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항목 : 바둑
파일:Attachment/040602-jiangjj9.jpg
파일:Attachment/장주주/Example.jpg
이름 | 장주주(江鑄久) |
생년월일 | 1962년 2월 17일 |
출신지 | 중화인민공화국 산시 성 타이위안시 |
입단 | 1976년 |
단수(2015년 기준) | 九단 |
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바둑기사이자 인권운동가. 2015년 기준으로 九단이다.
2 상세
2.1 초창기 생애
1968년 6세 때 바둑에 입문하여 1976년 중화인민공화국에서 프로에 입단하였다. 1982년 五단이 되면서 루이나이웨이와 사귀기 시작하였다.
2.2 천안문 사건과 도피생활
1987년 九단으로 승단 후 1989년 천안문 사건 때 기수에 서서 중화인민공화국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피켓을 들고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게 당시 덩샤오핑이 이끌던 중국 공산당에 제대로 찍혀버리면서 이 때부터 장주주 九단과 루이나이웨이 九단에 체포령과 현상수배령이 떨어지게된다.
이에 따라 장주주 九단과 루이나이웨이 九단은 홍콩을 통해 중화인민공화국을 탈출, 중국 공안의 감시망을 피해 중화민국, 일본, 미국 등 여러 곳을 전전하며 도피생활을 하게 된다. 이 도피생활 중인 1993년 루이나이웨이 九단과 정식으로 결혼식을 치렀다.
2.3 대한민국으로 망명
도피생활을 끝내기 위해 일본기원에 망명을 신청했지만 일본 여류기사들의 텃세에 루이나이웨이 九단의 망명이 거부되어 난처한 상황에 처해있었다. 그 상황에서 차민수 四단과 조훈현 九단을 만나 상의하고 대한민국에 망명을 할 수 있는가를 타진하였다. 한국기원에서는 OK. 이래서 1999년 한국기원 객원기사로 대한민국에 망명을 하게된다.
이 시절의 재미있는 기록으로, 2003년 입신최강전 우승이 있다. 이 기록이 재미있는 이유는, 이 대회 준우승자가 부인인 루이나이웨이 九단이었기 때문. 세계 바둑을 통틀어 유례가 없는 부부 결승전이다.
망명생활 기간동안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장주주 九단과 루이나이웨이 九단이 중화인민공화국 개최의 바둑대회에 참석하게 되면, 그 기간동안만 수배령을 면해주기로 하였다[1]. 그러나 장주주 九단은 중국 공산당을 신뢰하지 못하여 중화인민공화국 대회에는 거의 참석하지 않았고, 주로 루이나이웨이 九단이 참석을 하게된다.
그렇게 망명생활 하기를 12년...
2.4 특별사면과 중화인민공화국 귀국
2011년 중국 공산당에서 당 회의를 하여 후진타오 주석 명의로 장주주 九단과 루이나이웨이 九단에 걸린 수배령을 풀어주고 특별사면을 행하였다. 1989년 천안문 사건 이후 22년만의 일이었다. 특별사면이 행해지자 루이나이웨이 九단과 장주주 九단, 한국기원, 대한민국 외교통상부,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 등이 상의를 하여 장주주 九단과 루이나이웨이 九단의 안전보장을 약속받은 뒤 중화인민공화국 귀국을 허용하게 된다.
일단 루이나이웨이 九단이 먼저 상하이로 돌아가서 안전을 확인한 뒤[2]인 2012년 연말, 장주주 九단 역시 한국기원 객원기사직을 사퇴하고 중화인민공화국에 귀국을 하게된다.
2.5 중화인민공화국 귀국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에 귀국하고 나서는 루이나이웨이 九단과 바둑학원을 열어서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도 잘 지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