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兪棋濬
1924년 12월 18일 - 2004년 07월 31일
대한민국의 전 기업인, 정치인이다. 호는 산곡(山谷)이다. 현민 유진오의 조카이다.
1924년 경기도 광주군에서 태어났다.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화학과(현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 화학과), 명지대학교,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청년기 제일화학을 설립하여 경영하였다.
1960년대 후반 신민당 경기도 광주군-이천군 지구당위원장에 임명되어 정계에 입문하였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기도 광주군-이천군 선거구에 신민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차지철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2년 해당 선거구의 신민당 지구당위원장직이 박종진으로 교체되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오세응과 신민당 복수공천을 받아 경기도 광주군-이천군-여주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차지철 후보와 신민당 오세응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이충환계 정치인이 되었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오세응을 제치고 신민당 공천을 받아 경기도 성남시-광주군-이천군-여주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정동성 후보와 친야 무소속 오세응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9년 8월 조일환, 윤완중과 함께 신민당 김영삼 총재에 대한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을 서울지방법원에 제출하였다. 그러다가 10.26 사건 이후 신청을 취하하였다.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가 집권하자 정치규제를 당하였다. 1983년 정치규제에서 해금되었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강원채에 밀려 민주한국당 공천에서 탈락하자 경기도 성남시-광주군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민주정의당 오세응 후보와 한국국민당 이대엽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통일민주당 후보로 경기도 광주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1]. 1979년 8월 김영삼과 적대적인 관계였던 점을 감안하면 역시 정치에는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다는 점을 보여 준다. 그러나 1991년 지방선거 때 금품 수수로 구속되어 이듬해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공천에 탈락되었다.
이후에는 자신이 경영하던 제일화학의 경영에 전념하였다.- ↑ 이후 민주당계 정당이 국회의원 선거에서 광주시 지역에서 당선된 것은 28년 뒤인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때이다(광주 갑 소병훈, 광주 을 임종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