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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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큰집

宗家

대대로 장남으로만 이어온 큰집을 말한다. 종가를 다시 대종(大宗)과 소종(小宗)으로 나눌 수 있다. 대종은 적장자 상속을 통해 무한히 이어져나가는 집안이고, 소종은 대종의 집안에서 갈라져 나간 것으로, 같은 고조부(高祖父)에게서 나온 일족이 한 소종집단이 된다.

종가라는 개념은 중국 주나라 때의 종법제도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주나라의 봉건제도가 종법에 기원을 두는데, 주 왕실이 대종이 되고, 각 제후국은 소종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주나라 종법제도의 세계관에서 국가는 가문과 별개로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종법질서가 확장된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종가의 당주를 종손(宗孫), 그 아내를 종부(宗婦)라고 부른다. 종손은 남계 장남이 잇는 것이었다. 만약 종손에게 대를 이을 아들이 없으면 일가의 조카뻘 항렬이 되는 자를 양자로 들인다.[1][2]

종손과 종부가 하는 일에는 2가지가 있는데,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봉제사(奉祭祀), 그리고 손님을 맞이하는 접빈객(接賓客)이다.

꽃다운 20살에 종부가 되어

600년 내려 온 종가집 예법 따라
조상님께 누가 될까 이 가문에 폐가 될까
숙명처럼 살아온 종부의 길이여
하늘이 내 맘 알고 땅이나 내 맘 알지
이 가슴 태운 속을 누가 알리요
몸가짐 언행 하나 조심하면서
꽃처럼 곱던 얼굴 백발이 다 되도록
외로워도 말 못하고 괴로워도 참아내며
오직 한 길 지켜온 종부의 길이여
하늘이 내 맘 알고 땅이나 내 맘 알지
한 많은 그 사연을 그 누가 알리요

가수 정희라의 노래, <종부의 길>. 종부의 어렵고 막중한 삶에 대한 노래이다. 부르는 사람이 사람이다 보니 왠지 묘하다.

종가나 종손의 개념[3]은 법적인 보장을 받는 것은 아니고, 단지 관습적인 것에 불과하다.[4] 과거의 종손은 본래 종족통리권(宗族統理權)도 가지고 있었고 유명인의 종손은 각별한 대우를 받았으나, 현재는 그러한 관념은 상당히 퇴색되었다. 따라서 개인주의평등주의가 널리 퍼진 현대에는 여성들이 종부가 되기를 꺼리는 경우가 많아 이 때문에 종손들이 결혼에 애를 먹고 있기도 하다. 종가의 안주인(또는 며느리)으로서의 져야 할 책임으로 자신의 생활을 포기해야 하다시피 한 데에 비해, 그에 따른 대우나 보상이 없다시피 하기 때문. 종부와 종가의 며느리들 또한 자신의 생활을 가질 권리가 있으며, 단순히 종가의 사람이란 이유로 이를 희생해야 할 의무는 없기 때문이다. 사실 옛날에는 음식 만들기나 제사 뒤치다꺼리는 집안 하인들 몫이었는데, 신분제가 무너지면서 종부가 부엌데기로 전락해버렸으니...[5]

이외에도 고유의 가전(家傳) 기술을 보유한 집안의 가장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때 종가는 가문의 기술의 보호 및 발전을 위해 노력해야 하며, 외부에 개방할 지를 의사결정하는 등 막중한 책임을 지게 된다. 이러한 형태의 기술 유지는 가내 기술이 발달한 일본에서 쉽게 발견되고, 한국이나 중국에도 많이 존재한다.

대중매체에서 종가의 이미지는 대체적으로 보수적인 면이 강한데, 일종의 클리셰가 정해져 있다. 가령 새로 들어오는 여성(주로 종부로 들어오는 여주인공)에게 "너 같은 근본도 없는 년이 들어온다고? 난 반댈세!!"라거나, 현대 여성들처럼 행동을 하면 "종가의 며느리가 이게 무슨 꼴이냐?!"라며 못마땅해 하다가 그러다가 나중에는 인정을 하고 받아 들이는 식이 많다. 또한 과거 조상들이 붕당이나 개인적인 원한 등의 이유로 인해 사이가 나쁜 관계라면 로미오와 줄리엣 급.[6]

과거에는 종가집으로 시집가면 영광이였다고 하지만 산업화가 급속도로 발전한 1970년대를 기점으로 시작해 종가는 결혼 기피 대상 톱 클래스가 되어버렸다. 형제가 전부 여자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마법사 괜찮아 포기하면 편해 2009년 MBC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한국의 종가를 찾아서>를 보면 종가집 고명아들이 등장하는데 이 사람은 연애 3년차임에도 여자친구한테 자신이 종가집, 그것도 고명아들이라는 사실을 차마 밝히지 못하고 있었다. 전국의 종손들이여, 일코를 하여라!!

과거에야 종가집이면 소작농을 두는 지역의 토호였지만[7] 현대에서 시골의 토호라고 해봤자 토지세만 축내는 싸구려 부동산에 지나지 않아 가차 없이 기피대상이다. 게다가 오래 전에 한옥으로 지은 종택에서 생활하는 경우 종택이 문화재로 지정된 경우도 많아 집 수리 수준에서도 애로가 꽃피는 것은 기본이다.[8]

2 1에 비유하여, 어떤 분야의 원조격인 곳

예를 들면, "축구종가 잉글랜드" 같은 표현을 쓴다. 어라? 이제 아닌데?

3 임금이 탄 수레를 모시고 따르던 일

從駕

4 증권 시장에서, 그날의 마지막에 이루어진 가격

終價
  1. 다만 사후(死後)양자 제도는 1990년 민법 개정으로 폐지되었다.
  2. 보통 양자는 차남의 아들, 3남의 아들을 들이나, 굳이 양자를 들이지 않으면 차선으로 차남의 아들이 승계하고, 그렇게도 안 되면 차차선으로 3남의 아들이 승계해 나가기도 한다.
  3. 종가나 종손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서 늘어났고, 그 기준이 자기의 직계를 기준으로 하므로 웬만하면 제사를 지낸다.
  4. 다만 족보, 제사용구, 선산의 상속은 제사주재자로서 보장하고 있다.
  5. 다만 이전에도 집안의 식문화의 중심이 되는 을 담그거나, 제사나 중요한 잔치등에 쓰일 을 빚는 등의 중요한 일은 종부가 직접 나서야 했다.
  6. 실제로도 이런 예가 있다. 특히 사화환국 정치 등으로 인해 가문이 쑥대밭이 날 정도였다면 도저히 혼인 자체가 불가능할 지경. 대표적인 예가 경상도 남인 종가와 서인-노론 집안 간의 갈등이 있다.
  7. 과거에는 종가집에 시집을 가면 시부모들이 형제를 되도록이면 많이 낳으라고 강요를 하는데 이유는 일손이 부족해서라고(...) 실제로도 형제 많은 집안을 보면 종가집 출신인 케이스가 많다고 한다.
  8. 유홍준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문화재청장 시절 일화를 밝힌 적이 있는데, 전국의 종부들을 초청하여 간담회를 열었더니 그 동안 속으로만 삭이며 꾹 참고 살았던 종부들의 각종 불만사항이 폭발했다고 한다.