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용

1 조선 중기의 관료

이름김상용(金尙容)
생몰년도1561년 ~ 1637년(76년)
사망원인화약을 이용해 폭사로 순절

서울 출생. 본관은 안동. 자는 경택(景擇), 호는 선원(仙源)·풍계(楓溪)·계옹(溪翁)이다. 청음 김상헌의 형이다. 장유의 장인으로,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의 외조부이기도 하다.

병자호란이 일어나던 이듬해 강화성이 함락되자 성의 남문루(南門樓)에 있던 화약에 불을 지르고 순절하였다.

그의 직계 자손이 김옥균, 김가진, 김좌진이다.

2 20세기의 시인

 金尙鎔,1902.9.28~1951.6.22)

2.1 소개

1900년대 초에 태어난 일제강점기의 시인이다. 호는 월파(月波)이다.

2.2 일생

경기도 연천군 남면에서 태어났다. 이후 경성제일고보 입학하였고 보성고보 졸업하였다. 대학교는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이화여전 교수를 역임한 후 여러 시를 발표한 시인이다. 서정시 '무상' 등의 작품이 있다. 동아일보에 '그러나 거문고의 줄은 없고나'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하게 된다. 이후 '대화', '포구', '마음의 조각'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에 열중하게 된다.

그의 시가 가지고 있는 특징은 '나와 자연의 동일성'이다. 나와 자연의 관계에서는 어떠한 대립도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그의 시에 반영되어 있다. 또한 '나와 자연의 화해'를 설파하며 '자연의 품에 안긴 삶'을 꿈꾸었다. 인위적인 것과 그것에 투영된 삶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자연과 더불어 살기를 동경하였다. 1939년, 시집 '망향(望響)'이 출간되었다. 그는 소설집인 '무궁화'도 남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허탈하면서 초탈한 듯한 '왜 사냐건 웃지요'란 구절은 지금도 사람들에게 자주 쓰이는 유행어이다.

광복 이후에는 미군정 하에서 강원도 도지사로도 임명되었으나 며칠만에 사임하고 이화여대 교수, 학무처장으로 일했다. 그러다가 1946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3년 동안 보스턴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연구하였다. 6.25가 터지자 부산으로 피난갔지만 1951년 6월 22일, 갑작스런 식중독으로 세상을 떠났다.

2.3 작품

2.4 관련 문서와 자료

한국어 위키백과 - 김상용 (시인)

2.5 흑역사

이런 유명한 시를 남긴 시인에게도 흑역사가 있다. 바로 그가 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인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 벌어진, 도둑 누명을 쓴 학생의 자살 사건이다.

기숙사에 살면서 학교 청소 등의 일을 하며 고학하던 문XX[1] 양이라는 여학생이 있었는데, 문 양은 금전출납부를 관리하며 사생들의 돈을 맡아주는 일도 하게 되었다.

어느날 주XX 양이 문 양에게 40원을 맡긴 후 20원을 찾아 썼다. 이후 주 양이 남은 20원을 찾아 쓰려고 문 양을 찾아갔는데, 금전출납부에는 주 양이 이미 나머지 20원도 찾아간 것으로 되어 있었다. 주 양은 문 양이 도둑이라며 펄펄 뛰었고, 문 양은 억울하다며 펄펄 뛰었다. 문 양이 사감 박은혜[2] 선생에게 불려갔다 올 때마다 학우들이 문 양을 보는 눈길은 싸늘해졌고, 문 양은 학우들로부터 철저히 따돌림을 받았다.

당시 이화여전 문과학장이었던 김상용은 문 양을 다독이고 도둑 누명을 풀어주기는커녕 "네가 했다고 시인해라. 돈은 내가 채워주겠다"라는 말을 하였다. 이는 결과적으로 문 양을 죽음으로 내모는 결과를 초래했다. 문 양은 가족과 학교, 학우들 등에게 보내는 유서 5통을 남긴 채, 1937년 1월에 학교 교정의 나무에 목을 매어 자살했다.

의외로 이 사건은 당대 문단에서 엄청난 논란을 초래했다. 당대의 명 시인인 김상용이 교육자로서 제대로 된 처신을 못했다는 비난이 쏟아졌는데 심지어는 춘원 이광수까지도 "김상용은 교육자로서 글러먹은 인간이다. 책임을 지고 교수직을 사임해야 할 것이다."라고 대놓고 신문에 비판글을 썼을 정도였다.근데 이광수 이 양반은 친일파다(...).

그러나 김상용은 이런 세간의 비난에도 아랑곳 않고, 태평양 전쟁으로 일제가 모든 학교에서 영문학 강의를 금하게 되는 1943년까지 계속 교수이화여전에 남아 있었다. 이런 걸로 보면 인성은 썩 좋은 사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왜 교수질 하냐고 물으시면 웃지요였나

그리고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과 민족문제연구소가 2008년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교육/학술 부문에 선정되었다. 1943년 《매일신보》에 발표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등 총 3편의 친일 작품을 썼기 때문.

2.6 관련 항목

  1. 제주도에서 서울로 상경하여,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입학했다고 한다.
  2. 목사의 딸이며, 미국에 유학하여 영문학과 종교학을 공부했다. 이화여전 영문학 교수 및 사감, 경기여자고등학교 교장, 은석초등학교 이사장 등을 지낸 교육자이다. 문 양의 일로 김상용이 호된 비판을 당할 때, 박은혜도 함께 비판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