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어들러

제1차 세계대전기의 독일 해군 군함
연습함드랏해
건보트일티스, 파터란트, 그라프 폰 괴첸, 칭다오, 아터, 폴붸르츠급
어뢰정 / 함1898급, 1906급, 1911급, 1913급, 1914급, 1916급, 1917급, 1918급
잠수함U보트
항공모함I
경순양함헬라, 가젤급, 브레멘급, 쾨니히스베르크급(1905), 드레스덴급, 노틸러스급, 콜베르크급, 마그데부르크급, 카를스루에급, 그라우덴츠급, 필라우급, 비스바덴급, 쾨니히스베르크급(1915), 브룸머급, 퀼른급
장갑순양함퓌르스트 비스마르크, 프린츠 하인리히, 프린츠 아달베르트급, 룬급, 샤른호르스트급, 블뤼허
방호순양함클라스 플레밍급, 빅토리아 루이제급
순양전함폰 데어 탄급, 몰트케급, 자이들리츠급, 데르플링거급, 마켄젠급, 에르자츠 요르크급
전함
프리 드레드노트급브란덴부르크급, 카이저 프리드리히 3세급, 비텔스바흐급, 브라운슈바이크급, 도이칠란트급
드레드노트급나사우급, 헬골란트급, 카이저급, 쾨니히급, 바이에른급, L 20 α
기타G-101급, 제어들러
취소선: 건조 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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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원

전장83.5m
전폭11.8m
높이5.5m
기준배수량1,571t
최대출력500hp
최대속력9kn
항속력불명
무장10.5cm 단장속사포 2문, 중기관총 2정
탑재기 수없음
승원64명
동형함없음

2 개요

유틀란트 해전영국해군에게 열세였던 독일해군은 현존함대주의의 기치아래 함대주력을 킬 군항에 머무르게 했다. 적이 없어진 영국함대는 해상봉쇄에 의해 독일경제의 소모를 노렸다. 이러한 상황하에 독일해군은 유보트가장순양함에 의한 통상파괴작전으로 이행했다.

그러나 영국해군의 봉쇄선은 엄중하여 간단히 돌파할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독일해군 사령부는 상선으로 가장한 범선이라면 봉쇄선을 보다 쉽게 돌파하지 않을까 생각하여 범선으로 근무경력이 오래되었고 태평양대서양에서 지식이 풍부하고 각국의 언어에도 능통했던 펠릭스 폰 루크너 백작에게 이 일을 맡겼다.

가장순양함으로 사용될 배로는 전쟁초기에 북해에서 독일해군의 U-36에 의해 포획되었던 미국선적의 마스트 3개의 범선이던 패스 오브 발마하(Pass of Balmaha, 1,571톤, 영국에서 1915년 완공)를 개조하여 사용하기로 했다. 선체에는 10.5cm 속사포 2문, 중기관총 2정이 바깥에선 보이지 않게 은폐된채 장비되었는데, 이 배가 바로 제어들러다.

3 상세

악천후시 사용할 500마력의 보조 디젤엔진이 탑재되었다. 소총수류탄 등 무기류는 숨겨져 창고에 적재되었는데 석유탱크, 음료수 탱크, 식량저장고도 새로이 만들어졌다. 포로수용을 위해 선실도 개조하여 사관용 특별선실, 포로전용 식당도 구비했다. 루크너는 처음에 선명을 <알바트로스>로 고려했지만 동형함이 존재했기 때문에 부하와 상담하여 <제어들러, 바닷매>로 정했다.

4 활동

영국의 봉쇄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타국적 상선으로 위장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에 루크너는 노르웨이 범선 <마레타>호로 가장한 후 항해일지를 훔쳐내어 이를 토대로 제어들러호를 위장했다. 그러나 준비중에 영국의 봉쇄는 더욱 강화되어 그 사이 <마레타>호는 출항하고 말았다.

이에 소재불명의 노르웨이 범선인 <칼레모에>호의 이름을 빌렸는데 이것역시 영국군에게 포획되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궁여지책으로 루크너는 만약 발각시 적당히 얼버무리기로 하고 출항을 결의했다. 선명은 행운을 기원하는 약혼자였던
<일마>의 이름을 땄다.

1916년 12월 21일에 6명의 사관과 57명의 선원을 태우고 제어들러호는 빌헬름스하펜을 출항했다. 도버해협을 통과할수는 없었기 때문에 브리튼 제도의 북쪽을 돌아가는 루트를 선택했다. 12월 25일에 아이슬랜드 남동쪽 해협에서 영국해군의 순양함인 <어벤저>에게 포착되어 검문을 받았는데 다행히 정체를 들키지 않고 제어들러호는 항해를 계속했다.

1917년 1월 9일에 지브롤터 해협에서 영국선적의 석탄운반선 <글래디스 로열>을 발견한 루크너는 신호를 보내 접근한 뒤에 독일군기를 내걸고 발포했다. 위협사격을 3발정도 했을 때 <글래디스 로열>은 정선했다. 루크너는 선원들을 자함으로 이송시킨 후 <글래디스 로열>은 폭약을 설치한 후 폭침시켰다.

이후 제어들러는 순조롭게 임무에 착수하여 정체를 숨기고 접근해 불시에 독일군기를 내걸고 발포하여 정선시킨후 포획을 거듭했다. 선원들은 모두 제어들러호에 이동시킨 다음 배는 침몰시켰다. 포로는 배의 전방부(탄약고가 있었다)에만 들어가지 않는 한도내에서 항해의 방해가 없다면 선내에서 자유가 허락되었다.

다음날인 1월 10일에 근해에서 영국선적의 설탕수송 기선인 <런디 아일랜드>도 포획 후 격침시켰다. <런디 아일랜드>의 선장은 이전에 포로선서에 서명한 적이 있었기에 적선에 수용되는 것은 전쟁법 위반이라 따졌지만 루크너는 이를 듣지않았다. 제어들러호는 지브롤터 해협을 떠나 더욱 남하했다.

브라질과 서아프리카를 잇는 대서양의 거의 중앙에서 무역풍을 타고 오는 배를 기다렸다. 1월 21일에 프랑스 선적의 범선인 <샤를 그노>를 포획한 후 격침시켰다. 1월 24일에 캐나다 선적의 스쿠너 범선인 <퍼스>도 역시 포획격침했다. <퍼스>호의 선장은 아내를 대동하고 신혼여행중이었다.

2월 3일에 프랑스 선적의 초석운반 범선인 <안토낭>을 포획격침했으며 2월 9일엔 이탈리아 선적의 초석운반 범선 <부에노스 아이레스> 도 역시 포획격침했다. 2월 19일엔 영국선적의 곡물수송범선인 <핀모어>를 발견해 포획했는데 <핀모어>호는 루크너가 전에 탄 적이 있던 배여서 285일간 함께 항해하면서 폭풍과 질병, 식량부족과 물부족으로 생사를 함께 했던 인연깊은 배였다.

루크너는 <핀모어>를 폭침시키기 전에 혼자서 선내를 둘러본 후 추억에 잠겼었다고 한다. 2월 26일에 영국선적의 가축수송선인 <브리티시 여멘>을 포획격침했는데 이 배엔 여성이 한 명 타고있어서 <퍼스>호의 선장아내와 사이좋게 지냈다고 한다. 이날 밤 프랑스 선적의 <라 로슈포코>를 포획해 격침했으며 3월 5일엔 프랑스 선적의 <듀플렉스>호를 포획격침했다.

3월 11일에 영국선적의 기선 <혼거스>를 발견했는데 이 배의 갑판엔 5인치(12.7cm)포가 구비되었었고 무선장치도 있었다. 루크너는 정면에선 이길수 없었기에 계략을 꾸몄다. 먼저 연기를 내서 불이 난 것처럼 꾸미고 여장을 한 선원을 갑판에 세워 구조를 요청하게 했다.

<혼거스>가 구원을 위해 가까이 다가왔을 때 갑자기 독일군기를 내 걸고 포격에 나서 무선실을 파괴시켰는데 이 포격으로 인해 <혼거스>의 선원인 더글러스 페이지가 추락하면서 증기파이프에 부딫쳐 사망했다. 그는 제어들러호와의 교전에서 유일하게 사망한 자이기도 했다.

이어서 큰 소리를 내며 발포하며 선원들을 위협하여 패닉상태에 빠트렸는데 <혼거스>의 선장은 결국 공포에 질려 항복했다. 이 기선엔 고가인 코냑 500상자와 샴페인 2,300상자, 바이올린피아노 등의 악기류, 고급회화와 가구등이 실려있었는데 루크너는 이를 모두 제어들러로 옮긴 후 배를 침몰시켰다.

이 때 승무원과 포로는 약 300명을 넘어섰는데 수용능력의 한계에 다다랐다. 3월 20일에 프랑스 선적의 범선인 <캄브론느>를포획하자 루크너는 포로를 이 배에 태워 육지로 보냈다. 제어들러호는 태평양으로 향했는데 해역을 벗어날 시간을 벌기 위해 <캄브론느>의 마스트를 절반으로 잘라내 속력을 내지 못하게 했다.

루크너는 포로에게 몇일 분의 식량을 주고 회화와 샴페인 몇 개를 전별선물로 주었다. <캄브론느>의 지휘는 <핀모어>호의 선장이며 최연장자였던 뮬렌에게 위임했다. 루크너는 뮬렌에게 육지에 다다를때까지 타 선박과 연락을 취하지 말도록 부탁했다. 뮬렌은 약속대로 도중에 기선을 봐도 그냥 지나쳤다.

<캄브론느>는 리오데 자네이로에 도착하여 포로는 전원 해방되었다. 이것은 기사도적인 의미뿐만이 아니라 해당 해역에서 통상파괴작전이 이루어졌음을 연합국측에 알리는 효과도 있었다. 포로의 말을 듣고 제어들러호의 존재가 드러나자 영국해군은 혼 갑에 함대를 파견하여 이를 포착하게 했다.

제어들러호는 이를 벗어나기 위해 더욱 남하하여 혼 갑을 통과했다. 4월 18일에 영국해군의 가장순양함 <오틀랜토>를 발견한 루크너는 악천후 속에 제어들러호를 돌입시켜 적함의 접근을 뿌리쳤다. 혼 갑을 지난 후 루크너는 여벌의 구명보트에 제어들러호라 써 넣은 후 바다에 흘려보냈다. 이 중 몇척이 영국함선에 의해 건져져 제어들러호가 폭우속에 침몰한 것으로 발표하게 되었다.

이것은 얼마간 제어들러호의 추격을 중지시켰다. 태평양으로 나아간 제어들러호는 크리스마스 섬 주변에서 행동을 개시했다. 이때는 미국이 독일에 선전을 포고한 직후여서 미국선박도 공격대상이었다. 6월 14일에 미국선적의 범선 <A. B. 존슨>을 포획해 격침한 후 6월 18일에는 미국선적의 <R. C. 슬레이드>를 포획격침했다. 7월 8일에도 미국선적의 <마닐라>를 포획격침했다.

태평양에서 영국, 일본, 미국함대의 쫓김을 당하게 된 제어들러호는 이전처럼 행동이 자유롭지 못했는데 물과 음식도 떨어지자 루크너는 보급과 휴식을 위해 소시에테 제도로 향했다. 7월 29일에 몽펠리어 섬에 도착했지만 산호초로 인해 내만으로는 들어가지 못하여 외항에 배를 정선시킨 후 루크너와 선원들은 섬에서 몇일을 보냈다.

그런데 8월 2일에 쓰나미가 섬을 덮치면서 산호초 위로 밀려올라간 제어들러호는 선체에 큰 구멍이 생겨버려 항해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어쩔수 없이 루크너는 섬을 개간한 후 선원들과 집을 짓고 생활했는데 이를 <제어들러부르크>라고 명명했었다. 하지만 루크너는 섬을 탈출하기로 하여 구명보트를 타고 인근 섬을 돌면서 적당한 함선을 노리기로 했다.

섬에 남겨진 부하들은 부함장이던 클링크 대위에게 위임되어 루크너는 석달 후 돌아오지 않는다면 독자적으로 탈출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8월 23일에 루크너는 5명의 선원과 함께 보트를 타고 출항했다. 루크너와 부하들은 쿡 제도로 향하여 8월 26일에 쿡 제도 남부의 아티와 섬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