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왕후

조선의 역대 왕비
중종
장경왕후 
중종
문정왕후
인종
인성왕후
조선의 역대 왕대비
중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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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왕대비
조선의 역대 대왕대비
연산군
인수대왕대비
명의대왕대비
명종
성렬대왕대비
인조
소성대왕대비
호칭문정왕후(文定王后)
시호성렬인명문정왕후(聖烈仁明文定王后)
사망지창덕궁 소덕당
본관파평(坡平)
배우자중종(中宗)
아버지파산부원군 윤지임
어머니전성부부인 이씨
생몰
기간
음력1501년 10월 22일 ~ 1565년 4월 6일
양력1501년 12월 2일 ~ 1565년 5월 5일
재위
기간
1517년 ~ 1544년(왕비)
1544년 ~ 1545년(왕대비)
1545년 ~ 1565년(대왕대비)

1 소개

조선왕조 역사상 여인의 몸으로 최강의 권력을 가졌던 사람
조선의 헬리콥터맘

중종의 제2계비이자 인종의 계모, 명종의 생모. 시호는 성렬인명문정왕후(聖烈仁明文定王后). 정희왕후와 더불어 파평 윤씨 가문이 배출한 알파걸.[1] 그리고 명성황후와 더불어 조선의 역대 왕비 가운데 가장 인지도가 높은 왕비이기도 하다. 즉, 윤원형윤임의 권력다툼은 같은 가문의 내전이라고 봐도 될 정도.

대비로 수렴청정하던 시절의 공식 존호는 성렬대비(聖烈大妃)이지만 대중적으로는 문정왕후라는 호칭이 더 잘 알려져 있다. 덕분에 대비일 때는 '문정대비'라 표기하는 약간의 오류가 있었다.

이전의 정희왕후[2]소혜왕후, 후의 순원왕후, 신정왕후는 말할 것도 없고 정순왕후도 문정왕후가 누린 위세에 비견하자면 한수 접고 들어가야 한다.외척극혐 태종은 피꺼솟[3]

2 왕비 시절

조선의 두 번째 간택 왕비[4][5]

파산부원군 윤지임의 딸이다. 1517년, 17살 때 당시 중종의 왕비이자 문정왕후에게는 9촌인 삼당고모인 장경왕후가 죽자 세자의 외숙부 윤임의 뒷배로 간택되어 가례를 치르고 중전이 되었다. 중전이 되었으므로 당시 태어난 원자(훗날의 인종)를 돌봐야 할 책무가 있었고 처음엔 성심성의껏 훈육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인간의 욕심이 시작된다. 연이어 의혜공주(懿惠公主), 효순공주(孝順公主), 경현공주(敬顯公主), 인순공주(仁順公主)를 낳았으나 보다시피 모두 다 딸이다. 아들이 귀하던 왕실에서 아들을 낳아 중전의 입지를 지키려 했다.

설상가상, 자신에게 기어 오르던 경빈 박씨뭬야?가 아들인 복성군을 놓고 양자인 세자와 암투가 벌어졌다. 이에 세자의 또 다른 친위세력인 세자의 누나인 효혜공주의 시아버지 김안로작서의 변을 조작하여 경빈 박씨를 찍어내고 조정의 가장 큰 세력으로 성장하였으며 문정왕후는 이들과 잠시 한 배를 타기도 했다. 참고로 문정왕후가 드라마에선 군기(…) 잡는 연상의 이미지이지만, 실제 역사에선 경빈 박씨보다 8살 정도 나이가 어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에 문정왕후가 34살의 나이에 경원대군을 낳으면서 정국에는 소용돌이가 치기 시작했다. 요즘에야 34살에 아이를 낳는 것이 그리 나이 많은 편이 아니지만, 문정왕후는 17살에 궁에 들어와 결혼 17년 만에 이제야 자신의 다섯째 아이로 첫 아들을 낳았다는 것은 노산(老産)아라 봐도 타당하다.

데스매치가 예고된 상태에서, 문정왕후는 노골적으로 세자를 적대시하기 시작했다. 중종 말년 세자가 있는 자선당이 불탄 사건의 배후로 문정왕후가 지목받을 정도다.[6] 이 때부터 자신의 남동생들을 불러 당파를 만드는데 그 유명한 윤원로윤원형.[7] 이들이 바로 소윤(小尹)의 축이다. 그 후 대윤의 영수이자 세자의 외숙 윤임과 김안로가 짜고 맘에 안 드는 문정왕후를 찍어내려 하나, 여기서 실패. 이를 눈치챈 중종은 김안로가 대역부도하여 도리어 그를 찍어내고 사약을 내린다. 이 때 또 다른 세자의 보호자 윤임이 김안로 숙청에서 한 몫을 담당하는 바람에 세자를 옹호하는 세력(대윤)들을 때려잡는데는 실패하고 다만 세력을 엇비슷하게 맞추는데는 성공했다.

3 대비 시절과 여인천하

1544년 중종이 죽고 세자가 인종이 되었으니 소윤은 픽 사그라들고 대윤의 기세가 승승장구했다. 이와 더불어 소윤의 축 윤원로는 유관 등의 주도로 대윤의 탄핵을 당해 귀양살이까지 했다. 윤임의 눈밖에 이미 난 문정왕후는[8] 자구책으로 표독스럽게 인종에게 "나와 경원대군을 죽이시려거든 어서 빨리 죽이시오!!!"라며 몰아세우고 삭망전을 정지하고 대비전이 좁다고 옮기는 등 막나가는 행보를 밟는다. 거기에 효성이 깊었던 인종은 대비전 앞에 석고대죄까지 하며 계모의 심사를 돌리려 한다.(…) 너무 슬퍼한 나머지 세종도 어머니의 장례에서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안 지킨(혹은 못 지킨) 장례 의식을 철저히 준수하며 안 그래도 허약한 몸을 망치고 있던 인종에게 이는 치명타였다라는 견해도 있다.[9] 특히 인종이 식음을 전폐하고 장례 의식을 준수하는 걸 본 정승들이 "세종대왕도 장례 중에 고기를 드셨습니다." 하며 고기 들기를 권했으나 인종은 대비마마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고기를 먹을 수 없다고 했고, 문정왕후는 정승들 앞에서는 "주상께 고기를 드시라고 허락했는데 주상이 안 드시는 걸 나한테 어쩌라고?" 하면서 신하들이 "그럼 자전(대비)께서 먼저 고기 반찬을 드시죠. 그러면 주상께서도 드시겠죠."라고 건의하자 "내가 병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상중에 고기를 먹니?"하고 거부했다.

어쨌거나 문정왕후가 인종을 몰아세우는 모습만 보인 건 아니라서, 인종의 환후가 위중하니 명산대천에 기도를 올릴 것을 지시하는 등 친밀한 모습도 많이 보였다. 그러나 그전에 사이가 좋았던 건 아니고, 이러한 행동들이 조정에서의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시키려 한 연막작전이었을 뿐이라는 해석이 많아서리… 정순왕후 김씨정조가 사이가 안 좋았다는 건 이덕일 부류의 소설에 불과하지만 문정왕후와 인종의 사이가 별로라는 건 진짜다

결국 인종은 몸이 본래 약한데다가 중종의 장례를 무리하게 치르느라 등극한지 9개월만에 요절했다.

하지만 야사가 일반인들에게 더 유명한데, 야사에서는 문정왕후가 환한 얼굴로 인종을 맞으며 을 주었는데 문제는 그 떡에 독이 있었고, 떡을 먹으면서 계모가 드디어 날 용서하나 싶었던 인종은 기쁜 마음에 떡을 먹었다. 그후 얼마 안 되어 승하했다. 다른 야사에는 인종이 그 떡에 독이 있는걸 알면서도 마음이 너무 착한 나머지 떡을 먹고 죽는 걸 선택했다고도 한다. 전설의 고향 시리즈 중에는 이 설을 택한 에피소드도 있다. 거기의 나레이션에서 인종의 유령이 자주 보였다는 야사도 소개한 바 있다. 독살 떡밥이 사실이면 신하들도 가만 있었을 리 없으며, 무엇보다 사관들이 없는 근거라도 만들어서 깠을 판국에 기록이 안 남았을 리 없다.

이듬해인 1545년, 결국 문정왕후의 아들 경원대군이 왕위에 오르니 명종이고, 이와 더불어 대왕대비인 문정왕후가[10] 수렴청정을 하였다. 드디어 여인천하의 시작이다!아아~ 아아아아아아아~ 아아~ 어아~ 아아~ 어어 아~ 아아아~ 어어아~ 아어~ 어아아아아아아~

결국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과 대윤을 찍어내었고 오히려 자신을 길들이려는 대신들이 윤원로를 귀양보내자 오히려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서 유관, 유인숙을 비롯한 대신들을 차례로 죽였고 백인걸, 권벌, 이언적을 비롯한 반대파 대신들도 유배를 보내 조정을 완전히 장악했다. 그 다음해에 일어난 양재역 벽서 사건(양재역은 '말죽거리'를 의미.)을 빌미로 다시 사림들과 눈엣가시였던 다른 왕족들도 제거하였다. 대윤의 잔당을 뿌리뽑는다는 명분으로 을사사화보다도 이 양재역 벽서 사건이 그 여파는 더욱 컸다. 그리고 다음해에 이홍윤의 옥사가 터지자 수십명의 목을 날려버리고 충청도를 청홍도로 바꾸었다.

그런데 이 이홍윤의 옥사가 가관인데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죽은 유학자 이약빙은 원래 충주의 대유학자로 일대의 선비들이 죄다 그의 문하였다. 그런데 그런 그가 죽자 분노한 그의 아들 이홍윤이 아버지의 장지를 잡으며 친구들과 좋은 날이 오면 옥사의 결과가 뒤집힐 것이라는 요지의 '불온한 말'을 주고받았고 이홍윤의 이복형 이홍남이 이를 수상쩍게 여겨 고변을 함에 따라 10여명이 능지되고 그 이상이 고문사하는 초대형사건으로 커져버렸다. 그런데 이런 대형 역모(?)를 때려잡았는데도 공신 책봉이 없었다는 것 때문에 조작이 아니냐는 말이 있다. 거기에 초기에 책임자인 이기는, 미친놈들이 모여서 헛소리 좀 한 사건이니 곤장이나 치고 유배나 보내고 말 생각이었다. 그런데 정언각이란 자가 '헛소리를 하면서 한 일'을 캐내야 한다고 이기를 꼬드겼고 이에 이기는 난언율 사건을 역모 사건으로 확대하여 충청도 지역의 유생들을 전멸시켜버렸다. 추신으로 정언각은 양재역 벽서 사건을 키운 장본인이기도 하다. 원래 궤서는 범인을 잡을 수도 없으니 보는 족족 태우는 것이 관례인데 정언각은 이를 떼어 갖다바친 것이다. 그런데 이기, 정순붕 등은 "벽서가 붙은 이유는 역적들에게 가볍게 벌을 준 탓이다."라고 전혀 관련도 없는 엉뚱한 종친 봉성군, 송인수, 이약빙, 이언적, 노수신, 정황, 유희춘, 권응정, 이천제, 권벌, 백인걸 등을 처벌할 것을 청한 것이다. 이를 문정왕후가 수락함에 따라 일대 피바람이 불었다.

이 정도면 완전히 여왕이다. 세간에서도 문정왕후를 여왕이라 칭할 정도였으니. 이와 더불어 소윤의 핵심인 남동생 윤원형, 이기, 정순붕, 임백령, 최보한 등에게 요직을 주었고 윤원형의 첩인 정난정정경부인으로 올려주기까지 했다. 이와 더불어 문정왕후와 그 딸들인 공주들, 윤원형, 정난정까지 그 권세는 엄청났고 시전을 장악하여 시전 상인으로부터 뇌물을 받아서 드셨다. 한양 각지에 엄청난 사저를 가지고 백성들을 강제로 노역에 동원하여 엄청난 원성을 들었다. 헌데 소윤의 핵심들 중에서 잘나간 건 몇 안된다. 우선 윤원형과 이기는 엄청난 권세를 누렸지만 정순붕, 임백령, 최보한은 사화 이후 몇년도 못가서 죄다 골로 가버렸고 온건파였던 허자는 윤원형과 이기의 성미를 건드렸다가 숙청당했다. 그리고 전 항목에선 윤원형이 문정왕후의 빽으로 영의정에 올랐다고 기술되어 있었는데, 윤원형이 영의정이 된 건 맞지만 문정왕후의 섭정이 종료된 다음에 외척 이량이 급부상할 시점에 명종이 윤원형을 안심시키는 차원으로 임명한 것이다. 문정왕후 시기의 영의정은 윤인경, 홍언필, 심연원[11] 등이다. 윤원형은 심연원의 후임인 상진이 명종 13년에서 명종 18년까지 재임한 다음인 명종 18년이 돼서야 영의정이 되었다.

20살이 된 명종이 친정을 하자, 편전을 내주고 물러난 문정왕후는 여전히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윤원형을 이용해 조정의 뜻을 모았다. 야사에서는 문정왕후가 내시와 궁녀들을 이용해 명종을 감시했으며 명종에게 가서 따지고, 만약 아들인 명종이 자신의 말을 안 들으면 다 큰 자식, 그것도 임금에게 뺨을 때리거나 회초리를 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로 명종은 어머니만 보면 겁부터 먹고 쫄며 지냈다 카더라. 어디까지나 야사인것에 주의. 그러나 이러한 야사도 어느 정도는 실제 상황을 반영하기는 한 모양이다. 다음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또 스스로 명종(明宗)을 부립(扶立)한 공이 있다 하여 때로 주상에게 ‘너는 내가 아니면 어떻게 이 자리를 소유할 수 있었으랴.’ 하고, 조금만 여의치 않으면 곧 꾸짖고 호통을 쳐서 마치 민가의 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대하듯 함이 있었다. 상의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김없이 받들었으나 때로 후원(後苑)의 외진 곳에서 눈물을 흘리었고 더욱 목놓아 울기까지 하였으니, 상이 심열증(心熱症)을 얻은 것이 또한 이 때문이다.” ─ 《조선왕조실록》 명종 31권, 2번째 기사

명종은 엄마에게 잡혀 살았다

게다가 숭유억불인 조선에서 승려[12]보우를 총애[13]하여 불교의 중흥을 꾀하고 승려들의 과거인 승과와 도첩제를 부활시키는 등의 행보를 밟았다.[14]. 이런 중흥책은 가뜩이나 자신의 말을 안 들어먹는 사림들을 약화시키기 위한 계책이고 이를 안 사림들과 유생들은 노발대발하며 반발을 일으켰다. 하지만 문정왕후의 국정장악력 자체는 대단한 것이라 얼마 안있어 사그라들었고 내수사의 권력화로 사대부들은 더 이상 절에서 깽판을 칠수 없게 됐다. 하지만 이건 이거대로 내시 주제에 사대부를 능멸한다고 사대부들의 어그로를 더 끌었다.[15]

4 죽음

1565년 창덕궁에서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하필이면 이것이 보우가 목욕재계를 권하여 그것을 따르다가 한기가 들어 중병에 걸린 것이라 가뜩이나 사대부들의 미움을 받으며 적승이니 요승이니 하는 오명은 다 듣던 보우는 완전히 죽일 놈이 됐다.(…) 그녀의 죽음 이후로 윤원형정난정도 몰락하고 집에 처박혀 있다가 부부가 잇달아 요단강 건너고 보우는 한때 친했지만 살기 위해 배신한 윤원형까지 가세한 신하들의 처형 요구에 승적을 박탈당하고 제주도로 귀양갔다가 불교 중흥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제주목사 변협에게 곤장을 맞다가 이내 참수당하고(…)[16], 승과와 도첩제 등 문정왕후가 추진한 불교 융성책들은 모두 휴지통에 들어갔다[17].

이는 아들 명종에게 호기가 되었으나, 그 뒤 2년 뒤에 승하하였다. 안습.

문정왕후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유언에서 "주상이 이단(불교)을 박해하려거들랑 신하들 너희들이 좀 막으라"고 했는데, 정황상 명종이 불교를 신봉하려들어도 어림없는 판국이라.(…)

그러나 이것은 실록의 '사관 논평'에 나온 말이라서 문정왕후를 비하하는 의미가 있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문정왕후의 권한이 막강하긴 했지만 수렴청정을 거두면서 정치에 크게 개입은 하지 않았고[18] 명종의 정책에 문정왕후가 크게 제동을 건 기록도 발견되지 않는다. 특히 윤원형을 견제하기 위해 중전 인순왕후의 외삼촌 이량을 크게 중용했는데 이에 대해서도 문정왕후는 이의를 전혀 제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학자들 입장에서는 일단 대왕대비가 지나치게 전횡을 부린다는 것에 불만이 많았고[19], 무엇보다도 숭유억불 원칙을 가진 조선에서 공식적으로 국가차원[20]에서 불교를 중흥시키려는 시도를 한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야사에서 이미지가 너무 강해지자 사람들은 자주 명종을 '마마보이 임금'이라고까지 비하하기도 한다. 굳이 마마보이라고 불릴 만한 이유를 들자면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둔다고 했을 때 울며불며 사양했고 "대신들은 뭐하는가! 어머니를 말리지 않고!"라며 징징거렸던 모습 정도인데. 사실 저런 쇼는 수렴청정 거둘 때 다들 하는지라...[21]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막상 친정을 시작한 후에는 딱히 모후의 간섭을 받지 않고 나름대로의 정치를 펼쳐 나갔다.

윤원형 항목에도 나와 있지만 문정왕후의 죽음에 얽힌 재미있는 설화가 하나 있는데, 문정왕후가 죽기 전 한강 두모포에서 거대한 괴 물고기가 낚여 올라왔다. 이 광경을 구경하던 여러 사람들 중 한 사람이 이를 보고 큰(大) 물고기(魚)가 낚여 올라오니(行) 이는 윤원형의 '형'(衡) 자를 암시하는 것이라 곧 그가 몰락 테크를 타게 될 것이라 점쳤다. 그로부터 3일 후 과연 점괘대로 문정왕후가 죽음을 맞이하며 그와 동시에 윤원형과 정난정이 몰락하기 시작했다.

5 평가

"사신은 논한다...... 그의 아우 윤원형(尹元衡)과 중외에서 권력을 전천(專擅)하매 20년 사이에 조정의 정사가 탁란(濁亂)하고 염치가 땅을 쓸어낸 듯 없어지며 생민(生民)이 곤궁하고 국맥(國脈)이 끊어졌으니, 종사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일 뿐이다....... 윤씨는 천성이 강한(剛狠)하고 문자(文字)를 알았다. (중략) 윤비(尹妃)는 사직의 죄인이라고 할 만하다. 《서경(書經)》 목서(牧誓)에 ‘암탉이 새벽에 우는 것은 집안의 다함이다.’ 하였으니, 윤씨(尹氏)를 이르는 말이라 하겠다.” ─ 《조선왕조실록》 명종 31권, 2번째 기사

조선의 여후
하지만 여후는 황실 내에 피바람을 일으켰을지언정, 백성들을 수탈하지도 않았고 민생을 어렵게 할만큼 부패하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평가가 분분한 왕비인데, 8년간 섭정하며 사림들을 죽이고 권세를 이용하여 외척들을 비호한 부정부패의 온상이라는 것과 지나치게 커진 사림의 권한을 약화하려고 불교를 끌어들인 여걸이라는 평가가 있지만 명종시기 조선의 국방력이 결정적으로 약화되기 시작했고[22] 사림을 싫어한 나머지 윤원형으로 대표되는 척신세력과 자신을 따른 소윤을 전적으로 신임했는데 문제는 그들의 부패가 극심했고(…) 이로 인해 국정이 심각하게 문란해졌다는 점에서 확실히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한다. 거기에 임꺽정이 활동하던 시기가 이 시대였으니 당시 일반 백성들에게는 분명 수탈과 고통의 시기. 근데 문정왕후가 죽고나서 개선되었냐면 그건 또 아니다.

사실 문정왕후를 까는 상당수의 근거들이 명종에게 매를 때렸다는 둥 인종에게 독을 탄 떡을 먹여 죽였다는 둥 하는 야사이거나[23][24] 조선왕조가 세워진지 100년 넘어가면서 생긴 중기적 문제들을 그냥 문정왕후의 책임으로 돌리고 본 것이 많긴 하다. 불교 문제만 해도 한때 땡중으로 매도되던 보우의 행보를 보면 딱히 땡중으로 부를 이유도 없고, 승과도 세종대왕도 실시하던 걸 연산군이 폐지했다가 부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 승과, 즉 제대로 스님이 되는 과정이 없는 관계로 가짜 중들이 판을 치고 돈을 내지 못한 이들이 몰래 절에 들어가 중이 되는 경우도 있어 호구 파악에 어려움이 컸기에 이 점은 전혀 까일만한 것이 못된다. 게다가 승과로 뽑힌게 천하의 사명대사라서(물론 이 마지막 부분은 결과론이라 역사학적으로 옳은 해석법은 아니다).

국방력의 약화도 계속된 문치주의로 인해 이미 성종조부터 꾸준히 보고가 올라오면서 수면 위로 올라오던 것이 문정왕후 치세에 이르러서 폭발한 것이고 방납의 폐단으로 대표되는 수취제도의 문란은 문정왕후 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전에도 있었고 문정왕후가 죽은 후에도 대동법이 실시되기 전까지 계속 이어져가던 문제다.

물론 이러한 병폐들을 바로 잡는 것이 권력자의 의무이고 이걸 못했다는 점에선 백번 까여도 할말이 없다. 여기에 그리고 윤원형, 이기로 대표되는 소윤 측근들의 비리는 심각한 수준이었고 이걸 잡지 못한 것도 병크다. 게다가 바로잡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악화시켰다는 점에서 더더욱 할 말이 없다. 아무리 이전부터 존재했던 문제점이라고는 하지만, 문정왕후 섭정기의 정부는 그 이전 시대와 비교해도 심각하게 부패한 정부였다는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 중기 국력 급락의 원흉이라던가, 권력에 눈이 멀어 인종을 죽인 막장부모 타이틀을 달 정도로 막장은 아니라는 것이 결론.

어쨌거나 여자+불교를 숭상한 것 때문에 사림들에 의해 까인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왕가에 관한 문제만큼은 제대로 못 까는 체제의 엄연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까였다. 훗날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고종의 부인 명성황후 아님)가 아버지 김우명을 구하기 위해 왕이 신하들과 면대하고 있는 상황에서 뒤에서 울면서 왕을 은근히 압박하고 대신들에게 손가락질하고 욕을 하자, 한 신하는 명성왕후를 '문정왕후가 돌아온 건가여?'라며 까기도 하였다.

조선 역사상 왕비들 중에서 정순왕후, 명성황후와 함께 세간의 인식이 가장 혹독한 인물이다.[25] 하지만 명성황후라면 또 몰라도 후의 영조비 정순왕후 김씨의 경우에는 또 이덕일 부류의 노론 사관 떡밥에 무고를 당한 것에 가깝다. 게다가 정순왕후 김씨는 그나마 명백한 실정이라도 있는 문정왕후와는 달리, 전횡을 하거나 이렇다 한 실책을 하지도 않았고 이시수 등의 조리있는 반박에 수렴을 쳤다가도 물러나기도 했다.

본 단락의 처음에 인용된 조선왕조실록의 사관의 논평은 문정왕후 사망 기사에 기록된 것이다. 후세의 인물들이 평가한 것도 아니고 당대의 평가가 종사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고, 윤씨는 사직의 죄인이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조선의 사관들에게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해도 저런 고인드립성의 멘트를 사망기사에 적는 경우는 없었을뿐더러 문정왕후의 전이나 후나 사망 기사에 저런 심한 사론이 적힌 왕비는 더더욱 없었다. 21세기 기준으로 생각해봐도 누군가의 사망기사에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논평하면 고인드립 수준이다. 문정왕후의 숭불정책에 대한 유림들의 반발심으로 저런 심한 사론이 적혔다는 견해도 있으나 객관적으로 봐도 저 정도의 평가가 나와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나라를 개판으로 만든건 사실이다. [26]

6 문정왕후의 능

능은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에 위치한 태릉(泰陵). 유명한 태릉선수촌이 바로 근처에 있다. 왕비의 무덤인데 능호가 클 태(泰) 자인 것을 보면 문정왕후의 권세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크기도 웬만한 왕의 무덤보다도 더 크다. 본래 문정왕후는 중종과 묻히고 싶어 중종의 능인 정릉(靖陵)을 장경왕후의 무덤 옆에서 선릉(宣陵, 중종의 아버지 성종의 능) 근처에다 이미 마련하였으나 정릉 근처가 지대가 낮아[27] 여름에 비만 오면 침수되었다 하여 결국 강건너 북쪽인 태릉에 묻혔다.

그런데 이 자리는 풍수지리상으로 무후지지(無後之地)라고 한다. 즉 후손이 끊기는 자리라는 것인데, 당시에도 이 자리가 무후지지라는 소문이 파다했었나보다.[28]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명종은 윤원형과 총호사 심통원에게 대방동(지금의 서울 동작구 대방동이 아니라 오늘날 태릉이 위치한 공릉동이다.)과 경기도 장단 이 2곳을 두고 의견을 물었는데, 윤원형이 술관의 이야기를 듣고 대방동에 묻힌 사람의 후손을 비교해본 결과 풍수지리설이 별 신빙성이 없다고 여겨 결국 대방동이 묘 자리로 전해졌다고 한다. 그런데 정말로 여기에 묻힌 명종은 후사가 끊겼다.(…) 결국 중종의 서자 덕흥대원군의 아들인 하성군이 선조로 즉위하면서 이후 왕위는 방계 혈통으로 흘러간다.

애초에 침수가 잦자 다시 묘자리를 옮기려고 하였으나, 거듭해서 묘자리를 옮기는 것은 불가하다는 이유로 상소가 쏟아져서 중단되었을 정도로 당시에도 그런 이야기는 별로 먹히지도 않았다. 풍수지리가 맞건 틀리건 생전에 그만큼 문정왕후가 아들을 죽도록 들볶아 댔던 탓도 크다. 조선 왕릉이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태릉 내부에 조선왕릉 전시관을 지어 놓았다. 태릉선수촌을 사이에 두고 아들 명종의 능인 강릉이 위치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왕릉 중 유일하게 왕비릉이 왕릉을 앞장 선 형태라고 한다. 물론 왕의 어머니이기도 해서 그렇지만 묘의 위치 자체가 어머니 치맛바람에 치여 살던 명종의 삶을 사후에도 보여주고 있는 꼴이라 그저 지못미. 순회세자뿐 아니라. 2년뒤 문정왕후 자신이 죽고. 그녀의 아들인 명종도 2년뒤에 승하하였다.

왕후답지 않게 큰 규모의 능역을 가진 덕분인지 현대에 들어서는 노원구 시민들의 나들이 장소로 애용되고 있다.(...) 정작 바로 옆에 붙은 진짜 왕릉인 강릉은 제한공개능역이라 사람도 별로 안 온다.

그녀의 능인 태릉은 세조의 광릉, 성종의 선릉, 신덕왕후의 정릉, 명성황후의 홍릉 등과 더불어 지명화 된 왕릉들 중 하나이다.

7 사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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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천하에서의 문정왕후.

SBS 대하사극 여인천하에서 전인화[29]가 연기하여 호연을 보여주었는데 덕분에 2001년 SBS 연기대상을 정난정 역의 강수연과 더불어 공동수상하였다. 명대사가 참으로 많다.

  • 암! 암~! 그렇고 말고!
  • 뭐라?
  • 네 정녕 단매에 죽고 싶은 것이더냐?
  • 윤임이와 김안로를 정녕 찍어낼 방도가 있느냐?
  • 그 입 다물라 하였느니!
  • 난정아!
  • 엄상궁!
  • 네년내년이 미쳤구나.
  • 나가라, 경빈! 경빈 : 뭬야!?

7ab14012_2.jpg 표정이 귀엽다.
오죽 여인천하로 인기몰이를 하셨으면 2001년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바로 문정왕후 분장을 하고 나와 엄상궁에게 공을 받고 시구를 하였다. 엄상궁 게 공 있느냐~ 예 중전마마(…) 하필 이 경기에서 삼성과 두산 양팀은 29점을 주고받았다.

SBS 여인천하보다 16년 앞선 1985년 MBC 조선왕조오백년 시리즈 중 하나인 풍란정난정과 문정왕후가 주인공이다. 현재로선 쉽사리 이미지가 생각되지 않지만 김혜자가 문정왕후로 출연하여 그야말로 서릿발같은 연기를 보여주었다. 당시 전원일기를 찍고 있던 김혜자는 이미지 변신이 필요하다 싶어 선택했다고. 다만 문제는 이 드라마에서 문정왕후가 상당히 미화되었다는 것이다. 여인천하에서 명종에게 회초리를 들던 문정왕후와는 많이 다르게 명종에게 "정치는 이런 것이다"라고 하면서 훈수를 두는 정도다. 지혜롭고 정치에 노련한 사람으로 나왔다.

대장금에서는 박정숙이 문정왕후 역을 맡았는데, 포커스가 장금이에게 맞춰있고, 중종이 그리고 시월드(대비)도 살아 있을 때라 정치적인 비중이 크지는 않다.라이벌 경빈도 안나온다 하지만 장금이가 수랏간에 있을 때 부터 눈여겨 보고 있었으며, 의녀가 된 후에도 뒷배 역할을 해 준다. 중종 사후 조정을 장악하여[30] 도망다니던 장금과 민정호 일가의 신분을 회복시켜준다. 그리고 중종의 다른 후궁들을 쫓아낸 것과 달리 장금이의 절친인 숙원 이씨(연생이)는 동생 같다며 잘 보살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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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화에서의 문정왕후. 김미숙이 연기한다.

8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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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왕후의 어보(御寶, 왕실 도장)는 지금 LA카운티 박물관(LACMA)에 있다. 그 이유가…

6.25 당시에 종묘에 있던 걸 미군 병사가 훔쳐갔다! 그것도 문정왕후 어보 포함해서 39개의 어보를(…)이런 날강도 쉐키

2000년 LA 카운티 박물관이 경매로 산것을 시민단체가 확인했고, 꾸준히 반환요청을 한 결과, 2013년 9월 반환 결정이 내려졌다링크

아직 완전반환일지 영구임대일지는 결정 안된 상태이고 2014년 오바마 대통령의 방한에서도 문정왕후 어보는 반환되지 못했다.

그리고 아직 미군 병사가 훔쳐간 어보 중 37개가 사라진 상태다…

9 자녀

  • 배우자 : 조선 11대 국왕 중종 이역
  • 문정왕후 윤씨(尹氏)
    • 양자 : 왕세자 호 - (12대 인종 이호)
    • 양녀 : 효혜공주
    • 차녀 : 의혜공주
    • 3녀 : 효순공주
    • 차남 : 경원대군 이환 - (13대 명종 이환)
    • 4녀  : 인순공주
  1. 중종의 어머니인 정현왕후도 파평 윤씨이며, 인종의 생모였던 장경왕후 윤씨도 파평 윤씨다. 장경왕후와 문정왕후는 서로 9촌 관계다.
  2. 조선 7대 왕이였던 세조의 왕후
  3. 정순왕후 김씨도 위세가 대단하긴 했지만 소론 신하 이시수와의 키배에서 지고 물러나야 할 정도여서 자신에게 개긴 신하들을 죄다 골로 보낸 문정왕후의 서슬퍼럼에 비할 바는 못된다.
  4. 바로 전 버전에서는 조선 최초의 간택 왕비라고 되어 있었으나 조선 최초의 간택 왕비는 단종정순왕후 송씨다. 간혹 장경왕후 윤씨가 간택 왕비라고 아는 경우가 많지만 장경왕후는 후궁 출신이다.
  5. 의외로 조선 왕조의 간택 왕비가 별로 없다. 오히려 간택 세자빈 혹은 후궁 출신이거나, 원경왕후 민씨처럼 군부인이었다가 남편의 급작스런 즉위로 함께 왕비가 많다. 참고로 이전판까지 조선 왕조의 간택 왕비는 총 6명이라고 서술했으나 이는 잘못으로, 실제로는 총 10명이다. 정순왕후(단종), 문정왕후(중종), 인목왕후(선조), 장렬왕후(인조), 인현왕후(숙종), 인원왕후(숙종), 정순왕후(영조), 효정왕후(헌종), 철인왕후(철종), 명성황후(고종).
  6. 중종과 세자 모두 수사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은 것도 의문. 세자야 조선 시대 최고의 도덕군자 중 하나일 정도의 인물이지만 자식들 사랑이 지극했던 아버지 중종은 왜…?
  7. 여인천하에선 둘 다 오빠로 나왔으나 남동생들이 맞다. 윤원형 역할로 나온 이덕화전인화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액면상(…) 어쩔 수 없이 오빠로 설정했다는 뒷 이야기가 있다.
  8. 뭐 대비의 몸이니 대신 눈 밖에 났다고 어찌 될 위치는 아니지만 자신의 지지층인 소윤과 친정을 위해서라도 행동했어야 했다.
  9. 비슷한 예로 문종도 그렇게 몸을 망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10. 명종의 형수이자 인종의 왕비인 인성왕후가 왕대비가 되어 있었으므로 대왕대비가 되었다.
  11. 훗날 동서 분당의 빌미가 되는 심의겸의 할아버지다.
  12. 사실 땡중으로 알려져 있지만 보우의 악행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엄밀하게 따지면 아니라고 봐야 한다. 실제로 보우 비판의 내용을 보면 국정이 문란해지고 재난이 늘고 하는 등의 이유를 보우와 불교에서 찾고 있을 정도이지만, 분명한 비리의 증거를 대지 못하고 있다. 문정왕후 생전에 보우가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절에서 물건 훔치고 패악질 하던 유생들 중에서 가장 악질적이었던 황언징을 경국대전에도 언급되는 유생들이 절에 가지 못하도록 한 '금유생상사지법'을 통해서 처벌하고, 유생들이 사찰에 들어가서 횡포를 부리는 것을 막은 것이었다. 이후 보우 처벌후 과거 무학대사이성계가 머물렀을 정도로 대찰이자 조선 왕실의 원찰이었던 회암사가 보우의 거점이었다는 이유로 유생들과 인근 농민들에 의해서 약탈되어서 말 그대로 터만 남을 정도가 될 정도로 불교에 대한 멸시가 강했던 조선시대 였기 때문에, 그까짓 절의 물건 좀 가져온 것이 무슨 죄냐고 황언징을 석방하고 보우를 처벌하라는 상소가 물밀듯이 쏟아졌다. 이후 보우가 문정왕후의 쾌유를 기원하려는 목적으로 석가탄신일에 대형 법회를 벌이려는 이유로 많은 국고를 소모하였다는 명목의 죄가 더해졌다. 사실 유생들 입장에서는 숭유억불이 모티브인 조선에서 불교를 부활시키려는 시도를 한 것만으로도 죽일 놈이었다.
  13. 엄밀하게 따지면 불교를 총애한 것은 거의 전 시기의 조선 왕실의 특징이기도 했다. 애초에 유학은 종교가 아니기 때문에 왕실내부 특히 궁중의 여인들에겐 매력이 없었다. 하지만 문정왕후와 이런 일반적 이들과는 실질적인 권력이 있느냐 없느냐라는 결정적 차이가 있었다.
  14. 그리고 이 승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서산대사 휴정과 사명당 유정과 같은 인물들이다. 이 2명만 고려해도 조선은 본전 이상을 거두었다고 봐도 된다.
  15. 원래 전 항목에선 이 부근에 명종이 친사림이었다는 기술이 있었고 문정왕후가 매를 때려서 명종의 친사림 정책을 막았다고 했는데, 문정왕후가 명종을 때렸다는 것이 야사에 불과하다는 점은 제쳐두더라도 명종이 친사림이었다는 근거는 사실 빈약하다. 이황, 조식 등의 사직에 사직 하든지 말든지하면서 대수롭잖다는 반응을 보였고 조식이 쓴소리를 하자 확 조져버릴라. 초야의 선비니까 봐준다. 하면서 곱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이량이나 심의겸을 비롯해서 사림들보다는 외척을 더 신임했고 은거 학자들의 등용 요구에도 건성으로 대하곤 했다. 다만 문정왕후 사후에 이황에게 매우 큰 관심을 보이는 등 없잖아 친사림으로 해석될만한 행보를 밟았으나 2년도 채 못되는 기간이라서 무리가 있다.
  16. 사실 이것도 엽기 그 자체였다. 엄밀하게 따지면 이런 식의 참수는 지방관이 함부로 내릴 수 없고, 한양으로 올려서 처형해야 하는 것이 조선시대의 법률체계였다. 그런데 보우는 제주목사의 선에서 죽은 것이다. 보우가 제주도로 유배를 떠난 것이 6월말에서 7월이었는데, 보우의 죽음이 도성에 알려진 것은 10월 중순이었다. 더욱 엽기적인 것은 실제 보우가 죽은 다음에도 유생들은 보우를 죽이라는 상소를 올렸고, 명종은 이미 보우의 죄가 정해졌다는 이유로 더 이상 논죄하지 말라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쟁이 마지막으로 언급되는 것이 바로 10월 14일, 보우의 죽음이 전해지기 바로 하루 전이었다. 여러모로 법률 체계를 무시한 처벌이었으나 그냥 저냥 넘어간 듯하다.
  17. 그나마 살아남은 것은 능침의 사찰이나 고찰의 경우는 잡인들이 함부로 출입하는 것을 막고, 무뢰배가 유생인 척하고 절에 들어가서 행패를 부리지 못하도록 단속하라고 한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출입한 것은 유생들이었으니 이런 명목상의 지시가 지켜질리가 없었다. 이는 앞서 언급한 회암사의 파괴로 단적으로 드러난다.
  18. 만약 그랬다면 개입한 예를 문정왕후를 까기 위해 사관들이 안 실었을 리가 없을 것인데 그런 기록은 없다.
  19. 한고조 유방의 비인 여후와 애초에 나라를 세워버렸던 측천무후의 전례가 있으니 긴장하는 것은 당연했다.
  20. 조선시대 초기 사찰을 세우고 불경을 편찬한 그 세조마저도 불사는 개인적인 일로 처리했다.
  21. 다만, 시기는 좀 늦은 건 맞는게, 문정왕후가 청정을 거둔다고 한 해인 1553년에 명종은 20세의 청년이었다. 물론 당시 상황이 친 문정왕후 파로 신하들이 꽉 차있었을 때라는 점, 몇 번 정도는 저 '쇼'를 해줘야 불효자 딱지가 안 붙는다는 점 등을 감안해야 한다.
  22. 중종시기 삼포왜란을 쉽게 제압한 반면 이 시기의 왜란을 제압했을때 조선군은 왜군을 상대로 어려움을 겪는데, 이러한 국방력의 약화는 임진왜란 때까지 이어지게 된다. 하지만 이는 반대로 왜군이 질적으로 향상된 결과일 가능성도 있는데, 전국시대를 겪으면서 왜군은 무기와 전술의 향상을 보이게 된것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 거기에 국방력의 약화는 성종 때부터 이미 조짐이 보여서 이미 화살이 부족하여 싸울수가 없고 군선이란 군선은 죄다 조운에 쓰는 형편이라 포구에 군함이 없다는 보고가 들어올 정도였다.
  23. 명종의 매를 때렸느니 하는 것은 야사에 지나지 않고, 실록에는 민가의 어머니처럼 왕을 꾸짖었다는 정도의 기록이 있다. 게다가 명종이 이량을 등용하여 윤원형을 궁지에 몰아넣는 것을 구경만 하는 등 수렴을 거둔 후에도 위세는 등등했지만 정치에 관여했다는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
  24. 명종에게 매를 때렸다는 기록은 십중팔구 과장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아무리 왕의 어머니라고 하지만 왕의 몸을 때린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
  25. 단종의 왕후 정순왕후 송씨가 아니라, 영조의 왕후 정순왕후 김씨다.
  26. 세조비인 정희왕후도 왕실대소사를 위해서 불공을 드릴 정도로 불교를 지나칠 정도로 신봉하였고, 연산군은 부친 성종을 위해서 수륙재를 지내려다가 신하들과 충돌한 적이 있다. 조선전기는 겉으로는 숭유억불을 표방했으나 오랜기간 이어온 불교숭상 관습이 왕실에도 남아 있었다.
  27. 원래 강남 일대가 상습 침수지역이라 묫자리로 쓰기에는 문제가 많다.
  28. 이 풍수설은 세종대왕의 능과도 관련이 있다. '절사손장자'라고 해서 무후지지와 비슷한 의미였는데 세종대왕의 마지막 항목 참고.
  29. 남편이 이방원이성계를 맡았던 유동근인걸 생각하면 묘한 인연.
  30. 구체적으로 ㄷㄷㄷ한 모습은 안 나오지만, 민상궁이 "요새 얼마나 무서운데!"...라고 말하는 장면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