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신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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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神宮

1 개요

일제강점기일제가 지금의 서울특별시 남산 중턱에 세웠던 일본신사(神社). 1920년에 '조선신사(朝鮮神社)'라는 이름으로 세워졌고 1925년에 '신궁(神宮)'으로 올려졌다가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면서 철거되었다.

2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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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조선총독부를 통해서 '신사정책(神社政策)'을 수립하여 조선총독부의 예산을 통해 경기도 경성부(京城府)(지금의 서울특별시)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 일본식 신사(神社)를 설립하기로 하였고 그 중 경성부의 경우 '한양공원(지금의 남산공원)'에 신사를 세우기로 결정하고[1] 여기에 일본을 건국했다는 주신(主神) 아마테라스 오오카미(天照大神)와 1912년에 사망한 메이지 덴노를 제신(祭神)으로 결정하였다.

이 과정에서 서울 남산의 국사당(國師堂)이 자기들이 조선신궁을 짓기로 정한 곳보다 높이 있다면서 트집을 잡았고, 결국 국사당은 원래 위치인 현 서울 남산에서 지금의 위치인 인왕산으로 옮겨졌다. 현재 남산에 국사당이 있던 곳에는 팔각정이 있다.

조선총독부는 당시 경성부 한양공원에 대한 신사 부지 시찰과 토지 조사 등에 착수하고 1918년 일본 내각에 조선신사 창립안 청의(請議)를 제출하였고 이듬해인 1919년 7월 일본 내각으로부터 일본 수상(총리)의 최종승인하에 일본 내각고시에 의거하여 1920년에 '조선신사(朝鮮神社)'라는 이름으로 기공식을 갖고 신사 건물을 완공하여 돌계단과 참도(參道) 시설 등을 조성하였다. 이후 1925년에 일본 내각의 승인하에 '신사(神社)'에서 '신궁(神宮)'으로 격상하여 '삼종신기'를 전시하게 되고 이 때부터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강제적으로 참배를 강요하였다.

1930년대 들어서는 일제가 조선인들에게도 의무적으로 신사에 참배하라는 훈령을 공포함에 따라 참배객 수가 증가하게 되었고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인들은 물론 일제의 강요 등으로 어쩔 수 없이 개인적으로 참배를 당한 조선인들과 단체로 참배하는 조선인들까지 포함해 더욱 증가하게 되었다.

3 해방 이후

그러나 1945년 8월 미국일본의 도시인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폭탄을 2차례나 투하하고 이에 놀란 히로히토가 연합국에 대한 무조건 항복을 발표하게 되면서 조선일제로부터 해방을 맞이하게 되자 8월 16일 조선신궁은 '스스로 하늘로 돌려보낸다'는 의미를 지닌 승신식(昇神式)이라는 폐쇄 행사를 끝으로 9월 7일부로 일본인들에 의해 해체 작업에 들어가고 3종 신기 등 각종 신물(神物) 등도 일본으로 보내지게 되면서 10월 6일에 신사의 모든 시설이 철거되었고, 이튿날 남은 시설을 소각함으로써 끝을 맺게 되었다.

1948년 1월 서울 남산 스키장이라는 사진 한 장이 기록되어 있는데 신사입구 계단에 눈을 깔아 스키장으로 썼다는 사진이 있다.창경궁을 동물원으로 만든 일본에 대한 할아버지, 아버지들의 복수 관련 포스트

이후로 1970년 10월 옛 조선신궁이 있던 자리에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건립되었으며 2010년 10월 신관건물이 지금의 자리에 세워지기도 하였고 옛 경성부 한양공원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남산공원으로 이름을 변경하였다.[2]

숭례문에서 힐튼호텔, 남산도서관에 이르는 현재의 소월로도 조선신궁을 만들 당시에 참배길로 정비가 되었던 길이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 아래쪽에는 백범광장이 조성되어 당시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당시 서울이 아닌 지방도시에서 신사로 쓰이던 곳중 몇몇도 해방 이후 갈아 엎어졌지만, 희미한 흔적이 끈질기게 남아있는 경우도 있다. 인천의 인천여상 부지#[3], 창원시 마산합포구(舊 마산시)의 제일여고[4], 춘천 봉의산의 세종호텔[5] 등등, 일본인들이 거주했던 곳이라면 전국적으로 산재해 있다. 그 중 당시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은 3% 미만이라고 한다. 또한 부산광역시부산타워 있는 용두산공원도 원래 용두산신사가 있던 자리이다
  1. 지금의 안중근 의사 기념관, 남산도서관 등이 있는 자리.
  2. 남산공원 분수대에서 안중근 의사 기념관으로 내려오는 계단의 좌우 축대가 조선신궁에 쓰였던 것이라고 한다.
  3. 바로 옆에는 연합군 병사 포로수용소가 있었다. 왜 신사옆에다 지었냐면 포로수용소는 함부로 연합군 타겟이 되지 못하니까 이걸 역이용해서 신사를 폭격당하지 않게 하려는 국가신토의 발악이었다.
  4. 이 경우는 구한말부터 일본인 조계지였기 때문에 굉장히 오래 전에 지어진 신사이며 기단부는 그대로 남아 있다. 현재의 제일여고 정문은 토리이가 서 있던 걸 뜯어내고 거기에다 콘크리트 구조물을 올려놓은 것.
  5. 강원도청 뒤에 있으며, 1918년 일제가 '춘천신사'를 지은 곳인데, 지금도 계단과 주춧돌, 참배 전 손을 씻었던 수수사 등 일본 신사의 흔적이 오롯이 남아 있다고 한다. 관련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