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대한민국의 전 · 현직 정치인을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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曺逸煥
1916년 3월 13일 - 1980년 1월 29일
1916년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에서 태어났고 대구부에서 자랐다. 일본 메이지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 영남대학교의 전신 대구대학에서 강사를 역임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구시 무 지역구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구시 서구-북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김종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같은 지역구에 신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구시 서구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민당의 공천을 받았음에도 대구시 중구-서구-북구선거구에서 친야 무소속의 한병채 후보[1]와 민주공화당 박찬 후보에게 밀려 낙선하였다. 이 시절에는 신도환계인 신우회에 속하였다. 그리고 1979년 6월 김영삼 총재가 한병채를 대구시 중구-서구-북구 지구당위원장직에 임명하자 같은 해 8월 유기준, 윤완중 등과 함께 신민당 김영삼 총재에 대한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냈다. 그러다가 10.26 사건 이후 신청을 취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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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 선거 모두 신민당의 공천을 받지 못하자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