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선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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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선왕후(仁宣王后, 1618년 ~ 1674년)는 조선 제17대 왕 효종의 비로 1631년 봉림대군과 가례를 올려 풍안부부인(豊安府夫人)에 초봉되고, 병자호란 후 봉림대군과 함께 선양에서 8년간의 볼모생활을 했으며 돌아온 후에 남편 봉림대군이 세자가 되면서 세자빈이 되었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왕비에 진봉되었다.

2 생애

현종의 어머니이며 아버지는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 장유(張維)이며, 어머니는 영가부부인 김씨[1]이다. 1618년(광해군10) 12월 시흥 장곡동(당시 안산군) 안골마을에서 출생하였으며 1631년 14세에 봉림대군(鳳林大君:효종)과 혼인하여 풍안부부인(豊安府夫人)에 봉해졌다.

병자호란소현세자 내외와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가 8년간 심양에서 기거하였을 때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많이 뒷바라지를 하였고 그곳에서 현종을 낳았다. 이후 소현세자가 청나라의 볼모에서 풀려나 귀국하였으나 독살로 의심되는 의문사를 한 후에 봉림대군이 귀국하여 세자로 1645년 9월 책봉되었고 장씨는 1646년 3월 소현세자의 아내 민회빈 강씨가 사사된 후 세자빈으로 책봉되었으며 1649년, 인조가 승하하고 세자인 봉림대군의 즉위로 왕비에 진봉되었으며 2년 후에 정식으로 왕비가 되었다.

효종 못지않은 북벌론 지지자였던 인선왕후는 효종과 더불어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굿판을 근절하고 금주령을 내리는 한편 이불의 색을 적색과 청색의 2가지 색으로 통일하여 전시에 군복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준비하였다. 이렇게 준비된 재원은 모두 북벌 계획에 사용되었다.

이후 1659년 효종은 머리에 난 종기을 맞다가 피를 너무 많이 쏟아 재위 10년만에 사망하고 이로서 북벌론은 물거품이 되었고 아들 현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는 세력이 커진 조정대신들에 의해 실권에서 멀어져 갔으며 왕대비로서 효숙(孝肅)의 존호를 받아 효숙왕대비(孝肅王大妃)가 되었다. 소생으로는 일찍 죽은 두 아들(대군),현종 그리고 '숙안(淑安)숙명(淑明)숙휘(淑徽)숙정(淑靜)ㆍ숙경(淑敬)'이라는 호를 가지고 있는 6명의 공주를 두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는 1남 5녀로 기록되어 있다. 인선왕후는 몸이 무척 뚱뚱했다고 전해지며 남편 효종의 북벌 계획의 수행을 못 보고 1674년(현종 15) 57세로 사망하였다.

그러나 그녀가 죽었을 때는 인조의 계비로써 자신보다 6살 어린 시어머니었던 자의대비가 생존해 있던 상황이라 남편인 효종의 사망 이후 문제되었던 예론이 또다시 불거졌고, 결국 인선왕후의 사망은 제2차 예송논쟁(禮訟論爭)의 시발점이 되었다.[2]

효종이 묻혀 있는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 영릉(寧陵)에 쌍릉으로 안장되어있다.

3 드라마에서의 인선왕후

인조 대를 배경으로 한 JTBC 사극 꽃들의 전쟁에서는 극중 배경이 삼전도의 치욕~효종 즉위 직후까지이기 때문에 비중이 매우 작은 봉림대군부인, 세자빈으로 나온다. 특별한 역할이나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소현세자 사후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되고 세자빈이 되었을 때 조 귀인과 대립하지 않고 유순히 말을 들어주는 모습을 보이며 극 막판에 모두가 조 귀인을 죽이자고 할 때 "숭선군의 생모인데 죽이자는 것은 불쌍하다"는 대사를 했다. 동정심이 많은 캐릭터로 설정한 듯 하다.

현종 대를 배경으로한 MBC 사극 마의에서는 현종의 어머니인 왕대비로 나오며, 중신들의 무서움을 알기에 전반적으로 중신들을 터치 안 하고 그들의 뜻을 따르자는 입장이라 아들과 충돌이 잦다. 그리고 사사건건 백광현에게 딴죽을 걸고 그저 천하다는 이유로 왕의 말도 다 씹어대며 왕실 사람들을 구한 건 무시하고 무조건 탓하기만 해서 시청자들에게 어그로를 끌었다. 대장금 땐 안그랬는데 마의에선 완전 발연기

나중에는 자신의 병을 고친 백광현에게 호의를 베푼다.

드물게 병자호란~효종대를 배경으로한 KBS 대하드라마 대명<1981>에서는 세자빈 시절부터 그려지는데 원미경씨가 열연하였다. 세자빈시절부터 병자호란의 강화도 피난, 심양볼모시절, 귀국후 왕비시절 모두를 연기하였다.

1981년 사극치고는 야외촬영이 많았고, 전투장면이 많았던 사극이었다. 효종으로 故 김흥기씨가 열연하였다. 소현세자백윤식, 민회빈 강씨 역에 김영철 씨의 부인인 이문희, 인조 역에 故 김동훈, 임경업역에 백일섭, 김자점역에 故 김순철씨가 출연.

4 참고자료

두산백과사전
한국어 위키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 병자호란 당시 순절한 김상용의 딸이자, 김상헌의 조카딸이다
  2. 1차 예송논쟁에서는 서인이 승리하여 집권하지만 2차 예송논쟁에서는 1년상을 주장했던 남인이 승리하여 집권하게 된다. 이때 남인의 집권은 즉위 후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나 왕권이 안정되었던 현종이 서인과 송시열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남인의 세력을 키워 조정을 균형상태로 맞추기 위한 의도였다고 보는 해석이 많다. 기록을 보면 남인보다 현종 자체가 서인의 주장과 대립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자세한 것은 예송 논쟁항목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