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밀턴

John Mil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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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시인, 청교도 사상가.
올리버 크롬웰 밑에서 오랫동안 외교 비서관으로 그를 보좌했다. <실낙원>과 <아레오파지티카>로 널리 알려져 있다.

좋은 책을 파괴하는 자는 이성 그 자체를 죽이는 것이다.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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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양심에 따라, 자유롭게 말하고 주장할 자유를, 다른 어떤 자유보다도 그러한 자유를 나에게 달라.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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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1608 출생~1674 사망.
청교도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문학과 학문 전반에 재능과 열성이 있어, 열 여섯 살에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을 다닐 때 '귀부인'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용모가 빼어났으며(...), 천재성을 발휘하여 젊은 시절에 영문학계에서 불후의 걸작으로 남은 영시《그리스도 탄생의 아침에》를 썼다. 졸업 후 아버지의 별장에 은둔한 채 전원에서 고전·수학 등을 연구하여, 광범위한 독서와 사색으로 문학적 역량을 쌓으며 몇 편의 작품을 썼다. 보통 밀턴을 삶을 세 단계로 구분하는데, 이 시기, 즉 1640년까지의 밀턴은 시인으로서의 자질을 연마하던 첫번째 단계라고 평가된다.

두번째 단계는 영국 청교도 혁명의 대의를 지지한 올리버 크롬웰 지지자이자 주요 논객으로서, 그리고 공화정 및 호국경 체제의 옹호자로서 활동하던 시기이다(1640~ 1660). 이 시기엔 영시 문학활동보다는 정치적 산문 저술을 통해 크롬웰의 청교도 정권과 왕정 폐지를 사상적으로 옹호하는데 열심을 다했다. 이때 너무 과로한데다 젊을 때부터 굉장히 공부를 많이 하고 책을 지나치게 많이 본 탓에[1] 1652년 결국 실명하고 만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혁명이 실패로 끝나고 스튜어트 왕정이 복고된 후 서사시인으로 활동하던 시기이다(1660~1674). 이 두 시기에 밀턴에게는 큰 시련이 닥치는데, 일단 앞서 서술했듯 44세가 되던 해에 실명했고, 또한 엎친데 덮친 격으로 1660년에 찰스 2세의 즉위로 복고한 왕정은 공화주의자인 밀턴에게 큰 환멸을 안겨주었다. 당연히 왕정의 눈에 공화주의자인 밀턴은 곱게 보일리가 만무했고, 밀턴은 동료 문학가의 적극 탄원으로 처형만은 면했으나, 모든 정치적, 사회적 입지를 잃고 완벽하게 몰락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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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명된 후, <실락원>을 구술(口述)하는 밀턴의 모습. 딸이 받아적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시련을 바탕으로 <실락원Paradise Lost, 1667>,<복락원Paradise Regained,1671>,<투사 삼손Samson Agonists,1671>등이 집필됐으니, 후세 사람들에게는 좋은 걸지도....

2 사상

이상적인 공화주의자이자 매우 독실한 청교도주의 개신교 신도였다. 또한 어떤 의미로는 영국 민족주의자였고 당시 기준으로 매우 진보적인 축에 드는 인물이었다.

만일 제가 무엇인가 후세를 위해 글로 쓰게 된다면, 저의 조국을 명예롭게 만들고 지식을 충만케 하여 하느님을 영예롭게 하는 것 말고는 달리 고려할 것이 없습니다. 저는 모든 근면과 기예를 다 발휘하여 나의 모국어를 아름답게 장식하는 데 사용할 것입니다. 이 섬나라에 사는 저의 동포 시민들 사이에서 일어난 가장 훌륭하고 슬기로운 일들을 모국어로 전달하고 해석하는 자가 되겠습니다. 혹시 라틴어로 글을 쓰면 해외에서 더 큰 명예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르나, 그런 데에 관심을 두지 않고, 이 영국 땅을 나의 세계로 삼는 것으로 만족하려 합니다.

여기서 보다시피 그는 영어로 글을 쓰는 데에 대한 상당한 자부심이 있었다. 이러한 점 이외에도 그의 저작 곳곳에서 영국을 사랑하는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곳곳에 엿보인다. 이러한 사랑을 바탕으로 집필된 저작들이 영문학에 미친 영향력은 후술.

또한 그는 개신교의 자유주의적 시장 경제 논리를 지식에도 적용시켜 가능한 한 모든 지식이 표현되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고 생각했다.[2],

누군가 묻기도 전에 미리 고백합니다만, 나는 나의 연설이 조국의 자유를 희구하고 촉진시킨 모든 이들에게 환희와 만족 이외에 아무 것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해도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 내가 하려는 모든 연설은 자유의 승리에 대한 기념물은 못 될지라도 그에 대한 하나의 확실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중략) 불평이 자유롭게 제기되고 깊이 숙고되어 신속히 개혁될 때 비로소 현명한 사람들이 추구하던 시민적 자유가 최대한으로 달성됩니다.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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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청교도 근본주의자였지만 인간의 양심을 성서보다 우선으로 두었다는 점에서 괄목할 만 하다. 말하자면 성경의 내용을 받아들이는 한에서의 인간의 자유를 추구했던 셈.

밀턴은 궁극적으로 양심을 성경보다 우위에 놓았지만, 그것은 성경지상주의의 원칙과 위배되는 것이 아니다.(중략)그런 의미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은 개인적 판단(private judgement)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놓은 셈이다(알레스터 맥그라스, 복음주의 성공회 사제).

3 문학세계

실낙원은 영문학 사상 유일한 거의 세계적 서사시가 되어 후세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어 <투사 삼손>,<복낙원> 등 청교도적 사상을 나타낸 대작을 계속 발표하여, 영문학 사상 최대의 시인이 되었다. 토머스 칼라일은 밀턴의 작품을 "성당에서 울려나오는 노래와 같다"고 평가했다[3].더 자세한 내용은 추가바람.

3.1 소네트

밀턴은 소네트 시인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 지방에서 프로테스탄트인 발도파를 학살한 피에몬테 학살 사건에 대해 듣고 이에 대해 항의하는 시를 쓴다. 그의 소네트 18번 <On the Late Massacre in Piemont> 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Avenge O Lord thy slaughter'd Saints, whose bones
</br>복수하소서, 오 신이여, 학살당한 당신의 성인들의 뼈가
</br>Lie scatter'd on the Alpine mountains cold,
</br>알프스 산위에 차갑게 흩뿌려져 있나니
</br>Ev'n them who kept thy truth so pure of old
</br>당신의 오래되고 순수한 진리를 지켜왔던 그들조차
</br>When all our Fathers worship't Stocks and Stones,
</br>모든 조상들이 돌과 나무를 숭배할 때
</br>Forget not: in thy book record their groanes
</br>그들을 잊지 마소서, 당신의 책에 그들의 신음을 기록하소서
</br>Who were thy Sheep and in their antient Fold
</br>당신의 양이자 예전부터 섬겨왔던 이들을
</br>Slayn by the bloody Piemontese that roll'd
</br>피의 피그몬테가의 사람들이 굴림에 의해 잔혹하게 학살된
</br>Mother with Infant down the Rocks. Their moans
엄마와 아이를 저 바위 아래로, 그들의 고통은

The Vales redoubl'd to the Hills, and they
</br>계곡에서 언덕으로, 또 그들은
</br>To Heav'n. Their martyr'd blood and ashes sow
</br>하늘로 울려 퍼졌습니다. 그들의 순결한 피와 재는 뿌려졌습니다
</br>O're all th' Italian fields where still doth sway
</br>아직도 폭군이 지배하는 모든 이탈리아의 땅에
</br>The triple Tyrant: that from these may grow
</br>삼중의 폭군(교황의 삼중관)으로부터 온 것들은 자라나서
</br>A hunder'd-fold, who having learnt thy way
</br>그럼 백배나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뜻을 배워
</br>Early may fly the Babylonian wo.
</br>일찍이 바빌로니아의 화를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는 2개의 quatrain 과 2개의 tercet으로 구성된 소네트로 영미시의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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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종교적 사상

그는 청교도였기에, 종교적인 자유주의자가 아니었다.물론 17세기에 종교적 자유주의를 주장한 사람은 거의 제로에 가까우니 패스.

성경을 연구하는데 생의 대부분을 바쳤고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예수 그리스도 재림의 때가 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사상적 관용을 누구보다 주장했던 밀턴은 가톨릭에 대해서는 매우 강경해서, 관용을 베풀어선 안된다고 주장했다. 밀턴의 가톨릭 교회에 대한 인식을 잘 나타내주는 발언은 다음과 같다.

가톨릭은 이중적인 권력을 요구한다. 하나는 성직에 대한 권력과 다른 하나는 정치적 권력으로 이들 두 가지 권력은 상호 보완적이다. 그래서 가톨릭은 우상이고 공적으로는 물론 사적으로도 관용될 수 없다.[4]
  1. 밀턴은 어린시절 이후로 공부하느라 12시 이전에 잠든 적이 단 하루도 없다고 한다. 진성 공부벌레였던 셈.
  2. 박상익, <언론 자유의 경전: 아레오파기티카>
  3. 토마스 칼라일, <영웅숭배론>
  4. 출처 동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