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Attachment/KimJwaJin.jpg | |
이름 | 김좌진 |
아호 | 백야(白冶) |
출생연도 | 1889년 |
사망연도 | 1930년 |
출생지 | 충청남도 홍성군 |
사망지 | 중국 길림성 |
활동분야 | 독립운동, 교육, 군사 |
업적 | 청산리 전투 |
섬네일을 만드는 중 오류 발생: 파일이 없음 |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重章) 수여자 | |||
강우규 | 김구 | 김규식 | 김좌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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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김좌진(金佐鎭, 1889년 12월 16일[1] ~ 1930년 1월 24일)
청산리 전투의 지휘관으로 조선 말 ~ 일제강점기의 교육인, 군인, 독립운동가이다.
삼천리 금수강산에 왜놈이 웬 말인가. 단장의 아픈 마음 쓸어버릴 길이 없구나.
1 생애
본명은 김좌진, 본관은 (신)안동김씨, 자는 명여(明汝), 호는 백야(白冶)이다. 충청남도 홍성군 출신.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에서 명문 양반가의 3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3살 때 부친을 여의었지만, 넉넉한 재산으로 경제적으로 문제는 없었다. 모친으로부터 엄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첫째 김경진이 서울에 양자로 가면서 차남인 김좌진이 장남 역할을 했다. 나이 17세에 노비들을 해방시키며 전답을 나눠주고 자신의 집에 학교[2]를 세우는 등, 교육사업에도 활발히 펼쳐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사례로 꼽힌다. 1905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지만 대한제국 군대해산으로 1907년 학교를 열고 자기집의 노비를 해방해 전답을 나누어주었다.
1911년 친척뻘 되는 인물에게 자금을 받으러 갔다가 변절한 친척뻘의 뒤통수로 미리 잠입한 일본 경찰에 잡혀 서대문형무소에 2년 6개월 수감되었다.
1918년 만주에 망명해 대한 광복회 부사령을 맡았다. 대한 광복회의 와해 이후 북간도 지역으로 건너가 북로 군정서군을 이끌었으며, 이후 청산리 전투(1920년)에서 독립군 연합 부대를 이끌었다. 이후 밀산을 거쳐 북으로 이동하다가 다시 남으로 내려왔다. 이 때 북으로 간 군대들은 자유시 참변(1921년)에 휘말려 무척 큰 피해를 입은 탓에 그나마 다행이라는 평. 이후 1920년대 중후반 북만주 지역의 독립 운동을 이끌었다.
자유시 참변으로 반공노선으로 전향한 김좌진은 참변으로 불모지나 다름없는 만주에서 다시 시작하면서 방앗간 등으로 동포들에게 인심을 얻으면서 한족총연합회 주석 등에 만주의 독립운동에 지도자로 활약했다.
1925년 신민부(초기엔 한족연합회), 1929년 한족총연합회 등을 창설하고 활동했는데 이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을 배제하고, 항렬이 같은 아우뻘인 아나키스트 김종진[3] 등 아나키스트들을 받아들였다. 그에 위협을 느낀 공산주의자 박상실에 의해 1930년 41살의 젊은 나이에 피살됐다. 유언으로 "할 일이….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러워서…."라는 말을 남겼다.
그의 유해는 아내 오숙근이 3년 뒤에 만주로 잠입해 수습한 후, 홍성에 가명으로 밀장되었다가 1957년에 전답을 노비들에게 나눠주면서 어머니의 이름으로 남겨진 선산 보령에 김두한에 의해 안장되었다. 1999년 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가 발족되어 여러 교육사업 활동을 펼치고 있다.
김좌진이 김두한의 친부이고전 새누리당 국회의원(19대) 김을동의 친조부라고 한다.
2013년 8월, 대한민국 해군 손원일급 잠수함 4번함이 김좌진함으로 명명되었다. 증손자 김도현은 육군 병장으로 전역한 뒤 공군 부사관이 되었다가 또 다시 해군 장교로 임관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로, 증조부의 유지를 잇고 있다.#
2 김좌진은 왜 암살되었나?
지금까지 김좌진의 암살은 단순히 공산주의자들의 암살로 여겨졌으나 암살 사건을 연구한 학자들은 그 뒤에 꽤 복잡한 배경이 있다고 보고있다.
박상실은 김좌진이 운영하던 방앗간에서 일하던 일꾼이었는데 김좌진을 암살한 뒤에 도망쳤다. 김좌진의 장례식에서 밝혀진 바로는 박상실은 고려공산청년회의 회원이자 재중 한인청년동맹원으로 알려졌다. 김좌진의 측근들은 박상실이 혼자서 김좌진을 암살했을 리가 없고 그 뒤에 배후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는데 그 배후로 지목된 인물은 김봉환으로, 그는 한때 김일성이라는 가명을 쓰고 있었던 탓에 북괴의 괴수 김일성이 김좌진 암살의 배후라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그러나 이후 연구를 통해 김봉환과 김일성은 다른 인물임이 밝혀졌다.
중국 자료가 공개되면서 박상실의 정체도 드러났는데 박상실은 가명이며 진짜 이름은 공도진, 혹은 이복림이라고 한다. 이복림과 박상실이 동일인물인지를 밝히는 명확한 증거는 없으나 연변대 교수 김동화는 두 사람이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공산주의자들이 김좌진을 암살한데 대해서는 김좌진이 공산주의자들을 배제하고 아나키스트들을 받아들이면서 만주내 한인들에게 영향력을 높여가자 공산주의 전파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그를 제거했다는 것이 일반적 설명이다.
그러나 공산주의계 생존자 일각에서 김좌진이 일본과 내통하여 공산주의자들을 일본에 팔아넘겼고 이 때문에 김좌진을 암살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당시 만주에서 활동하던 조선공산당 ML파의 일원이었던 지희겸은 "김좌진이 하얼빈 총영사관 경찰국장 마츠시다와 밀담을 나눈후 공산당원들을 많이 잡아 가둬죽였기 때문에 암살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공산주의계 생존자들의 주장들은 잘못된 소문에 근거한 것이라는게 일반적이다. 당시 일본은 중국 군벌들에게 압력을 가해 김좌진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실제로는 김봉환이 일본과 밀통했다라고 보고 있다. 즉, 지희겸이 주장한 김좌진과 마츠시다의 밀담 운운은 실제로는 김좌진이 아니라 김봉환이 그랬다는 것. 학자들은 김봉환이 일본과 밀통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으나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보면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있다. 김봉환은 자신이 공산주의자들을 일본에 팔아넘긴걸 김좌진에게 떠넘겼고 김봉환의 주장을 그대로 믿은 조선공산당은 박상실(공도진)을 보내 김좌진의 방앗간에서 일하게 하면서 기회를 엿보다가 그를 암살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 주장을 입증할 명백한 증거가 없다는 문제는 있다.
동료 독립운동가들의 공을 상습적으로 가로채어 원한을 샀다는 설도 있다. 현재도 연변 조선족 자치구 거주 조선족들은 김좌진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다.
신용하 교수는 적기단의 배후설을 주장한다. 신용하 교수 기사
3 흑역사: 신민부 군정파의 테러
흑역사가 있는데 김좌진 장군은 신민부에서 군정파 지도자였는데 군정파는 세력상 신민부에서 주류 세력이었다. 문제는 군정파가 지역에서 테러를 벌이고 주민들을 강압했다는 것이다. 김좌진 장군 암살 사건 이전에 일어난 일이지만 이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 있지 않다.
3.1 빈주현 테러사건
김좌진 장군을 지도부로 하던 신민부 군정파를 민간인 테러를 벌인 흑역사가 있다. 대표적인 사건이 빈주현 사건이다. 이 지역의 재만동포들은 대부분이 중국인의 소작인이라 생활이 빈곤하였는데 군정파는 모금을 강제했다. 빈주현 농민들은 신민부에게 탈퇴를 결의하고 통보했는데 군정파가 이들의 회의현장을 습격해 농민들을 살상한 사건이다. 이걸로 김좌진 장군은 폭군, 마왕이라는 별명까지 얻는다. 자세한 건 빈주현 테러사건 문서로.
김좌진 암살이 이것에 연관되어있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에 대해선 아직 전문적인 연구가 없어서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리고 빈주테러사건과 김좌진 장군 암살은 년도가 5년이나 차이가 난다. 직접적 영향이라하기에는 기간이 길다.
3.2 간민호회 테러와 최계화 암살
신민부 군정파는 간민호회에 대한 테러를 하기도 했다. 간민호회는 '영안현 입적간민호회'를 가르키는데 당시 중국정부로부터 입법, 사법, 행정 등의 권한을 획득해 실질적인 자치기관의 면모를 갖춘 곳이라 한다. 구영필의 간민호회와 김좌진의 신민부는 시대적 상황과 이념적 차이 같은 여러점으로 인해 대립을 하였고 대립을 보여주는 기록은 수없이 많다고 한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간의 대립도 있으나 영고탑 일대 주민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강제 징수하려는 신민부와 이에 저항하는 간민호회 간의 갈등도 있었다고 한다.[4]
옌볜대 박창욱 교수는 ‘1928년 길림성 동부지방상황 기록문건’이란 걸 공개했었는데 신동아에 의해 소개된 내용을 재인용한다.
신민부는 영안 지방을 자기 세력범위에 넣고 군자금을 모으고 자기 단체 세력을 뻗치는 데 매우 필요한 지방으로 느꼈다. 때문에 간민호회를 타도하고 전 영안을 장악하기 위하여 대정 14년 9월 먼저 보안대를 파견하여 길에서 간민호회 수령 최계화(구영필)를 암살하는 것으로, 기타는 위협, 공갈하였다. 영안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들은 신민부의 이러한 태도에 질겁을 먹고 이전에 구영필을 수령으로 한 경상도파는 신민부와 연계를 갖고 있는 평안도파에 눌리게 됐다.신민부에는 3개 보안대가 있었는데, 문우천을 대장으로 한 제3대가 영안지방을 관리했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영안, 해림, 수문하와 기타 성시에 출몰하면서 군자금을 강제로 징수했다(제3보안대장 문우천은 구영필을 암살하였다는 혐의로 현(縣)공서에 구류되어 지금 심문을 받고 있다).’
-1928년 길림성 동부지방상황 기록문건, http://shindonga.donga.com/3/all/13/104317/2 것을 재인용 재인용
3.3 연길도윤 테러사건
1926년 12월에선 신민부원들이 군자금을 강제하다 응하지않는다는 이유로 재만동포 다섯명을 살해한 테러사건이 일어났다.
신민부원체포중국연길도윤은 훈춘 방면에서 활동하는 신민부원들이 군자금을 여구하다가 응하지 안는다고 조선인다섯명을 살해한일이 잇슴으로 각현에 톄포령을 나리엿다. 엿다바일전에 잡히엿다더라(모처착뎐)
- 동아일보 1926.12.14
4 작품에서 김좌진
4.1 황야
김영수 극작가의 1947년 연극인 '황야'가 극화되었다. 배우 서일성이 김좌진 역을 연기하였다.
4.2 일송정 푸른 솔은
이장호 감독의 1983년작 영화 <일송정 푸른 솔은>은 청산리 전투를 다룬 영화로 배우 김기주가 김좌진 역을 연기하였다. 청산리 전투 참전자 마지막 생존자였던 이우석의 영상으로 마무리 된다.
4.3 야인시대
야인시대에서 최동준이 연기하였다. 1화에서 큰할머니와 원노인을 따라 독립군 기지까지 찾아온 두한을 만나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후 사회주의자 박상실에게 살해당해[5] 다시 만나는 일은 없게 되었지만, 그와의 만남은 두한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4.4 북만벌, 칼을 가는 나그네 - 백야 김좌진 장군
장형일 감독이 연출하였고, 배우 이일재가 김좌진 역을 연기하였다.
- ↑ 음력으로는 11월 24일. 인터넷상에서는 음력인지 양력인지 구분하지 않고 날짜만 적어서 혼돈케 하는 경우가 많다.
- ↑ 현재 충남 홍성군 갈산면에 위치한 갈산중학교 및 고등학교의 자리가 호명학교의 자리였고, 당시 90여칸이나 되는 김좌진의 자택을 학교로 사용하였다.
- ↑ 김종진도 1년 후에 공산주의자들에게 피살되었고, 김좌진을 중심으로 1명씩 피살되면서 와해됐다.
- ↑ http://shindonga.donga.com/3/all/13/104317/3
- ↑ 처음에 김두한은 김좌진이 일본군에게 피살당한 줄 알았으나, 백의사에 의해 뒤늦게 사회주의자 박상실에게 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 즉시 조선청년전위대를 탈퇴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