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빈 최씨

1 개요

1670년 12월 17일 ~ 1718년 4월 9일

조선 숙종대의 인물. 숙종의 후궁으로 영조의 어머니이며 장희빈과 더불어 일명 조선판 신데렐라. 단, 장희빈은 중인 집안 출신이었지만[1] 숙빈 최씨는 이보다 더 격이 낮았다. 진짜로 신데렐라. 신데렐라는 귀족인데?

1670년 음력 11월 6일(12월 17일) 최효원의 딸로 태어났다. 정말 단박에 신분이 고속상승한 케이스라서 로또 맞은 인생이라고밖에 달리 설명이 안 된다. 처음에는 종 4품 숙원이었으나 임신 등을 거쳐서 정1품 빈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사후 "화경"이라는 시호를 받아 화경숙빈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2 출신

출신이 불분명하여 여러가지 설이 많다.

원래 궁녀도 아닌 무수리인데다, 천민 출생에 심지어 결혼을 했다가 남편과 사별한 기혼녀였다는 주장도 있다. 무수리는 궁녀와 달리 꼭 처녀여야 하는 것도 아니었고, 궁에만 머물지 않고 출퇴근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때문에 영조에게는 아버지가 다른 형이 있다는 소문, 심지어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 전 남편의 아들이라는 소문까지 돌았고, 영조가 이로 인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영조가 숙빈 최씨와 숙종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 아니라 차남이므로 이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숙종과 영조의 성깔을 보면 친부자지간이 확실하다 영조의 친형은 어려서 죽었다. 그래서 영조가 숙빈최씨의 차남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2][3]

어쩌다가 숙종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었는데, 기록에 남는 이야기로는 인현왕후가 폐서인이 되어 사가에 나가서 살던 시절, 인현왕후의 생일에 인현왕후를 모셨던 적이 있는 그녀가 인현왕후를 위한 기원을 올리고 있던 모습을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숙종이 목격하는 바람에 눈에 띄게 되어 후궁이 되었다고 한다.(이문정의 수문록)

다른 기록에서는 인현왕후가 쫓겨나간 사가에서 어느 날 밤 홀로 바느질을 하고있다가 후원을 지나가던 숙종이 뒷태가 아름다워 잠시 들어가서 만남을 가졌다 한다. 그런데 낮에 한번 더 본 이후 외모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찾지 않았다 한다. 하지만 이 설은 신빙성이 낮은 게, 일찍 죽기는 했지만 그녀 소생 왕자가 영조 앞뒤로 둘이 있다. 낮에 본 뒤 찾지 않았다면 이 두 왕자는 어디서 온 거란 말인가. 거기다 영조가 가례할 때의 비용이 만만찮았다는 등, 의외로 영조와 숙빈 최씨를 편애했다는 걸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또 영조의 외모가 조선 시대의 미남상이라 할 수 있는 얼굴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숙빈 최씨의 외모 역시 적어도 나쁘진 않았다는 추측을 할 수 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전염병으로 고아가 된 그녀가 산신령의 계시를 받고 나주 목사에게 거둬졌는데 목사의 부인이 인현왕후의 친척이었기에 인현왕후가 입궁할 때 같이 입궁하였다고 한다. 혹은 인현왕후의 부친인 민유중이 영광 군수로 부임하는 길에 다리 옆에서 그녀를 거뒀으며 인현왕후의 입궁시에 나인으로 입궁했다고 한다.

고종은 영조가 말하길 숙빈 최씨는 침방의 궁녀였다며 무수리 설을 부정했는데 영조의 컴플렉스 등을 생각해보면 이쪽은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있다. 침방 궁녀는 내명부에서 꽤 높은 편에 속한다. 지밀 궁녀 바로 다음이 침방 궁녀.

후궁이 되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그녀의 숙모의 사위 김해성이 그녀를 독살하려고 했다는 혐의로 문초를 받을 때 원래 구걸을 하면서 살았다가 그녀가 숙원에 봉해지면서 도움을 받았다고 진술한 것을 보아 야사에서처럼 천민이 아니더라도 매우 가난하고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보통 사극에서는 무수리설을 가장 많이 채용한다.

3 후궁이 되다

숙빈 최씨가 후궁이 되자, 당시 왕비였던 장희빈의 강력한 경쟁상대로 떠오른다. 그 탓에 인현왕후가 복귀되기 전까지는 고초도 많이 겪은 모양이며, 노론 세력이 희빈 장씨를 천하의 악녀로 기록한 수문록에 나오는 이야기라 100% 신뢰할 수는 없지만 처음 태기가 있었을 무렵 당시 중전이었던 장씨가 그녀를 잡아서 린치를 가했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숙종이 졸다가 꿈을 꾸었는데, 용이 땅에서 나오지 못 하고 울면서 살려달라고 청했다. 이에 중전 장씨의 처소에 가니 빈 독이 뒤집혀져 있었는데 그 독 안에 두들겨맞은 임신부 숙빈 최씨가 있었다. 급히 응급조치를 하여 태아와 숙빈 최씨를 살릴 수 있었다고 한다.

린치에 관한 일화는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겠지만 임금의 총애를 받고 왕자를 낳았기에 수많은 견제와 공격을 받은 것은 사실로 보이며, 이에 맞서기 위해 서인 세력과 친밀해졌다. 비천한 출신에 뒤를 봐줄 배경도 없는데다가 장희빈의 견제가 극심했기 때문에 별다른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연잉군은 훗날 서인 분파인 노론 세력과 손을 잡는다.

지지기반이 불안했기 때문인지 숙종의 총애를 받을 때에도 몸가짐과 말에 극히 조심했다고 한다. 본인은 물론 휘하 나인들의 입까지 단속하였다고. 숙종이 농담으로 그녀를 왕후에 봉하겠다고 하자 그 말이 무서워 눈 위에 엎드려 있었다는 야사도 전한다.

인현왕후를 폐위하고 장희빈을 중전으로 앉혔다가 다시 인현왕후를 복귀시키고 장희빈을 도로 희빈으로 강등시킨 것은 숙종의 왕권강화책이었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그 구실을 만들어준 것이 다름 아닌 숙빈 최씨다.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무고하여 죽였다는 것을 고발한 것도 숙빈 최씨.[4] 이런 점을 볼 때 실제 역사에서 아예 정치색이 없는 인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4 뒷날

사실 많은 사극들이 장희빈의 일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일반 시청자들은 숙빈 최씨의 후일담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일설에 따르면 숙종은 인원왕후를 맞으면서 숙빈 최씨를 궁 밖으로 내보냈고, 그녀는 이현궁[5]에서 기거하다가 숙빈 혼자 살기엔 궁이 너무 넓어서 안쓰럽다는 이유로 창의궁(연잉군 사저)으로 옮겨간 후 연잉군 내외와 같이 살다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숙빈이 인원왕후의 등장이후 궁 밖으로 나갔다는 역사적 근거는 전무하다. 숙빈 최씨가 궐을 나갔을 거라 추측하는 근거는 이현궁을 환수할 때 등장하는 숙빈방이라는 표현 때문인데 조선왕조실록 숙종편을 보면 장숙원방, 장귀인방, 숙의방이란 표현이 등장하며 비변사등록에도 영빈방이라는 표현이 등장한 것으로 보아 숙빈방이란 표현은 숙빈이 기거하는 곳이 아닌 숙빈의 창고 또는 재물일 가능성이 높다.[6] 또한 숙빈이 인원왕후 때문에 궐을 나갔다는 명확한 기록은 없는 반면 숙빈 최씨 신도비에 숙빈 최씨가 1716년에 병을 얻어 궐을 나갔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임방이 지은 숙빈 최씨 제문 역시 숙빈 최씨가 말년에 병을 얻어 궐을 나갔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숙종은 1702년 이현궁의 대규모 토목공사를 시행하였는데 이 규모가 워낙 커 말 30필이 토석을 운반하는데 3개월 이상이 걸린다며 숙종에게 만류하는 상소를 올린 것과 숙종이 결국 끝까지 밀어붙여 공사를 마친 기록이 승정원일기와 비변사등록에 존재한다. 쫒겨나는 후궁을 위해 숙종이 숙빈의 사저인 이현궁을 욕 먹어가며 공사해 준다는 것은 커다란 모순이다.

숙종이 싫어하던 영빈 김씨를 생각하자. 영빈 김씨는 숙종 사후에 궐을 나갈 때 사제가 너무 허름해 경종이 안쓰러워 사제를 사라고 돈을 줬다. 이런 숙종이 원래도 대저택인 이현궁을 확장 공사 시켜 줄 정도인데 그 당시 숙빈 최씨를 쫒아냈다는 말은 믿기 어렵다. 이런 이현궁은 영조가 옹주에게 주려할 때 이 궁은 어의궁보다 크다며 반대를 할 정도로 방대한 크기였다. 왕의 딸인 옹주에게도 과하다는 것을 일개 후궁에게 줬으니 그 비난은 수도 없이 많았으며 실록에서도 이현궁에 대한 비난이 많았다. 결국 숙종은 1711년 이현궁을 환수하라는 명을 내렸다.

"후궁은 중전이 될 수 없다."라는 교지 역시 희빈 장씨의 일 때문에 내려진 교지라고는 하지만, 애초에 그 교지가 내려진 시점이 희빈 장씨가 죽기 하루 전의 일이었기에 그 교지의 진정한 타깃은 숙빈 최씨라는 설도 있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숙빈 최씨 역시 숙종의 희생자.

다만 여기에는 다른 의견도 존재한다. 숙종의 후궁들 중에는 숙빈 외에 영빈 김씨가 있었는데, 인현왕후가 사망할 당시 품계는 숙빈보다 한 단계 낮은 귀인이었지만[7] 위에 서술된 대로 매우 한미한 집안 출신임이 분명한 숙빈과 달리 영빈은 서인 세력의 명문가 출신이었다. 숙빈 역시 서인에 속하였고 당시 귀인이었던 영빈보다 품계가 높긴 했지만, 만약 후궁들 중에서 중전을 간택했다면 중전이 됐을 사람은 숙빈이 아니라 영빈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위의 교지의 타깃은 숙빈이 아니라 영빈이라는 것이다.[8]

여기에는 또 다른 근거가 있는데, 숙종이 영빈에게 악감정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영빈은 기사환국이 터지고 1달이 안 된 시점에서 왕의 동정과 궁중 기밀에 관한 정보를 친정에 빼돌리고 이모부 홍치상[9]과 작당하여 희빈의 친정 어머니에 관한 유언비어를 날조한 혐의가 적발되어 홍치상은 처형되고 그녀는 폐출됐다.[10] 후에 인현왕후가 복위할 때 같이 복위했지만 숙빈이 이런저런 이유와 핑계로 계속해서 품계가 올라 그보다 높은 빈이 되고 다른 후궁들도 하나하나 승봉[11]될 때에도 홀로 귀인에서 진급누락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는 안습한 상황을 겪었다.

게다가 역시 인현왕후 복위 때 같이 복권되었던 홍치상의 경우 그의 아들[12]이 홍치상의 무고함을 밝혀달라고 호소했다가 빡친 숙종에 의해 복권이 취소되고 이후 명예회복이 영원히 금지되어 버린다. 안습.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가지 영빈에 대한 악감정이 대단했던 모양. 영빈은 인원왕후 책봉 때에야 간신히 빈으로 진급승봉된다.

뭐 어쨌건 숙종은 적어도 그녀 소생의 아들 영조를 총애했고, 결국 그녀의 아들은 왕이 되었다.(...) 그리고 철종대까지의 임금들은 모두 숙종과 숙빈 최씨 사이에서 난 자손이 되는 셈이다.

또한 인원왕후는 연잉군을 지켜주고 왕위에 오르는 데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숙빈에게 있어서는 인원왕후가 아들의 은인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뒷날 영조도 인원왕후를 친어머니 모시듯 극진히 모셨다고.

5 묘소

최씨의 무덤은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에 있다. 그녀의 묘소를 소령원(昭寧園)이라고 부른다. 영조는 최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해 여러차례 그녀를 기리는 제문을 지었고, 또 왕권 강화차원에서 어머니의 무덤을 능(陵)으로 승격시키고 싶었던 듯 하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드라마 동이 마지막 장면에서 성장한 영조가 차천수(배수빈 분)와 함께 어머니의 묘를 찾은 장면에서 나온 그 무덤이 실제 소령원이다.

야사에는 한 나무꾼이 모화관 부근에서 향나무를 팔고 있는데, 암행을 하고 있던 영조가 어디에서 나무를 캐왔냐고 묻자, 나무꾼이 "나랏님의 모후를 모신 소령이 있는 양주 고령산에서 캐웠다."고 했다. 영조는 기뻤지만 넌지시 "다른 사람들은 소령원이라고 부르는데 왜 소령릉이라고 하시오?"라고 물으니 "아니, 임금님의 어머니가 묻혀 계신 곳인데 왜 원이요? 능이지?" 라며 오히려 영조를 무식쟁이 취급(...)했다고 한다. 나무꾼이 무식하여 원과 능을 구분하지 못한 것이었는데, 영조는 기뻐하여 백성들도 능이라 부르는데 왜 원이라고 하느냐고 신하들에게 호통을 치고 나무꾼에게는 통훈대부 능참봉의 지위를 주었다고 한다.

다만 아이러니하다면 아이러니한 것이, 숙종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를 비롯 희빈 장씨까지 모두 그 무덤이 서오릉 경내에 있는데, 숙빈 최씨만 홀로 파주에 떨어져 있다.

6 사극

장희빈을 다룬 많은 사극에서는 드라마 중반부터 출연, 어느 정도 비중을 차지했다. 하지만 이 시대를 다룰 땐 대개 인현왕후장희빈의 대결의 비중이 커서 숙빈 최씨는 인현왕후에겐 인지도가 밀리기에, 동이가 방영되기 전까지 주인공으로 등장한 적은 없고 김혜수가 출연한 장희빈을 제외[13]한다면 단지 인현왕후 편을 들 뿐, 정치색은 아예 없는 인물이었다.

보통 숙종 연간 장희빈을 둘러싼 내명부의 갈등을 다루는 작품의 경우 일반적으로 숙빈에게는 별 다른 포커스가 주어지지 않거나 영조의 어머니로서만 부각된다거나 아예 극에서 배제되는 경우가 많았다. 나온다고 해도 인현왕후를 돕는 어진 여성상으로 등장할 뿐. 그러나 후기 작품 들어서 숙빈 역시 갈등의 중심축으로 들어가 주역이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어질고 조용한 숙빈상을 연기했다는 평을 받는다.
-욕심없이 착하고 순박한 여성으로 그려진다. 인현왕후를 모후로서 잘 모셔야 한다며 어린 영조를 훈육하는 장면이 나올 정도.
-1회에서 임종 직전에 보위에 오르기 전의 영조에게 유언을 남기는 장면으로만 짧게 등장.
-본격적으로 장희빈과 맞서는 역할로서 유명해진 숙빈이었다. 서인세력과 결탁하여 궁중에 사씨남정기를 퍼뜨리는 등 인현왕후 복위를 돕는 것으로 나온다. 후궁이 된 이후 장희빈이 그녀의 출신을 문제삼자 희빈 역시 중인궁녀 출신이면서도 중전이 되지 않았느냐고 쏘아붙이는 등 희빈과 대립하는 숙빈상을 그려냈다.
- 주인공으로 나온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이병훈 PD의 전작 이산에 나오는 정조의 후궁 의빈 성씨를 그대로 옮긴 것 같다(...). 또 너무 동화적이고 선한 인물이라 인간적인 면모가 부각되는 장희빈에 비해 비현실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인현왕후하고도 포지션이 겹쳐서 식상하다는 평도 있었다. 이런 비판을 극복하기 위해 아들 연잉군이 태어난 이후 치열한 정쟁으로부터 아들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뒷바라지하는 모습이 부각됐다. 허나 드라마에서 그려내는 행위들은 거의 역모에 해당하는 수준이라서 이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 역대 숙빈 중 초기 캐스팅 과정에서 가장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숙빈이다. 장희빈 캐스팅의 김태희와 더불어 이건 아니지 않느냐는 평가. 비록 한승연이 유치원-초등학교 때 연기를 배웠던 아역 출신이긴 하나 그래도 한창 아이돌 활동을 하다가 상당한 연기력을 요구하는 사극에 도전한다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많다. 일각에서는 김태희와 한승연을 캐스팅한거 자체가 일본 수출을 노린 거 아니냐는 비아냥마저 나올정도. 근데 일본어 더빙판 성우가 더 호평을 받으면 오히려 우리나라 원판 배우가 안습이 되는 건데 여기서는 인현왕후가 사가에서 부리던 몸종이라는 설정으로, 나름대로 욕심도 있고 영악한 인물로 그려진다. 특히 장옥정을 자해공갈로 괴롭히고 낚아서 숙종으로부터 후궁의 자리를 따내는 영악함까지 보인다. 신분 상승의 과정이나 그 방법이 장옥정이 겪었던 방식 그대로[14]인 것을 보아, 장옥정의 사랑이 주제인 작중에서 그 사랑을 독차지하는 장옥정과 장옥정처럼 사랑받고 중전이 되고 싶어하는[15][16] 최 무수리로 그려졌다고 볼 수 있다. 단순히 나쁜년이라 보기는 어렵다. 그저 작중에서 사랑받지 못했을 뿐이지.
- 위에 나온 숙빈 기혼녀 설을 반영하여, 본래 노름꾼 백만금(이문식 분)의 아내였으나 도박빚 때문에 백만금과 헤어져 궁인이 된 것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이인좌(전광렬 분)의 계략에 놀아난 것이었다는 설정이 나와있다.
  1. 다만 양반이 아니었을 뿐, 그녀의 일족은 조선에서 손꼽히던 대부호였다.
  2. 여러 사극에서 숙빈 최씨가 무수리였다가 승은을 입고 영조를 낳아 빈으로 승급됐다고 묘사되나 사실 장남을 낳고 차남인 영조를 낳은 뒤 삼남까지 낳았다. 그러나 영조의 동복형제들이 모두 요절해서...
  3. 오죽하면 야사에서 국문을 받는 소론세력들이 "영조는 선왕의 자식이 아니다!"라며 바락바락 대드는 얘기가 있다. 게다가 숙종조 공작정치의 대가인 김춘택과도 염문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이걸 비틀어 과거 MBC 정통사극 <대왕의 길>에서 혈통을 부정하는 소론에게 영조가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자, 숙종의 혈육이 맞다고 데꿀멍하는 장면이 있다.
  4. 단 장희빈이 폐위된 것은 인현왕후의 복위로 인해 자동적으로 이뤄졌다.
  5. 숙빈이 기거할 때는 숙빈방이라 불렸다.
  6. 장숙원방, 장귀인방, 영빈방이 쓰인 시기에 희빈 장씨와 영빈 김씨는 모두 궐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7. 이때 당시 숙종의 후궁들 중 빈의 지위에 있던 사람은 장희빈을 제외하면 숙빈이 유일했다.
  8. 실제로 중종 때 장경왕후가 죽자 중종은 경빈 박씨를 왕비로 삼고 싶어했는데 정광필이 왕비는 좋은 집안에서 들여야 한다고 주장해 무산시켰다. 이 시대에서도 조정 대신들이 신분제도와 관해서는 이때와 같은 시각인 걸 감안하면 숙종이라 할지라도 숙빈 최씨를 왕비로 삼지 못했을 것이다.
  9. 효종의 차녀인 숙안공주의 아들. 즉 숙종의 고종사촌이다.
  10. 이 일이 있고 열흘 후에 인현왕후도 폐출된다. 숙종이 이 일의 배후로 인현왕후를 지목했다 한다.
  11. 쉽게 말해 진급
  12. 영빈에겐 이종사촌동생이 된다.
  13. 이 드라마에선 서인 세력과 손을 잡고 희빈을 견제하며 인현왕후의 복위를 돕는다.
  14. (가짜이긴 하지만)승은호새칸을 받는 묘사나, 독이 있는 음식을 일부러 먹어 다른사람을 모함하고 상전(장옥정은 명성왕후에게)에게 핍박받은 것이 숙종이 알게되어 첩지를 받는 묘사는 장옥정이 겪은 그대로다.
  15. 최 무수리는 1화에서 '나는 아씨처럼 될래요. 장옥정처럼'이라는 말을 한다. 그 외에도 몇번 장옥정이 누리는 것을 훔치러 왔다는 뉘앙스의 발언을 했다.
  16. 작중에서 최 무수리는 인현왕후와의 관계도 왠지 불편하게 묘사된다. 자기가 아들을 낳으면 왕세자는 아니더라도 왕세제로는 세울 수 있느냐고 떠보자 인현왕후가 난색을 표하고, 인현왕후가 아들이 없고 몸이 불편한 것을 알아채자 그녀 사후에 자기가 중전이 되고자 하는 야망을 내비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