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시 참변

1 개요


1921년 6월 27일에 러시아아무르 주 자유시(러시아어명: 스보보드니[1])에서 한국 독립군 부대와 러시아 적군이 교전을 벌인사건.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 흑하사변(黑河[2]事變)이라고도 한다. 이 사건으로 독립군 960명이 전사하고, 1,800여 명이 실종되거나 포로가 되었다.

항일무장투쟁사(史) 최악의 실책. 만주 지역에서 무자비한 독립군 소탕 전쟁을 벌이던 일본에 밀려 후퇴하던 시기에 벌여져 치명적인 확인사살을 당해버렸다. 희생자의 규모 자체도 최악인 데다, 일본군과의 전투도 아닌 (이념에 따른) 내분이라는 점, 그리고 아울러 불완전했던 임시정부 내부를 분열시키는데 있어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 사건이란 점으로도 더 비극적이다. 이후 만주 지역의 항일 무장단체들이 오랫동안 통합한 연합 부대를 못 만들었다는 점에서도 최악의 사건으로 꼽힐 만하다.[3]

2 시대적 상황

세계사적으로 1차 세계대전 중이었으며 러시아는 러시아 제국 말기의 상황이었다. 원래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 관계는 러일전쟁 이래로 적대관계이다가, 1차 세계대전으로 동맹관계로 변화해, 러시아 제국은 연해주 지방의 독립운동 단체를 탄압, 대한 광복군 정부는 해체(1914년)된 상태였다.

그런데 1917년 볼셰비키의 10월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멸망하고 적백내전 기간에 돌입, 시베리아 연해주는 볼셰비키(적군)와 멘셰비키(백군)가 대립했고, 여기에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반란과 외국군의 무력간섭이 있었으며, 일본군까지 1918년 4월 시베리아에 출병, 러시아 적군을 공격하는 동시, 한인(韓人) 항일무장독립부대도 함께 섬멸하려 하는 등 카오스 그 자체였다.[4] 적의 적은 우리 편인데, 쟤네들끼리 동맹 맺어 다시 적. 그 적이 망하고 둘로 갈라졌는데 그 중 하나가 우리편이 된건가...아닌가? 일본만큼은 언제나 적

일단 한인(韓人)의병대는 일본군과 적대관계인 적군에 가담했는데, 일본군은 1920년 4월 4~5일 야간에 블라디보스토크의 모든 볼셰비키 기관 및 신한촌을 비롯한 한인 밀집지대를 습격했다. 이 사건으로 블라디보스토크의 볼셰비키 기관과 적군이 북쪽으로 후퇴함에 따라 연해주의 한인의병대도 같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이동하였다.

이 한인의병대는 일반적으로 "이만군대"·"다반군대" 등이 대표적인 무력군으로, 이만군대 사령관에는 김표돌, 부사령관 박개서·김덕보였고, 다반군대 사령관은 최니콜라이였다. 이들 연해주의 한인무장대들은 임시흑룡주정부가 극동공화국으로 강화하고 볼셰비키 세력이 커지자 자유시로 집결했다.

3 대한독립군단의 조직

1920년 봉오동 전투청산리 전투 등에서 독립군과 교전한 일본군이 대대적인 공격과 학살을 펼쳤기에, 전술한대로 한인무장대는 이를 피해 북쪽인 러시아 지역으로 이동 중 밀산[5]에서 독립군을 통합 및 재편성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

대한독립군단에 통합한 조직은 다음과 같다.

  • 북로군정서 (서일, 김좌진)
  • 대한독립군 (홍범도)
  • 대한독립단 (지청천)
  • 간도국민회 (구춘선)
  • 대한신민회 (김성배)
  • 의군부 (이범윤)
  • 광복단 (이범윤)
  • 혈성단 (김국초)
  • 도독부 (최명록)
  • 야단 (김소래)
  • 대한정의군정사 (이규)
  • 군비단 (김홍일)

대한 독립군단의 총재는 서일이었고 부총재는 홍범도·김좌진·조성환이었으며, 총사령관에 김규식, 참모총장에 이장녕이 추대받았다. 여단장에 이청천(지청천), 중대장에 김창완·조동식·오광선 등을 선임했다. 휘하에 1개 여단을 두고, 그 아래에 3개 대대·9개 중대·27개 소대를 편성했으며, 총병력은 3,500여 명이었다.

밀산에서 겨울을 난 대한독립군단은 1921년 3월 부대별로 이동을 시작하여 노령 연해주와 헤이룽장 일대에서 활동중이던 문창범, 한창해 등의 도움을 받아 만주-소련국경 하천인 우수리강을 넘어 안전지대인 이만(Iman, 달네레첸스크)에 집결하였다. 당시 연해주에 있던 대한국민의회[6]의 문창범과 자유대대의 오하묵 등은 자유시에 군대주둔지를 마련하여 독립군을 집결하도록 권하였다.

이에 1921년 1월 중순부터 3월 중순에 걸쳐 독립군들은 자유시에 집결했다. 간도지역의 독립부대인 최진동 등의 총군부, 안무 등의 국민회군, 홍범도 등의 독립군, 서일 등의 군정서가 있었으며, 러시아 지역의 의병대로는 김표돌의 이만군, 최니콜라이의 다반군, 임표와 고명수의 이항군·자유대대, 박그리골리의 독립단군 등이 있었다.

자유시 집결의 궁극적 목적은, 분산했던 독립군 부대들이 힘을 모아 단일한 조직 아래 대일항전을 전개하려는 것이었고, 적군을 도와 일본군을 몰아내어 자치주를 보장받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중 이만 시로 들어간 이청천 부대는 홍범도의 소개로 소련 적계군 한인부대장인 박일리아 연대장을 알고, 박일리아는 소련 교관을 한국독립군부대에 배치하여 전술법을 교육하는 등 독립군을 훈련시켰다.

4 분열과 갈등

그런데 여기서, 바로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독립군대 중 자유대대와 이항군 사이에 독립군 통수권을 둘러싸고 일어난 갈등이 문제였다.

이 때 자유대대는 고려공산당 중 이르쿠츠크(노령, 즉 러시아)파 고려공산당이 장악한 대한국민의회를 지지했지만, 이항군은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이 장악한 상하이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분열이 나타났고, 끝내 이르쿠츠크파와 상하이파 사이에 분쟁이 표면화 되었다.

먼저 이항군을 이끌었던 박일리아는 군통수권 장악을 위해 극동공화국 원동부(遠東部) 안의 한인부를 찾아가 이항군대는 자유대대로의 편입을 거부한다라 통고했다.

당시 극동공화국 한인부는 상해파의 이동휘계 인물인 박애(박마트베이)와 장도정 등이 장악했으니, 이들은 대한국민의회 및 자유대대측과의 협의도 없이 극동공화국 군부와 교섭하여 박창은을 총사령관, 그레고리예프를 참모부장으로 지정하여 자유시로 보내면서 이항군대사할린 의용대로 개칭하고 그 관할아래 자유시에 집결한 모든 한인무력을 두도록 했다.

하지만 1921년 2월 중순 자유시에 도착한 박창은 일행은 총사령관의 지휘권을 행사하려다가 실패해 총사령관직을 사임했고, 한인부는 그레고리예프를 연대장, 박일리아를 군정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두 사람은 즉시 군대관리에 착수하고 자유대대에 편입했던 종래의 이항군대와 다반군대를 마사노프로 이주시키고 간도군대도 강제로 이주시켰다. 그러나 자유대대는 끝까지 불응하여 장교들이 체포되었고, 무기들을 압수당하는 한편 이항군대와 다반군대에게 무장해제되고 지방수비대로 강제로 편입되었다.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독립군들의 군권이 일단 상해파를 지지하는 이항군의 승리로 돌아가자, 자유대대의 오하묵·최고려 등도 이르쿠츠크에 있던 코민테른(제3인터내셔널) 동양비서부에 가서 독립군의 통수권을 자기들이 가질 수 있도록 교섭했다. 이를 받아들인 동양비서부는 임시 고려군정회를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갈란다라시월린, 부사령관은 오하묵, 군정위원은 김하석·채성룡으로 임명하였다.

박일리아 등은 한인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이 위원회의 합법성을 주장하면서 극동공화국정부와 교섭했으나 실패하였다. 1921년 6월 6일 자유시에 도착한 갈란다라시윌린은 7일 자유시의 전부대를 소집하여 자신이 고려군정의회의 총사령관임을 선포하고, 8일 박일리아에게 군대를 인솔하고 자유시에 출두하라고 명령했다. 박일리아는 이를 거부하였지만 홍범도와 안무의 군대는 자유시로 돌아갔다. 박일리아는 고려군정의회에 계속 반항했다.

그러나 1921년 6월 27일 오후 11시 사할린 의용대의 연대장 그레고리예프도 칼란다리시빌리에게 투항하자, 칼란다리시빌리는 사할린 의용대의 무장해제를 결정했다. 28일 자유시수비대 제29연대에서 파견한 군대가 사할린의용대에 접근했고, 이후 제29연대 대장은 사할린의용대 본부에 들어가 복종을 종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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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 사변 현장 약도
(출처: 1989년 8월 15일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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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 참변이 일어난 슬라세프카역의 급수탑. 급수탑 뒤쪽에는 사할린 의용대의 진지가 있었다.)

그러나 사할린의용대는 무장해제 명령에 불응했고, 자유시수비대 29연대는 공격명령을 내려 무장해제를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독립군들이 목숨을 잃었고,[7] 전투 끝에 무장해제를 겪은 사할린 의용대는 전사자와 도망자를 뺀 864명 전원이 포로가 되었다. 교전 당시의 병력은 1,000여 명가량이었다. 그리고 특히 대한독립군은 러시아 적군 소속으로 편입되어 이르쿠츠크로 이동하게 되었다.

5 사건의 평가

자유시참변은 외부적으로 보면 러시아 적군의 포위와 집중공격에 쓰러진 참변이었지만, 내부적으로 한인 간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vs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분열과 권력투쟁이 불러일으킨 사건이라는 평이 있다. 그리고 적군(공산주의)에 가담한 한인(韓人)독립군 간 서로 총을 겨누는 일이 일어난 사건이라, 이 사건을 한인간 최초의 동족상잔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그 다음은 한국전쟁(...)

6 사건 뒤

이 사건으로 대한독립군단은 와해했고,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던 서일은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 많은 동지들이 사망하자 여기에 책임을 지고 두 달 뒤 밀산에서 자살했다. 이 때 대종교를 창시한 나철과 마찬가지로 폐기법(閉氣法), 즉 호흡을 멈추는 수련방법을 써서 자결했다고.[8]

당시 이범석·김홍일 등 많은 독립군은 이만으로 안 가고 그냥 만주에 잠복했었으며, 김좌진만은 이만까지 갔다가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기 전에 탈출하여 만주로 돌아왔다.

이 사건이 독립운동계에 사상적으로 끼친 영향은 엄청났는데, 바로 매카시즘이 일어나기에 앞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극도의 반공주의를 확산시키는 데에 기여했다. 러시아 적군은 일본군을 상대로 싸우니까 우리편인 줄 알고 손을 잡았는데 배신을 겪었다는 감정[9], 공산당은 상종할 놈들이 아니라는 인식, 공산당은 분열[10]을 일삼는다는 인식을 심어준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김구[11], 김좌진, 이범석, 장준하가 반공주의를 고수하는 계기가 되었고, 공산당과 협력하자는 입장을 보인 김원봉, 여운형 등의 독립운동가들과 연대를 거부한 까닭 가운데 하나라고(...). 이러한 공산당 자체의 분열과 민족지도자의 반공정서는 훗날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 사건으로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은 러시아 적군에 편입했다가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를 당했고 말년에 극장 수위장 등으로 있다가 광복 2년 전 생을 마감했다. 청산리 전투의 영웅, 김좌진 장군은 만주로 돌아와 민심을 얻기 위해 방앗간 등을 운영하며 공산주의자들을 뺀 아나키스트[12]도 받아들이면서 지도자로 활동했지만, 위기 의식을 느낀 공산주의자들에게 피살됐으며 북로군정서 등의 독립운동가들도 반공을 고수하다 역시 대부분 피살을 겪어 몰락했다. 양세봉 장군은 공산주의자의 협력 요청에 민족주의자들은 당파는 만들지만 사람을 죽이지는 않는다며 민족주의자 보다 못한 공산주의자에게는 협력을 거부했다.

7 관련 항목

  1. 러시아어 Свободный는 한국어로 '자유로운'이라는 뜻이다. 한글로는 러시아어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보통 '스보보드니'로 적지만 악센트 등을 반영한 실제 발음은 '쓰바봇늬'에 가깝다. 러시아 아무르 주에 있는 자유시는 1920년 2월 볼셰비키 적군이 백군을 몰아내고 점령한 알렉세옙스크란 도시로, 소비에트 정부는 해방구의 상징으로 삼고자 스보보드니로 개칭했다.
  2. 흑하는 아무르 강을 지칭하는 말이다.
  3. 만주 지역의 3부였던 신민부, (대한통의부가 분열된) 참의부, 정의부는 민족유일당 운동에도 불구하고 분열되었으며,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혁신의회)와 정의부 주도의 국민부/조선혁명당/조선혁명군(양세봉)의 세력으로 분열되었다. 막판에 좌우합작의 일환으로 임시정부(한국독립당)의 한국광복군조선민족혁명당 휘하의 김원봉조선의용대가 합쳐지긴 했으나 의용대의 대다수는 조선의용군으로 넘어가 버렸고, 만주지역엔 빨치산 성향의 조선인민혁명군이 있었다.
  4. 이때 발생된 것이 봉오동 전투청산리 전투, 간도 참변.
  5. 미산시 密山市라고도 한다. 현재 헤이룽장 성 지시 시에 있다.
  6.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문창범이 중심을 해 설립한 임시정부.
  7. 사망자의 대부분은 전투 당시 사살을 겪었지만 아무르 강을 헤엄쳐서 도망치려다 익사하거나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한 자도 소수 있었다.
  8. 서일은 고위급 대종교인으로 진작에 대종교의 3대 도사교(道司敎), 즉 3대 교주를 하라고 지목받은 터였다. 다만 서일은 도사교를 하면 독립운동에 지장이 있다는 까닭으로 5년간만 미뤘는데, 자유시 참변이 일어났다. 대종교에서는 서일을 사후에 추존해서 호칭은 도사교와 같이 한다. 서일을 대신해서 단애 윤세복이 3대 교주에 올랐다.
  9. 따지고보면 코민테른이 임시 고려군정회를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갈란다라시월린을 임명해 무장을 해제시켰으니(...) 한편 일본측이 독립군 무장해재를 위해 볼셰비키 세력에게 외교공세를 펼쳤고, 볼셰비키 또한 급선무로 일본과 마찰을 피하면서 러시아 영내의 각종 군 세력들(조선의 독립군까지 넣어서)을 무장해제하여 국내정세를 안정시켜야 했다.
  10.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과 상하이파 고려공산당 간의 다툼
  11. 백범일지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엄청나게 까는 반공주의자가 됐다.
  12. 이 탓에 김좌진이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라는 소리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