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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전 판사, 정치인, 변호사이다. 호는 야촌(倻村)이다. 종교는 불교다. 장인은 제2대, 제3대, 제4대 국회의원(자유당. 경상북도 군위군)을 지낸 박만원이다.
1933년 경상북도 대구부에서 태어났다. 대구 경북중학교와 능인고등학교를 거쳐, 1957년 고려대학교 정법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사법시험 10회에 합격하여 판사로 근무하였다가 변호사를 개업하였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경상북도 대구시 중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이만섭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유진산계가 아니라서 신민당 공천을 받지 못하자 신민당을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경상북도 대구시 중구-서구-북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박찬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4년 9월 신민당 김영삼 총재 체제가 출범하자 이용희, 한영수, 김재광, 진의종, 김인기와 신민당에 복당하였다. 1975년부터 1976년까지 신민당 대변인을 역임하였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표면적으로는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특혜분양 사건을, 실질적으로는 이철승 대표최고위원과의 불화를 이유로 신민당 공천에서 탈락하자 신민당을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이만섭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9년 6월 신민당 김영삼 총재 체제가 출범하자 오세응, 박찬, 이상민, 예춘호, 손주항, 김현규 등과 신민당에 복당하였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자 민주정의당에 입당하였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경상북도 대구시 중구-서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한국국민당 이만섭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83년부터 1985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민주당 바람에 의해 해당 선거구 신한민주당 유성환 후보와 한국국민당 이만섭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노태우 정권 때인 1988년부터 1994년까지 헌법재판소 재판관을 역임하였다. 헌법재판소 재판관 재임 중 이상돈 중앙대학교 법과대학 교수의 논문을 표절했다가 논란이 되자 사죄 및 배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