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록대전

600px

巨鹿之战

초(楚)의 전사들은 한 명이 열 명을 당해내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고, 부르짖는 소리는 천지(天地)를 흔들었으며, 제후들의 군사들은 서로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이미 진(秦)의 군사를 깨뜨리고 항우(項羽)는 제후들의 장수들을 불러 보았는데, 원문(轅門)으로 들어오는 제후들의 장수들 중 무릎으로 기어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감히 올려다보는 사람도 없었다.

《사기(史記)》항우본기(項羽本紀)

보통 중국 위키백과 등에서 사용되는 표현은 거록지전(巨鹿之战). 국내에서는 '거록 전투' 혹은 '거록대전' 정도로 통용된다.

거록대전
날짜
BC 207년
장소
중국 허베이 성 싱타이 시 쥐루 현
교전국1교전국2
교전국초(楚)(秦)
지휘관항우
범증
경포
포장군
전도
전안
왕리
섭간
소각
결과
진나라 군의 괴멸
기타
항우의 패권 장악, 진나라의 멸망

1 개요

중국 (秦) 말기인 BC 207년 현재 형대(邢臺) 부근에서 벌어진 제후 연합군과 (秦) 원정군의 싸움. 기본적으로는 (趙) 구원전의 성격을 보이고 있는데, 실제로 제후 연합 중에 제대로 진나라 부대와 전투를 치룬 부대는 항우의 초나라 부대가 전부. 그런데 그것만으로도 차고 넘쳤다.[1]

진승 · 오광의 난 과정에서 그야말로 압도적인 힘으로 반란군을 진압했던 진나라는, 이 전투의 대패로 인하여 완전히 멸망의 방점을 찍어버리게 된다. 또한 항우는 일약 전중국 최강의 사나이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진나라 말기의 혼란스러운 판도는 대번에 정리되었고, 초한쟁패기의 시작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2 발단

2.1 진나라의 몰락과 장한의 등장

270px
장한(章邯)

백기(白起), 왕전(王翦), 몽염(蒙恬) 등의 명장, 그리고 압도적인 생산력을 가지고 전국시대(戰國時代) 최강국으로 군림한 진나라는 기어코 시황제(始皇帝)의 손으로 중국 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루어 내었다. 그러나 이러한 위업도 잠시, 진나라의 지독한 법가식 통치와 만리장성 축성 등 무리한 대외정책으로 백성들의 불만은 폭주했고, 결국 진승 · 오광의 난으로 인해 이러한 내적 갈등은 완전히 표면화 되고 만다.

이로 인해 진나라는 수도 함양 부근까지 수십만 대군이 밀고 오는 최악의 상황까지 놓였으나, 장한이 주문(周文)의 부대를 격파한 후 아예 진승까지 참살해버리는 엄청난 군사적 위업을 세운 끝에 간신히 목숨 줄을 유지하게 되었다.

진나라가 멸망하기 직전의 상황에서 오히려 적의 수괴인 진승을 죽이는 일을 성공한 장한은, 그 기세를 놓치지 않고 다른 봉기군을 모조리 진압하려는 시도를 벌였다. 첫번째 목표는 바로 (魏) 공략이었다.

2.2 장한의 진격과 위나라의 멸망

진승을 물리쳐 기세를 올린 장한은 곧바로 임제(臨濟)로 진격해 위나라를 쳤다. 당시 위나라의 왕이었던 위구(魏咎)는 주시(周巿)를 보내 (齊), (楚)에 구원병을 요청했다. 이에 제나라에서는 군주였던 전담(田儋)이 직접 구원을 하러 왔고, 초나라에서는 항타(項陀)를 지휘관으로 삼아 지원병을 보냈다.

그러나 구원병도 장한에게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 장한은 밤중에 별안간 기습을 해서[2] 대번에 제·초 연합군을 박살내었으며, 이 싸움에서 전담과 주시를 모두 참살했다. 구원병이 삽시간에 박살나자 위왕 위구는 절망했고, 그대로 항전을 계속하면 백성들이 다칠 것을 염려해서 항복을 약속하고 본인은 불에 타서 자살 했다.[3]

위나라는 이렇게 다시 재건되기가 무섭게 멸망되었고, 전담의 동생이었던 전영(田榮)은 남은 군사를 거두어서 동아(東阿)로 달아났는데, 장한은 이를 추격해서 포위하였다. 제나라의 군사들은 이렇게 동아성에 포위되어 있고, 제나라 본국에서는 새로 왕을 세우는등 난리가 벌어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또다른 속보가 전해졌다. 초나라의 무신군(武信君) 항량(項梁)이 북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2.3 항량과 장한의 대결

270px
병마용갱(兵馬俑坑)의 진나라 군 모습

진나라에게 멸망한 초(楚) 최후의 명장, 항연(項燕)의 아들이였던 항량은 혼란을 틈 타 기반을 쌓아 초나라를 다시 부활시켰으며, 초회왕(楚懷王)을 옹립하여 망국의 한을 갚았다. 당시 항량은 군사를 이끌고 항보(亢父)를 공략 중이었다. 이때, 항량에게도 전영의 급한 사정이 전해졌고 그는 곧바로 부대를 이끌고 동아로 진군하여 장한과 교전을 하여 승리했고, 장한은 서쪽으로 물러 날 수 밖에 없었다. 항량은 기세를 타고 장한을 추격했지만, 장한은 군세를 수습해서 다시 강력한 진영을 갖추었다. 항량은 장한을 물리치는데 전영이 지원을 해주기를 바랬다.

하지만 전영은 자신이 위기에 처해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새로 왕을 세운일에 격분하여 오히려 동쪽으로 나아가 제나라를 뒤흔들어 버렸고, 왕으로 추대되었던 전가(田假)는 초나라로 달아나고, 상국이었던 전각(田角), 대장군 전간(田間)은 조나라에서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전영은 만일 초나라와 조나라가 이들을 죽여준다면 바로 군사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했으나, 두 나라 모두 난색을 표했기에 지원군을 전혀 보내지 않았다.

제나라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독자적으로 진나라군과 대결하기로 한 항량은 항우(項羽), 패공(沛公) 유방에게 별동대를 이끌게 하고 성양(城陽)을 공격하게 했다. 성양을 함락하고 성 내의 사람들을 학살한 별동대는[4] 이윽고 복양(濮陽)으로 진군하면서 진나라 군을 한번 격파하고, 다시 성에 공격을 가해 복양을 점령했다. 그리고 정도(定陶) 공략에 나섰지만 쉽지 않자 옹구(雍丘)로 진군하여 진군을 격파하고, 진나라의 재상 이사(李斯)의 아들 이유(李由)를 죽이는데 성공했다. 이후 별동대는 외황(外黃)을 향해 진군했다.

본인 스스로 장한을 격파하기도 했고, 별동대도 성공적으로 활약하자 항량은 점점 진나라 군을 얕보게 되었다. 그런 모습을 경계한 송의(宋義)라는 인물은, 항량에게 이렇게 충고를 했다.

"싸움에서 승리를 했다고 해서 장수들은 교만해지고 사졸들은 게으르게 된다면 그 부대는 다음 싸움에서 반드시 패하고야 말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군사들의 사기가 다소 나태해지고 진군의 세력은 더욱 늘어만 가고 있어 이에 신은 장군을 위해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항량은 이런 말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대신 송의를 제나라에 사절로 보냈다. 당시 제나라의 전영이 지원군을 보내지 않았으니 이를 설득하라는 명령일테지만, 성가신 송의를 쫒아버리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송의는 제나라로 향하던 중, 제나라에서 온 사절인 고릉군(高陵君)이라는 인물을 만나게 되었다. 송의는 고릉군에게 이렇게 말했다.

"무신군 항량을 만나기 위해 가는 길이라면, 무신군은 곧 있을 진나라와의 싸움에서 패하고야 말 것입니다. 공은 행보를 천천히 하여 초나라에 들어가시면 죽음을 면할 수 있을 것이고 발걸음을 빨리하여 들어가신다면 화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장한은 모든 병력을 집결시켜 대대적인 반격을 가했고, 항량은 그 공세를 이겨내지 못하고 전사했다. 이때 항우와 유방의 별동대는 외항을 버리고 진류를 공략 중이었지만, 항량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자 병사들의 사기가 염려되어 여신(呂臣) 등과 함께 퇴각을 했다. 그 당시 초나라의 기둥이었던 항량을 참살한 장한은 이제 초나라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며 말머리를 북쪽으로 돌렸다. 조나라를 박살내기로 한 것이다.

3 전개

3.1 위기의 조나라

파일:ExhZWG5.jpg
초한전기의 장한

당시 조나라는 이량(李良)이라는 인물의 배반으로 한단(邯鄲)은 쑥대밭이 되었고 무신(武臣), 소소(邵騷) 등도 모두 살해되었다. 조나라의 유력자였던 장이(張耳), 진여(陳餘) 등은 주위 사람의 도움으로 간신히 탈출하고 조헐(趙歇)이라는 인물을 왕으로 세워 세력을 수습했다. 진여는 군사를 이끌고 이량의 습격을 물리쳤으나, 문제는 이제 이량 따위가 아니었다. 장한이 북상했던 것이다. 이량은 장한에게 항복하였다.

한단에 도착한 장한은 성을 모조리 파괴하고 그 곳의 주민들을 하내(河內)로 이주시켰다. 장이와 진여 등은 거록으로 우선 도주했는데, 장한은 수하인 왕리(王離)[5] 를 보내 거록을 포위하도록 했다. 진여는 성이 포위가 되기 전에 북쪽으로 달아나서 수만의 군세를 얻은 후 다시 남하했지만, 거록을 포위하고 있는 진나라 병사들이 워낙 가공스러워서 함부로 싸움을 걸기도 힘들었다.

왕리가 이끄는 진나라 군[6]은 그 군세도 강력할 뿐만 아니라, 거록의 남쪽인 극원(棘原)에 주둔한 장한이 용도(甬道)라는 양식 운반로를 건설하여 꾸준히 군량을 안정적으로 보급하고 있었기에 사기도 왕성하여 거록을 매우 세차게 공격했다. 이에 반해 거록 내부에서는 양식이 바닥나고 있었고, 병사들의 숫자도 많지 못했기에 대단히 위급한 상황이었다.

워낙 성 내부에서는 답이 없는 상황이었기에 장이 등은 성 밖의 진여에게 수차례 사람을 보내 SOS 사인을 보냈지만, 답이 없기는 진여도 마찬가지였기에 뭘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몇개월이 지나자 악이 바친 장이는 "니가 그러고도 친구냐?" 하며 성을 내었고, 이에 진여는 어쩔 수 없이 장염(張黶)과 진택(陳澤)이라는 인물에게 5천명을 주어 한번 돌격하게 해보았지만, 5천 명은 진나라 군에 접근하기가 무섭게 녹아내리고, 단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이때 성 밖에는 장이의 아들이었던 장오(張敖)도 만 명의 병사를 북쪽에서 조직하여 내려와 있던 상황이었으나, 사태가 이런 마당이니 손을 쓸 방도가 전혀 없었다.

3.2 항우, 송의를 참살하다

이렇게 조나라는 죽어가는 소리를 내며 어떻게든 도움을 갈구했고, 조나라가 무너지면 다음은 자신들 차례가 될 것이 뻔했기에 (燕)나라, 그리고 초나라 등 모든 나라에서 지원군을 보내기 시작했다. 이 중 핵심은 초나라였다. 이때 초회왕은 장한의 지릴 듯한 기세에 수도를 우이(盱胎)에서 팽성으로 옮겼고, 새로 부대를 조직해서 지원군을 보내려고 하였는데, 이때 일전에 송의와 대화를 나눴던 고릉군이 부대의 지휘관으로 송의를 추천하였다.

"송의가 얼마 전에 무신군의 군사는 필시 진군과의 싸움에서 패할 것이라고 예언한 적이 있었습니다. 과연 며칠 후에 초군은 진군과의 싸움에서 패하고 무신군은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군사들이 싸워보기도 전에 그 패전을 미리 예언한 송의야말로 가히 군사의 일을 알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에 초회왕은 송의를 상장군으로 삼고, 항우는 차장(次將)으로 임명한 후에 범증(范增)을 말장(末將)으로 삼아 지원군을 조나라로 보냈다.

그보다 앞서, 초회왕은 먼저 관중(關中)에 입성하는 사람이 그곳의 왕이 될 것이다. 라고 엄포를 내려놓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른 장수들은 관중으로 향하는 건 꺼려하고 있었는데, 항우만은 항량이 살해된 일에 격분하여 서쪽으로 향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서쪽으로 향하고 싶었던 항우가 조나라로 향한 것은 항우를 꺼려한 여러 늙은 장수들 때문이었다. 초회왕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항우는 심심하면 사람을 죽이니, 이 경우에는 유방을 보내 적당히 다독이는 편이 낫다.면서 유방을 추천했던 것. 그 때문에 서쪽으로 향하는 것은 항우가 아닌 유방이 되었다.

파일:7PGh5Qv.jpg
유방과 항우의 진격로

경자관군(卿子冠軍)이라고 불린 송의와 항우의 부대는 이렇게 해서 서쪽이 아닌 북쪽으로 행군을 하기로 되었는데…… 그런데 송의는 안양(安陽)에서 46일 동안 머문채 진군을 하려고 하질 않았다. 답답해진 항우는 직접 송의에게 따져 물었다.

"진이 조를 포위하여 급한데, 마땅히 빨리 군사를 이끌어 황하를 건너야 하고, 우리 초가 그 외곽을 치고 조는 안에서 호응하면 진군을 깨트리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송의는 항우의 의견을 무시했다.

"그렇지 않소. 무릇 소의 등 뒤에 붙어 그 피를 빠는 날파리는 잡을 수 있으나 털에 붙어 있는 서캐는 어찌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진(秦)이 조(趙)를 공격하여 이긴다 할지라도 그 군사들은 피로해 질 것이며, 그리되면 우리는 그 기회를 타서 진군을 파할 수 있소.
"이와 반대로 진군이 이기지 못할 경우 군사들을 이끌고 서진하여 피로에 지친 그들을 공격한다면 틀림없이 우리는 승리를 취할 수 있소. 고로 진과 조 두 진영의 군사들이 먼저 싸우게 내버려두어야 하오. 무릇 철갑을 두르고 병장기를 휘두르며 싸움에 임하는 것은 내가 공보다 못하지만, 장막에 앉아서 작전을 짜는 일은 공보다 내가 더 나을 것이오."

이 말은 한 후 송의는 군중에 명령을 내렸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용맹하기가 호랑이 같은 자는 참(斬)할 것이다.
  • 삐뚤어지기가 염소 같은 자는 참할 것이다.[7]
  • 욕심 많기가 이리 같아서, 강하여 부릴 수 없는 자는 참할 것이다.

이 명령의 대상이 누구인지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항우로서는 열 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송의는 한술 더 떠 싸우러 나와서는 아들인 송양(宋襄)을 제나라의 재상이 되게 하는데 힘을 쓰고, 아들을 배웅한답시고 술을 마시면서 신나게 연회를 하며 놀았다. 당시는 이미 11월 즈음이라 날씨가 추웠는데, 마침 까지 내려 병사들은 굶주림과 추위 때문에 힘들어 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지켜보던 항우는 병사들을 선동했다.

"모든 힘을 다해 진군을 협격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한 곳에 머물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아 그 기회를 놓치고, 이제는 세상에 기근이 들어 백성들은 굶주리고 사졸들은 콩잎을 먹으며 연명하고 있을 정도로 군중에는 군량미마저 동이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식은 호화로운 연회를 열어 음주가무를 즐기고 있으면서 군사들을 이끌고 하수(河水)를 건너 조 땅의 식량을 먹이고 조군(趙軍)과 함께 힘을 합해 진군을 공격하지도 않으면서 입으로만 ‘그들의 피로함을 엿보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무릇 강한 진나라가 새로 건국한 조나라를 공격한다면 아마도 그 세가 아마도 조나라를 압도할 것이다."

"조나라는 결코 강한 진나라의 상대가 될 수 없음에도 어찌 그들의 피로하기를 기다린다는 말인가? 얼마 전에 우리의 군사들이 진군에 의해 패함으로써 좌불안석이 된 왕은 경내의 모든 군사들을 내어 장군에게 내어주어 나라의 존망은 이 한 번의 출격에 달려 있음에도, 오늘까지 사졸들을 돌보지 않고 그 사사로움만 구하고 있으니 송의라는 자는 사직을 지킬 수 있는 신하가 아니다!"

310px
초나라 부대와 진나라 부대의 진격 루트

그렇게 분위기를 만든 항우는 적당한 타이밍을 봐서 어느날 새벽에 송의의 막사를 기습, 그 자리에서 목을 베어 버리고, 장수들에게 "송의 이놈이 모반질을 해서 전하가 죽이라고 명령하셨음."이라고 군령을 위조했다. 다른 장수들이라고 그 내막을 모를 리는 없겠지만, 항우의 포스가 너무 엄청나서 모두 항우를 떠받들었다. 그렇게 임시로 상장군이 된 항우는 송의의 아들을 추격하여 죽이고, 환초(桓楚)를 시켜 초나라에 보고를 하게 하였다. 초회왕은 항우를 상장군으로 임명했다.

그 당시 항우의 위세는 가히 초나라를 뒤흔들었다. 항우는 지체하지 않고 북상, 조나라 구원전에 참여하였다.

3.3 초나라의 선봉대와 파부침주

파일:Vtiljec.jpg
배를 불태우고 밭솥을 깨 부수는 초나라 군

항우는 본대를 이끌고 북상하고 있었지만, 전군이 도달하는 일은 아직 시간이 필요했고 거록은 오늘 내일 하는 상황. 우선 항우는 경포포장군에게 2만명을 주어 서둘러 황하를 건너 거록을 구원하도록 명령했다. 두 사람은 즉시 부대를 이끌고 황하를 건너 거록에 도착했고, 바로 교전을 벌였다. 전력 상 한순간에 승부를 낼 수는 없었지만, 조금 유리한 상태를 만드는데는 성공했고 이를 바탕으로 하수 북쪽 강안에 진영을 만들었다. 초나라 군이 당도한것을 본 진여는 안달하며 다시 한번 구원을 요청했다.

항우는 진여의 요청을 듣자 이제 황하를 건넜는데, 건너고 나서는 타고 온 모든 배를 침몰시켰고, 임시로 세워둔 집과 가져온 솥과 시루 마저도 전부 부셔버렸다. 초나라의 군대는 단 3일간의 양식만 지니게 되었는데, 여기서 죽더라도 돌아갈 마음이 없음을 보여주는 행위였던 것이다. 여기서 나온 것이 바로 파부침주(破釜沈舟)의 고사.[8]

어차피 여기서 초나라 군이 대패하고 진군이 조나라를 멸망시킨다면, 승산은 전혀 없어지고 제후들에게는 암흑의 세상이 다시 도래할 뿐이다. 그야말로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3.4 결전

560px
거록 대전

마침내 도착한 항우는 곧 왕리의 군대와 회전(會戰)에 돌입했다. 이미 경포가 몇차례 진군을 격파하여 진나라 부대가 당혹스러워하는 사이, 항우는 진나라 부대와 사생결단을 낼 기세로 맹렬하게 힘 대 힘의 전투를 치루었다. 항우는 장한의 용도를 끊어버렸고, 진나라 군은 식량이 이제 부족하게 되었다.

서로 군량이 바닥 나 내일을 볼 수가 없는 상황에서, 양군은 무려 아홉 번이나 어마어마한 대전을 벌이고, 마침내 진나라 군이 크게 무너져 버렸다. 진나라 장수 소각(蘇角)은 전투 중에 살해당해 버렸고, 섭간(涉間)은 싸움에서 패망하게 된 것이 확실해지자 항복을 하지 않으려 불 길에 몸을 던져 자살 해버렸다. 지휘관이었던 왕리는 항우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양군이 뒷 일을 생각하지 않고 처절하게 맞붙었던 만큼, 전장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압도적일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초나라 병사들은 항우의 지휘 아래 엄청난 전투력을 발휘해서 한 사람이 진나라 병사 10명을 당해내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부르짖는 소리는 천지를 뒤흔들었다.

이때, 항우를 제외한 다른 제후들은 거록 주변에 10개의 영채를 세우고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엄청난 분위기에 압도당해 아무도 함부로 움직이지도 못했고, 그저 벌벌 떨거나 식은 땀만 흘리면서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마침내 항우는 진나라 부대를 문자 그대로 개발살 내고 난 후, 제후들의 부대를 불러모았다. 제후들은 항우에게 불려 가며 원문[9] 아래로 들어갔는데, 모든 제후들이 무릎으로 질질 기어서 앞으로 나아갔고, 감히 고개를 들어 항우를 바라보는 제후도 없었다.

이로서 항우는 대번에 모든 제후들을 제압하여 제후들의 상장군이 되었고, 제후들은 모두 항우에게 속하게 되었다.

4 결과

이로서 조나라는 진나라 부대의 압력에서 벗어났고, 몇개월 동안 거록 내부에서 벌벌 떨며 지내던 조왕 헐과 장이는 성 밖으로 나와 기뻐하며 모든 제후들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그런데, 장이는 진여를 만나자 진여가 자기를 구하지 않았다고 깠고, 진여는 진여대로 열이 받아 둘이 말 다툼을 벌였다. 결국 문경지교(刎頸之交)의 사이였던 장이와 진여는 이로 인해 완전히 서로간의 관계를 파탄내고 말았다.

사태가 이리되자 가장 난감한 지경에 처해진것은 장한이었다. 장한은 사태가 좋지 않음을 깨닫고 후퇴를 하고 싶었지만, 호해(胡亥)의 반대 때문에 이것조차 불가능했다. 그는 부하인 사마흔(司馬欣)을 보내 자초지종을 설명하려고 했지만, 사악한 간신 조고(趙高) 때문에 이것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게다가 항우의 부하인 포장군이 진나라 군을 격파했고, 조나라의 진여 역시 장한에게 항복을 권유했다. 고민하던 끝에 장한은 은허(殷墟)[10]에서 항우를 직접 만나 눈물까지 흘리면서 항복했다. 멸망 직전의 진나라를 지탱한 것은 오로지 장한 개인의 군사적 능력이었으므로, 이 시점에서 진나라는 사실상 멸망한 것이나 다름 없게 되었다. 항우는 장한을 옹왕(雍王)으로, 사마흔을 상장군으로 임명해서 대접해 주었고, 곧바로 함양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5 규모

이 전투의 병력 숫자에 대해 진나라 군 15만과 8천명의 초나라 군이 붙어 초나라가 이긴 전투라는 이야기가 유명한데, 사기나 자치통감에서는 병력의 숫자에 대한 기록이 없다. 8천 명의 병력은 아마 초나라 군이 처음 거병할 당시 병력이 8천이었던 사실에서 유래하는것 같은데, 항우의 본대가 거록에 도착하기전 선봉으로 떠났던 경포나 포장군의 부대만 해도 벌써 2만명이 넘었다.

선봉보다 본대가 적은 경우는 전쟁사에서 왕왕 있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생각해보자면 항우의 병력은 못해도 수만 단위는 되었을 것이다. 또한 왕리가 이끌던 진군 역시 진나라의 전 병력이 아니라 따로 움직이는 부대였음을 고려하면, 수십만에 이르는건 무리가 있을 수 있다. 신안대학살 당시에서 보듯이 당시 진나라군은 20만이라는 병력이 따로 존재하던 상황이었다.

6 영향

270px
함양에 입성하는 유방[11]

사실상 진나라의 멸망을 확정 지은 전투. 춘추시대부터 이어진 진나라의 역사를 마지막으로 장식하는 전투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 전투에서 승리했다면 그 시점에서 장한을 저지할 수 있는 제후는 전중국에 아무도 없었을테고, 진나라는 멸망은 피할 수 없었더라도 최후에 직면하게 되는 순간은 늦쳐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거록의 패배로 진나라는 그 역사에 사실상의 마무리를 짓게 되었다.

제후들에게 이 승리는 진승의 난 시점부터 일어난 각지에서의 저항 중 가장 완벽한 승리였다. 또한 장초의 멸망과 위나라의 최후 등, 계속해서 이어진 절망적 상황의 분위기를 대번에 바꿀 수 있게 된 계기였다.

항우 본인으로 말하자면 항량의 뒤를 잇고, 바로 부대를 탈취한 위태로운 외줄타기 상황에서 단번에 자신을 전중국 최강의 사나이로 만들었던 무대가 되었다. 왕리를 포로로 잡고 모든 제후들이 땅바닥을 기어다니게 만들었을 때, 항우는 이미 일개 지휘관이 아니라 중국의 지배자였다.

그러나 장한의 항복을 받은 항우는 함양으로 진군하던 도중, 항복한 진나라 병사 20만명을 생매장하는 전대미문의 대학살을 벌였고, 홍문연에서 유방을 놓아 주고 난 후 함양에서 대살육과 약탈을 자행하였다. 그리고 반발도 뿌리치고 다시 초나라로 돌아오고 말았는데, 이 시점부터 항우는 모든 선택에서 항상 어긋나기 시작한다.

항우가 진나라의 주력을 끝장 낼 무렵, 조용히 실리를 챙기고 있던 사람은 바로 서쪽으로 진군하던 유방이었다. 장량 등의 도움으로 함양에 입성한 유방은 민심을 사면서 백성들의 지지를 얻었고, 이는 그 뒤에 이어진 항우의 만행 때문에 더욱 긍정적으로 부각되었다.

유방 본인은 홍문연의 일이 있은 후 벽지인 파촉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지만, 이러한 민심은 유방이 다시 재기할 때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결국 진나라를 물리치는 일은 항우가 했지만, 유방은 그 전투에 끼지도 않았으면서도 실질적인 이득은 모조리 챙겨 먹었다.

어찌되었건, 시대는 거록 전투를 기반으로 진나라와 반(反) 진 세력의 대결에서 초한대전의 양상으로 변하게 되었다.
  1. 사실 이 대전 이전에는 제후들 역시 정황상 항우를 그렇게까지 따르지 않았고 오히려 강력한 진군에 홀로 대항하는 항우를 패배할 것이 뻔한 짓거리를 한다고 멍청하다고 비웃기까지 했으나 전투 결과를 보고 쫄아서 자진해서 복종하게 되었다.
  2. 병사들의 입에 재갈을 물려 소리가 나지 않게 해서 공격했다고 한다.
  3. 위구의 동생이었던 위표는 초나라로 도망쳤다.
  4. 학살을 한 주체가 항우인지 유방인지는 명확치 않다.
  5. 왕전의 손자이자, 왕분의 아들이다. 후대에 누군가는 이 싸움에서 패배해 죽은 왕분을 보며 "3대에 걸쳐 수많은 사람을 도륙했으니 패해 죽는것 또한 하늘의 섭리 아니겠는가" 라는 말을 남겼다고도 전해진다.
  6. 하북군(河北軍)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7. 고대 중국에는 양이 없었고 고문에서 羊은 무조건 염소를 말한다. 양과 달리 염소가 도망도 잘 치고 말을 잘 안 듣는 동물이다.
  8. 남아공 월드컵 당시 국가대표팀을 이끌던 허정무 감독이 이 고사를 인용하기도 했었다.
  9. 군사가 군사 행동을 할때, 전차를 벌려놓고 수레의 원을 서로 마주 보게 하여 문처럼 만들어 놓은것
  10. 옛 상나라의 도읍지다.
  11. 제감도설(帝鑑圖說)에 실린 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