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조

許稠(1369년 - 1439년 음력 12월 28일)

1 소개

조선 초기의 문신 관료. 자는 중통(仲通)이며 호는 경암(敬菴)이다. 본관은 하양(河陽)이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고려 말 성리학을 들여온 학자 문성공 안향의 사위 허수(許綏)의 증손자. 즉 안향의 외고손자이다. 세종 시대의 재상들 중 황희맹사성에 비하면 대중적 인지도는 낮은 편이지만, 사실 세종 치세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2 꼬장꼬장한 재상

판도판서를 지낸 귀룡의 아들로 조선 태조의 중신이었던 권근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1390년, 공양왕 2년에 과거에 급제해 본격적으로 관료생활을 시작했는데 조선이 개국하면서 그대로 조선 개국에 동참해 좌보궐과 봉상시승을 거쳐 태조 6년에는 공자에 대한 제례인 석전제례를 개정하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예전과 법률에 상당히 조예가 깊었는데 그만큼 꼬장꼬장 하기로도 악명(?)이 매우 높은 인물이었다. 정종을 거쳐 이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한 뒤에도 허조는 감히 먼치킨 태종에게도 직언을 아끼지 않아서 태종은 처음에는 허조를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하지만 황희님께 직언할 강직한 신하도 곁에 두셔야 함다라고 허조를 두둔해서 결국 태종이 인정해 이후 이조정랑과 예조참의 등의 직책을 역임했다. 예조참의 시절에는 전국에 학당을 건립해 유교 보급에 힘썼고, 고려의 불교식 제례를 일소하고 유교식 제례를 백성들에게 보급하는데 노력했다.

태종이 선위를 하면서 세종대왕에게 이 사람은 내 주춧돌이라고 했을 정도였다고 하니 태종도 결국 그 강직한 성격을 높이 사서 세종에게도 중용할것을 추천했다고 볼 수 있다.

세종시절도 중용되었는데 사실 허조는 세종에게도 그리 고분고분한 신하는 절대 아니었다. 압록강 유역의 여진족을 정벌하는 파저강 정벌 때도 허조는 끝까지 반대했을 정도였고, 세종이 지나치게 앞서나가는 정책에 황희 이상으로 브레이크를 걸며 반대했던 신하였다. 그럼에도 세종은 그런 허조를 불쾌하게 여기거나 멀리하지 않고 되려 더 중용했으니 참 대단한 먼치킨들의 시대였다고 할만한듯? 세종시기에는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의 중직을 거쳐 좌의정까지 직위가 올랐다.[1] '신속육전'이라는 법전을 만드는데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고 전해진다.

별로 문제가 될만한 일을 한 사람은 아니지만 세종대왕 항목에도 적혀있듯 이 사람이 주장했던 수령 고소 금지법은 현대에 논란이 되기도 한다.[2]

3 청백리

허조는 자기관리가 매우 철저한 관료였고 부정부패와는 정말 완전히 담을 쌓은 신료였다. 야사에서는 청백리로 유명한 황희조차도 실제 역사에선 부정부패가 있었던 반면[3], 허조는 털어도 정말 먼지도 안나오던 인물이었다. 또한 젊은 관료들을 볼 때마다 "자네는 인사도 안 하나?", "자네는 복장이 그게 뭔가?" 등의 별 사소한 것을 가지고 갈구기도 해서 젊은 관료들은 모두 허조를 싫어했다고 한다.

실록에는 하나도 언급이 없지만, 서거정의 <필원잡기>에는 허조가 척추가 굽은 장애인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며갈굼당한 원한으로 디스차원에서 남긴 기록일수도있다 알아서 판단하자, 여기에다 식사도 허기를 면할 정도로만 먹은 탓에 늘 깡마른 체격을 유지해서 말라깽이 재상이나 수응재상(瘦鷹宰相, 송골매 재상)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신참들을 갈구는 매의 눈[4] 그 외 '주공(周公)'이라는 별명도 있었는데, 예학의 전문가였던만큼 공식 석상이나 사석에서 말할 때마다 주례를 자주 들먹여서 비아냥거리는 의미로 붙은 별명이었다고 한다.

여색도 멀리한 나머지 세간에는 허조를 게이 부부관계도 모를거라고 놀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자 허조는 내가 부부관계를 모르면 내 아들들(허눌과 허후[5])은 하늘에서 뚝 떨어졌겠냐라고 웃으면서 반박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런 철저한 청백리 기질 때문에 다른 신료들의 부정부패 사건에 엄격한 원리원칙을 강조할 수 있었다. 조말생이 거액의 뇌물로 치부한 사건이 드러났지만 세종이 파직하는걸로 사건을 덮으려 들자 가장 강력하게 맞서서 조말생의 처형을 주창하기도 했다. 사실 조선의 당시 국법상으론 일정 이상의 뇌물수수가 발각되면 처형당하는게 원칙이었다.

형님인 허주도 먼치킨이었는데 완전기억능력을 소유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셜록 형제? 허조가 어려운 일이 생기면 늘 형님인 허주에게 달려가서 물었는데 절대기억능력과 철저한 공사구분으로 허조를 도와주었다고 한다.

참고로 허주는 허조보다 더 엄격한 사람이었다. 허조가 형 대신 제사를 지내면서 제사 방식을 조금 바꿨는데 허주가 이걸 듣고 "이렇게 멋대로 제사 방식을 바꾸는 건 집안 어른들과 조상님들을 무시하는 행동이다!"라고 화를 내고는 문을 걸어 잠그고 허조를 만나주지 않았다. 그 천하의 허조가 형의 집 문 밖에서 며칠을 빌고 나서야 겨우 동생을 용서해 주었다고. 카노사의 굴욕? 그래서인지 허조는 늦게나마 정승 반열에 올랐으나 허주는 정승이 되지 못했다.

4 죽음

1439년에 세상을 떠났다. 공교롭게도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드는건 보지못하고 세상을 떠났는데 이게 오히려 다행일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허조가 훈민정음 반포시에도 살아있었다면 아마 최만리보다 더 강력하게 훈민정음 반포를 반대했을 공산이 크다. 허조 입장에선 훈민정음이 나오기 전에 세상을 떠나서 영구까임권을 얻지 않은게 다행일지도?

죽기 직전에 유언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태평한 시대에 나서 태평한 세상에 죽으니, 천지간에 굽어보아도 부끄러운 것이 없다. 이것은 내 손자가 미칠 바가 아니다. 내 나이 70이 지났고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으며 성상의 은총을 만나 간언하면 행하시고 말하면 들어주시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

요약하면 "태평성대에 살다가 죽으니 정말 행복하다. 살 만큼 살았고, 재상까지 올라도 봤고, 말 하는거 잘 들어주는 임금 모셨으니 여한은 없다." 정도의 의미다. 세종과 언쟁을 많이 벌이기는 했지만 세종에 대한 충성은 변함없었던 모양. 애초에 이 시대에는 열심히 간언을 하는 것이 충성의 상징이었고 지금도 무관하지 않다. 사랑의 매 드립이 괜히 나오려고

허조가 죽던 날 허조의 형 허주가 허조의 방에 들어가 보니 허조는 혼자 웃고 있었고, 이어 허조의 부인이 들어가자 허조는 여전히 빙그레 웃고만 있었으며 아들 허후가 옆에 앉아 보고 있어도 웃고만 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상하게 여긴 가족들이 허조를 자세히 살피니 허조는 웃음을 띤 채로 숨을 거둔 뒤였다고 전해진다. 유언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걸맞게 만족스러운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하며 운명한 듯하다.

5 그 외

철두철미한 원칙주의자였던 허조는 언제나 바른말과 쓴소리를 하는 일에는 굽힘이 없었는데, 심지어는 중국 명나라의 황실조차 비판한 일이 있었다. 영락제가 죽은 후에 그의 비빈이었던 한씨가 함께 순장당하자 "인형이라도 순장하면 대가 끊어지는 법인데, 중국의 일이라고 해도 본받지 못할 일이다"라고 하였던 일이 바로 그 것.[6]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실제 역사처럼 철저한 원칙주의자로 묘사되며, 기록을 참고했는지 깡마르고 꼬장꼬장한 인상을 하고 있다. 박시백은 이 사람의 얼굴을 국회의원 조순형을 모델로 그렸다고 한다. 조순형은 30여년 동안 정치인으로 활동하면서 7선 의원의 영예를 누리다가 2012년에 정계에서 은퇴하였는데, 실제로도 꽤 날카로운 인상에 "미스터 쓴소리"라는 별칭으로 불렸기에 원칙주의자인 허조와는 매치되는 부분이 제법 있다.

대왕 세종에서는 김하균이 배역을 맡았다. 깡마른 체구와는 거리가 멀지만 역사상의 인물처럼 보수적이고 엄격한 신료로 등장한다. 극중에서는 어쩐지 맹사성과 같이 다니는 장면이 많은 편. 말버릇으로는 '닥치고 내 말 잘 들어!'가 있다.(...) 자기보다 낮은 직위의 인물이건, 자기보다 높은 사람이건 가리지 않고 사용된다.[7] 물론 세종만은 예외지만.

75화에서의 대사가 꽤나 명대사에 속한다.

"닥치고 내 말 잘 들어! 심정적으로,나 또한 옷을 벗고 싶은 심정이야,인사 담당관으로서,너 같은 놈을 관직에 앉힌 수치 때문에 말이야,
죄인이 누구이건 상관 없이 넌 파직이야,왜? 관원으로서 자격이 없으니까."

"중앙에 보고라는 걸 할 땐 말이야,특히 이런 살인사건 같은 경우엔 말이지,
니가 할 수 있는 모든 조사가 다 끝난 연후, 그 때 하는 거다,
백성의 목숨을 최소한 니놈 목숨만큼 귀히 여겨야,니가 관원이라는 얘기야!"오오

그 외에도

(황희의 서경권 발동으로 의견의 모아진 후) 난 반대에요, 서경권 발동 당장 중지 해야합니다.
조말생(정동환 역): 자중 하세요 예판
허조:닥치고 내 말 잘들으세요 도덕적인 이유로 황희를 잘라야 한다면 우리가 먼저 옷 다 벗어야돼요, 젊은 날의 실수만 패륜이랍니까, 개인적 약점 악용해 정적을 자르려고한거 이거도 관원으로써 저지르지 말아야 할 패륜입니다.
허조:그렇지 않소이까 병판?
조말생: 황희가 얼마나 위험천만한 인사인지 설명을 해야 합니까.
허조:그건 빈청에서 머리 터지게 싸우면 될 일이에요.
허조:일이 터지기도 전에 먼저 술수 부터 부리려고하니 금상과 젊은 관원들이 우리 중신들 모두를 꼰대 취급하는 겁니다.
허조:위험 천만하고, 한때 부도덕 했다 해도, 난, 황희는 꼭 중용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조말생:(내려놓은 두루마리를 보며) 뭡니까 이게?
허조:황희가 금상의 특명을 받아 만들던 인사안 이에요.
조말생:꽤나 마음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허조:그 반대에요. 이거, 아주 부실해요. 곳곳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어요. 허나, 이건 황희가 무능한탓이 아니에요 조선에 인재가 없는 탓 이에요, 나라세운지 30년, 오늘의 조선엔 여전히 인재가 부족합니다.
허조:지금 이 자리는 말이에요. 황희가 아니라 우리들 모두의 서경의 자리입니다. 우리들은 적어도, 능력 있는 인재를, 그것이 설령 정적이라고 할지라도, 인정할 도덕성을 가지고있다고 보는데,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잘 보면 명대사마다 입버릇인 "닥치고(하략)"이 들어가 있다.(...) 단 절대로 조선의 관료, 그것도 모든 행실과 말 하나하나를 조심해야 하는 유학자가 조정에서 내뱉을 말은 아니다. 물론 드라마 자체가 조선시대라기보다는 대놓고 현대 정치를 묘사한 것 같은 드라마긴 하였지만.
  1. 이조판서로 있던 중 종묘의 춘향대제에 찬작관(제를 주관하는 왕의 곁에서 잔을 들고 있는 관리)을 맡았는데 세종에게 잔을 주고 물러나다 계단에서 넘어지는 일이 생겼다. 국가의 큰 제사를 망쳤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세종은 "이조 판서가 상하지나 않았느냐."고 묻고 계단을 넓히도록 했다. 세종이 허조를 아낀 정도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2. 당대에는 엄연히 필요한 법이었다. 이 법이 악법이라는 인식을 현대에 퍼뜨린 사람은 정조독살설로 유명한 이덕일이다.
  3. 사실 황희는 청백리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본문 참조
  4. 송골매 재상의 별명 어원에는 허조가 깡마른 송골매처럼 날카로운 외형이었다는 것에서 땄다는 설과 젊은 관료들을 사정없이 갈구는 게 마치 매가 사냥감을 공격하는 듯해서 붙었다는 설이 있다. 물론 둘 다일 수도 있다. 장애로 인해 구부정한 자세로 손아랫사람을 폭풍갈굼하며 째려본다면 매를 연상할 수도 있을 듯.
  5. 계유정난수양대군이 제수한 관직을 거절하고 황보인, 김종서 등에 동정적이었던 괘씸죄로 처형당했다. 아들도 아버지처럼 인간적으로 정말 멋지다.
  6. 이는 순장제도를 비판한 공자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공자는 사람을 망자와 함께 순장하는 것은 물론, 사람을 본떠서 만든 용(俑)을 순장하는 것 조차도 부정적으로 보면서 "용을 처음으로 만든 자는 대가 끊어지리라"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7. 심지어 명나라 사신에게도 시전하려고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