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호

鄭東鎬
1935년 2월 20일~2009년 3월 26일

대한민국의 전 군인, 정치인이다.

1935년 경상남도 의령군 출생. 마산고등학교, 육군사관학교 13기를 졸업하였다.

하나회 멤버로서 12.12 군사반란 당시 반란에 가담했다. 당시 준장이었던 정동호는 당시 대통령 경호실장 직무대리였다.

장관급(대장급)인 경호실장을 고작 준장인 정동호가 직무대리했던 이유는 10.26 사태 이후 상관들이 대통령 시해에 대한 책임으로 숙청당했기 때문이다. NO.1인 경호실장 차지철은 비명횡사한 후 NO.2인 경호차장 이재전 중장은 보안사에 끌려가 구속, NO.3인 경호차장보 김복동 소장은 5군단 부군단장으로 좌천당하는 등 대통령 시해에 대한 도의적 책임에 대한 징계가 이어졌다. NO.4였던 상황실장 정동호가 3계급을 뛰어넘어 대통령 경호실장을 직무대리하고 있었다.

12.12 군사반란에서 전두환의 명령으로 하나회 15기인 고명승과 함께 무단으로 경호실 병력을 동원하여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머물던 총리공관의 경비병력을 무장 해제하고 총리공관을 불법적으로 접수하는 공을 세웠다. 이후 전두환 정권에서 80년 8월부터 81년 7월까지 정식으로 경호실장을 지냈으며 장세동에게 경호실장을 이임하고 군에 복귀하여 5군단장, 육군참모차장을 역임했다.

후에 합참의장을 역임하는 최세창과 함께 하나회 13기의 선두주자 중 하나였으나 참모차장 시절 1986년 국회 국방위원회 회식 난투극 사건이 일어나 이 일의 책임을 지고 예편했다.

그 후 바로 윤필용의 뒤를 이어 한국도로공사 사장을 지냈으며 노태우 정권 때인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남 의령군-함안군 지역구에 민주정의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같은 지역구에 민주자유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김영삼대통령에 취임하고 국회의원의 재산을 공개하는 과정에서 부정축재한 것으로 드러났다.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지는 않았지만 민주자유당에서 제명되었다. 이후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지 않고 정계를 은퇴하였다.

2009년 3월 26일 별세하였다.

여담으로, 지금은 모두 폐쇄식 나들목으로 개조되어 있지만 2차선이던 남해고속도로는 4차선으로 확장개통된 후에도 한동안 동마산IC ~ 군북IC까지는 무료 고속도로 역할을 했다. 동마산 톨게이트부터 지수 톨게이트 사이에 군북IC, 장지IC[1], 함안IC, 산인IC[2], 서마산IC, 동마산IC로 진출입이 가능했기 때문. 특히 군북IC는 마산에서 의령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그리고 정동호의 정치적 기반은 함안과 의령이었고, 이후 이 지역에서 8년간 국회의원을 역임한다. 이 때문에 혹자는 한국도로공사 사장 시절 정동호의 영향력 덕에 이 지역이 상당 기간 고속도로의 혜택을 보았다고 평하기도 한다.
  1. 2차선 시절에는 없었다.
  2. 2차선 시절 H자 모양 평면교차로였다. 옛 산인역 하행방면에서 굽어지는 길목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