선수가 3A, 3Lz, 3T-3T로 구성을 넣는 것은 앞으로도 보기 힘들 것이다. 볼 수 없을 가능성이 더 높을듯;;;
  20. 굳이 설명을 덧붙이자면, 여싱 쇼트프로그램에서 모든 점프를 트리플로 구성한 것은 2015년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가 최초였다. 그런데 정식 경기도 아니고 20년도 더 전에 갈라에서 이런 구성을 보인다는 건 그냥 불가사의나 마찬가지. 이토 미도리는 88년 올림픽에서도 3T-3T를 선보인 적이 있고, 89년 월드에서는 즉석에서 3A를 선보일 것을 요청받기도 했다.
  21. 이쪽은 김연아아사다 마오 같은 스타성보단 말 그대로 전성기는 이미 지나가버린 30살 노장의 뒤늦은 투혼 같은 느낌이 너무 강해서...
  22. 은퇴 후 안무가로 활동할 정도로 피겨 스케이팅 곡 해석 능력이나 스텝 능력, 음악을 타는 능력이 매우 뛰어난 선수이다. 특히 스텝시퀀스 룰이 지금처럼 헐렁해지기 전에 김연아도 받아보지 못한 레벨4를 받았다. 외국 해설진들에게도 일본 여싱에서 예외적으로 음악과 잘 어울리는 스케이팅을 한다는 평을 들었다. 당장 일본인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아사다 마오와 비교해봐도 안무를 비롯한 전체적인 스케이팅이 세련되고 깔끔하다. 점프만 강조하는 일본 피겨계에서 예술적으로 스케이팅을 하는 정말 레어한 선수.
  23. 일본인들이 흔히 예의상 하는 그런 겸손이 아니라.
  24. 주니어 시절 그녀를 담당했던 재활의학과 의사 말로는 성인 남자도 진통제를 링거째 투여해도 고통에 몸부림 칠 염좌, 골절, 멍이 온몸에 있었다고. 이 지경이 됐는데도 왜 병원에 안 왔냐고 하자 '몸이 크는 중이라 그래서 살이 쪘겠구나 했다' 고. 그리고 나서 댄 2번째 이유가 연습할 시간이 아까워서...
  25. http://www.goldenskate.com/forum/showthread.php?53491-Measuring-Skater-Jump-Height
  26. 다운그레이드 판정을 받긴 했다
  27. 유투브에 보면 이토 미도리가 거짓말을 했다는 동영상이 있는데, 거짓말이라기보다는 본인의 심정을 억지로 표현한 것이라는 의미인 것 같다. 해석하면 대략 캘거리 올림픽 당시 우승한 카타리나 비트가 두 종류의 트리플을 뛰고 자신은 5종 7트리플을 뛰었는데 5위로 그쳐서 트리플악셀을 하게 되었다는 내용인듯. 이토 미도리가 이런 말을 할 리가 없다면서 억지로 한 말이라는 의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