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화 짱(만화)의 인물은 유지현(짱(만화)) 항목으로.
1 야구인
- 상위 항목 : LG 트윈스/선수단, 야구 관련 인물(K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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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시절. 오른쪽에 선수는 서용빈 코치
수비코치 시절
다시 작전/주루 코치로! 호빵맨?
LG 트윈스 No.76 | |
유지현(柳志炫 / ji-hyeon Yoo) | |
생년월일 | 1971년 5월 25일 |
신체 | 176cm, 70kg |
국적 | 대한민국 |
출신지 | 서울특별시 |
출신학교 | 충암초 - 충암중 - 충암고 - 한양대 |
포지션 | 유격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94년 드래프트 1차 지명(LG)[1] |
소속팀 | LG 트윈스(1994~2004) |
응원가 | 닐리리 맘보[2][3][4] |
1988년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MVP | |||||
김선영 (천안북일고등학교) | → | 유지현(충암고등학교) | → | 위재영(동산고등학교) |
1994년 한국프로야구 최우수 신인 | |||||
양준혁(삼성 라이온즈) | → | 유지현(LG 트윈스) | → | 이동수(삼성 라이온즈) |
1998년 ~ 1999년] 한국프로야구 유격수 골든글러브 수상자 | ||||
이종범(해태 타이거즈) | → | 유지현(LG 트윈스) | → | 박진만(현대 유니콘스) |
1997년 한국프로야구 올스타전 미스터올스타 | |||||
김광림(쌍방울 레이더스) | → | 유지현(LG 트윈스) | → | 박정태(롯데 자이언츠) |
1998년 한국프로야구 플레이오프 MVP | |||||
신국환(LG 트윈스) | → | 유지현(LG 트윈스) | → | 송진우(한화 이글스) 박석진(롯데 자이언츠) |
LG 트윈스 등번호 6번 | |||||
민경삼(1992~1993) | → | 유지현(1994~2004) | → | 박경수(2005~2011) |
LG 트윈스 역대 주장 | ||||
서용빈[5] (2002) | → | 유지현[6] (2002) | → | 이상훈 (2003) |
1.1 소개
LG 트윈스의 코치. 현역 시절 등번호는 6번. 별명은 꾀돌이. 충암고-한양대 출신.
1.2 선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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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출신으로 어렸을 때부터 유격수로서 두각을 나타내어 리틀야구 국가대표팀으로 뽑혔고, 이종범과 함께 당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유격수로 발돋움했다.
특히 김재박이 태평양으로 트레이드된 뒤 자타공인 LG 트윈스 최고의 유격수로 아직까지도 많은 이에게 각인되어 있으며, 그의 은퇴 후 권용관, 박경수, 박용근, 오지환 등이 유격수를 맡았으나 그만큼의 임팩트와 스탯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1994년 LG 트윈스의 1차 지명을 받아 입단한 그는 0.305-15홈런-51도루를 기록하며 서용빈, 김재현과 함께 '신인 3총사'로 활약, 돌풍을 일으키며 그 해 태평양 돌핀스를 꺾고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그리고 신인왕에 등극했다.[7]
1990년대 전성기를 달리던 LG 타선의 선봉장으로 활약했다. 전성기의 유지현은 1번 타자의 교과서라고 불려도 과언이 아니었다. 상대 팀 입장에서는 정말 죽이고 싶도록 얄미웠던 선수(...) 꾀돌이라는 별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니다.
공을 오래 보고 투구수를 늘리기 위해 초구는 그냥 흘려보내곤 했는데 이를 의식한 상대 배터리가 초구를 대충 던지면 그대로 잡아당겨서 잠실 좌측 펜스(유지현존이라고 불린다)를 살짝 넘겨버리는가 하면, 출루해 놓고 도루를 할듯 안할 듯 하면서 상대 투수를 괴롭히는 등의 영악한 플레이를 주로 했기 때문에 차라리 아예 이종범처럼 도루해 버리는 게 상대 입장에선 편했다고 한다.
작은 체구 덕분에 적용되는 스트라이크 존도 좁았고 타격시 몸을 웅크리는 버릇 덕분에 존은 더 좁아졌고 거기에 훌륭한 선구안[8]과 발군의 커트 실력이 갖춰져서 2스트라이크 노볼의 볼 카운트를 2스트라이크 3볼로 만들던 건 예사였다. 그 덕분에 클린업도 아닌 선수가 한 시즌 평균 볼넷이 60여개에 2할 후반대인 통산 타율에 비해 통산 출루율은 3할 중후반대였다. 유격수 수비도 준수했다.
다만 어깨는 약한 편이여서 훌륭한 1루 수비를 자랑했던 서용빈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지금 선수들로 유지현을 나타내자면 대충 이용규의 커트질+김주찬의 발+손시헌의 수비+이종욱의 타격+정근우의 센스를 갖춘 선수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한 마디로 리드오프로서 필요한 장점은 모두 갖춘 선수로, 그의 높은 출루율과 찬스에 강한 면모를 볼 때 LG의 "신바람 야구"라는 팀 컬러를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가 주로 출전한 1994-2002 9시즌 중 LG는 1996,1999,2001년을 제외하고 모두 포스트시즌에 진출했고 1회 우승, 3회 준우승을 차지했다.
1994년 .305-15홈런-51도루라는 기록에도 불구하고 골든글러브는 그해 .393-84도루를 기록한 이종범에게 내주고 만다. 1995년에도 매 경기 1994년 이상의 활약을 보여 주었으나 방위 복무[9]로 인해 일부 홈경기만 출전할 수 있었던 탓에, 골든 글러브는 그해 우승 팀인 OB의 김민호에게 돌아갔다. 1997년, 감독추천으로 출장한 올스타전에서 MVP가 되었고, 이종범이 떠난 1998년과 1999년에 드디어(...) 골든글러브 유격수 부문을 수상하게 된다. 이처럼 전성기에 이종범이라는 벽에 가려 그의 천재성은 늘 2인자라는 수식어로 점철되어야만 했다.
공격력은 이종범보다 부족했지만, 한양대 시절 수술로 인해 약해진 어깨에도 불구하고 수비력은 결코 밀리지 않았다. 약한 어깨를 풋워크와 한박자 빠른 타구 판단으로 커버했고 특히 2루쪽으로 쏠리는 타구의 경우 슬라이딩 후 역모션 송구 등 서커스에 가까운 명장면들을 자주 연출했다. 수비 측면에서는 어깨에 의존하는 이종범보다 오히려 기술적으로 김재박-류중일의 계보를 있는 정통 유격수라고 볼 수 있다. 1995 한일 슈퍼게임이 마지막이었으나, 유지현과 이종범은 국가대표로 함께 나갈 경우 공수주를 모두 겸비한 최고의 키스톤 콤비로 꼽혔다. 유지현-이종범-박정태가 아마에 공존하던 시기에는 3루 유지현-유격 이종범-2루 박정태의 포메이션이 나오기도 했다. (이때는 유지현 부상 전으로 강견 시절임) 유격수 수비로는 전문가들도 이종범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유지현에 대해서는 간간이 힘에 부치는 3-유간 상황의 원바운드 송구만 빼면 타구 판단에 이은 풋워크, 다이빙, 글러브질 등 극찬하는 편이며 논란의 여지가 적은 편. 오히려 본인이 아닌 이종범 항목에 유지현과의 수비력 비교에 대한 언급이 더 많다.. (이 분은 커리어 내내 이종범과 뗄레야 뗄수없는.. ) 그러나 세이버스텟을 보면 공격력에서 차이가 너무 많이 나므로 비교 대상은 아니다
사실 LG가 리그를 평정하던 1994, 1995년 후 해태가 1996, 1997년에 살아나면서 자연스레 양팀간 더비가 리그 최고 빅매치가 되었고, 이 둘은 같은 포지션에 둘 다 야구 지능이 높았고 각 팀의 리드오프로서 항상 비교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2006년 WBC에서 이들은 대표팀 코치와 주장으로서 재회하게 된다.(1루에서 둘이 대화하는 모습이 웬지 짠할 수 밖에 없다. Fe...)
이종범이 주니치로 떠나기 무섭게 골든글러브 2연패를 했고, 박정태와 키스톤 콤비를 이룬 1999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훌륭한 호흡을 자랑하며 나란히 베스트 포지션에 선정되기도 했다. (아마때부터 여러모로 박정태와의 케미가 좋았던 듯) 이때 획득한 출전권으로 이듬해 시드니 올림픽에 주전 유격수로 출전이 예상됐으나, 대표팀 감독이 주성로 감독에서 김응용 감독으로 변경되며 박진만, 김태균을 대신 선발해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2000시즌은 공교롭게도 찐만두가 유일하게 멘도사 라인을 탈출한 그란도 시즌이며 팀도 우승하고 골글을 받은 해. 아무리 그래도 유지현 대신 김태균의 선발은 언론지상이나 팬들에게 집중포화를 받았다.(해도해도 너무 급이 안맞는거 아니냐.. 김감독에게 평소에 잘못 보인거 아니냐.. 등) 결과적으로 대표팀이 동메달을 획득하며 이런 논란은 자취를 감췄고, 유지현은 그해 플레이오프에서 분풀이 맹활약을 펼치며 2승1패로 두산에 리드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이기는 날은 스포츠신문 1면에 나왔다. 그러나 엘지는 마무리 장문석의 연이은 블론 세이브로 이후 3연패하며 허망하게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이후 이광은 감독의 해임 및 김성근 감독의 부임 후 2001년부터 2루수-유격수를 보기 번갈아 보기 시작했고 2002년에는 완전히 2루수로 전향해 3할1푼의 타율을 기록함과 동시에 여전히 준수한 리드오프 역할을 수행하여 팀의 한국시리즈 준우승에 기여하였다.
아마 시절부터 실력으로 국가대표 고정 멤버였던 덕에 유독 포스트시즌같은 큰 경기에 강한 면모를 보였다. 대표적으로 회자되는 것이 유지현 존으로 날려보낸 1997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의 역전 만루홈런(상대투수 성준), 02년 한국시리즈 2차전 6회 임창용 상대 안타 및 도루 시전으로 역전 시발점 역할, 5차전 6회 2사에서 전병호 상대 2루타 및 3루 도루, 패스트볼로 득점 등 팀이 정말 필요한 순간에 깨알같은 안타와 도루를 시전하며 팬들로 하여금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통산 홈런은 적지만 특히 중요한 순간에 잡아당기는 2루타 코스의 타구를 잘 쳐냈다.
참고로 입단 동기인 김재현과는 사이가 나쁘기로 유명하다. 안그래도 등번호(김재박의 7번), 연봉 등 문제로 입단 때부터 갈등을 빚어 사이가 좋다고는 말 못하는 관계였다가, 김재현이 선수협에 적극적으로 가담을 할 때 유지현은 구단 편을 들어서 크게 틀어진 것. 정작 유지현도 LG 구단이 선수협에 가담한 선수들의 연봉 삭감, 징계성 트레이드를 보다 못하여 LG선수 전원을 선수협에 가입시키고, 본인도 2001년에 가입했다. 결국 이것과 2002년 연봉조정 승리까지 겹치며 구단과 틀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2003년 슬럼프 시점에 찾아온 FA계약 때 1년 4억원이라는, 유지현이라는 존재 가치에 너무도 격에 맞지 않는 처우를 받기에 이른다. 2004년 이순철 감독의 부임 후 슬럼프에서 재기할 기회조차 제대로 얻지 못한 채 애매하게 1군에 끌려다니며 후배들의 도우미 역할을 맡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특히 신인 내야수 박경수에게 사실상 반 강제로 주전 자리를 내주고 인스트럭터 역할을 코칭스태프와 구단으로부터 사실상 강요받으며 그해 가을 현역 은퇴 선언을 하였고, 10월 5일 롯데전 클리닝타임 때 약 20분 간 은퇴식을 가졌다. 은퇴식에서 김재현과 조우하는 장면은, 둘 사이의 관계를 떠나 동병상련에 처한 두 사람의 화해와 같이 비춰졌고, 많은 LG 팬들의 안타까움과 공분을 샀다. 이처럼 불운한 선수 말년으로 인해 본인의 가치와 재능에 비해 이후 끊임없이 저평가되는 계기가 된다. 유지현의 은퇴 직후 한화에 부임하여 팀 리빌딩 중이던 김인식 감독이 유지현을 안타깝게 여겨 반 농담 반 진담으로 현역 복귀 오퍼를 한 일화도 유명하다.
여러 인터뷰나 행적을 돌이켜보면 성격이 유하고 선후배 선수나 구단 관계자들과 각 세우지 않는 스타일이어서 스스로를 김기태, 김태형처럼 군기반장으로 포지셔닝하지 않았다. 반면 팀 내에서 주장일 당시 리더쉽은 본인의 실력이 받쳐줘서 만든 것이기 때문에 프라이드가 강했던 것으로 보이며, 선수협 문제에서도 엉뚱하게 친 선수협 멤버가 아닌 김기태와의 충돌로 팀원들이 그를 따라 단체로 가입 철회를 하여 같은 팀 양준혁, 김재현을 비롯한 친 선수협의 디스를 감수해야 했다. 결과적으로는 두고두고 리더십에 상처를 줄 수 있는 부분.. 나중에 본인이 주도하여 팀원을 선수협에 전원 가입시켰던 것과 구단과의 연봉협상 조정 신청 등을 봐서는, 본인의 소신은 있으나 말년에 엘지 이외의 팀으로 트레이드를 거부하고 구단의 지도자 연수 제의를 수용하는 것을 봐서 친정팀에 대한 로열티가 우선인 것으로 보인다. 다만 앞에서 언급했던 내용들처럼 주변, 특히 구단과 마찰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임에도 어설프게 프런트와의 구원(?)이 있어서 엘지 감독으로 앉을 수 있을 지 관전 포인트다. 류중일, 염경엽 등 선배들의 감독 데뷔 시점을 고려하였을때, 프랜차이져에다 실력만 놓고 보면 이미 감독 후보로 언급되고도 남았어야 하지만, 런기태 사태 때에도 언론지상에 후임으로 언급이 되지 않은 점은 생각해봐야 할 일. 양상문 감독 밑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입지를 굳혀야 할 것으로 보인다.
선수협 사건을 생각하면 서있는 구도가 묘하다.[10]
2000년 선수협 사태에 관한 말이 많은데, 이 당시 유지현은 원래 선수협 측이였으나, 63빌딩 선수협 총회 때 삼성의 주장인 김기태와 더불어 눈치만 보더니, 자기들끼리 싸웠다.... 그리고, 구단의 말을 들으며 선수협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 때 김재현과 원수지간이 되었다. 어쨌든 이런 뒷통수를 치는 행위 덕분에, 선수협 오적으로 불리게 되었다.[11] 그 뒤 2002년 연봉조정신청에서 구단과의 싸움에서 이겼으나[12] 그 대가로 구단으로부터 괘씸죄에 몰리게 되며 결국 2004년에 은퇴했다.[13][14]
이후 2006년 WBC 국가대표팀 코치, 2007년 시애틀 매리너스에서 코치 연수를 받은 후 2008년부터 2011년까지 LG 트윈스의 작전주루 코치를 담당하였다.
이 선수의 특징이라면 홈으로 사용한 잠실에서 친 홈런이 원정경기 홈런보다 오히려 많았다는 점이다. 당시는 95m로 5m 팬스를 당겼었는데, 폴대쪽으로 최대한 잡아당겨 살짝 넘어가는 홈런을 많이 쳤던 것. 신인시절 커리어하이인 15홈런을 기록했는데 이중 11개가 잠실에서 넘긴 것이었다.[15]
1.3 트리비아
개봉초등학교에서 야구를 시작했지만, 리틀야구대회에서 충암초교 야구부 곽성렬 감독의 눈에 띄어 충암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신바람 트리오로서 인기를 구가하고 있던 1990년대 중반, 하루에 팬레터를 3~40 통씩 받았다고 한다.
방위병 시절에는 유류관리병으로 복무하였다.
1.3.1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기록 | ||||||||||||||
연도 | 소속팀 | 경기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볼넷 | 장타율 | 출루율 |
1994 | LG 트윈스 | 126 | 482 | .305 | 147 (3위) | 20 | 0 | 15 | 51 | 109 (2위) | 51 (2위) | 64 (2위) | .440 | .391 (4위) |
1995 | 64 | 236 | .305 | 72 | 8 | 0 | 1 | 17 | 44 | 33 (5위) | 44 | .352 | .423 | |
1996 | 100 | 385 | .249 | 96 | 15 | 3 | 4 | 26 | 56 | 24 | 59 | .335 | .363 | |
1997 | 125 | 479 | .269 | 129 | 24 | 2 | 3 | 45 | 78 | 44 (4위) | 61 | .347 | .364 | |
1998 | 126 | 476 | .277 | 132 | 36 (1위) | 1 | 12 | 61 | 94 (2위) | 40 (3위) | 71 (5위) | .433 | .377 | |
1999 | 93 | 356 | .303 | 108 | 19 | 5 | 11 | 45 | 67 | 14 | 50 | .478 | .392 | |
2000 | 129 | 495 | .281 | 139 | 24 | 1 | 7 | 38 | 97 (4위) | 25 (4위) | 73 | .376 | .373 | |
2001 | 129 | 448 | .283 | 127 | 26 | 2 | 9 | 53 | 90 | 21 | 96 (2위) | .411 | .411 | |
2002 | 91 | 326 | .310 | 101 | 14 | 3 | 1 | 25 | 51 | 21 | 38 | .380 | .381 | |
2003 | 109 | 334 | .234 | 78 | 7 | 0 | 1 | 16 | 30 | 23 | 31 | .263 | .306 | |
2004 | 16 | 33 | .152 | 5 | 0 | 0 | 0 | 2 | 3 | 0 | 3 | .152 | .222 | |
통산 | 11시즌 | 1108 | 4050 | .280 | 1134 | 193 | 17 | 64 | 379 | 719 | 296 | 590 | .383 | .377 |
역대수상 | |
연도 | 수상내용 |
1994년 | 최우수 신인상 수상 |
1997년 | 올스타전 MVP 수상 |
1998년 | 골든글러브 유격수 부문 수상 |
1999년 | 골든글러브 유격수 부문 수상 |
1.4 지도자 시절
선수 때의 센스있는 플레이에 비해 주루코치로써의 능력엔 상당한 논란이 있었는데, 2011 시즌 유지현의 삑사리 주루 유도로 득점할 거 못하고 돌려야할 때 주자를 안 돌리고 돌리면 안될 때 주자를 돌려대서 주자 횡사를 여러번 시켜서 이래저래 까였다. 아마 유지현 입장에선 아니 왜 이걸 못 뛰어ㅠㅠ 일지도 모른다.[16]
박종훈의 뒤를 이어 김기태가 LG 트윈스 감독이 되면서 최태원 전 KIA 타이거즈 코치가 주루코치로 임명되었고, 그 결과 2011년 10월 14일 LG 트윈스의 수비코치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수비코치로는 비교적 평가가 좋다. 오지환에게 지옥의 펑고를 쳐 주면서 2013년부터 오지환의 실책 개수가 비교적 줄어들고 있다.아직까지 시즌 실책이 상위권인게 함정이긴 하지만 데뷔 초에 실책 퍼레이드 하던거에 비하면 나아지긴 했지.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결승전에서 7회말 적시타를 지우는 수비는 그의 위치 선정 덕분이다. 2014-2016 오지환의 수비만큼은 리그에서 확실히 인증받은 모습이다. 멘도사 라인임에도 수비장면만큼은 허구연 이효봉 등 해설자들의 극찬을 받고 있으며 ML 스카우터들도 눈여겨 보기 시작했다고..(수비만...) 이는 재론의 여지없는 유지현의 작품이다.
한편, 2015 시즌 중 최태원이 2군으로 내려가면서 3루코치로 보직변경 되었다. 동시에 박종호가 2군에서 수비코치로 올라왔다. 이후 엘지 경기에서 홈 주루사는 확연히 줄어든 모습인데(괜히 죄태원이 아님) 아직도 박용택의 경우 감히 유 코치의 신호를 종종 무시하고 뛰다가 돌아가시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아마 때부터 본인의 발을 믿고 엽기 주루플레이를 하도 시전하던 터라.. 선수시절 의외로 준족이 아니었음에도 쇼트트랙식 효율적 주루플레이를 시전했던 터라 선수들에게 전파해주길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2016년 10월 10일 와일드카드전에서 8회말 소중한 기회를 날려버리는 어이없는 주루지도를 했다.. 최태원이 생각난다.. 코치님 강남이인데 왜 돌렸어요..
10월 16일 준PO에서도 어이없는 주루지도가 또...
1.5 평가
선수협 문제에서는 엄청나게 까인다. 김기태, 이호성이 그랬듯이 구단 측 편을 든 것이 원인으로 일명 선수협 오적 중 한 명으로 취급된다.[17] 정작 본인은 연봉조정 갈등에서 구단에게 뒤통수를 맞았으니 지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18]
2 미스코리아
미스코리아 세종-충북 진 | ||||
2015 | → | 2016 | → | 2017 |
연서영 | 유지현 |
2015 충북-세종 대회에서는 미스 로이나주얼리에 입상해 본선 진출에 실패했으나 2016 세종-충북 대회에 다시 출전해 진에 입상하여 2016 본선대회에 진출하게 되었다.
- ↑ 1994년 드래프트 당시 OB 고위층에서 유지현, 류택현 두 선수 중 누구를 지명할 지 고심하다가 류택현을 1차 지명하였다. 하지만 류택현은 OB에서 전혀 성장하지 못하다가 LG로 이적한 후에야 빛을 보게 됐다. OB-두산 입장에서는 땅을 치고 후회할 일
- ↑ 날려라 날려라 유지현~ 유지현 안타~x2
- ↑ 여담으로 이 응원가는 유지현 은퇴 후 제 2의 유지현이 되어주리란 기대를 받던 특급 신인, 박경수에게 갔으나, 현재로썬 전혀 유지현에 걸맞는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kt wiz로... - ↑ 컴투스 프로야구 2016에 유지현의 응원가가 있는데 해당영상(소리만 나온다)에서 따온듯하다. [1]
- ↑ 시즌 중 군입대로 유지현에게 주장직을 넘겨줌.
- ↑ 서용빈의 시즌 중 군 입대로 인해 주장직을 이수받음.
- ↑ 다만 신인 3인방 중 김재현, 서용빈과는 달리 그 해 골든글러브는 수상하지 못했는데, 이유는 알다시피 그 해 4할 200안타 100도루에 도전했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분 때문에...
- ↑ 통산 출루율 0.367인데 보통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통산 볼넷이 삼진수를 뛰어넘는다.
- ↑ 서용빈을 제외한 유지현, 박종호, 송구홍 셋 모두 방위로 갔다!
내야폭발 - ↑ 김재현 해설과 유지현 코치는 선수협 참여 여부를 두고서 갈등을 빚었고, 사이가 나쁘다. 그리고 김기태 감독과 유지현 코치는 선수협 창립 회의에 누가 먼저 들어가는가를 두고 서로간에 멱살 까지 잡아가며 크게 싸웠는데 상황을 살펴보면, 김:누가더 먼저들어가냐?➡유:우리가 알아서한다.➡김:근데 어린놈의 새끼가 어디서 말대꾸야?➡ 자기네들끼리 싸우는 추태를 보임, 그래서 이런일이 일어난지라 사이가 나쁘다.
- ↑ 사실 원래 선수협 창단계획때는 유지현, 김기태와 같은 오적 두 사람도 창단 맴버가 되려했지만, 이 둘은 구단과의 관계는 어느정도 유지해야한다고 생각하고 뒷통수를 후려갈긴 것이다! 게다가 유지현의 경우 아버지의 회사가 LG의 하청을 받는 기업이여서 더 그랬다는 얘기도 있다.
- ↑ 이는 연봉조정신청 제도가 실시된 이래 선수 측이 승리한 유일한 사례다.
- ↑ 흔히 유지현도 이순철이 내쫓은 것으로 알고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위에 서술된 대로 유지현은 2002시즌 종료 후 연봉조정신청을 냈고, 결국 구단과 법정싸움까지 간 끝에 승소했으나 결국 이것이 괘씸죄로 적용되어 구단 눈 밖에 나면서 은퇴하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덧붙여 롯데 자이언츠를 상대로 열린 그의 은퇴 경기는 LG 트윈스 프런트와 팬들의 간극이 얼마나 벌어졌는지 보여주는 아주 좋은 사례. 여담으로 이 은퇴식 때 경기 상대 팀 선수였던 박정태를 가장 존경한다고 밝혀서 박정태가 놀랐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박정태 항목 참조.
- ↑ 단 유지현의 은퇴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도 있는데 이순철이 유지현으로부터 공수주에서 아직 쓸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쓸모없는 선수로 취급하며 결국 강제 은퇴시킨 점도 작용할 수도 있다. 이 때 유지현은 2군에 가서 훈련을 할 수 있는 기회 조차 받지 못하고 1군 선수단을 따라 다니면서 배팅볼이나 던져주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 ↑ 이 때문에 당시 팬들과 기자들은 좌익수 쪽 폴대 옆 5m의 빈 공간을 '유지현 존'으로 불렀고 우익수 쪽 폴대 옆 5m의 빈 공간을 '정수근 존'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유지현에 비해 정수근의 홈런은 손에 꼽는 수준이라...
- ↑ 흔히 스타플레이어가 명코치, 명감독이 못된다고 하는 이유 중의 하나로 현역시절 자신의 능력에 맞추어 코칭을 하거나 작전을 지시하는데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차범근의 경우 자신의 작전지시를 선수가 못 따라하자 스스로 실행해 보였는데, 그게 크루이프 턴에 논스톱 크로스.
- ↑ 그러나 세간의 인식과는 다른 면도 있다. 유지현이 처음에 구단 선수협 결성에 반대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후 구단들이 선수협 주동자들을 방출/트레이드하며 대응이 심해지자 이에 대한 항의로 LG 선수 전원을 선수협에 가입시킨 사람도 유지현이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LG 구단은 유지현을 눈엣가시로 여기기 시작한다.
- ↑ 다만 프랜차이즈 스타였기 때문에 흑역사화까지 되지는 않았다. 위의 설명을 참조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