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설명
전두환의 망작 1
대한민국 자동차 산업 역사상 최악의 조치로, 업체 간 경쟁을 엉망으로 만든 조치이자 대한민국 자동차 업계 최대의 암흑기.[1]
사실 이것이 당시 실 권력을 잡고 있던 국보위에서 내린 조치이기에 어찌보면 흑역사/목록/경제를 넘어서서 흑역사/목록/정치와 행정 항목에도 들어갈 수 있는 수준이다. 당시 국보위가 얼마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막 정했는지를 보여주는 내용인 셈.
2 배경
1979년의 제 2차 오일 쇼크를 거치면서 박정희 정권은 자동차 수요 억제 조치를 단행하게 된다. 당시 유가가 1979년 당시 배럴당 24달러까지 치솟으면서[2] 자동차의 수요 억제 정책을 추진한다. 여기에는 장관급 관료의 차량 실린더 수를 4기통으로 제한하는 조치도 있었으니 볼거 다 본 셈.
게다가 1979년에 발생한 10.26 사건과 그해 12월에 일어난 12.12로 인하여 사회의 혼란은 가중되었다. 동시에 업계들간의 과잉 생산으로 인하여 생산률이 줄어드는 일이 발생하자,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쿠데타 세력이 세운 국가 보위 비상대책 위원회에서 긴급조치를 단행하게 된다.
3 내용
3.1 기본 골자
1980년 8월 20일에 중화학 분야 투자조정 조치 밑으로 자동차 부분 투자조정 조치라는 명칭으로 처음 시행되었으며, 1981년 2월 28일에 자동차공업 합리화조치를 발표하면서 실물화되었다.
우선 이 자동차 부분 투자조정 조치의 내용을 살펴보면 현대자동차는 새한(현, 한국GM)을 통합하여 승용차만 전문생산을 하되 경영은 현대그룹이 맡고, 기아자동차(당시 기아산업)는 5톤 미만의 소형 상용차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되, 5톤 이상의 버스와 트럭은 당시 제조사들에게 자유 경쟁에 맡긴다는 것이 기본적인 골자였다.
또한 기아자동차의 2륜자동차 사업부이자 계열사격 회사인 기아기연[3]을 대림산업에게 넘기고 철수를 함과 동시에 자동차 산업에서 손을 뗀 대우는 현대양행(지금의 두산중공업)을 인수하는것으로 할려고 했다. 이는 자동차부분 투자조정 발표 전에 국보위에서 정주영 회장과 김우중 전 회장으로 하여금 선택하게 했던 것의 일환이었다.
3.2 반발
그러나, 진짜 이루어졌다면 현재의 한국GM을 영영 볼 수가 없게 되었을 테지만, 이후 발효된 자동차공업 합리화조치로 새한과 현대가 합병하는 꼴은 면했다. 여기에는 골치 아픈 사정이 있는데 바로 당시 새한의 지분 50%를 미국 제너럴 모터스가 가지고 있었던 것.
당시 미국 GM에서는 새한의 지분은 한국 내 자동차 사업권에 대한 지분이라는 것과 동시에 이 통합이 사실상 현대와 GM의 1:1 통합이기에 통합한 후에도 50%의 지분과 경영권을 요구하면서 꼬인 것이다.[4]
지분 문제와 경영 전략간의 이결로 인하여 현대와 새한의 통합은 무효로 돌아갔고 현대와 새한 대신 기아와 GM의 통합을 생각 했지만 이 역시 불가능해졌다.
3.3 2차 안,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
투자조정 조치가 사실상 무위로 돌아감에 따라 국보위에서는 이것의 대안을 발표하는데 이것이 바로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였다. 흔히 1981년 2월 28일에 발표했기에 2.28 조치라 불리는 이 조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승용차는 현대와 새한으로 2원화 하여 경쟁체제를 유지시키고 수출시장 개척에 주력하도록 한다(1~5톤 트럭 및 버스 생산 금지)
② 차종별 전문생산 체제의 강화를 위해 기아는 1~5톤 트럭(승용차 및 픽업은 제외) 및 중소형 버스, 동아[5](1977년 하동환자동차에서 상호 변경)는 소방차, 믹서트럭, BCC(비포장 시멘트 운반차), 탱크로리 등 특수특장차의 생산을 각각 전문화한다.
③ 기아와 동아의 전문생산체제에 대비한 양사의 경영합리화 방안으로 양사의 통합을 추진하고, 기아는 2륜차 부분을 대림산업에 인계한다
④ 기타 계열기업 정리과정에 대한 조치 기준
이 조치의 핵심은 통합이 불가능해진 승용차부분 대신 상용차 부분에서 기아와 동아의 통합을 통해 통폐합 조치의 명분을 살려보자는 말도 안 되는 정책이었다.
3.4 기아의 반발과 철회
이 조치가 발표된 후 기아산업은 말 그대로 발칵 뒤집힌 수준이었다. 명령을 내린 곳이 국보위라지만 비슷한 크기를 갖고있는 현대와 기아와의 통합이면 어떻게든 가능하겠지만 크기에서 엄청난 차이가 났던 기아와 동아와의 통합은 회사 차원에서도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볼수 있는 수준이었다. 사실 동아자동차는 당시 대형 상용차 전문 메이커였던 반면 기아는 이제 막 종합자동차회사로 성장하려던 상황에서 싹을 자르는 조치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리고 아시아자동차를 인수한 1976년부터 기아의 누적된 부채 문제로 인해 결국 김상문 회장이 1981년 10월 5일 자본과 경영의 분리를 선언함과 동시에 퇴진하면서 김선홍 당시 기아기공 사장이 기아를 이끌게 된 것이다. 상공부에서는 합병을 계속 주도했지만 당시 동아 하동환 회장의 기아 및 동아 주식 대량 매집을 했으나 기아의 부채를 견디지 못해 다시 주식을 대량 매각한 사건으로 인해 더이상의 협상은 불가능해 진 것이다.
결국 이 조치는 사실상 무효화 되고 1982년 7월 26일 최종적 조치가 내려졌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2.28 조치 중 기아와 동아의 통합은 백지화한다
② 승용차생산을 중단한 기아에 대하여는 중소형 트럭 및 중소형 버스의 전문생산 체제를 지속한다
③ 양사의 합병을 전제로 동아에 전문화시켰던 소방차, 믹서트럭, BCC, 탱크로리 등 특장차는 자유화한다
④ 앞으로 양사의 경영상태가 악화되어 정상 경영이 어렵다고 판단될 경우 자연 통합 방향으로 유도한다
3.5 조치 발표 결과
- 승용차 : 현대, 새한의 2원화
- 지프형 차량 : 신진[6]이 민수용, 아시아가 군수용
- 1~5톤 트럭 및 버스 : 기아 단독 생산
- 8톤 이상 트럭 및 버스 : 현대, 기아, 새한 자유 생산 가능
- 특장차 : 전 회사 생산 가능
4 결론
이 조치 발표로 인하여 기아는 적자투성이인 2륜차 사업 관련을 대림산업에 헐값에 넘기게 된다. 이 일로 인해 김선홍 기아기공 사장, 김명기 고문, 김성웅 아시아자동차 전무[7]가 반발했지만 결국 기아의 2륜차 생산은 1982년 3월을 기점으로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당시 이 조치로 인한 피해액을 살펴보면 현대 195억, 기아 48억, 새한 20억원이었으며 특히 기아는 7년간 승용차 생산이 중단되면서 1987년 이후로도 승용차 생산에서 1997년 부도날때까지 밀리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1987년에 이 조치는 어느 정도 해제 되지만[8] 결과적으로 이 조치로 인해 기아와 현대의 간극은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게 될 정도로 기아와 현대에게는 최악의 조치였다. 오죽하면 훗날 자동차 관련 단체 및 만화에서도 이 조치를 제대로 비판했을 정도였다. 경쟁회사가 없어진 한국 자동차 업계는 후퇴를 거듭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현대도 당시에 생산하던 중소형 상용차 뿐만 아니라 디젤엔진도 생산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현대의 중소형 상용차 기술, 디젤엔진 기술 및 국산화율은 1990년대 후반 까지 한동안 크게 후퇴하고 말았으며 1997년 현대 슈퍼트럭, 1998년 마이티 2출시 및 2000년에 현대 파워텍 엔진이 개발되면서 그제서야 어느정도 만회할 수 있었다.
5 여담
- 1982년 제미니의 페이스리프트 모델로 출시된 새한의 맵시는 첫 출시 당시 1.5리터 엔진이 나온 후 마쓰다제 1.3리터 엔진을 쓰고 있었는데 이 엔진은 사실 기아 브리사 2의 엔진을 얹은 것이었다. 기아자동차(당시에는 기아산업)가 이 조치로 승용차 생산을 못 하게 되자 그렇지 않아도 엔진 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던 새한이 얻어 온 것.[9]
- 기아는 이 사건으로 승용차를 생산할 수 없게 되자 다른 쪽으로 눈을 돌렸는데 그 결과 나온 모델이 바로 기아 봉고, 불가능하리라 예상되었던 이 모델은 빅 히트를 치면서 기아를 기사회생시키는 역할을 했다.[10]
- 기아는 승용차를 생산하지 못하더라도 브리사의 계열모델이었던 브리사 픽업(기아마스터 B-1000)이라도 살려보려고 했었으나 회사 입장에서 말도 안 되는 답변을 받고 브리사 픽업을 단종시켜야 했다. 당시 기아차는 브리사 디젤 모델도 연구하던 상황이었으니 더더욱 속이 탔을 정도.
- 1983년 기아의 계열이던 아시아자동차는 당시 랜드마스터란 컨셉트카를 공개했다. 하지만 실제로 출시하는데에는 몇 년이 더 걸렸는데, 결국 그 과정에서 이름을 바꿔야 했다. 그것이 바로 지금의 록스타. 그리고 원래 이 차를 이용해 미국에 진출하려던 기아차의 계획도 완전히 틀어져 기아는 포드를 통해 우회적으로 미국에 진출했다.
- 이명박 전 대통령의 저서 '신화는 없다'에서도 이를 맹렬하게 비판한다. 물론 그는 현대그룹의 임원이기 때문에 당연하긴 하지만.
5.1 단종 차량
기아-브리사, 피아트 132[11], 푸조 604.[12]
새한-엘프[13], BL064
- ↑ 이거에 비하면 새나라자동차는 아무것도 아니다.
- ↑ 바로 전해인 1978년의 유가는 배럴당 10달러였다.
- ↑ 당시 기아혼다란 브랜드는 이 회사 소유였다.
- ↑ 이는 당시 새한자동차의 지분 상황이 복잡했기 때문인데, 새한자동차는 신진자동차와 미국 GM이 1972년에 50:50으로 출자한 GMK가 그 시작이다. 그러나 신진자동차가 1973년 오일쇼크로 인하여 산업은행이 관여함에 따라 신진이 빠지게 되었고 당시 신진의 사장이던 김창원은 그룹이 분리되는 것을 보면서 말년에 신진공고(현 신진자동차고등학교)의 이사장직을 지내다가 1996년에 사망한다. 현 이사장인 김용식은 김창원의 아들이다.
- ↑ 현재의 쌍용자동차이다.
- ↑ 신진자동차와 미국의 AMC가 합작해서 설립한 신진지프자동차를 가리킨다. 신진 지프차량의 판매부진을 계기로 AMC가 자본을 철수하면서 합작이 깨지기 시작했고, AMC 자본철수를 계기로 지프를 리비아에 수출한 사건으로 인하여 지프 브랜드 사용 연장도 불허되는 바람에 1979년에 사명을 신진자동차로 변경하고 1981년에 거화로 변경하게 된다. 1984년에 동아에 인수되었고 현재 쌍용자동차의 한 축이 된다.
- ↑ 이 3인의 지위는 당시 지위 기준, 세 사람 모두 당시 기아의 원로 인사들이었다. 당장 김선홍만 해도 소하리 공장 건설을 지휘한 인물이고 공채 1기였으며 김명기 역시 회사 초창기부터 함께 해온 인물. 김선홍은 기아그룹을 책임졌으며, 김성웅도 뒤에 기산그룹을 책임졌다. 김명기는 1981년 10월에 이미 퇴사했고, 김성웅은 1993년 기아그룹의 자회사인 기산의 회장이 되었지만 1997년 IMF 사태 및 기아그룹의 부도로 물러났고, 김선홍은 1990년에 기아그룹의 회장이 되었지만 마찬가지로 1997년 IMF 사태 및 기아의 부도로 물러났다.
- ↑ 실제 완전 해제는 1989년에 이뤄졌다.
- ↑ 이미 대우/한국GM의 우려먹기는 옛날부터 있었다. 이 1.5리터 엔진은 계보가 좀 복잡한 게, GM코리아에서 실패한 시보레 1700의 1.7리터 엔진의 사이즈를 줄여 1.5리터 엔진으로 다시 만들어서 카미나에 장착하였다. 하지만 카미나는 불과 1년도 안 되어 망했고 이 엔진이 제미니에 달리는데, 당연히 연료효율이 나빠 인기를 못 얻었다. 그럼에도 제미니의 F/L인 맵시에 달렸다는 것... 맵시는 1.3리터 엔진을 얻어오고도 인기를 못 끌어 맵시-나(2번째로 만들었다는 뜻에서 가나다 순서의 "나"를 붙였다.)를 내놓으면서 결국 이 1.5리터 엔진을 버리고 XQ 엔진으로 교체한다.
물론 XQ엔진도 1.5리터이고 깡통 중형차에 들어갔다가 허벌나게 욕을 먹었다는 건 논외로 하자. 아참 그 후속인 론지 엔진도 똑같이 1.5리터에 후속 깡통 중형차와 중형 장수모델에까지 들어갔다 - ↑ 그런데 사실 현대에서 HD-1000라는 이름으로 비슷한 크기의 승합차가 생산되고 있었다. 다만 이쪽은 레저도 고려한 기아와 달리 영업용만 고려하고 만든듯 하다. 나름 잘 팔리고 있었지만, 역시 이 조치로 인하여 단종.
- ↑ 한국에서 최초로 생산된 DOHC 엔진 승용차였다.
- ↑ 당시 기아에서 생산하던 승용차 다 생산하지 말라는 소리 그 자체였다.
- ↑ 일본 이스즈에서 생산한 동명의 트럭을 들여와 팔았다.
- ↑ 미쯔비시 후소의 FK 시리즈를 도입한 이후 국내 실정에 맞게 개조해 팔랐던 트럭, 이후 91A 중형 트럭을 거쳐 메가 트럭으로 이어지는 현대차 중형 트럭 라인업의 제1호였다.
- ↑ 영국 퍼킨스와의 기술제휴로 1977년부터 4종의 디젤엔진을 생산하였으나 불과 5년도 채우지 못하고 강제로 공장이 문을 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